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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2)힘 센 하나님에 대한 숭배,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로서의 기독교는 이제 사라져야!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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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년 02월 08일 (월) 14:39:56
최종편집 : 2010년 02월 08일 (월) 16:46:36 [조회수 : 3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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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냐구요? 최고의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전능한 존재가 어디있겠어요.
전쟁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경우 승리가 보장된다고 말해왔습니다."  - 한스 큉(신학자)

힘의 하나님 : 전제 군주왕 모델로서의 제국주의적 하나님

   
기존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에는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와 찬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의 과잉>이라는 용어를 좀더 쉽게 이해하고자한다면 <폭력>이라고 봐도 좋다. 오늘날 폭력이란 개념에는 물리적 폭력만을 일컫지 않는다. 사회구조 혹은 국가폭력 같은 체제 시스템의 과잉한 힘으로부터 받는 폭력도 분명한 폭력에 해당한다. <폭력>이란 개념에는 힘의 과잉 집중 혹은 힘의 넘침 및 힘의 불균형성을 전제하고 있는 개념인데, 관계적 사태에서 볼 경우 그러한 힘의 과잉(넘침)은 또 다른 한 편에서 볼 경우 힘의 결핍이라는 약자를 낳게 한다. 내가 기존 기독교를 유달리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 이면에는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화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선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한국기독교연구소) 참조). 그것은 곧 힘에 대한 숭배인 것이다.

나 자신의 이런 주장에 대해 혹자는 순진하게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우리가 언제 폭력의 신을 섬겼다는 얘기냐? 기독교인들도 알고 보면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본인의 기독교 짠밥 정도도 설마 그런 점까지도 모르고서 얘길 꺼냈겠냐만, 나로선 좀더 시야를 세계사적으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역사적으로 서구 기독교가 자행해왔던 폭력의 역사는 너무나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것은 예수사건 이후 교리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종교 논쟁과 폭력의 싸움들은 자행되었으며(리처드 루벤슈타인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을까>(한국기독교연구소) 참조),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폭력적이었고,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여지없이 폭력적이었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은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라진 종교분파 사건(세간에선 ‘종교개혁’이라 불리지만 개혁이 못되었다고 봄, 본인의 "그것은 과연 종교개혁이었나?" 참조) 사건 중에도 엄청난 생명들이 죽었으며, 그 이후에도 기독교가 자행했었던 폭력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왔었다. 신대륙 원주민들과 인디언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기독교인들은 부지기수였다. 살해한 생명의 수가 1억 명 정도라면 엄청난 재앙이 아닌가. 기독교인들은 흑인 노예에 대한 폭력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도 했었다. 서구 제국주의 땅따먹기 경쟁에는 언제나 기독교의 복음전파도 함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20세기에도 여전히 기독교도들은 유대인 학살 방조, 흑백차별, 남녀차별의 죄과가 끊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우리는 신실한 기독교인 부시 행정부 시절의 이라크 침공을 기억하고 있다. 부시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힘센 분이니까! 알고 보면 그 하나님의 실체가 바로 강력하고 전능한 힘 곧 폭력이라는 종교였던 것이다.

아, 그것은 신을 잘못 믿는 인간들의 잘못이지 기독교의 신 개념 자체가 폭력적이라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리석은 인간의 잘못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자행해왔던 폭력사는 거의 대부분이 신의 이름으로 살인과 전쟁이 저질러졌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조찬선, <기독교죄악사>(평단문화사) 참조, KBS다큐 <신의 나라 인간의 나라> 3부작 참조). 신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표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인양 심판을 빌미로 해서 다른 생명들에게 폭력을 자행해왔던 것이다.

혹자는 그러한 사건들은 세계사적인 매우 큰 사건들이 그러했을 뿐이고, 우리네 기독교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결코 그렇지 않다. 기존 기독교가 자행하는 폭력은 이미 우리 삶의 일상에서도 여지없이 발견되고 있다. 확성기로 고래고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떠들어대는 열혈 교인들, 동네 장승과 불상을 우상숭배라며 베어버리는 열혈 신자들,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억지 부리는 기독교인들 등등 이런 자들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접하는 기독교 폭력의 일상들이다. 사실 알고보면 기독교 구원독점주의를 표방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 자체가 기독교 아닌 것들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서 심각한 폭력을 낳고 있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권함으로써 사실상 제 스스로 하나님을 파시스트적인 군주로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적 결정 자체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심지어 신조차도 침해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태들이 비단 신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테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기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신 관념 역시 부지불식 간에 관여되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전능한 신 개념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물론 이론적으로는 정확히 반합리적이다). 그러한 반합리적 신앙의 신념이 삶의 행태로 드러날 경우 폭력적 행태를 띨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전제 군주왕으로서의 하나님 이해는 그 자신이 마치 신의 대리자인 양 현실에 드러날 때에는 세계 안에 왕노릇 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왕노릇이 또다시 군주 모델로서의 하나님 신앙을 지속하게끔 함으로써 끊지 못하는 끔찍한 악순환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교회의 대형화와 황제식 권력 구조를 지향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계 현실은 전능왕 신앙의 충실한 반영일 뿐이다. 하나님이 힘이 세면 셀수록 힘센 하나님을 믿는 나의 힘도 계속 커지고 확장될 수 있는 기복신앙으로도 이끌고 있다. 믿고 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이뤄주시리라! 자본주의적 성공 신화 및 맘몬주의 신앙도 역시 알고 보면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에 다름 아니다.

과정신학자 그리핀은 "Global Imperialism and Reconstructive Postmodernism"에서 말하길, 미국의 패권 외교를 사례로 하여 그 밑변에는 힘의 하나님이라는 제국주의적 신관이 깔려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모든 사물을 통제하는 힘으로 이해되는 전능성은 신을 규정하는 특성이 되어 버렸고, 이것은 서구 사회가 근대 이후에도 글로벌 제국주의를 지향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우리는 “전능왕 오소서~”가 아니라 “전능왕 저리 가소서~”를 외쳐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전능왕 하나님은 이제 제발 좀 찌그러졌으면 좋겠다.

위계적 이원론, '힘의 과잉'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해주고 있는 진리 담론

힘의 하나님을 표방하는 신앙은 당연히 힘의 복음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힘의 복음이 보다 세계만방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결국은 진리 담론에도 기대려는 보편화의 작업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결국 ‘힘의 과잉’을 정당화하는 철학 사상을 끌여들였고 이를 기독교 조직신학의 바탕으로서 깔았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위계적 이원론>hierarchical dualism 이었던 것이다(<위계적 이원론>에 관한 글 참조). <위계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존재를 성찰할 때 어느 한 쪽이 본질적 핵심적이라면, 다른 한 쪽은 종속적 파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위계적이라고 간파했던 자들은 특히 여성신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서구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해왔던 진리 담론으로서의 이 철학적 이원론의 몹쓸 행태를 무던히도 고발했었다. 왜냐하면 특히 여성의 경우는 약자들 중의 약자로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심각한 피해자들이었고 고통 받는 경험을 한 우선적 민중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윗대가리들은 거의가 하나같이 남정네들의 독점 구조로 이뤄져 있는 실정이다. 구성원으로 따지면 여성들이 훨씬 많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이러한 남정네들의 강단 독점 구조가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첫 장본인이자 피를 흘리는 여성은 불경스럽고 불결한 존재로서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종교라고 보는 것 역시 이미 다른 종교들에 대해 폭력적인 작태일 뿐이다. 알고 보면 <배타성>이라는 것은 폭력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기만 인정하겠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배타적 구원론 입장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기독교적 정체성 및 선교가 가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거의 드물다. 많은 교인들은 배타적 구원론에 세뇌되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사유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 같은 폭력적 사유는 다른 이웃종교인들이 보기에도 매우 혐오스러울 정도다.

기독교는 또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연과학 진영에 대해서도 매우 폭력적이었다. 수많은 종교재판은 수많은 과학자들을 심판하고 처벌했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 양상은 현대라는 20세기와 21세기 오늘날에 들어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창조론(with지적설계) 대 진화론의 대결 양상이 그것이다. 사실상 생물학의 진화론 자체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말해주고 있진 않지만, 기존의 성서 창조이야기를 협공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치 진화론 자체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유신론자도 여지없이 많다.

오늘날의 진화론이라는 학설은 생물학이라는 한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런 협애한 성격의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천문학, 지질학, 화학 등등 우주 형성과 지구 탄생을 연구하는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들의 성과들과도 맞물려 있다. 따라서 오늘날 진화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생물학 진영 하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현대 과학 진영 전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오늘에까지 기독교인들의 폭력성은 과학 교과서에 어떻든지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집어넣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진화론을 밀어내려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교과서에 실리고 싶을 뿐이기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볼 때 동등하려고 보는 그 발상부터가 현대과학 진영의 기본적 룰을 어기는 폭력성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은 종교 분야와 다르게 과학 진영의 룰을 따라야 한다. 과학은 학문적 성격부터가 분명한 근거와 추론을 핵심으로서 지향하고 있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아무 검토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 색깔을 띠고 있는 창조론이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어쩌구하면서 택도 없는 지적설계론을 과학계에 디민다는 것은 정말이지 쪽팔리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 옛날 기독교가 천동설을 지지한 것만큼이나 쪽팔리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그 옛날 천동설이 권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 초라한 지동설의 등장은 너무나 허약해보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오늘날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옛날의 천동설을 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현대의 진화론을 폄하하는 작태는 지금도 웃음거리지만 사실상 날이 갈수록 더욱 확실한 쪽팔리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결국은 우리 모두가 쪽팔리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 머잖아 진화론은 그 옛날 지동설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과학상식으로서 자리매김 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찰스 다윈의 한(恨)은 그때쯤이나 풀리려나.. 내가 볼 때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론상의 반합리성이 실천상의 폭력성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인류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과학자들도 예전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을 때보다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놀랍게도 사탄의 실체는 기독교 밖에 있지 않다. 사탄이 곧 힘의 하나님이며, 적그리스도는 이미 기독교 신앙으로 신앙화 되어 있는 작금의 현실임을 제발 똑똑히 인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힘의 기독교, 폭력의 기독교여,  반합리적 기독교여, 이제는 가라! 언젠가 너네들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멸망할 때가 올 것이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말했었다. 너 이스라엘이여,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외침은 지금도 마찬가지의 패턴을 지니고 있다. 너 기독교여, 뒤바뀌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물론 이런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옥 불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비난자들에게 오히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기꺼이 냉소를 보내드리는 바이다. 그런 하나님은 없으니까 말이다! 신화가 과거에 있어선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 진 모르나 지금도 여전히 이를 문자적 사실로만 본다면 그건 현대인의 커다란 오해요 망상일 뿐이다. 그런 "신은 없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인생을 즐겨라!" 요기까지는 도킨스의 무신론 이론에도 일정 부분 지지하는 어느 새로운 유신론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다음부터는 현대의 무신론과 새로운 유신론과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될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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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바람 (210.2.40.208)
2010-02-09 09:07:29
기독교 신의 출현(신화) 자체가 제왕적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기독교 신의 출현(신화) 자체가 제왕적이며 콘스탄틴의 기독교 허용이 황제적 종교로의 진화를 묵인한 상태인데 이를 피해갈 방법이 없지요.바로 기독교 역사이고 전통인 힘의 과잉의 숭배인 셈이지요. 부족민의 신정(神政)통치를 위한 권위의 창출 행위로 보이는 모세의 종교와 중국의 천자 수권은 많이 닮아 있지요. 항상 산(山)을 배경으로 하며 산신령의(엘 사다이)종교가 맞나 봅니다.종교 폐해에 대하여 몇 말씀 드리자면 교회지상주의, 기독교의 분열, 선교의 폐해, 건물지상주의(힘의 숭배), 예수천국 불신지옥, 역사가 증명하는 기독교 죄악사, 성서의 절대화 등이고 진정 종교의 개혁은 진행중이라고 봐야 합니다. 종교도 생물과 같아서 시대에 따라 진화하며 토착화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기독교도 순종이 어디 있으며 배타성을 가질만한 구석이 없어 보이는데 종교 자체가 가지는 히스테리(죤 쉘비 스퐁)라고 봅니다.
전 종교가 최대의 위선이라봅니다. 종교자첸 진리를 담보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 내장된 왜곡과 위선을 간파한다면 어찌보면 최대의 사기극입니다. 바울서신은 분명 신학적 해석이며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전화함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거든요. 복음서도 예수 사건은 유대인의 회당 전례를 위한 예배를 위한 창작( 만들어진 예수 참사람 예수/죤 쉘비 스퐁)이고 이적의 부정,제자의 부정, 부활과 승천의 부정등 모든 복음서의 이야기를 해체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이고 자기 고백의 언어를 역사화하려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치명적 오류로 보입니다. 신앙고백은 역사를 담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역사에 있질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서의 불일치는 이를 말하여 줍니다.
정강길님의 담대한 주장을 적극옹호하며 새로운 대안 기독교가 승리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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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2
요담 (121.130.231.67)
2010-02-08 23:20:40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인쉬타인의 말이더군요.
반기련에 의한 버스광고로 나왔다가 스피드업된(^^;) 질럿들에 의해 쫑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문구는 수위가 그나마 낮은 것으로 채택한것으로 알고 있지만.

'빨갱이', '좌빨'이라는 표현으로 상대방을 쉬이 가르고 단정하는 세상속에서, '자유주의'라는 딱지로 유사하게 제단해버리는 한국 교계에서도 이 분의 고민만큼 생각해보고, 이 분의 삶만큼 도전해 보는 이들이 많아지기를 바랄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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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1
박창진 (115.41.59.127)
2010-02-08 22:10:20
교회 역사를 좀 더 온전히
사도 시대로부터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과
국교가 된 이후의 교회 모습은 완전히 구별되지요.
그 이전은 위에 언급한 그러한 모습은 없었지요.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던 교회와 위에 언급한 경우의 교회는 전혀 다르지요.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으로
하나님을 예수님의 아버지이시며 그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아버지로 고백함에 있어서는 같았지만요.

사도 시대에도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주님으로 삼아 살아가는 삶에 대한 초대가 있었고요.

하나님께로부터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새 가족이며 대안 사회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인 교회가 어쩌다가 이런 비난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자비와 용서 그리고 사랑의 실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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