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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성서연구 열정과 직무 유기의 교단 신학자들한국교회 현장의 병폐적 상황에서의 도올읽기와 교단 신학자들의 문제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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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5월 18일 (화) 03:04:29
최종편집 : 2010년 05월 18일 (화) 10:47:40 [조회수 : 3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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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한글역주』발간과 본인이 보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문제

   
▲ 정강길
최근 도올 김용옥 교수의 『도마복음한글역주』2, 3권(통나무)이 나와서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럴만도 한 게 주로 동양철학을 전공한 학자가 천 페이지가 넘는 성서신학에 대한 주석 작업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열정적 작업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도올은 그 자신의 도마복음 연구를 통해 그동안 서구의 기독교로만 알고 있던 맥락을 뒤집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의 장에서 그 안에 깃든 아시아적 가치의 발견을 아름다운 중동 사막의 풍경 사진들과 함께 고스란히 담아내었다.

사실 그가 보는 역사적 예수상에 대해 혹자는 여러 학설들 가운데 하나일 뿐으로 또는 그러한 도올의 작업을 또 하나의 변종된 예수상을 구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보다 더 날카로운 메스를 가한다면 얼마든지 도올의 성서읽기 작업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도올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서구 신학에 길들여진 관점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소신 있는 동양철학자로서의 신선함을 도입하는 맥락도 있다. 다양한 관점으로서의 시도가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쨌든 본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도올의 역사적 예수가 틀렸다거나 전적으로 옳다거나 하는 그러한 평가들에 있지 않다. 역사적 예수 연구 문제는 사실상 좀 더 논의가 복잡한 지점들이 있어 지면상 여기서 이를 다 끌어내서 얘기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만일 보다 더 치밀하게 그리고 보다 더 실증적이고 합리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들을 시도할 경우엔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Jesus agnostic의 문제와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한계 역시 있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의 입장이야말로 내가 볼 땐 그나마 가장 합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정직한 입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사실상 역사적 예수 탐구의 문제는 그만큼이나 자료의 빈곤도 문제지만 거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기 십상이었으며(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설정한 역사적 예수 연구들을 두고 일컫는 것만은 아님), 적어도 어느 한 면으로 모아지기가 힘든 논의의 장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의 입장만 고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차라리 오늘의 시대에 현실적 유용성을 주고자 하는 관점으로 역사적 예수 탐구를 좀 더 깊이 들어가서 현실 변혁의 입장에서 새롭게 활용할 필요도 있다고 여겨진다.

실제적으로 우리에겐 <역사적 예수>라는 논의의 장 자체가 이미 현시대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있는 투쟁의 장이 되고 있음도 분명하게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역사 연구에서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고 있는 한계적 현실의 실체다. 내가 볼 때 모든 성서 연구든 예수 연구든 간에 그 자체로 이미 현재적 정치 행보를 보이고 있는 것이며, 그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비롯한 여러 포지션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찌보면 당연할 수 있는 이 얘기를 나는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현실 변혁의 담론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논의들이 항상 담론적 성격만 띤다고 보진 않는다. 나는 부분적인 합리주의적 성취도 중요시한다. 예컨대 Q자료설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다. 물론 더욱 엄밀한 고등비평 진영에선 Q자료설까지도 의심스럽게 보는 면이 있긴 하지만(결정적으로 Q는 아예 사본조차 발견된 적도 없으니), 그래도 어느 정도는 성서학자들 가운데서 대체로 인정받고 있는 정설로서 거의 받아들이고 있잖은가. 내가 볼 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담론의 장이 있게된 그때까지의 기나긴 인과적 연유들 역시 있겠지만 그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선 궁극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역사적 예수 연구를 왜 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그러한 시도 자체가 탐구자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도 끊임없는 의미들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확정된 역사적 예수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들 모두는 합리주의의 모험을 감행하는 가운데 어쩌면 천 개의 예수를 계속적으로 써내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신약성서라는 텍스트 자체가 케리그마의 집산이라는 피할 수 없는 한계적 현실이 있으나 이것이 곧바로 역사적 예수 탐구 자체를 봉쇄시킬 수가 없으며, 오히려 더욱 역사적 예수의 논의들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물음을 던져야만 하는 역설적 동기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복음서 케리그마의 배후를 끊임없이 묻는 것과 그러한 예수담론을 둘러싼 오늘 우리 자신들의 정치적 행보는 결코 무관할 수 없다. 역사적 예수 이론은 결코 과거에 완결된 것으로서 남아 있지 않으며, 오히려 오늘의 현실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복음서에 대한 다양한 이해로도 새롭게 창조적으로도 열려 있다. 이는 마치 하나님의 창조가 태초에 다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창조과정(-ing)에 있는 것과 같다. 역사적 예수 역시 언제나 형성과정에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본인의 입장은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결국 확정할 수 없다고 보는 측면에선 불트만과 비슷할진 모르나 그가 역사적 예수를 굳이 알려고 할 필요까지도 없다고 말한 측면에선 본인과 불트만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 있다. 내가 볼 땐 지금까지 인류의 지성사가 거쳐왔던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거대한 논의의 장에 함께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그 자신을 포함한 당대의 의미 있는 창조적 모험이 될 수 있을 걸로 본다.

 

 
▲도올의 도마복음서 연구시리즈는 제3권까지 나와 있다. 사진은 마지막 3권 책표지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서 수행되는 도올의 작업과 도올 읽기

지금까지 잠시나마 본인의 역사적 예수 연구 문제를 바라보는 입장을 밝힌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현재의 도올의 역사적 예수 연구 작업에 대해서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은데, 이것은 그러한 작업들이 지금 현재 한국교회 현장에서 드러나는 여러 병폐와 문제점들로 노출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적 상황 속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현재의 도올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나로선 도올의 성서읽기 작업과 함께 현재까지도 한국교회 현장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성서읽기의 참혹한 현실 문제와 함께 내다보고 싶은 것이다. 그동안 도올이라는 인물이 주로 동양철학자로서 활동한 점도 없잖아 있지만, 이미 그 자신의 성장 배경에서 받았던 기독교의 영향 역시 빼놓을 수도 없었기에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러브콜 작업은 항상 끊임없이 있어왔다.

그것이 더러는 이번처럼 표면상으로 드러나기도 했었거나 혹은 잠재적으로 감지되거나 했었을 뿐, 이전의 글에서도 그가 보인 기독교 문제에 대한 관심 자체는 여전히 그 배경으로서 지니고 있었던 터였다. 기독교에 대한 비판 역시 그가 지닌 기독교에 대한 애정과도 결코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이번에 발간된 매우 두꺼운 『도마복음한글역주』작업에서 보여준 예수와 기독교에 대한 도올의 관심과 열정도 기본적으로는 그 자신 안에 형성된 몸삶의 무게와도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도올의 도마복음연구에서 주장하는 그 아시아적 가치란 것도 사실상 그때까지 그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들로 형성된 그 자신의 삶의 자리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잖은가. 

그런데 예전에도 그랬듯이 이러한 도올의 성서연구의 작업들에 대한 기존의 보수 개신교 진영은 이를 폄하하거나 아예 무시 또는 언급을 꺼려하거나 하는 반응이었지만, 기존의 진보 개신교 신학자들은 나름대로 반응을 해보이기도 했었다. 혹자는 이를 찬성하기도 하고 비평하기도 하는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도 한 것이다. 보다 흥미로운 지점은 기존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인 건강한 변혁을 요구하는 기독교 내부의 소수자들과 외부의 일반 사회 진영에서는 그러한 도올의 행보에 대해 나름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교단 신학자들의 직무 유기 : 교회현장과의 심각한 괴리와 이원화

역사적 예수 연구 및 우리의 성서읽기가 오늘의 현재적 정치행보와도 결코 무관할 수 없듯이, 결국 도올에 대한 비판이든 긍정이든 간에 내가 볼 때 한국 신학자들의 우선적인 관심의 포지션은 한국교회의 건강한 변혁에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진보 개신교 진영의 한계 역시 그렇듯이 도대체 신학현장과 교회현장 간의 심각한 괴리와 이원화 현상에 대해선 누구하나 책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점에 대해 기존 한국 신학자들의 분명한 직무 유기가 있다고 보고 있다. 보수 개신교 신학자들이야 이미 그렇다치니까 그러려니 하겠지만, 나로서는 특히 진보적 성향을 지닌 교단 신학자들에 대해서 드리는 얘기이기도 하다. 크게는 두 가지 점에서다.

첫째는 기독교 성서가 지닌 초자연주의 문제에 대해서 제발 좀 솔직한 커밍아웃이라도 하길 바란다는 것이다. 이때 이 지점에서 <성서의 그 구절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신학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식의 성서우회주의자들> 역시 문제가 있는 태도라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교회 목사들과 신자들은 이미 그 성서구절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에 그토록 목을 메달고 있는 현실이 있기에 이를 더욱 더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밝힐 필요가 있음에도 여전히 그러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354 참조).

따라서 성서구절들의 역사적 사실 여부의 문제와 신학적 의미의 구현 둘 모두를 분명하게 얘기해줄 수 있어야하지만, 한국의 신학자들은 전혀 그러질 못했었다. 물론 보수 개신교 진영의 신학자들이야 그런 문제들에 대해선 그냥 간편하게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멍청함의 태도 문제가 있지만, 정작 진보 개신교 신학자들의 문제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솔직하게 나오질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진보적인 성서학자도 사석에선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신학현장과 교회현장에선 덕을 끼치지못한다고 봐서인지 여전히 성서우회주의자의 모습을 드러낼 때가 많은 실정이다.

결국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추상적 수준에서의 얘기들로 황급히 마무리 짓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신학현장과 교회현장 간의 괴리와 이원화 문제는 더욱 심각하게 불거져만 갈 뿐임을 왜 모르는가. 또한 그럼으로인해서 더욱 구조화된 병폐들은 한국교회 현장까지 망칠 뿐만 아니라 아예 자유로운 학문 탐구의 신학현장까지도 보수적인 교단 목회 시스템에 의해 더욱 심하게 통제받게 되는 치명적 문제까지 낳는 꼴만 되고 있다. 어찌보면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고 있는 셈인 것이다.

두 번째 진보적 성향을 지닌 한국 신학자들의 직무 유기는 도대체 쓸만한 성경공부 교재하나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 현장을 가보면 거의 대부분은 교리적인 성경공부 교재이지 도대체가 쓸만한 성경공부 교재를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목회 현장을 맡고 있는 김경호 목사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시리즈인 성경공부 교재는 매우 반가운 마음이 든다. 내가 보기에도 보수적인 한국교회 현실에서는 꼭 한 번은 필요한 성경공부 과정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마저도 결국은 <성서신학적 성경공부> 교재라는 점에서 더욱 아쉬움이 있다.

그렇기에 한국교회의 처참한 보수적인 성경공부 교재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가 필요하다. 이는 어쩌면 기존의 진보적인 조직신학자들과 성서신학자들의 협력이 함께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신학자들은 이 작업을 여태까지도 해오질 못했었다(‘한국교회 성경공부 문제, 교재가 없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32 참조). 물론 한국교회의 교단 신학자들이 도올의 성서연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나무랄 수는 있겠으나 그전에 먼저 지금까지도 한국교회 현장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성경공부의 문제부터 분명하게 비판개선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건강한 변혁을 갈망하는 흐름으로서의 예수와 성서읽기

이러한 한국교회의 참담한 현실에서 오늘날 도올의 성서작업을 다시 들여다 볼 경우, 오히려 도올의 그러한 창조적 작업들 자체는 한국교회를 향한 보다 생산적인 자극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신학현장과 교회현장의 괴리와 이원화 문제는 역사적 예수와 교리적 예수 간의 엄청난 불통만큼이나 심각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우선적으로 선취해야 할 관점은 우리 시대의 한국교회 현실의 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새롭고 건강한 변혁으로서의 관점인 것이다.

물론 신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솔직한 입장을 드러낼 경우 아마도 자신의 밥줄이 걸려 있어서 구체적인 커밍아웃까진 안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앙이란 건 자신의 신념에 기반되어 있어야 하잖은가. 만일 밥줄 때문에 결국은 위선과 기만의 비겁한 행보를 걷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신학을 하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야말로 신학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고질적인 한국교회 병폐 문제에도 기여하고 있음을 왜 모른단 말인가.

혹자는 나의 이러한 얘기에 대해 당신은 아예 교단을 배경으로 하지 않으니까 저런 말이나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나 내가 볼 때 보수적인 교단 시스템이 나로 하여금 죄짓게 한다면 차라리 이를 과감히 엑소더스하거나 짤라낼 수 있는 각오까지 하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런 나의 얘기가 황당하게 들린다면, 다음과 같은 주의 말씀은 어떠한가.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두 손이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나으니라..”(마가복음 9장 42-43절).
 
그렇다. 목을 메고 차라리 바다에 빠져버려라! 찍어 버려라! 자 이제 이 같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여러분들은 어쩔 텐가? 우물쭈물 곤란한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나 자신 역시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하고서도 목회 시스템 과정을 밟지 않은 이유는 당시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에까지도 불어닥친 보수화 바람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럼으로써 나는 여전히 지금까지조차 생활고의 불안을 겪게 되기도 했었지만 동시에 거침없는 자유로운 창조적 신학적 작업을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기도 해서 결코 후회스럽지가 않다.

돌이켜보면 그 옛날의 예수운동이 이단이었고 비주류였듯이, 새로운 진보 역사의 창조는 얼마든지 아웃사이더를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진보적이라는 기장교단까지도 예장을 나와서 기장을 세운 장공 김재준 목사의 정신을 잃어가는 점에 있어선 참으로 아쉬움이 클 따름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보다 더욱 근원적인 기독교 변혁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즉, 기독교 전체의 총체적이고도 근본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진실로 주를 믿는 자라면 먼저 확고한 결심부터 세웠으면 한다. 난 21세기에 새로운 기독교 혁명이 한국이라는 <지금 여기>now and here를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일어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여, 자각인들이여,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감내하자! 그러한 아픔 속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있지 않나니!

도올의 성서연구 열정만큼이라도 솔직하고 해방적인 성서읽기를 위하여

만일 한국의 신학자들이 자기가 속한 교단과 교세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신학자라고 할 경우, 그러한 기독교에선 거의 희망이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한국의 모든 신학자들이 죄다 이러한 직무 유기를 한다고는 볼 순 없겠고, 적어도 그같은 교단 신학에 복무하는 신학자들의 경우는 대체로 분명한 직무 유기를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한국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색조는 <성서무오설>에 입각된 보수적인 색깔이며, 교회현장에서의 성경공부라는 것도 너무나 처참할 지경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특히 기독교 성서의 초자연주의 문제에 대해선 진보적 신학자들일수록 더욱 구체적으로 솔직한 입장들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 현장이 안고 있는 <성서무오설>은 성서의 초자연주의적 내용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서 이해시키는 기반이 되고 있는 실정이라 진정한 성서읽기의 깊이에는 접근하지 못하는 치명적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이 있다. 그렇기에 본인은 <성서무오설>이야말로 사탄의 교리요 오히려 성경을 사탄의 바이블로 만들 뿐이라고 본 것이다( ‘성서는 오류와 같이 간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27 참조).

이러한 현실에서 내가 볼 때 한국교회의 새롭고 건강한 변혁을 염원한다면 도올은 함께 해야 할 우군이지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다. 물론 세부적인 각론에선 차이가 있을지언정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지향하는 해방의 큰 흐름에서는 함께 협력해야 할 분명한 동반자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도올의 연구 작업에서도 여전히 개선되고 보완할 사항들은 있을 걸로 본다. 이를 테면 도올의 글에서 자주 거론되듯이 자신에 대한 평가를 자기가 기술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전략적으로도 마이너스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어차피 저마다의 이해관계에서 도올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사람은 그렇게 평가할 것이고, 비판적인 사람은 도올을 자꾸만 부정적으로 씹어댈 것이며, 실상 도올에 대한 평가는 결국 후대의 몫일뿐이다. 그냥 그렇게 진행되는 흐름에 맡겨두다보면 자연스러운 피드백으로서 시대적 요청에 응답하면 될 것으로 본다. 동시에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바라는 점에 있어선 도올의 열정적인 성서 연구 작업들에 대한 인색한 평가를 내려서도 안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에게서 한국 기독교가 최소한의 상식만으로도 소통될 수 있으면 하는 그러한 건강한 기독교를 염원하는 그 신념의 열정과 진정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도올은 이미 우리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한국 신학자들의 더 엄중한 비판의 화살은 도올읽기를 통해서조차도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한국교회 현장의 처참한 현실 문제로 겨누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한국교회의 건강한 변혁을 위한 보다 솔직한 대화들이 더욱 생산적으로 형성되기를 앞으로도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라는 바이다. 
 
[도올-김경재-오강남 교수와의 대담 동영상 및 후기] "도마복음과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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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장 (112.187.196.38)
2010-05-19 15:50:17
정강길님
지난 6일 기사연에서 세미나하셨던 "통합적 약자해방신학"도 한번 올려주시지요
리플달기
4 9
Man (170.20.11.116)
2010-05-18 23:56:09
이성적 이해를 주장하는 시대의 흐름을 간파하지 못한 기독교 신학

유럽의 기독교가 죽어간 이유조차 제대로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신학계가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는 구호가 더 이상 좋은 믿음으로 간주되는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현시대의 조류를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규정하지만 인간에게 이성적 사고는 버릴 수 없는 본성입니다.

아무리 감성에 의해 가치관의 틀을 재구성하는 시대가 왔다고 해도 이성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가르침은 그 수명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성경의 내용은 오래전에 이미 사멸된 신학의 이론인 경우도 많고 때로는 신학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내용이 허다합니다.

신학에도 검증이 필요하기 마련인데 신학과 신앙을 적절히 교배시킨 변종이 교회에서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몇몇 신학자들은 지적을 하지만 목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적인 의무감에서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지만 그들의 귀는 교회에서 가르치려는 것에서 떠나 있는 상태입니다.

그 결과 비이성적이고 무속신앙에 가까운 가르침에 열정적인 자들이 교회의 중심에서 세를 키워 간것이기에 현재의 한국의 교회의 병폐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것을 돌이킬 가능성이 있느냐입니다.

저는 가능성이 없다고 봅니다.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세상과 짝을 하게 되었기에 수천년 동안 패역을 계속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 선지자를 보내었어도 그들은 결국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처럼 21세기의 한국의 교회는 유사한 상황을 맞이 하리라고 봅니다. 유럽은 이미 그 상황이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고 유럽의 기독교에 뿌리를 둔 미국의 교회도 이런 상황이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를 무분별하게 수입 가공한 한국의 기독교도 이런 역병이 그 조짐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학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원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원리를 가지고 인간이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종교를 세워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입니다.

신학이라는 것이 형성 되기 이전에 원시 기독교가 로마 카톨릭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과정을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그 당시 로마 제국을 지배하던 그리스 철학과 이방종교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채 로마 카톨릭 안에 조금씩 수용하던 것이 지금의 기독교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병은 있으나 그 원인을 모른채 죽어가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만일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과의 갈등이 정치적인 분쟁의 역사로 번지지 않고 화합과 균형을 이루어 간 역사가 펼쳐졌다면 로마가 중심이 된 로마 카톨릭은 동방교회와의 균형을 이루며 기독교가 전개되는 상황이 펼쳐졌을 것이고 따라서 지금의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동방 교회와의 논쟁의 촞점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로마 카톨릭이 어떤 방법으로 동방교회를 물리치고 적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는지를 자세히 보는 역사적 시각을 지녔다면 결국 문제는 현재의 신학이 아니라 그 신학의 태동기에 나타난 역사적 비극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역사적인 비틀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바로 세우지 못하였고 따라서 기독교는 변형된 가르침에 그 출발점을 지녔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무시해버린 결과가 이성적인 논리를 무조건적인 복종으로 얼버무리는 신앙을 강요하게 된 것을 보아야 합니다.

앞으로도 '그냥 믿어'식의 가르침이 교회에 계속 남아있게 된다면 성경 표현 그대로 쓸쓸한 성읍으로 한국의 기독교는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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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9
갈바람 (210.2.45.38)
2010-05-18 19:23:58
신학과 강대상의 괴리는 신도들을 기만하고 있는 제도 교회의 위선이고 기만에 속하는 일입니다.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 부활 승천 등 기독교에서 주장하고 있는 케리그마는 실증되지 않는 사항임에도 이를 역사인양 가르치는 교회의 현실은 참으로 실망 그 자체입니다.

도마복음서에는 인간 예수의 말씀만 있지 동정녀 탄생이나 기적 부활 또는 십자가 사건 등이 전혀 없는 것으로 담백한 권면의 말씀만 있습니다.
이제 신학자들이나 강대상의 목사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위선적인 성서의 가르침에서 과감히 나와야합니다.

이를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다면 신도들에게 가르치는 모든 권면의 말씀들은 위선의 행위에 해당됩니다. 자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면서 이를 가르치는 행위는 위선이지요.

종국적으론 이런 사실을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결국 기독교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기독교의 사양화는 불을 보는 듯 뻔한 사실입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유럽교회처럼 텅빈 교회의 모습을 보는 날도 멀지 않습니다.

그런 텅빈 교회의 모습을 보기전에 교회의 변혁과 개혁이 이루어 져야합니다. 새로운 신론과 다수의 사람들이 이성으로 받아드릴 수 있는 교리로 탈바꿈을 해야합니다.

기자님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며 건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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