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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와 집착 버린 아름다운 농부한평생 이웃사랑, 생명사랑의 평화공동체 일군 원경선님
류기석  |  yoogiseo@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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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3월 30일 (화) 09:38:43
최종편집 : 2010년 03월 30일 (화) 12:05:07 [조회수 : 2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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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생명농부의 원조 원경선(97세), 그 분을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의 김중권님 댁에서 만났다. 첫 느낌은 그 연세에 비해 아직도 정정함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귀가 잘 들리지가 않아 불편한 점은 있지만 사리판단은 분명했다.

   
▲ 포천에서 만난 원경선 선생님

필자와 원경선님과의 첫 만남은 1997년 겨울로 기억된다. 날로 각박해지는 도시생활 속에서 대자연과 어우러진, 또 거기에 순응하는 농촌과 농업 그리고 농민의 순박함과 마주하고자 귀농이라는 화두를 꺼내들었다. 귀농은 하루를 살아도 사라져가는 농촌의 풍광, 그리고 그 배경이 되는 자연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느끼면서 이웃과 정직하게 살아갈 요량으로 귀농학교도 다니고, 농사와 집에 대한 공부도 하고 각종 모임에도 열심히 찾아다닐 때였다.

정직하게 농사를 짓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인 '정농회'가 경기도 양주에 있는 풀무원공동체에서 열린다는 안내를 받고 경기도 파주에서 아내와 함께 정농회에 참석, 강마른 체구였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원경선님을 그 때 처음 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여러번 마주 대했던 기억이 있지만 직접 대화를 나누어 본 일은 없었다. 그런데 2010년의 시작된 1월과 2월 연속해서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중리에 살고 계신 김중권, 원혜덕님 댁을 방문했을 때 원경선 선생님을 만나고 귀한 경험들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포천의 김중권·원혜덕님 가정은 사랑방교회에서 함께 성서모임을 하면서 교회안의 작은 교회로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교제를 나누는 식구다. 사랑방성서모임은 매주 한번씩 정한 요일에 모임을 갖는데 이 모임의 특징은 서로 오손도손 둘러앉아 저녁식사를 나눈 후 차를 나누면서 성도간의 교제와 한 주간의 성서일기, 말씀을 대하면서 깊은 성경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과 더불어 이웃사랑, 자연사랑, 하나님사랑을 경험하는 감동의 자리다.

   
▲ 사랑방교회에서 생활공동체로 삶을 나누는 식구들과 함께

오랜동안 정농회 부회장으로서 수고하신 김준권님이 최근 정농회 회장으로 일하시게 되었는데 그와 원경선님과의 만남은 사연이 깊다. 김준권님은 18세 되던 해 풀무원 연수생으로 3년간 일했는데 그때의 인연으로 원경선님의 따님 원혜덕님과 결혼하게 되어 사위가 됐다.

평소 괴산의 평화원 마을에 있다가 수시로 따님이 살고 있는 포천을 찾는 원경선님은 언제나 찾아오는 손님들을 반기시고, 말씀하기를 좋아하신다. 그날도 '풀무원공동체에 이어 괴산 평화원 마을'을 일구시고 '소유와 집착 버린 아름다운 농부'로 살아오신 체험을 들을 수 있었다. 말씀의 시작은 이사야서 55장 8절로 운을 떼셨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원경선님은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번동리 황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기에 가족들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늘 굶주림 속에서 시달렸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세상 사람이 인정하는 술고래였기에 집안엔 편할 날이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선조들의 손바닥만한 땅뙈기마저 빼앗기고 반거지 신세로 황해도로 이사한다.

그의 나이 11세 되던 해였다. 아버지는 당시 소 두 마리 값인 40원의 빚을 고스란히 가족에게 안기고는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래도 그의 삶을 지탱하여준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고 했다.

그때 아이들에 이끌리어 교회당 종소리를 들으며 생애 첫 예배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하나님, 아버지, 주님, 예수라는 소리를 듣는 순간 모두 미쳤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술 먹고 가산을 몽땅 탕진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의 대상과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대상의 '아버지' 를 체험하면서 그것이 이끌림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그 말씀을 마치고 당시를 회상하는 듯 “내 뜻대로 된 것은 없고, 오직 하나님 뜻대로 된 것 같다.”는 말을 이었다.

또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제나 이끌어주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다르다.”는 말씀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길을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 보시고 미리 예비해 주신 것 같다고 회고했다.

   
▲ 원경선 선생님과 함께 한 (좌측 위 세번째) 김중권님, (좌측 위 두번째) 원혜덕님

어렵게 초등학교를 마친 그가 서울로 올라와 목장 일과 함께 신학교 준비를 했다. 우유배달 등의 일을 하면서도 새벽2시부터는 YMCA 야간 영어공부를 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종로 길을 가다가 깜박 졸았는데 자신이 차량 밑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발견, 죽음에 대한 공포가 느껴져 즉시 3개월째 배운 영어공부는 포기했다.

또한 그의 연애시절은 요즘 미혼남녀들의 '연애 따로, 결혼 따로'와는 왁연한 차이가 있었다. 우유배달 할 때 따뜻하게 격려해 주고, 맞아준 이는 바로 배화여전 일본어과를 나온 아리따운 여대생 지명희님이었다. 같은 교회에 다녔던 지명희님과 그의 가족들은 초등학교를 나온 원경선님의 성실함에 일찌감치 사위감으로 점찍어 놓았던 모양이다.

사실 필자는 학벌과 신분, 재력, 직업에 상관없이 참사람임을 들여다볼 줄 알았던 깨어 있는 여성으로서의 탁월함과 부드럽고 담담하게 남자를 끌어안으신 지명희님께 존경을 표한다. 더욱이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유기농법의 실천과 소유하지 않는 대신 나눔을 추구하신 원경선님 뒤에는 지명희님이 있어서이다. 언제나 나서지 않으시고 풀처럼 나무처럼 싱그럽게 살다가 작년 2월 92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우리사회의 위대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부인 김영희님을 여의시고 많이 슬퍼했다는 원경선님은 결혼 전 당시 최고 인기업종인 사진사로 돈벌이를 했다고 한다. 그가 사진사를 택한 것은 빨리 돈을 벌어 마음이 아름다운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릉리 백골사건’이라는 자신이 죽을 뻔한 끔찍한 사건을 경험하고는 한국을 떠나기로 작정하고는 작고한 부인 지명희님과 우선 결혼한다. 그리고 곧장 중국 북경으로 건너가 일본인을 상대로 한 통역 서비스도하고, ‘인서사’라는 인쇄업을 시작했다. 인쇄업은 타이피스트로 한자는 물론 일본어에까지 능통한 부인 지명희님의 도움을 톡톡히 보았다. 부인이 타이프를 치면 원경선님은 등사하는 그런 단순한 인쇄업이었지만 실력과 성실함으로 인쇄소는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한다.

그 당시 독립운동을 하시던 김구 선생님의 비서가 찾아와 건국간부훈련 반을 제의했는데 거절하셨다는 귀띔도 해주었다. 이후 6.25전쟁을 맞아 혼자 독학으로 공부한 영어실력으로 영국군 통역을 자원했는데 그때 기억에 남는 것이 “영국군은 미군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미군이 머문 자리의 쓰레기를 뒤진다?” 라는 웃지못할 경험을 했다고 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미군 토목청부업도 시작했는데, 여러 명이 탄 트럭에 큰 사고가 터졌으나 사상자가 없어 하나님께 회계의 기도를 드리면서 정의롭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은 과감히 버리기로 결심하고는 즉시 농부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때가 1949년,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도 부천으로 내려와 풀무원 농장을 처음으로 연 것이다. 이후 원경선님은 하나님의 충실한 일꾼, 오직 농부로만 살아오며 마을 공동체사업을 주도한다.

1953년 맨손으로 모은 돈을 가지고 부천시 소사동에 1만평의 농장을 마련, 열심히 농사지으며 젊은이들과 스스로 자립하는 생활을 했다. 당시 인근 김포공항에 미군부대가 주둔했는데 이곳 목사(군목)와 인연이 되어 기숙하는 고아들, 이른바 하우스보이를 데려와 한 식구가 된 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 때 ‘풀무원’이라는 말이 처음 생긴 것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삶의 터를 제공한 것이 풀무원공동체의 발단이 된 것이다.

대장간에서 쇠를 달궈 각종 연장을 만들 때 풀무질이 필요하듯,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불러 모아 새로운 인격체로 만들기 위해 풀무질을 시작한 것으로 원경선님이 살아온 긴 여정 속에서 실패와 성공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구체화 된 것이 풀무공동체다.

이곳에서 '날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농사를 짓는 농사꾼 전도사'로서 생명을 살리는 '바른 농사'를 실천했다. 원경선님에게 유기농이라는 개념은 일본의 ‘애농회’라는 단체의 영향이 컸다. 당시 정부는 생산량을 늘려가며 화학비료와 농약사용을 독려하던 시기였는데 이러한 방식이 되레 땅을 죽이는 ‘독약’이라는 내용에 그는 말 못할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얼마 후 미국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찾아 ‘애농회’를 이끌던 ‘고다니 준이치’를 만난 것이 새로운 삶의 전기를 마련했다.

그로부터 살아있는 생명들을 지키려면 유기농 밖에 없다는 확신을 깨닫고 필생의 과업인 유기농에 매달렸다. 이 때 ‘정농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졌고, 3년간의 고투 끝에 유기농을 성공시켰던 원경선님은 아들을 시켜 서울 압구정동에 가게를 낸 것이 지금 풀무원식품의 효시라고 한다. 부천의 풀무공동체는 1975년까지 계속됐다.

   
▲ 우리 막걸리와 소박한 밥상을 대하신 원경선 선생님

정농회 공동체 텃밭이 1976년 경기도 양주로 옮겨진 후 우리나라 유기농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로부터 부천 풀무원에서 양주 한삶회로 이어지고 또다시 괴산 청천의 ‘평화원’으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몇 년 전 만들어진 평화원공동체는 1년 중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왔고 나가고 싶으면 나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사람들이 거쳐 갔지만 그중엔 며칠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사례도 비일비재하다는 것으로 단순히 낭만으로만 생각했거나, 그냥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함으로 들어 왔다가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의무로서의 노동으로 하루의 반은 쉬고 나머지 반은 노동 즉 일하는 것이다. 일을 안 하면 먹지도 말라는 것이고, 일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환영한다는 것이다. 공동의 노동을 통해 공동의 생산물을 만들어 내고 이중 꼭 필요한 만큼만 소비한 후 나머지는 나눠주는 삶이다. 당연히 그가 운영하는 마을 공동체는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원경선님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한이 하나 남아 있는데 그것은 신학교를 가고 싶었지만 못 들어간 것이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의 한계(?) 때문에 지금까지 전도사로서만 신심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감신대 특강을 계기로 한을 풀었다고 여러 번 말씀했다. 신학교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성경을 해석하게 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기 위해 신학의 길은 열어주시기 않은 것 같다."고 한 것이다.

한 평생 살아오면서 만난 이들 중 함석헌님은 YMCA 강의와 잡지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천안농장을 방문, 포도농사를 잘못 짓고 계신 함석헌님에게 농사를 제대로 지으려면 전문가에게 배워야 한다고 충고도 해줬다고 한다. 이외에 김교신님, 유영모님 등이 여의도에서 의기투합, 여의도공화국을 만들었다(?)는 후문도 전해주었다.

원경선님은 지금까지 큰 상 4개를 받았는데, 1992년 녹색인상과 1995년 UN글로벌 500상 그리고 199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09년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창립 20주년기념 공로패 등이다. 특히 글로벌 500상은 유기농 생명사업에 평생을 바쳐 온 원경선님에게 의미가 크다. 지구 살리기와 환경보호에 앞장 선 사람과 단체에 주는 글로벌 500 상은 환경 분야의 노벨상으로 통한다.

아름다운 농부 원경선님은 ‘나눔과 비움’의 신념을 간직하고 살면서 시험에 걸릴 때 마다 어김없이 ‘소유나 집착의 허망함’을 버린 즉, ‘소유’ 대신 ‘나눔’의 무소유 평화공동체를 추구하면서 이웃사랑, 생명사랑에 대한 역사를 이끌어 오신 분으로 우리들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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