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 날을 맞으며



지난해부터 토종닭 몇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며칠 전, 모이를 주려고 닭장엘 갔더니 닭 한 마리가 다른 닭들에게 집중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공격을 받고 있던 닭은 지난해 봄, 21일간 열심히 알을 품어 병아리 12마리를 깨워낸 어미닭이었고, 공격을 하고 있던 닭들은 그 어미닭이 고이 키워낸 새끼들이었습니다.

등에는 이미 깊은 상처가 생겨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얼른 어미닭을 붙잡아 다른 곳으로 격리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어미닭은 죽었습니다. 그래서 은행나무 아래에 묻어주었습니다. 어미닭은 그곳에서 썩어 거름이 되어 은행나무에게 좋은 영양을 줄 것이고 나중에는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해주는데 일조할 것입니다.

어미닭을 묻으면서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미닭이 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얼마나 고생하였습니까? 21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놀지도 못하면서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품어서 병아리를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병아리들을 먹이는 일에, 보호하기 위해 정말 성실하고 용기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미닭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난 그 새끼들이 다 커서 힘이 생긴 후에는 이미 닭의 수명이 거의 다하여 힘이 없게 된 어미닭을 공격한 것입니다.



“내리사랑이지 치사랑(위로 사랑)은 없다”는 말을 합니다. 자기들을 키워준 어미닭을 공격하는 새끼 닭들을 보니까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본능에 의지하여 사는 동물의 세계에서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어미닭을 공격했던 새끼 닭들은 이미 늙어서 힘없는 어미닭을 자기들의 먹이만 축내는 존재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그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키워 준 어버이의 은혜를 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현상 때문에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동물들은 그저 본능에 충실하며 사는 존재들이라 ‘내리사랑’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라서 본능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성이 있고 영성이 있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사는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는, ‘내리사랑’ 뿐 아니라 ‘치사랑(위로 사랑)’도 하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이고 진정한 인간이라는 주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내리사랑’만 인정하려는 사람은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귀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음 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적 본능을 효율적으로 억제하고 조절할 줄 알아야 하고, 하나님과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 것으로 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사랑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을 크게 가질수록 좋은 사람 아닐까요?



화요일(4일)에는 고 김희도목사님 빈소에 들렸습니다.

나에게 세례를 주시고 신학대학 입학을 위한 추천서를 써주신 분이십니다. 체구가 크시고 음성이 괄괄하셔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분을 오해하시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의리 있으신 어른이십니다.

제가 신학대학을 간다고 했을 때, 고인은 당신이 졸업하신 대전신학대학(목원대학)을 보내고 싶어 하셨습니다. 저의 집안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아시는 고인은 “대전으로 가면 1년 동안 학비 면제되고, 공부 열심히 하면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 받고 공부할 수 있다”면서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그러나 내심 서울로 가고 싶어 하는 저의 마음을 아시는 고인께서 어느 날 저를 부르시더니 “그래. 이왕 신학교 가는 거, 서울로 가라. 사람이 크게 되려면 서울로 가야지.” 하시면서 추천서를 써주셨습니다. 당신이 졸업하신 학교의 후배로 만들고 싶은 생각, 그리고 집안형편의 어려움을 아시는 고인의 배려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철없는 어린 학생의 순진한 생각을 꺾지 않으시기 위해 감리교신학대학에 추천서를 써주신 목사님의 깊고 높은 사랑은 제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고서도 한참 지나서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학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몇 달 동안 당신의 생활비에서 저의 기숙사비를 마련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큰 은혜와 사랑을 입었으면서도 목사님을 잘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철이 너무 늦게 들어서였겠지요. 불과 수 년 전부터서야 한 교회에서 자라나 같이 감리교회 목사가 된 오명동목사와 함께 가끔 찾아뵙곤 하였습니다. 찾아뵐 때마다 “내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목사가 많이 배출된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할 뿐이야” 하시며 진심으로 기뻐하시고 반가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반공포로출신이시라 친척도 없으시고, 자녀도 따님 한 분만 두셔서 항상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좀 더 자주 찾아뵙고 잘 모셨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찾아뵐 수도 없고, 주신 사랑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나를 위해 몸 바쳐 희생하신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지금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그 사랑에 조그마한 보답이라도 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아 그저 죄스럽습니다.

어머니는 요즘도 “박목사, 욕심내지 말고 그저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이가 벌써 오십대 중반이나 된 아들에게 어머니는 오늘도 그러한 말씀으로 염려하고 사랑해 주십니다. 어머니 말씀대로 내가 담임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열심 내려고 노력합니다. 매년 연세 많으신 노인들 20여명을 모시고 ‘좋은 곳’으로 관광여행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어머니와는 아직 그런 여행 흉내조차 한 번 내보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내리사랑만 있지 치사랑은 없는 법이다!” 아, 이 말이 꼭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습니다.

짐승이 아니고 사람일진대, 윗사람을 공경하고 기쁘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되는 안타까움......

매년 어버이날을 맞을 때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자괴감이 찾아들곤 합니다.

▲ 박인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