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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구, 기도, 도고 그리고 감사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제 17 주(20100919)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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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9월 17일 (금) 11:36:40
최종편집 : 2010년 09월 18일 (토) 03:05:14 [조회수 : 26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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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절 후 제 16 주(20100919)
성서일과/ 시 113; 암 8:4-7; 딤전 2:1-7; 눅 16:1-13
본문/ 딤전 2:1-7
간 구, 기도, 도고 그리고 감사

          (딤전 2:1-7, 개정)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기도는 세상 모든 종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기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하는 첫째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낱말을 사전에서는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신불에게 비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 대한 이해가 이런 사전적 의미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기독교에서 기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비는 일을 뛰어 넘어 하나님과의 인격적 친교요, 대화라고 정의합니다.
하나님과 만나 교제하고, 대화하는 일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교제하고 대화하는 방법이 다양한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 교제하고 대화는 것도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전에 나오는 의미의 기도-바라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은 그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바울도 한 마디로 ‘기도하라’ 라고 해도 될 것을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한 마디로 기도하라고 해도 될 일이지만 기도라고 해도 서로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입니다.

형식에 있어 개인적(個人的) 기도와 공동체적 기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사적(私的)인 기도와 예전적(禮典的)인 기도도 구분이 됩니다.
묵상(默想) 기도와 염경(念經) 기도로 구분할 수도 있습니다.

공적인 기도인 예배시간의 대표기도를 사적인 기도처럼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정한 시간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너무 길어서도 안 됩니다.
중언부언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과 같은 예전적 기도를 기계적으로 암송만 하는 것도 잘못된 일입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하신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비록 평생에 수 천번 외우는 주기도문일지라도 입술만 움직이는 것이라면 참된 기도라 할 수 없습니다.
소리 없이 하든, 조용히 하든, 사적이든 공적이든, 정해진 것이든 지어내는 것이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진정한 기도는 아닌 것입니다.


기도는 그 내용에 따라서 구분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는 감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기도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기도의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간구(懇求)입니다.
영어로는 supplication 이라고 합니다.
탄원하다, 애원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간구는 간절히 얻기를 바란다는 뜻이니 적당한 번역이라 하겠습니다.
간구는 어려움 당하는 자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애원입니다.
간구는 하늘을 감동시킬만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절박함이라고 할까, 천 길 낭떠러지에서 칡넝쿨을 붙잡고 버티는 그런 심정이어야 합니다.
기도라고 할 때 누구나 이것을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이라는 이탈리아 사람이 쓴 꽁트집이 있습니다.
2차 대전 후 공산당 천지가 된 이탈이아의 시골 마을 신부와 그 마을 공산당 지도자인 읍장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들을 아주 재미있게 쓴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공산당원의 아들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병명도 알 수 없고 의사도 손을 놓아버려서 이제는 하나님 외에는 매달려 볼 만한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원인 아버지가 하나님을 찾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곁에 누운 아들은 곧 죽을 것 같이 깊은 신음을 토하는데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이 보고 있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고민 고민하던 아버지는 다락에서 엽총을 꺼내들고 교회로 갔습니다. 전쟁 전에야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신자였지만 공산당원이 된 후로는 처음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조심해서 갔습니다. 배신자 소리 듣는 게 무서웠습니다. 인민의 아편이라고 욕하던 주제에 기도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습니다. 기도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들어서자 느닷없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내 아들을 살려 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쏘아 죽이겠다.”
어떻게 됐을까요?
그 시간에 그 아들이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슨 얘깁니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심리에 대해 여러 가지 숨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박함이 기적을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유명한 기도는 바로 간구였습니다.
히스기야 임금 시절에 세계를 지배한 나라는 앗수르였습니다.
유다도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고 온 나라에 있는 모든 금과 은을 다 주고서야 물러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성전 문과 기둥에 입힌 금까지 다 벗겨서 바쳤습니다.
그런 치욕을 겪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앗수르가 또 다시 쳐들어 왔습니다.
앗수르의 대장 랍사게가 히스기야에게 산헤립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이 기가 막혔는데, 그 내용이 이랬습니다.
          “네가 누구를 의뢰하여 나와 맞서겠느냐? 애굽이냐? 아니면 여호와냐? 애굽은 이미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이 되었으니 말할 것도 못 되고 여호와란 말이냐? 내가 여호와의 뜻이 아니면 어찌 예루살렘을 치러 이렇게 올라 왔겠느냐? 여호와가 나에게 예루살렘을 쳐서 부수라고 해서 내가 왔다. 내가 사마리아를 칠 때 여호와가 미동이나 했었느냐?”

네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어떻게 생기겠느냐는 말이었습니다.
너와 마찬가지로 여호와를 믿고 의뢰하던 사마리아-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할 때 여호와가 어떻게 했느냐고 묻는 말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편지를 받자 바로 입고 있던 옷을 찢어 버리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갔습니다.
신하들도 같은 모습으로 그를 따랐습니다.
그동안 말로 할 수 없는 치욕을 당해 왔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까지 조롱꺼리로 만들고 있는데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될 말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한 히스기야는 산헤립에게서 온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했습니다.
          (왕하 19:17-19) [17]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18]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19]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

사람이 만든 거짓 신들이야 앗수르 왕 산헤립의 손에 무녀졌지만 여호와께서는 산헤립을 꺾으셔서 당신이 참 하나님임을 세상이 알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왕하 19:35-37]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37]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할렐루야!

히스기야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기가 곧 죽게 되리라는 걸 알게 된 히스기야는 바로 벽을 향하고 앉아 통곡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왕하 20:2-3)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나가 마음을 찢으며 기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두 번째 말 그대로 기도라고 표현된 기도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요 찬양과 경배입니다.
영어로는 prayer 라고 합니다.
간구가 가장 대중적인 의미의 기도라고 한다면 기도는 기도라는 말이 가진 본래의 뜻과 가장 가까운 말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제 자리에 모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제 자리에 모신다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바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오늘의 성서일과 중 시 113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 113:1-10) 『[1]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하나님의 자리는 찬양받으시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영원입니다.
          [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아침 안개와 같은 인생과는 뚜렷하게 구별되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는 시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시작이요 끝이며, 알파와 오메가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리는 경계가 없습니다.
          [3]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해 돋는 것과 해 지는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낮 가운데 있지만 세상에는 깊은 어두움이 깔려 있는 곳이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선가 해가 뜨는 그 시간에 어디에선가는 해가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는 해가 뜨는 그 시간에 해가 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제 자리에 모신다는 것은 인생이 자기 자리를 찾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인생이 자기 자리를 찾으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육신의 원하는 바와 영이 원하는 바 사이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바라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마 26: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바울의 기도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사단의 사자와 같은 병으로 고생하다가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간구는 바울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고후 12:8-9)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과 예수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먼저 간구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열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망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오히려 기쁨으로 물러났습니다.
간구로 시작하였으나 기도로 끝난 것입니다.

간구하는 믿음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간구에 머무는 믿음은 약한 믿음입니다.
장성하지 못한 믿음입니다.

기도하는 믿음은 쓰임 받는 믿음입니다.
장성한 자의 믿음입니다.
기도로 마치는 믿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은 도고(禱告)입니다.
도고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입니다.
오직 우리말 성경에만 있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intercession 이라고 하는데 중보기도입니다.
나와 내 식구 아닌 타인을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중보자이십니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두루 계시는 하나님, 인생이 도무지 미치지 못할 먼 곳에 계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만남과 교제와 대화를 주선해 주시는 중보자입니다.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시편 113편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찬양입니다.
          [시 113:4-9]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그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도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8]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9]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그런데 왜 남을 위해 내가 기도해야 합니까?
결국은 나의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라 했습니다.
나무는 가만히 있으려 하는데 바람이 멈추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평안은 평안이 아닙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평안할 때 비로소 내가 평안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예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에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렘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놀랍게도 원수의 나라가 평안하기 위해서 힘쓰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전도하던 그 시절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훼방과 핍박이 심했던 시절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곧 훼방자요 핍박자였던 시절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높아서, 귀해서, 무서워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안해야 성도들이 평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철학자는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자만이 남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평안하기를 원하십니까?
원수조차도 평안하기를 바라고 기도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은 감사입니다.
간구와 기도와 도고가 비슷한 말인데 비해서 감사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라는 묶음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모든 기도가 감사로 끝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감사는 우리의 기도를 완성하는 마침표입니다.
그런 면에서 감사는 기도입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만한 설교는 없는 법입니다.
주의해서 들으십시오.
          (마 18:24-35)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수천만 원에 이르는 빚을 단지 애원하는 것으로 탕감 받고서도, 자기에게 수만 원 빚진 자를 만나서는 멱살을 잡으며 내 돈 내어 놓으라고 닦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감사함이 없는 까닭입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속된 말로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애원도 헛것이 되었고, 불쌍히 여기는 주인의 마음은 괘씸한 마음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다시 간구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감사로 마치지 못하면 다시는 간구도 하지 못하는 암담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먼저 내가 하나님께 애원할 때의 사정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셨던 은혜의 크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신 15:15)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 되어서 신음하던 때를 기억하면 이스라엘 중에 나그네 된 자들을 소홀히 여길 수 없습니다.
          (신 29: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인도하여 광야를 통행케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바다를 갈라 바로의 군대를 멸하시고, 광야 건건한 땅, 빈들에서 먹이시고 인도히신 은혜는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고, 감사한 것입니다.

설혹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이 외롭고 아파도 지금 그대로 거기서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직 마치지 못한 것, 아직 부족한 그 무엇이 있다 해도 다시 간구할 기회가 있음을 인하여 감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이 거름 무더기와 같은 곳일지라도 감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간구를 들으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 또다른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세상에서 주께로 향하는 자의 다리입니다.
기도는 놓치지 말아야 할 생명줄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여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응답 받고, 항상, 모든 일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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