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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는 축복(祝福)종교입니다
박경은  |  0117669763@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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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2월 16일 (화) 16:03:29
최종편집 : 2010년 02월 16일 (화) 21:34:41 [조회수 : 2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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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14:14~20; 히7:1~7


   

‘축복(祝福,bless)’이란 말이 무슨 말일까요? 한자어로 보면 축복이란 ‘복을 빈다’는 뜻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주시기를 기도한다는 의미의 말씀이지요. 그러나 축복이란 말은 하나님을 향해 복을 요청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가 잘 되기를 바라서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 수 있는 말씀이 창14:19b와 히7:1b,6b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복을 받으라’는 말은 정상적이지만 ‘축복을 받으라’는 말은 어법을 부수는 잘못된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축’이라는 말이 ‘빈다’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축복 받으라’고 한다면 ‘복을 빈다를 받으라’가 되어 의미가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복을 받기를 기원하면서 축복하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지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바로 이렇게 서로를 축복하는 모습으로 나타나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는 일에 한 마음 한 뜻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세 가지 주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1.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때 “축복은 준비된 사람을 상대한다”는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넉넉히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커다란 복을 빈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사과나무 아래 입 벌리고 누워서 자기 입 안으로 사과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복을 빈 것과 같은 축복이 아무런 효과가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복을 빌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평소에 318명의 사람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야간 기습 작전에 투입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아브라함의 재산과 가족을 지키는 임무를 맡은 사병과 같은 인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시겠지...’ 라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핑계삼아 인간적으로 자신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지 않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면 이런 비상시에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것은 마치 비가 올 날을 대비하여 우산을 준비해 놓은 것과 같은 지혜로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인력만 준비시켜 놓았던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실전 연습도 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조카 롯이 포로로 사로잡혀 가 있는 상태인데다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가축들마저 모조리 빼앗긴 상황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우호적으로 지내고 있던 이들의 상황도 매우 비슷한 상황이었으므로 일을 어설프게 처리한다거나 잘못 처리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작전을 신속히 진행했고 상황은 쉽게 종료되었습니다. 이런 일이 평소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될 일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날마다 영광 돌리는 일에 소홀함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평소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318을 투입하여 야간 기습 작전을 벌이므로 어렵지 않게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사사 기드온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합니다. 기드온도 300명의 숫자로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숫자가 많고 당시로서는 강력한 최신 화력에 해당하는 낙타부대를 갖고 있었던 미디안 족들을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기드온이 상대했던 적군의 병력이 어떠했는지를 보면 이렇습니다.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많은 수와 같고 그들의 낙타의 수가 많아 해변의 모래가 많음 같은지라 (삿7:12)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이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에는 작전수행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습니다(삿7장 참조). 처음에 기드온을 중심으로 의기투합했던 백성들의 수가 이만이천 명이었습니다(삿7:2). 하지만 그 수는 하나님의 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교만의 수에 해당하는 수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떠들어댈 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병력의 수로 전쟁을 하려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수를 줄이기 원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만 명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그 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수의 많고 적음을 근거로 승부를 결정짓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백성들의 수를 한 번 더 조정했습니다. 그랬더니 처음에 이만 이천 명이던 수가 대폭 줄어들어 겨우 300명 남았습니다. 그 때 기드온은 자기 나름대로 ‘전쟁 수행 불가능 판정’을 내렸던 것 같습니다(삿7:10).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그의 마음을 아시고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300의 수로 승리하게 될 것임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도록 조치하셨습니다(삿7:15). 마침내 준비된 병력 300의 정예요원들을 중심으로 야간기습 작전을 통해 엄청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에서는 그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복,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창25:32b, 34b).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를 근거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면서 주의를 주고 있습니다. 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은 장자로서의 구실과 역할에 별 관심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장자로서의 복을 감당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장자의 명분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고 말았다는 것이 창세기를 통해 나타나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곧 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7절)” 아무리 아버지가 장남 중심으로 인생을 운영하려고 한다고 할지라도 본인 자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 뜻인 것이지요.

이러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축복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지를 잘 알아 준비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축복은 준비된 사람을 상대한다는 교훈을 보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축복하는 것이 얼마나 소용없는 무익한 일인지를 성경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27:14를 찾아서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

어떻습니까? 실감나지요? 따라서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고 축복하는 것은 새벽에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받아야 할 분명한 교훈은 이렇습니다.

준비하십시오.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준비십시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에게 복주시며 준비된 사람을 통해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준비하십시오. 축복은 준비된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올 한 해 지금까지 준비해 오신 것에 대한 복을 받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또 다른 복을 향한 준비를 갖추어나가는 참으로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의 모습을 볼 때 “축복은 자기 자신을 더욱 복되게 한다”는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318명을 투입하여 상대를 물리치고 돌아올 때 아브라함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접은 단순히 그를 마중 나간 것 정도였습니다(창14:17). 그러나 살렘 왕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위하여 떡과 포도주를 갖고 마중했습니다. 물론, 상징성이 더 강한 음식이었겠지만 소돔 왕과 멜기세덱을 비교해 볼 때 차이나는 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향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마중한 그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진정으로 복을 빌었습니다. 19절~20a는 아브라함이 복을 받기를 바라서 그에게 복 받기를 원하는 축복의 말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되길 바라 하나님께 기원하였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그에게 그의 노획물들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습니다(14:20b)!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 여기에 큰 비밀이 들어 있음을 보게 되길 바랍니다.

비밀 첫 번째는 창12:3대로 된다는 원리입니다.

창12:3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멜기세덱이 바로 이 말씀의 적용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줍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므로 그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또 다른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복되게 하는 축복의 말을 듣고 노획한 노획물 중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명쾌하게 지적합니다. 단순하게 보아도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사이에 있었던 “주고받음”의 고리를 볼 수 있습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 반응하여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 주었습니다.

하지만, 창12:3의 말씀이 있었던 것을 바탕에 두고 볼 때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사이에 있었던 “축복과 십분의 일의 주고받음”은 단순한 일회성 선물교환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이 주고받음의 관계를 반대로 기술해 놓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창세기와는 달리 아브라함이 먼저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받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히7:6b).

이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창세기의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차이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주인공 삼아서 본문을 기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이와는 달리 ‘축복하는 사람의 고귀함’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히브리서 저자는 7:7과 같이 말씀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 약속을 받은 사람보다는 그 사람을 위하여 축복하는 사람이 더 고귀한 사람, 더 복있는 사람, 더 높은 사람이라는 신앙적 견해가 담긴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멜기세덱의 모습을 볼 때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더 복받는 사람으로 만드는 사람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들은 이 원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로마서 12:14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누가복음 6: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신약성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축복하는 사람은 그 축복으로 자기를 더욱 복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올 한 해 우리 믿음 안에서 서로 한 식구 되었으니 우리를 한 가족 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안에서 서로 복받기를 위하여 기도하며 축복하는 사랑의 공동체, 은혜의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비밀,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높여 주신다는 원리입니다.

잠시 전에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창세기는 아브라함을 주인공으로 하여 기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을 놓고 볼 때 창세기의 시각에서 본다면 아브라함이 더 역할이 크고 아브라함의 무게가 더 무거운 것으로 그림이 그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는 창14:18의 구절을 볼 때 아브라함과 멜기세덱 중 누가 더 높은 사람으로 생각되도록 기술되고 있습니까?

얼핏보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은 제사장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렇다는 뜻이므로 멜기세덱과는 관계없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창세기에 의하면 멜기세덱보다 아브라함이 더 높은 사람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신약성경의 히브리서 저자에 의하면 천만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일반적이고 통상적인 경우를 볼 때 높은 사람, 윗사람이 낮은 사람, 아랫사람에게 복받으라고 축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애가 할아버지에게 복받으시라고 인사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축복은 이삭이 세상을 떠날 때 야곱에게 했던 것처럼, 야곱이 세상을 떠날 때 그의 아들들에게 했던 것처럼 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으로서의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은 단지 전쟁 영웅 아브라함에게 인사치레 정도의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복받기를 원하여 윗사람이 아랫사람 잘 되기를 하나님께 기원한 것이므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7:7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개역한글)” 또는 “두말 할 것 없이 축복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서 받는 법입니다(표준새번역)” 공동번역도 이에 대해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다시 말할 것 없이 축복이란 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분명한 비밀 두 번째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제 아무리 높은 위치에 올라 앉아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높은 자를 땅으로 메치시며 바닥에 쳐져 있던 낮은 자를 높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아브라함의 힘이 주변 왕들보다 강했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주변 왕들이 아브라함을 마중 나올 정도로 막강했던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주변의 왕들보다 아브라함이 더 높임 받는 위치에 있던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진정으로 높은 사람은 바로 그 아브라함을 축복했던 멜기세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축복,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잘 되길 바라 진정으로 축복하는 사람은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더욱 복받게 한다는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서로 축복하는 한 해 보내시길 바랍니다. 서로 잘 되길 기도하면서, 서로 잘 되길 소망하면서, 서로 잘 되길 축복하면서 그렇게 사랑의 공동체를 이뤄가는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게 되길 바랍니다. 그럴 때 그로 인해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더욱 복받게 하는 놀라운 기적이 허락될 겁니다.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3. 멜기세덱의 경우를 볼 때 축복은 “새로운 계보를 시작하는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볼 수 있습니다.

창14장은 멜기세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살렘 왕’이라고만 나타납니다(14:18a).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멜기세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세히 묘사합니다.

먼저 히브리서는 7:1에서 창세기에 나타나는 대로 그를 ‘살렘 왕’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소개를 그대로 가져온 겁니다. 그런데 그 다음 2절 끝부분을 보면 창세기에는 없는 해석이 달려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살렘’이란 지역명은 곧 ‘평강’을 뜻하는 말임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살렘 왕’이란 말은 ‘평강의 왕’이라는 뜻이라고 낱말을 풀이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왜 ‘살렘 왕’이라는 고대 가나안 지역의 조그만 부족장에 해당했던 그를 이렇게 지역명을 풀이하면서 자세히 묘사하는 것일까요?

다음으로 히브리서 7:3a를 보세요.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멜기세덱은 고아였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그가 지금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 ‘평강의 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겁니다. 천하의 고아가 왕으로 등극했음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평강’이 강조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7:3b를 보세요. 그는 단순한 인간존재가 아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히브리서 기자가 그를 이런 식으로 나타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 답을 한다면 그것은 뜻밖에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것은 멜기세덱을 통해 새로운 계보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멜기세덱은 다른 사람이 잘 되기를 진심으로 축복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마치 인류를 위해 자신을 드리신 주님의 성품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평강의 왕이신 주님과 동격으로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그는 가나안의 살렘이라는 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몰랐던 창세기 기자는 멜기세덱에 대해서 그저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게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 잘되기를 바라는 그의 축복의 성격은 ‘평강의 왕’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구약의 증인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하셨던 성자 하나님과 동격으로 묘사되어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기술되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가 소개하는 멜기세덱을 통해서 다른 사람 잘 되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새로운 계보를 시작하는 복을 받는다”는 진리를 분명히 봅니다.

한편, 구약에도 나타나는 대로 살렘 왕 멜기세덱은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영적인 계보를 이루어갑니다. 살렘은 다른 말로 예루살렘입니다. 이 예루살렘을 다윗이 정복하였고 왕좌에 앉았을 때 거기서 종종 제사장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그가 법궤를 옮길 때 에봇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는 것은 바로 다윗이 왕으로서 제사장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음을 보여줍니다(삼하6:14).

그리고 다윗의 뒤를 이은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가가 멜기세덱의 왕권과 제사장권을 이어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왕상8:14에 나타나는 대로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 때에 이스라엘 온 회중을 축복하고 하나님 존전에서 두 팔을 높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것은 바로 제사장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정교분리가 현대처럼 완벽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제정일치 시대의 제왕 통치 때에 다윗과 솔로몬이 멜기세덱의 왕권과 제사장권을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은 별로 무리가 없는 자연스런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히7:3에 나오는 대로 선천적으로 고아였던 멜기세덱에게 왕권과 제사장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계보를 다윗과 솔로몬에게 이어지도록 하셨음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이에 더하여 멜기세덱과 다윗, 솔로몬으로 이어진 계보가 어떻게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주님은 제사장 직을 가통으로 이어받는 레위지파 자손이 아닙니다. 주님은 분명히 유다지파 자손임이 확실합니다(히7:14). 그리고 모세도 또한 유다 지파에게 제사장직에 관한 한 어떤 언급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의하면 주님이 대제사장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의 조항에 따라 된 것이 아니요 생명을 사랑하시는 불멸의 능력으로 된 일이기 때문입니다(히7:16). 생명을 사랑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에 의해 된 일이란 뜻이지요. 따라서 멜기세덱도, 예수님도 제사장의 가문에서 출생하지 않은 채 제사장이 된 것은 율법과 규정에 의한 직책계승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무궁하신 은총과 사랑에 의해 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제사장 가문이 아닌 유다지파에서 출생하셨음에도 대제사장인 이유는 멜기세덱의 계보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복주심 안에서 된 일이란 뜻이 되는 겁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멜기세덱을 통해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축복하는 사람은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가는 사람이 된다”는 진리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명 구원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계보를 이루어 간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무한 사랑 안에서 인간적으로 이어온 족보보다 더 귀한 계보를 새로 만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축복하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가르치는 겁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사람은 놀라운 복의 사람이 된다는 진리를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서로 축복합시다. 우리 서로 잘 되기를 바라 하나님의 복을 서로에게 빌어 주십시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인생 계보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정리해 볼까요?

그리스도교는 축복(祝福,bless)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주 안에서 축복하는 삶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백 번 축복해 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준비된 사람만을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축복은 자기 자신을 더욱 복되게 만드는 원리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축복할 상황에서만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상대방을 축복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축복은 축복하는 바로 그 사람을 더욱 복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축복은 새로운 계보를 시작해 가는 원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조상 자랑하지 말고, 또는 조상 탓하지 말고 새로운 계보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다 조치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들의 지금의 형편과 상관없이 새로운 복의 계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또 한 번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주 안에서 서로 축복하면서 서로 은혜받는 일에 열심을 내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복된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무한 은총을 베푸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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