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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9·10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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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8월 27일 (금) 01:55:39
최종편집 : 2010년 08월 27일 (금) 14:07:55 [조회수 : 2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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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소개> 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10년 9·10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86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 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10년 9·10월호 중 10월 첫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믿음의 탑 쌓기

* 성경 본문: 누가 14:25-33
* 성경 주석

오늘 본문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현대 문화의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예수의 제자 됨의 의미에 우리가 직면하게 한다. 그렇다면 설교자가 할 일은, 한편으로는 그 메시지가 급진적인 성격을 잃지 않고 들려지게 하는 것,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길게 늘어진 지루한 비난의 이야기로 바뀜이 없이 들려지게 하는 것이다. 복음의 메시지는 삶에 관한 가정들을 뒤흔들어놓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복음"(good news)이다.

오늘 본문은 흥미로운 설화적 장치로 시작된다. 예수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계속하고 있는데, "많은 무리"가 예수와 동행한다(25절). 누가복음 기자는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을 "마치 그가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지를 그들이 진실로 이해하는지 여부를 묻기 위해, 예수가 갑자기 군중에게로 돌아선 것처럼" 이야기한다(26a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기는 해도, 그들은 예수가 그들에게 묻고 있었던 것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많은 무리"(large crowds)가 성공의 확실한 표지로 간주되는 우리 시대의 문화 속에서, 이 구절은 그러한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뭔가 잘못되었거나 최소한 오해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군중을 향한 예수의 말은 도발적이다. 예루살렘으로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진정한 제자들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는"(26절) 사람들뿐이다. 확실히, 우리는 이 요구를 자신의 가족과 자기 생명을 글자 그대로 "미워하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수는 동반 자살을 계획하는 비밀 종파 공동체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미워하다"(hate)는 일종의 비유적인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말이냐는 것이다.

일부 해석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기에서 쟁점은 비교의 문제이다. "더 못한 것으로부터 더 위대한 것으로의"(from the lesser to the greater) 이동을 말하는 [문장 등이] 몹시 생략된 형태의 주장에서, 예수는 이렇게 주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너무 커서, 우리의 가족과 우리 자신의 생명에 대한 가장 깊은 인간적인 사랑이 비교적으로 '미움'처럼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의 제자 됨에 있어서 위태로움에 처해 있는 것을 참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런 방식의 추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군중들에 의한 아무런 결정이나 선택도 요구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너 자신과 너의 가족을 사랑하라. 다만, 나를 더 사랑하라"는 수준으로 요약된다. 우리는 군중들, 즉 고대와 현대의 군중들 모두 겉으로는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분명히 계속해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따라가려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군중을 향한 예수의 극적이고 대결적인 돌아섬을 재촉했던 것은 단순한 명료함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 문맥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 사용에 대한 보다 그럴 듯한 해석은, 그것이 수사학적 과장법, 즉 실제로 요구되는 행동을 과장되게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미움은 관계에 있어서 사이가 틀어짐 혹은 관계가 깨어짐이다. 그래서 예수는 군중에게 제자가 되려는 결정은 예수의 부름에 대답하기에 앞서 자신의 가족과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기존의 관계를 깨뜨리고 새롭게 하는 것을 포함함을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리라. 성경 주석가인 존 놀란드가 묘사하였듯이, "미움이 있는 곳에는, 한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는 아무런 속박의 끈도 없다." 예수는 가족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심지어 이 가장 심원한 관계들까지도 제자직이 요구하는 범위 안에서 이해되고 제약되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습관적인 관계들의 망 안에 머물러 있기로, 혹은 제자로서 예수를 따르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든 선택해야 한다. 그런데 이 선택의 불가피성은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된다: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에 의해(27절), 그리고 자신의 결정을 내림에 있어 비용을 신중하게 고려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두 개의 간단한 비유에 의해(28-30절, 그리고 31-32절).

제자직의 대가로서의 "십자가"에 관한 말씀들은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지, 혹은 그 말씀들은 부활 이후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는데 보다 이른 전승 요소들 속으로 스며든 것인지에 관해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 왔다. 만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요구하는 말씀이 예수에게서 시작되었다면(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런 급진적인 요구들은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짓는다), 예수는 자신이 말하려는 요점을 생생하게 예증하기 위해 매우 섬뜩한 형태의 공개적인 처형의 이미지를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상상 가능하다. 그러나 복음서들이 쓰여질 무렵에 이르러서는, 예수 자신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은 그러한 말씀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해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틀지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말씀들에 대한 기원 후 1세기와 21세기의 반응들 사이의 차이는, 십자가 처형을 자신들에 대한 제국의 정책의 지속적인 현실로서 경험했던 사람들이라면 그러한 진술들을 신체적인 현실이 결여된 영적 용어들로 들을 수는 결코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십자가를 지라"는 요구를 총체적으로 영성화하는 것은 예수의 급진적인 제자직으로의 부름을 유순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두 비유에서 주장하는 것은, 우리는 자기 선택의 궁극적인 결과들을 주의 깊이 고려함이 없이 한 행동 과정에 우리 자신을 섣불리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선행하는 말씀들의 두 가지 차원에 상응하면서 두 상이한 차원에서 작용한다: 가족, 그리고 생사의 문제.

첫째 비유(28-30절)에서 언급되는 '망대"(tower)는 농업용의 망루처럼 비교적 단순한 구조여서, 군중 속의 사람들은 자신을 그것에 개인적으로 연관지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확실히, 구조물을 완성할 자원이 부족하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게 되리라고 말하는 비유의 요점은, 그 프로젝트에 상당한 비용이 드는지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사리에 맞게 밝힐 수 있는 상황이다. "왕들"의 행동에 기초한 둘째 비유는 군중 속의 사람들이 직접 대면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생사의 결과를 낳는 실제적인 결정들을 다룬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결정은 우리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 우리의 전 인격을 아낌없이 내놓겠다는 공개적인 헌신의 다짐이다. 33절에서 분사 uparcousin의 사용에서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 요점일지 모른다. 보통은 "소유"(possessions)로 번역되는 그 단어의 관용적 어법은 소유물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생계 수단"(means of living)이라는 의미도 전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이전의 삶을 정의해 왔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제자직의 삶을 영위하는 방식으로 예수를 따라야 한다. 그것의 완성까지를 신중히 고려하는 헌신이 없이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삶의 다양한 것들 속의 한 가지 헌신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제자로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 설교 본문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무리"에게로 돌아서서 단호한 어투로 묻는다: "너희 가운데서 누가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그것을 완성할 만한 비용이 자기에게 있는지를, 먼저 앉아서 셈하여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하지 않아서, 기초만 놓은 채 완성하지 못하면, 보는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것이며, '이 사람이 짓기를 시작하기만 하고, 끝내지는 못하였구나' 하고 말할 것이다"(누가 14:28-30).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세우라고 촉구하는 탑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에게는 그것을 완성할 인내심과 헌신이 있는가?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현대 문화 속에서, 다음 세대를 위한 건물은 드물고도 "신앙으로 충만한'(faith-filled) 행동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세 가지 구별되는 탑들, 즉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세울 자원을 조달할 수 있다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구조물을 제안한다. 그것들은 헌신의 탑, 희생의 탑, 그리고 관대함의 탑이다.

첫째, 헌신의 탑.

군중을 향한 예수의 연설은 다음의 말로 시작된다: "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 아내나 자식,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당신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군중 속의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다: "미워하라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들, 형제와 자매를 미워하라고? 그들은 확실히 성가신 존재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강렬한 분노 혹은 강한 적개심이라는 의미에서 미움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가 좋아하는 스포츠 팀에게 보여주는 충성심 비슷한 사랑-미움의 이분법을 세우고 있다. "나는 기아 타이거즈를 사랑하고 롯데 자이언트는 미워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이 헌신적인 기아 타이거즈 팬이어서 언제든지 다른 팀들보다 기아 타이거즈를 응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아 타이거즈에 대한 그의 사랑은 확고부동하고 영원하고 열렬하고 비합리적이다. 기아 타이거즈가 이기든 지든, 기아 타이거즈는 늘 그가 좋아하는 팀이 될 것이다.

이 팬이 "나는 롯데 자이언트를 미워해"라고 말할 때, 그는 실제로는 "나는 결코 롯데 자이언트를 응원할 수는 없을 거야"라고 말하는 셈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러할 것이다. 그는 롯데 자이언트 팀 선수들에 관해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그는 "나는 그들에게 분노나 적개심을 느낀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만일 한 스포츠팬이 이런 종류의 강렬한 감정을 쏟아 붓는다면, 그 사람은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예수는 단호한 어투로 말한다: "내 제자가 되고 싶다면, 나를 '최고로 중요한 존재'( Number One)로 여겨라." 그는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아내, 자녀, 형제 자매보다 그에게 전폭적으로 헌신하기를 원한다. 예수가 당신을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고 당신의 가족은 당신을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예수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다.

당신은 예수 주변의 군중들이 이 지점에서 투덜대기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나는 그런 종류의 헌신은 결코 할 수 없어."

그러나 흥미로운 점이 있다. 예수가 넘버원일 때, 당신의 가족은 사실상 이익을 본다. 강력한 원칙들을 가지고 있는 남편은 아내에게 충실할 것이다. 예수에게 초점을 모으는 엄마는 자녀들이 불건전한 방향으로 살아가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십대는 위험한 또래 집단을 따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주일날 부모를 따라 쇼핑몰 대신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는 천박한 소비문화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헌신의 탑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다음 세대들을 위해 우리가 지어야 할 중요한 구조물이다. 그것은 드물고도 신앙으로 충만한 행동이다.

둘째, 희생의 탑.

바로 뒤이은 절에서, 예수는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당신이 믿는 것을 위해 당신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실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예수는 아주 분명히 한다. 우리들 각자에게 있어서 희생의 구체적인 내용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시간과 에너지의 희생일 것이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습관, 취미, 혹은 특정한 경력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다. 유일한 공통분모는 예수가 그랬듯이 우리의 목숨을 기꺼이 내려놓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매일 행하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기까지는, 그러한 희생은 극단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희생을 부단히 연습하다 보면, 마침내 희생이 우리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폭탄이나 지뢰의 신관을 제거하는 것과 비교하여, 시간, 에너지, 습관, 그리고 취미를 희생하는 일은 그렇게 아슬아슬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희생의 탑을 세우는 일이 몹시 어렵게 느껴질지 몰라도, 희생의 탑은 제자직의 삶에서 한 본질적인 구조물이다.

셋째, 관대함의 탑.

오직 바보만이 자신이 끝마칠 수 없는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예수는 두 가지 비유를 연달아 제시한다. 사람은 그것을 끝마칠 돈이 없이는 탑을 세우기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왕은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군인들이 없다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다. 적절한 자원이 없으면, 그들은 당황하거나 패배한 모습으로 끝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28-32절).

두 비유를 말한 다음, 예수는 결론적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서 누구라도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33절). 예수를 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관대함의 탑을 높이 세워야 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영속적인 것을 섬기는 일에 자신의 시간과 재능, 돈과 노력을 기쁜 마음으로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망설임이 없이 우리 삶의 날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 구성원들처럼, 우리는 공동체 안의 어느 누구도 궁핍한 삶을 강요받지 않도록 우리의 물건과 소유물을 후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행전 2:44-45; 4:32).

물론, 관대함의 아이러니는 그것이 우리를 고갈시키기보다 오히려 부유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 기독교적 대의명분에 우리의 것을 아낌없이 바칠 때,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위해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남들과 기쁜 마음으로 나눌 때, 우리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기여한다. 굶주린 아이를 먹이고 난민 가족을 후원하고 교회 건축을 위해 정성껏 헌금을 드리는 것과 같은 관대함의 행동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더 부자로 만든다. 우리가 세상을 더 낫게 만드는 일에 나름대로 공헌하고 있다는 인식 가운데, 우리 자신이 더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들 중의 아무도 자기 소유물 중의 어느 하나라도 가지고 세상을 떠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소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뒤에 올 세대들을 위해, 관대함의 탑을 가급적 크고 높이 쌓는 편이 더 낫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이 세 가지 "예수의 탑들", 즉 헌신과 희생과 관대함의 탑을 건설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린다. 그것들은 날림공사로 지을 수 있는 탑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일단 그 탑들이 세워지면, 그것들은 수백 년, 수천 년 지속되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공동체들에게도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이 탑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의 신앙의 행동들이며, 그리고 제자직의 삶과 완전히 조화된다.

이 신앙의 탑들과 관련해서 이상야릇한 것은 하나도 없다.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예수와 "가족적 가치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 "십자가 없는" 제자직의 유혹적인 매력
*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가 예수를 따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소유물
 
* 예화

+ 초의 영혼

초에도 영혼이 있다.
볼 수 없으나
볼 수도 있는 초의 영혼
애절하게 녹아내리는 초의 몸 안에는
뜨겁게 피어오르는
영혼이 있다.

초에게 영혼을 주는 건
바로 사랑의 뜨거운 불
자신의 몸을 녹이는
그 어떤 뜨거움에
희생적으로 자신을 맡길 때
그는 영혼을 얻는 것이다.

점점 작아지는 키
그러나
더 선명해지고
더 높이 오르는
초의 영혼.   
(이은희·수녀)

+ 주님이 오신 후

주님!
주님이 안 계신 내 마음의 집에는
정욕, 명예욕, 탐욕, 물욕
교만, 자만, 오만, 거만으로 가득 찬
아주 더럽고 불결하고 냄새나고 살기 싫은
귀신 나오는 집이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어느 날
내 마음의 집에 불쑥 찾아 오셔서
청소를 하기 시작하셨지요.
쓸고 닦고 긁고 칠하고
꽃을 심고 나무를 심고

주님!
주님이 사시는 내 마음의 집에는
사랑, 기쁨, 감사, 행복
양보, 헌신, 희생, 웃음으로 가득 찬
아주 깨끗하고 상쾌하고 향기 나고 살기 좋은
주님이 사시는 집이 되었습니다.
(최용우·전도사)

+ 십자가의 행복
  
내 어깨에 메워진 십자가가 없다면
나는 정말 행복할까?

살다 보면 부모가 십자가가 되고,
남편이 십자가가 되고 아내가 십자가가 되며,
자식이 형제가 친척이 친지가
서로가 서로에게 십자가가 되고,
이웃과 조국이 십자가가 되고,
가난과 병고, 심지어
하느님도 신앙도 십자가가 된다.

그 많은 십자가들을 내 어깨에서 내려놓는 날
나는 바라던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목적은
이런 십자가들을 내려놓는 것일까?

우리는 안다.
내 어깨에 메워진 이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꺼이 하고,
분노하다가도 인내하고
용서하며 화해하게 된다는 것을.

십자가는 내게
사랑이 인내라는 것을 가르쳐 주며
그 자체로 사랑임을 깨우쳐 주는 선물임을.

십자가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존재로 키워주고,
겸손하게 하고, 없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고,
희생이 기쁨이며 그게 바로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은총이라는 것을.

십자가를 내 어깨에서 내려놓는 날,
나는 희생도 용서도 화해도 모르는
비정한 인간이 되고,
내 몸에서 사랑을 발산하지 못하는
사랑하지도 사랑 받지도 못하는
돌같이 차가운 존재가 되고 만다는 것을.
(이제민·신부)

+ 유일한 기쁨

예수님은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았던
한 상인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 상인은 진주를 자기 것으로
만든 기쁨에 완전히 도취되어
그 대가로 지불한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의 삶에 나타나는
성숙한 모습이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엄격한 자기 훈련이 아니라
어떤 희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할 만한
풍성하고 가치 있는 새로운 삶이다.
(필립 얀시, 『아,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

+ 당신의 종교가 그대에게 뭘 해 주었는지

당신의 종교가 그대에게 뭘 해 주었는지
그리고 당신의 종교가 그대를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나타내 보세요.

만약 당신의 종교가 그대를
이기심 없고 연민에 가득 차 있으며
봉사와 희생으로 충만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런 종교는 한데 모아 저
바닷물 속에 집어던져 넣어 버리세요.

그건 종교가 아닙니다.
그건 환상입니다.
자, 다시 새로 시작해서 진정 '종교적'이 되어 보세요.
(스와미 치다난다·인도의 성인)

+ 가족을 위해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사람은
누구와도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가족보다 다른 것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에게는 행복이란 없습니다.
가족을 떠난 행복은 착각일 뿐입니다.
가족을 외면한 사람은
세상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세상의 기초이니까요.
(김홍식,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 달팽이의 목표

어느 추운 날,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느린 속도로 조금씩 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을 때, 나무껍질 틈새에서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달팽이에게 말했다. "너는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는구나. 저 위에는 사과가 하나도 없단 말이야."

하지만 달팽이는 계속 기어오르면서 말했다.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열릴 거야."

+ 주님과 함께라면

영국의 한 광고 회사가 큰 상품을 내걸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빠른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을 묻는 퀴즈를 냈다.

워낙 상품이 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응모했다. 비행기가 가장 빠르다느니, 기차를 타고 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느니, 새벽에 지름길로 승용차를 운전하고 오면 가장 빠르다는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실제로 시간을 재어보면서 자신의 아이디어가 가장 빠르게 가는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일등상을 탄 사람의 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아무리 머나먼 길도 무척 가깝게 느껴진다. 이것이 사랑의 거리 계산법이다. 주님과 함께라면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라도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갈 수 있다.
(최병남·대전중앙교회 목사)

+ 축복의 꽃 포인세티아

오래 전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는 착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산에 올라가서 약초를 캤다.

어느 날 소녀는 절벽 사이에 돋아나 있는 약초를 캐다 그만 굴러 떨어졌다. 소녀가 흘린 피로 주변의 하얀 꽃이 빨갛게 물들었다. 소녀의 정신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이 나타나서 "저 피 묻은 꽃을 꺾어 어머니에게 갖다드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소녀는 불끈 힘이 솟아 일어나서 그 꽃을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어머니는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되찾았다.

포인세티아 꽃의 전설이다. 그래서일까? 이 꽃의 꽃말은 ‘희생’ 또는 ‘축복'이다. 희생은 축복의 열매를 맺는다.

+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1949년 4월 5일, 일리노이 주에 핑햄에서 아주 끔찍한 병원 화재가 발생했다. 그런데 희생자들 중에는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기 자리를 지킨 스물 두 살의 간호사 페른 릴리가 끼여있었다.

화재가 나던 날 밤, 그녀는 2층 신생아실에서 열 명의 신생아를 돌보고 있었다. 신문 기사에 따르면 화재 경보가 울리고 대피하라는 말이 들렸을 때, 그녀가 이렇게 외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

"제 아기들이요! 저는 제 아기들과 함께 있어야 돼요!"

과연 그녀는 불이 완전히 꺼진 뒤에 신생아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페른 릴리가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보여준 약하고 무기력한 아이들에 대한 그 희생적인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이 어려울 때면 때때로 실의에 젖는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J. 모러스, 『행복 만들기』)

+ 교회학교 교사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있었던 일이다.

한 어린 영국 군인이 적군의 총에 맞아 죽어가고 있었다. 군목은 군인의 몸에 손을 얹고 기도하며 유언을 물었다. 그러자 어린 군인은 짤막하게 말했다. "제 어머니에게 전해 주십시오. 아들은 고통 없이 기쁘게 죽었다고요."

잠시 후 어린 군인은 무슨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 숨을 헐떡이며 간곡하게 말했다. "목사님, 한 가지 부탁이 더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학교 선생님께 이 말을 전해 주십시오.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고요. 그리스도인으로 편안하게 눈을 감게 해주신 선생님께 감사한다고 전해 주세요."

군목은 어린 군인의 유언에 따라 교회학교 선생님을 찾아가 마지막 유언을 들려주었다. 여선생님은 아무런 말없이 한참 눈물을 흘리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지금 교회학교 교사가 아닙니다. 교회학교 교사라는 직분이 대단치 않게 생각돼 그만두었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유언을 들으며 결심했어요. 다음 주일부터 다시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겠습니다."

+ 성공보다 성실을

꽤 여러 해 전, 나는 인도에 있는 마더 테레사 수녀를 방문해서 그녀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비참한 가난과 지옥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날이 저물 무렵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수녀님이 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녀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너무 작은 것을 볼 때 낙심이 되지 않습니까?" 그녀는 미소 띤 얼굴로 즉시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주님께서는 나를 성공하라고 부르신 게 아니라 다만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부르셨어요."

우리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 또한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때로 교회마저도 세상의 방식으로 측정되는 적당한 성공을 이룰 것을 우리에게 재촉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어진 삶에서 얼마나 성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성실했느냐를 따지신다. 당신은 이 주님의 요구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테레사 수녀의 고백을 명심하기 바란다.
(마크 하트필드)

+ 나눠주어야 남는다

클라크라는 한 미국 여인의 간증이다.

클라크 부인은 어린 시절을 농장에서 보냈다. 그런데 가을 추수 때가 되어 감자를 거둬들여야 했는데 무거운 감자를 캐내어 나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땀 흘리고 애써 거둬들인 감자였기에 그 감자는 몹시 소중하고 더 맛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아버지는 겨울에 우리 집에 찾아오는 교회 성도들에게 여름 내내 그렇게 애써 거둬들인 감자를 아낌없이 나눠주는 것이었다.

클라크 여사는 그 감자가 너무 아까웠다. 그녀는 한여름에 그렇게 수고하여 캔 감자를 왜 손님들이 올 때마다 나눠주는지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감자는 나눠주어야만 남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봄까지 감자가 남아 있는 집은 클라크 여사의 집밖에 없었다. 감자를 나눠주지 않고 그대로 쌓아둔 집들은 감자가 썩어 남도 주지 못하고 자기네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감자를 나눠준 클라크 여사 집의 감자는 썩지 않고 봄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 불평 노트

한 목사가 자기 책상 위에 "교인들에 대한 교인들의 불평들"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공책 한 권을 올려놓았다. 교인들 중 하나가 그에게로 달려와서 다른 사람의 결점을 말하려고 하면, 그는 말하곤 했다. "좋습니다, 여기 불평을 담는 책이 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제가 기록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거기에 사인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그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고자 할 때, 거기에 기록된 불평의 사항들을 참고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공책이 늘 펼쳐져 있고 펜이 준비되어 있는 모습은 효과를 발휘했다.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목사에게 달려와 불평을 털어놓던 사람들도 목사의 얘기를 듣고 나서는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오, 아닙니다. 나는 그와 같은 것에는 도저히 사인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공책에는 아무런 불평 사항도 기록되지 않았다. 목사의 말에 따르면, 그는 자그마치 40년 동안 공책을 늘 열어놓은 상태로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았지만, 공책에 단 한 줄도 적을 수 없었다.

+ 가장 작고 가벼운 짐

언제나 불만으로 가득 찬 사나이가 있었다. 사나이는 자신을 늘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멀리 있는 곳으로 짐을 옮기게 되었다. 사나이도 다른 사람들처럼 짐을 짊어지고 나섰다. 한참을 가다보니 사나이는 남들보다 자기 짐이 더 무겁고 커 보여서 몹시 기분이 나빴다. '난 역시 재수가 없어!' 갑자기 그는 힘이 빠져 가장 뒤쳐져 걸었다.

길이 너무 멀어 마을 사람들은 중간에서 하룻밤을 자고 가게 되었다. 바로 이때다 싶어, 사나이는 모두 잠든 깊은 밤에 몰래 일어나 짐을 쌓아둔 곳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짐을 하나하나 들어보았다. 그리고는 그 중 가장 작고 가벼운 짐에 자기만 아는 표시를 했다.

날이 밝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어젯밤에 몰래 표시해 둔 짐을 찾았다. 그런데 그 짐은 어제 하루종일 자신이 불평하고 짊어지고 온 바로 그 짐이었다.

+ 이상한 설교
 
어느 교회에 신임 목사가 부임했다. 그는 첫 취임 예배에서 아주 멋지고 놀라운 설교를 했다. 교인들은 '우리가 정말 목사님을 잘 모셔왔다'고 생각하며 아주 기뻐했다.

그 다음 주일이 되었다. 목사는 취임 예배에서 한 것과 똑같은 설교를 고스란히 되풀이했다. 교인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저 목사님이 지난 주일에 설교한 것을 까맣게 잊었나?' 그래도 교인들은 ‘목사님이 취임 예배로 너무 정신이 없어 설교 원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착각했을지도 몰라’ 하고 너그럽게 이해했다.

그런데 셋째 주일에도 신임 목사는 첫째, 둘째 주일에 한 설교를 똑같이 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똑같은 설교를 세 번씩이나 들었을 때 교인들의 반응이 어떠했을지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새 목사님을 모셔 와도 아주 잘못 모셔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한 용감한 교인이 목사에게 물었다. "목사님, 목사님은 언제 새로운 설교를 하실 작정입니까?" 목사는 교인의 눈동자를 주시하며 또렷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이 말씀을 정말로 당신의 삶 속에 적용할 때, 그때 저는 새로운 설교를 시작할 것입니다."

+ 가족

어느 가족의 일화다.

아버지는 종종 가슴이 답답하여 현기증을 느꼈다. 어느 날 증세가 심해져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정확한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몇 종류의 약봉지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 안정을 취해야 했다.

그러던 중 명절이 되어 온 가족이 한 집에 모였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한참을 웃고 즐기는 가운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오랜만에 한참 웃었더니 내 병이 깨끗이 나은 것 같구나."

가족보다 더 좋은 약은 없다. 오늘, 가족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해 보는 것은 어떨까?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비가 오면
그 빗물을 찬미하리라
바람 불면
그 바람을 찬미하리라
추위가 오면 그 추위를
더위가 오면 그 더위를
거기 함께 흐르는
당신의 섭리를
찬미하리라
기쁠 때는 그 기쁨을
슬플 때는 그 슬픔을
사랑밖에 모르는 주님
사랑으로 나를
섭리하시니
나보다 나를 잘 아는 주님
내 영혼의 선익을 위하여
은총으로 나를
보살피시네
나 항상 당신을
찬미하리라
사랑밖에 모르는 주님
사랑으로 나를
섭리하시니
(홍수희·시인, '찬미하리라')

+ 가을 산길

맑은 바람 속을 맑은 하늘을 이고
가을 산길을 가노라면
가을 하느님,
당신의 옷자락이 보입니다.

언제나 겸허하신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 알의 익은 도토리알 속에도 계셨고
한 알의 상수리 열매 속에도 계셨습니다.
한 알의 개암 열매 속에도 숨어 계셨구요.

언제나 무소유일 뿐인 당신,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제 겨우 세 살바기 어린아이의 눈빛을 하고
수풀 사이로 포르릉 포르릉
날으는 맷새를 따라가며
걸음마 연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나태주·시인) 

+ 실천하는 기도
 
오 하느님, 우리는 전쟁이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당신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우리가 자신뿐 아니라 이웃들과 평화롭게 사는 길을 찾을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굶주림을 없애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 전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자원을 당신께서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편견을 뿌리 뽑아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서 선을 볼 수 있는 눈을 당신께서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절망을 없애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사용하기만 한다면 빈곤을 몰아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당신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는 단지 질병을 없애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건설적으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치료법과 치유법을 찾아낼 수 있는 위대한 정신을 당신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느님,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기도만 하거나 단지 바라기만 하지 않습니다.
행할 힘과 결단력과 의지를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잭 리머, '오 하느님, 그러므로 우리는')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나는 위로 쌓아 올려지기 보다
밑에 내려 깔리기를 원한다
지상보다 먼 하늘을 향해
계속 쌓아 올려져야 한다면
나는 언제나 너의 발 밑에 내려 깔려
너를 단단히 받쳐줄 수 있게 되길 바란다
그리하여 어느 날 너와 함께
하늘 높이 쌓아 올려졌다 하더라도
나는 지상을 가르는 장벽이 되길 바라지는 않는다
산성이나 산성의 망루가 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다
나는 그저 우리 동네 공중 목욕탕 굴뚝이나 되길 바란다
때로는 성당의 종탑이 되어 푸른 종소리를 들으며
단단해지기 보다 부드러워지길 바란다
쌓아 올린 것은 언젠가 무너지는 것이므로
돌이 되기 보다 흙이 되길 바란다
(정호승·시인, '벽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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