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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11·12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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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10월 26일 (화) 15:46:44
최종편집 : 2010년 10월 29일 (금) 18:57:29 [조회수 :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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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11·12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7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0년 11·12월호 중 11월 둘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종말과 상황 인식

* 성경 본문: 누가 21:5-19
* 성경 주석

오늘 본문 바로 앞의 두 일화에서, 누가는 종교 지도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뽐내고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지(누가 20:45-47), 그리고 부자들의 많은 헌금과 과부의 희생적인 헌금을 올바로 구별할 것을 말한다(누가 21:11-4). "그것은 참 아름다운 돌과 봉헌물로 장식되었다"(5절)고 몇몇 사람들이 성전에 관해 즉흥적인 논평을 한 것에 기초해서, 누가는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필요함을 오늘 본문인 누가 21:5-19에서 계속해서 강조한다

누가복음의 한 가지 매혹적인 측면은 성전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성전의 겉모습에 위압된 사람들이 "제자들"인 반면, 누가복음에서는 그들이 익명의 집합적인 "몇몇 사람들"(some)이 된다. 이 분명한 편집상의 차이를 감안할 때, 우리는 이것 말고도 다른 편집상의 변형들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반응을 현저히 변형시키지는 않는다. 성전에 대한 사람들의 감탄을 엿듣고, 예수는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6절)라고 선언하는데, 이것은 다른 공관복음과 매우 비슷하다(마태 24:2; 마가 13:2).

예수의 충격적인 진술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이야기할 때에도, 누가는 그들의 익명성을 그대로 유지한다. "선생님, 그러면 이런 일들이 언제 있겠습니까? 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는,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7절)라고 물은 것은 "제자들"도 아니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그리고 안드레"도 아니라, 아무런 특징이 없는 "그들"(they)이다(7절; 마태 24:3; 마가 13:3 참조).

그들의 질문은 일부 사람들이 예수의 선언에 깜짝 놀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성전의 멸망을 생각한다는 것조차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그런 일이 전에 일어났다는 것을 그들 자신의 역사를 통해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생각은 2001년 9월 11일의 비극적인 테러 이전에는 "쌍둥이 빌딩"의 붕괴가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서 그랬듯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전의 비극적인 파멸이 그들의 마음을 얼마나 혼란스럽게 할지 알고, 예수는 곧바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경고를 했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다' 하거나, '때가 가까이 왔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8절). 다시 말해, 남들이 임박한 재앙을 추종자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때에도, 예수의 추종자들은 공포와 두려움의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고, 그 대신 그들의 현실에 대한 이해와 그들의 믿음이 손상되지 않도록 감정을 제어해야 한다.

그들을 안심시키고 어려운 때에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를 강조하기 위해, 누가는 예수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도한다: "전쟁과 난리의 소문을 듣더라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런 일이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종말이 곧 오는 것은 아니다"(9절). 표징들이 성전의 멸망을 가리키고 있을 때에도, 지상에서의 삶은 오랜 세월 동안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것을 예수는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과거에 전쟁과 난리가 있었던 것처럼, 미래에도 전쟁과 난리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세상의 종말에 대한 아무런 확정적인 결론도 불가능하다. 그의 말하려는 요점을 강화하고 또 그의 추종자들이 무장투쟁에 관한 이 메시지를 오해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예수는 아울러 그들에게 "민족이 일어나 민족을 치고, 나라가 일어나 나라를 칠 것이다"(10a절)라고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들 사이의 적대감은 거짓 예언자들이 미래를 예언하려고 할 때 사용할지도 모르는 유일한 표징은 아니었다. 그런 메신저들은 자연재해를 또 다른 신적인 신호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예수는 또한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예언적인 가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큰 지진이 나고, 곳곳에 기근과 역병이 생기고, 하늘로부터 무서운 일과 큰 징조가 나타날"(11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핵심 요점을 반복하여 말한다면, 지상에서의 모든 생명이 붕괴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우리는 민족들 사이의 적대감이나 물리적인 큰 재앙들로부터 추론하여 미래를 점치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종말" 시나리오들에 관해 잘못된 길로 끌려가지 않도록 조언한 후, 예수는 두 번째 주의보를 발한다. 닥칠 것이 분명한 이 세상의 일시적인 혼란들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놀라기보다는, 예수는 보다 개인적인 문제, 즉 그의 제자들이 직면할 박해들로 향한다. 그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얼어나기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고,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겨줄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왕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갈 것이다"12절).

누가가 분명히 하듯이, 세상의 제국들이 충돌하고 끔찍한 자연적인 사건들이 일상의 삶을 분쇄시킬 때에도, 예수의 제자들은 근심한 나머지 '세상의 종말이 가깝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덧붙여, 그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도 놀라서는 안 된다. 그러하기는커녕, 그들은 법정에서의 그러한 대결들을 "증언할 기회"로 간주해야 한다(13절). 그들은 자신들을 "변호할 말을 미리부터 생각해서도" 안 된다(14절). "그들의 모든 적대자들이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15절). 갈등이 너무 심해서 심지어 그들 자신의 가족조차 그들을 배반하고 "그들 가운데 더러는 죽일 것"이라고 예수는 또한 경고한다(16절). 진실로, 예수가 이미 말했듯이,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17절; 12절의 "내 이름 때문에"도 참조할 것).

아이러니컬하게도, 체포, 투옥, 배반, 심지어 순교 따위의 모든 형태의 박해를 겪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약속한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이 간결하고 힘찬 표현의 과장법은 너무 극단적이어서, 이 진술은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이 부분은 일시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구별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과 관련됨을 상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대조를 배경으로 하여 볼 때, 예수의 선언은 신자들이 이해하기에 한층 더 수월하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제자들이 소름 끼치는 반대에 직면해서도 믿음을 굳건히 유지한다면, 말하자면 그들의 일시적인 머리카락조차도 영원한 것이 되리라고 예수는 약속한다.

예수의 그 다음 주장에 비추어 살펴볼 때, 이 결론은 더욱 강화된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을 것이다"(19절). 어떤 신자들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희생하도록 부름을 받을지 몰라도, 죽음 앞에서의 그들의 충실한 믿음은 그들의 영원한 운명을 보증한다. 요약하면, 그것은 예수가 이미 말했던 것과 같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누가 9:24).         

* 설교 본문

우리 주변의 세상이 산산조각이 나고 있는 상황에서도, 예수는 우리가 두 눈을 활짝 뜨고 머리를 바로 세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운동선수들은 그것에 대한 요령을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그것에 의해 살고 죽는다. 정보 요원들은 그것을 배우는 데 여러 해를 보낸다. 심지어 "그들의 머리 뒤에 달린 눈들"을 발전시켜 온 많은 엄마들도 그것에 통달한 것처럼 보인다.

"상황 인식"(situational awareness). 그것은 자기 주변 상황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것들의 의미를 이해하고,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신속히 판단하고, 그 결과 무슨 결정을 할 필요가 있는지 아는 능력이다. 군사 및 전투 이론의 많은 전문가들은 상황을 빠른 시간 내에 평가하는 이 기술이 힘겨운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성공하기 위한 기본적인 구성 요소라고 믿는다.

당신이 무엇을 행해야 할지 이해하기 위해 바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은 삶에서 살아남고 번성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신이 어떤 스포츠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고, 비행기를 조종하고, 생각이나 행동이 무분별한 아이들을 양육하고, 심지어 교통이 복잡한 길을 건널 때에도, "상황 인식"은 당신의 성공에 필수적이다.

이런 주장에 예수도 동의할 것이다. 사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의 이 지점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그의 초점이 달라졌다. 즉, 그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서 승천한 다음, 제자들이 몸담아 살게 될 세상에 대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졌다.

탄알을 잰 총의 가늠쇠로 전방을 응시하는 것보다 당신에게 명료함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나 소름 끼치는 십자가를 응시하면서, 예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지상에서 떠난 후 그들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될 사람들에 관해 생각했다.

제자들은 당시 헤롯이 재건축을 하고 있었던 성전을 바라보며 한순간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55?-120?)와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37?-100?) 같은 역사가들은 그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육중한 돌로 만든 성전은 여러 나라들로부터 받은 선물들로 장식되고, 문들과 성문들은 아주 세련된 장인의 기능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성전이 맥없이 무너져 내릴 때가 오고 있다고 대담하게 말함으로써, 예수는 성전의 아름다움에 대한 제자들의 감탄을 저지한다: "너희가 보고 있는 이것들이, 돌 한 개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날이 올 것이다"(누가 21:6).

그것은 그 순간에는 터무니없는 말처럼 들렸을 것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 서서 대성당 쪽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돌 하나, 조각상 하나, 양초 하나, 프레스코 벽화 하나, 혹은 제단이 계속해서 서 있지 못할 날이 오고 있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예수는 담대하게 계속해서 말한다: "지구 자체가 지진과 기근으로 무너지기 시작할 때가 있을 것이다. 민족들 사이의 투쟁들, 막강한 세력들의 몰락, 그리고 심지어 나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가 있을 것이다. 그런 때가 오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만일 너희가 나의 진정한 제자들이라면 상황을 조망할 필요가 있다. 너희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평가하고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한다."

이제, 역사와 성경은 예수가 단지 하나의 사건 그 이상을 예언하고 있었다고 우리에게 말해 준다. 기원 후 70년에, 예수가 언급했던 바로 그 성전이 정말로 멸망했다. 예수가 말했던 것과 정확히 일치되게,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크리스천들에 대한 혹독한 박해가 뒤따랐다.

그러나 예수의 말들은 기원 후 70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미래에까지 뻗쳐 있었다. 예수의 경고의 말씀들은 온 지구에 임할 투쟁과 심판의 때를 또한 가리켰다. 그것은 세상의 쇠퇴하는 날들과 예수의 의기양양한 재림을 위한 경고음 역할을 할 격렬한 투쟁의 때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죄의 모든 결과를 "단번에 모두"(once and for all) 말끔히 지울 것이고, 우리를 위한 한 새롭고 영원한 실재, 즉 그의 용서받은 가족을 구성할 것이다(계 21장 참조). 이 모든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맑게 깨어 준비하고 있음과 믿음으로 충만한 상황 인식에 대한 예수의 요구는 여전히 지속된다.

왜? 그런 때가 실제로 도래할 때까지는, 그분의 추종자들로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이 정말로 좋아지기 전에 앞서, 상황이 정말로 나빠지게 될 것이라고 예수는 우리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핵심적인 생각: 상황 인식 수준이 높을 때, 우리는 몹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준이 낮을 때, 우리는 아주 간단한 상황 속에서도 어처구니없이 실패할 수 있다.

영적 인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요청한다: 예수가 고무시키는 영적 상황 인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구체적으로, 우리가 점점 더 어려운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알 때, 어떻게 우리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로 일들을 올바로 행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 주변의 도로들이 더 위험하게 되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의 두 눈을 다른 것들에 고정시키고 있겠다고 우긴다면,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

상황적인 무감각(situational apathy).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오늘날 예수의 많은 추종자들이 마치 누가 21장의 "준비되어 있으라"는 예수의 요청을 회피해도 되는 결정권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듯이 잘못 살아가고 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상황적인 무감각"에 빠져 있다. 예수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명령하는 자신들 주변의 세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들 중 일부는 조용한 교외 생활에 적당히 만족한 채로 허위의 "안전 의식"에 빠져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삶의 터전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과 불의가 우리의 깊은 주의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고대의 세계가 헤롯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결코 흔들릴 수 없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라는 인식에 사로잡혔듯이, 우리 또한 우리의 나날의 삶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될 수 있다. 결국, 인간은 거짓된 "불멸의 망상"(delusions of immortality)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중 일부는 복음 자체에 의한 예리한 상황 인식에 고취되어 왔다. 주일학교에서 성장하거나 꾸준한 성경 공부를 통하여, 그들은 전체 이야기가 결국은 어떻게 판명되는지에 대한 기쁜 소식을 알고 있다. 그들은 요한계시록을 공부하면서 "마침내 우리는 이긴다"는 구절을 읽는다. 이 짤막한 구절은 강력한 신앙의 관점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잔치"(after-party)에 들어갈 무료 입장권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상황적 무감각의 마지막 결과는 증언할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날뛰는 세계에 개입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증언할 기회"(누가 21:13)를 제공하는 것으로 끝난다고 예수는 그의 제자들과 우리에게 말한다. 이 망가진 세상은 다양한 형태의 싸움과 투쟁과 박해로 그 세상의 모습을 점점 더 스스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세상의 한복판에 있는 제자들은 그들의 친구들, 가족들, 심지어 적들과 "왜 이 세상이 이리도 망가졌는지, 그리고 세상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만들어 가실 분은 누구인지?"를 함께 나눌 기회를 제공받을 것이다.

상황적인 강박관념(situational obsession). "상황적인 무감각"의 반대편에는 "상황적인 강박관념"이 있다. 이 세상은 어느 시점에서는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 가운데, 우리는 뉴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우리의 관계들 속의 모든 문제들을 꼼꼼히 주목하고, 그리고 종말론적인 "연이어 무거운 짐을 지워 마침내 못 견디게 할" 지푸라기를 찾는다.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의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그렇게 하면 우리는 빠른 속도로 악화되는 세상 속의 삶의 영토와 더불어 온다고 예수가 말하는 고통과 투쟁을 피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의 사건들을 구약성경의 예언들과 직접 연결짓는 TV 설교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악한" 일체의 직업적인 정치가들이나 부정한 유명인사들이 이 세상의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러한 강박관념의 마음은 예수의 요청들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은 온통 두려움과 관련된다. 예수는 "종말"(the end)에 이르는 길에 대한 황량한 그림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걱정과 불안을 선동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반대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천둥이 오고 있다" 혹은 "길이 울퉁불퉁해지고 있다"고 미리 경고할 때, 한 아이가 느낄 수 있는 부류의 평화이다. 그것은 당신의 영혼에게 "당신은 고통을 인내해야 하지만 마침내 그 고통을 극복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부류의 평화이다. 그것은 "문제가 생길 때, 그것은 '예수는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고, 따라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줄 따름"이라는 사실이 낳는 부류의 평화이다.

그의 제자들과 우리가 종말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게 하려는 예수의 목표는, "무질서한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평화를 우리 안에 낳으려는 것이다. 전 세계적인 투쟁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예수는 우리가 그러한 무서운 사건들을 궁극적으로는 상황을 기쁜 결론으로 이끌어가고 계신 하나님의 활동의 표지로 간주하기를 원한다.

상황적인 강박관념은 통조림 제품들을 축적하고 금에 투자하려는 두려움에 이끌린다. 그러나 상황 인식은 주변을 두루 살펴보는 것, 우리의 구세주가 말씀하신 모든 것이 실현됨을 보는 것. 그리고 우리의 평화에 동기를 부여받아 하나님의 계획이 펼쳐지고 있다는 기쁜 소식을 널리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 인식은 우리가 무감각 때문에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 혹은 강박관념에서 요새를 지으려는 것을 방지한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껴안고,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따위의 뭔가 희망적인 일을 행할 것이다. 왜? 우리의 선하신 하나님은 그분이 약속하신 "선한 종말"(good end)을 가져오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실상 상황 인식을 간단히 말한다면, 그것은 세 가지 행동으로 축소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눈을 좀더 활짝 열어 우리의 세계를 확장하자.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세계에 대한 매우 좁고 근시안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당신의 "삶의 터전인 교외가 가지를 치고 나온 더 큰 범위의 주요 대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배울 때이다. 당신이 지역 뉴스의 범위를 넘어 세계의 뉴스들을 시청하기 시작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당신이 크리스천 형제자매들이 전 세계적으로 어떤 박해와 시련 속에 있는지에 대한 보다 최신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순교자들의 목소리"(www.persecution.com)에서 최신 정보를 받아들이는 계약에 서명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둘째, 이 땅의 삶 속에서 투쟁들이 일어날 때, 단순히 그것들이 끝나기를 기도하지 말고 그것들을 잘 견딜 은총과 힘을 위해 기도하라. 많은 시대들, 특히 이 마지막 종말의 시대에, 하나님은 그분 자신에게 영광을 가져오실 것이며, 그리고 남들에게는 우리가 투쟁들을 회피하지 않고 인내함으로써 제공되는 "증언"(벧전 3:15 참조)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에 더 가까이 갈 기회를 주실 것임을 아는 성숙한 상황 인식을 갖도록 하자.

마지막 셋째로,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우리의 두 눈을 주의 깊게 고정시키는 반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는 것에 초점이 모아지게 하자. 특별히,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참고 견디는 가운데 너희의 목숨을 얻을 것이다"(누가 21:17-19)라는 약속을 우리는 기억한다. 

* 예화

+ 나무처럼 살기 

욕심부리지 않기
화내지 않기
혼자 가슴으로 울기
풀들에게 새들에게
칭찬해 주기
안아 주기
성난 바람에게
가만가만 속삭이고
이야기 들어주기
구름에게 기차에게
손 흔들기
하늘 자주 보기
손뼉치고 웃기
크게 감사하기
미워하지 않기
혼자 우물처럼 깊이 생각하기
눈감고 조용히 기도하기
(이경숙·아동문학가)

+ 11월의 나무처럼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에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은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이해인·수녀)

+ 인간의 삶이란

나는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대 사람들과
좀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나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안철수·벤처기업인)

+ 천국의 문

세상의 종말이 왔다
이 지상에서 제일 소중한 것 하나씩만 가지고 저 세상에 가도록 허락했다

어떤 자는 무거운 황금 뭉치를 낑낑대며 지고 간다
어떤 자는 애인의 손을 잡고 시시덕거리며 간다
어떤 농부는 씨앗 주머니를 소중히 안고 가기도 하고
어떤 어부는 큰 그물을 메고 가기도 한다
말을 타고 가는 자도 있고
수레를 끌고 가는 자도 있다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가겠는가?

그런데
천상의 입구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에게만 문이 열렸다

그는
병든 노모를 업고 온 가난한 등대지기였다.
(임보·시인)

+ 영화관에서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극장엘 갔습니다.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되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대단원의 막이 내렸을 때,
주인공에게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불이 켜지고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가 버려
텅 빈 객석에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이 끝나고 막이 내리면
누가 나의 인생을 위해 박수를 쳐줄 것인가.'

주님, 당신이십니까?
(작자 미상)

+ 일상생활에 영혼을 불어넣는 16가지 방법

1. 인생을 단순화하라.
2. 이 정도면 만족하겠다는 한계를 정하라.
3. 창조적인 사람이 되어라.
4.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라.
5. 위대한 자연을 경험하라.
6.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라.
7.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라.
8. 기도나 찬송, 또는 묵상을 하라.
9. 영감을 주는 문학 작품이나 테이프를 보고 들어라.
10. 자기 계발과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11. 가슴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라.
12. 음악 듣기나 노래부르기, 아니면 춤이라도 추어라.
13. 고결하게 행동하라.
14. 정기적으로 일기를 써라.
15. 어디에 있더라도 즐긴다는 자세를 가져라.
16.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라.
(로빈 위어러, 『더 이상 우울한 월요일은 없다』)

+ 블룸하르트와 마차

블룸하르트는 남독일 시골 마을의 목사였다. 그저 평범한 시골 목사에 불과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종말론 신앙'이 기독교사에서 꽤 의미 있게 다루어졌다.

블룸하르트는 예수의 재림을 살아 생전에 보리라고 예언하며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였다. 그의 집 마당에는 늘 마차 한 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자마자 그 장소로 달려가려고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렇듯 그는 종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았다. 그리고 그러한 종말론 사상 때문에 사회나 현실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일깨워 줌으로써 큰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물론 그의 생애 동안에 예수의 재림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종말에 대한 확신 가운데 맑게 깨어 한 시대를 생기 있게 살다간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 시계와 나침반 
 
지금 인류는 잘못된 방향으로 질주해가다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형국이다. 경제적 고도성장을 추구하며 선두 주자로 달리던 미국이 궁지에 몰리면서 뒤쫓아가던 모든 나라가 함께 덫에 걸렸다.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돌아갈 수도 없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절망의 늪에 빠져 있다.

각 나라가 이런저런 긴급 처방을 내놓고 있지만 암환자에게 주사 몇 대가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연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방향을 잃었을 때는 나침반을 찾아야 한다. 꽉 막혀 있는 앞뒤가 아니라 열려져 있는 위를 바라보며 출구를 찾아야 살길이 열린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도 고도성장이라는 신기루를 잡으려고 시계만 보면서 질주하다가 한계선에 봉착했다. 지금은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단축하려는 노력은 잠깐 접을 때다. 창고 어딘가에 깊숙이 넣어두었던 나침반을 다시 꺼내는 것이 해법을 찾는 지름길이다.
(손인웅·덕수교회 목사)

+ 세례 요한과 예수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가까운 장래에 직접 역사에 개입할 것을 기대했던 종말론적 예언자였지만, 예수는 이 세상이 조만간 끝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예수가 진정으로 가르쳤을 20여 개의 비유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이 세상의 종말 혹은 그 종말에 따르는 충격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일반 역사가 끝난 다음에 올 어떤 것이 아니었다. 예수의 비전에 따르면, 당시 옛 시대는 끝나고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확신은 매우 새롭고 비상한 방식으로 그를 바꿔놓았다.

요한계시록의 묵시사상은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예수의 확신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처럼 표준적인 묵시종말적 희망이 예수의 제자들의 손에 의해 복음서들 속에 삽입된 것은, 그의 제자들 중 일부가 전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예수의 미묘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비전의 강렬함을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예수가 이미 결별했던 표준적·정통적 종말 시나리오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 묵시사상

묵시사상은 현세를 부정하며 복수심에 근거한 사상이다. 묵시가 호소력이 있는 것은 그것이 이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항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묵시가 윤리적으로 절름발이인 것은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정의를 구하기보다는 다른 세상에서 바로잡혀지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내세에서의 상벌을 갈망하는 것은 조잡하고 감상적인 형태의 이기주의이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가장 단순한 필요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 영적 대지진을 피하는 방법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 주민들은 늘 대지진의 위험 속에 살고 있다. 이 지역은 안드레아스 단층에 속해 있으므로 지진을 피할 길이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진도 4 정도의 경미한 지진이 일어날 때에도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곤 하는데, 이런 현상은 오히려 좋은 징조에 속한다. 이것은 지각의 일부가 이동하고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서히 이동한 지각이 안정되기만 하면 대지진은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경미한 지진이 몇 년 동안 일어나지 않을 경우,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은 그만큼 커진다.

이처럼 빛 가운데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고 날마다 지은 죄를 자백하고 고쳐나갈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엄청난 영적 위기가 닥칠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심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죄가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허물을 감추거나 남들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건강, 가정, 직장, 친구를 모두 잃는 ‘대지진’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자백하지 않은 죄는 마치 암과 같이 서서히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 위기 파고드는 종말론의 유혹

인생이 곤두박질치듯 무너질 때 사람들은 자포자기, 근거 없는 낙관론, 우왕좌왕, 책임 회피 등의 증상을 보인다. 극단적으로는 "내가 망하면 이 세상도 망할 것이다(혹은 망해야 한다)"는 자아범람의 망상(Paranoia of ego-inflation)에 빠지기도 한다. '묻지 마 살인'이나 종말론은 나와 외부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아경계(Ego boundary)가 허물어졌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최근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다, 마야 달력에 의한 예측이다, 요한계시록의 예언이다 하면서 해일·지진·경제혼란·핵확산 등을 세상이 곧 망할 징조라고 믿는 이들이 많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이런 부류의 재해는 늘 있어 왔는데, 고통스러운 사회적 정황을 자연현상에 투사(Projection)한 결과 무심한 변화에서 부정적 의미를 찾는 것이다.

종말론에 빠져 혼자만 망상환자가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스스로 미륵보살이라 했던 궁예, 청나라의 백련교와 의화단, 미국의 찰스 맨슨과 짐 존스, 일본의 옴 진리교, 러시아의 최후의 심판일(doomsday)교, 오대양 사건처럼 끔찍하고 잔인한 말로를 보여 주거나 최근 우리나라의 JMS, 인도의 오쇼 라즈니쉬처럼 성폭력을 자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컬트 집단일수록 편견을 갖고 있는 주류 종교단체나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단으로 간주되었던 가톨릭의 초기 교부(敎父)들 중에는 후세에 그 평가가 달라졌던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병적인 종교집단의 망상을 논리적으로 깨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다.

신도 중에는 경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어서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니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하기도 힘들다. 교주들은 쉬운 단어와 논리를 반복적으로 말해 사람을 세뇌하기 때문에 집회에 자주 참석하게 되면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교주의 생각에 동화된다. 교주들은 뛰어난 화술과 용모, 따뜻한 마음 씀씀이와 강력한 카리스마까지 갖추고 있어 마음 붙일 곳 없는 이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과 고향을 찾은 듯한 기분에 빠지고, 기존 사회와는 마침내 완전히 단절된다.

인도의 테러와 관련되었다는 라시카르-에-토이바(LeT)나 9·11 사건을 일으킨 지하드 역시 정통 무슬림은 일종의 이단적 컬트라고 간주하고 히틀러·무솔리니나 김일성 역시 일종의 교주란 평을 받기도 한다. 즉각적 고용과 경제회생, 제3제국 혹은 김일성 국가의 장밋빛 미래, 민족에 대한 비정상적 자부심 등을 내세웠으니까. 시절이 흉흉할수록 다방면에서 이런 교주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저개발 국가에서 권력자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게 되는 이치다.

경제적으로는 선진국에 다가선 한국이지만, 여전히 무의식에는 저개발국가의 추억과 습관이 남아 있으니 누군가 교주가 되어 광기 어린 질주를 하면 우리 사회는 '눈먼 자들의 도시'와 같은 혼란과 폭력적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힘세고 가진 건 많지만 상식과 양심은 부족한 이들의 엉뚱한 궤변에 휩싸이지 않도록 눈 크게 뜨고 정신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할 것 같다.
(이나미·정신과 전문의, 융 분석심리학자)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당신을 하느님으로 안다는 것
그것은 다만
우리가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사유와 관념
그 너머
영원한 세계
그곳에 계시는 까닭입니다.
(조만나스, '하느님이신 당신에게')

+ 한 목소리로 드리는 기도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내 영혼을 심을 수 있다면

나무를 키우는 정성으로
내 영혼을 키울 수 있다면

나무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내 영혼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나무가 꽃을 피우듯이
내 영혼이 꽃을 피울 수 있다면

나무가 노래하고 사랑하듯이
내 영혼이 노래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나무가 하늘을 향해 감사하며 기도하듯이
내 영혼이 하늘에 감사하고 기도할 수 있다면

나무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듯이
모든 것을 내 영혼으로 베풀 수 있다면

오, 하느님!
당신의 사랑으로
내 영혼도 한 그루 나무가 되게 하옵소서. 
(작자 미상, '나무')

+ 신앙고백의 기도

그림붓이 스쳐간 자리마다
숲이 일어서고 새들이 날고,
곡식이 자라나는 들판이 되고.

내 손에서 그려지는
그림의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아무도 모르는 어느 큰 분이
그렇게 그려서 만든 것은 아닐까?

색종이를 오려서 붙여 가면
집이 세워지고 새 길이 나고,
젖소들이 풀을 뜯는 풀밭도 되고.

색종이로 꾸며 세운
조그만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아무도 모르는 어느 큰 분이
그렇게 만들어서 세운 것은 아닐까?
(김종상·아동문학가, '미술 시간')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한 잔 포도주처럼 찰찰 넘치게
따르어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바로 그 자리에서
조그만 틈을 벌려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박해석, '기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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