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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렙돈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스물세 번째 주일(20091108)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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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11월 13일 (금) 11:22:59
최종편집 : 2009년 11월 13일 (금) 12:41:10 [조회수 : 2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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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스물세 번째 주일(20091108)
성서일과/ 시 146; 왕상 17:8-16; 히 9:24-28; 막 12:38-44
본문/ 막 12:38-44
두 렙돈

          (막 12:38-44)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39]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0]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41]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는 것을 보실쌔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

예물이 없이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 성도들에게 함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예배와 제사를 구분하지 않고 같은 뜻으로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배와 제사가 분명 다른 것이긴 하나 둘 사이에 공통점이 많은 탓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드리는 방법과 목적에 따라 크게 다섯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먼저 번제와 소제가 있는데 방법이 다릅니다.
번제(燔祭)는 집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불로 고기를 태우는 제사입니다.
소제(素祭)는 곡물로 드리는 제사도 대개 번제와 함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목적에 다라서는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속건제는 사람과 성물에 대한 죄를 씻는 제사이고,
속죄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은 죄를 씻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며.
화목제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제사입니다.

크고 중요한 제사는 속죄제였지만 화목제는 제사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모두 죄의 사함을 구하는 제사인 것이죠.
그런데 화목제 드리는 규례를 보면 이 제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염두에 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이라고도 하고, 화목의 제물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제사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제물이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라는 것이 기실 제물을 드리는 일이니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제사를 폐하고 예배를 드립니다.
구원의 은총을 받은 자가 드리는 제사가 예배인 셈입니다.

제사와 예배는 분명 다른 것이지만 공통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습니다.
찬송, 말씀, 기도, 봉헌, 교제가 그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사에도 있고, 예배에도 있습니다.

제사에 제물이 있어야 하듯, 예배에 예물이 빠지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한 번 제물이 되셨으니까 다시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은 성전에서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이지 하나님이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제물이 없는 제사가 없듯, 예물이 없는 예배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에 드리는 예물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보통은 돈을 예물로 드립니다.
찬양예배는 찬송을 예물로 삼아 드리는 예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수요일 모이는 것은 예배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삼일예배 혹은 수요예배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기도회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결혼식이든지 장례식이든지 모여서 찬송하고, 설교만 하면 예배라고 이름을 붙이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어떻게 예물을 드릴까?

오늘 본문은 비록 짧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여인의 뜰에는 13개의 헌금궤가 있었는데, 그 모양은 마치 나팔 모양처럼 생겼고, 각각의 헌금궤마다 그 헌금이 쓰여질 용도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헌금궤 맞은 편에 앉아, 그리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동전이 긴 나팔 모양의 헌금궤를 통해 떨어질 때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헌금을 했습니다.
그 중에 한 가난한 과부가 겨우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렙돈이란 것은, 헬라의 동전으로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리키며, 고드란트는 로마의 동전으로 로마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를 가리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는데, 렙돈은 1/16 데나리온이었으니, 얼마나 작은 액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던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들을 부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겠다. 이 과부가 지금까지 이 헌금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단다. 왜 그런지 아느냐? 부자들은 자신들의 풍족한 것들 중에 얼마를 헌금한 것이지만, 이 과부는 가난하고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소유 전부를 헌금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을 드릴 수 있는 자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 주님이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41절/ "예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사 무리의 연보 궤에 돈 넣은 것을 보실새..

무엇이 느껴지십니까?
주님이 우연히 보신 게 아닙니다.
주님이 아주 작정하고 살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보 궤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셔서, 의식적으로 주의 깊게 살펴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그렇게 보고 계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있는 이 부분을 표준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편에 앉으셔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그렇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냥 할 일이 없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가하게 연보 궤 맞은편에 앉아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구경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헌금 궤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이 헌금을 드리는 이유나 목적, 헌금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 등등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부자들이나, 가난한 과부나 예수님께서 보고 계신 것을 알지 못했지만 주님은 주목하여 살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음의 자세, 동기, 이유와 목적들까지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우리의 속 깊은 곳까지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렘 :9-10절/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 리요마는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행실대로 보 응하나니"

우리 예수님은 헌금 궤 앞에서 헌금하는 무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물을 드리는 사람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교훈입니다.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헌신을 하는지 앉아서 보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자들이 되지 말고, 주께서 보시기를 원하며 드리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두 번째/ 예물은 결코 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한 헌신은 양이 아니라, 마음의 자세입니
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부자들과 과부를 비교해 보십시오.
누가 하나님께 더 많은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까?
41절 하반절에 보면, '여러 부자가 많이 넣었다'라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42절에 보면, 과부는 '두 렙돈, 한 고드란트', 다시 말해, 극히 작은 액수의 동전만 넣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종류의 헌금에 대한 우리 주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43절 말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여러 부자가 많이 넣은 헌금보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넣은 것보다 과부가 넣은 두 렙돈이 더 많다고 주님께서 평가하십니다.
이것은 분명, 우리의 수학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여러 부자들의 많은 헌금을 합친 것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많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에게는 '얼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헤아리지만 우리 주님은 물질에 담긴 마음의 무게를 달아 보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넣다'라는 단어가 모두 7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7번의 동사가 다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 개역 성경에는 모두 다 '넣다'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헬라어 성경에 보면,분명하게 두 가지 형태로 구별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우선, 여러 부자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어진 '넣다'라는 동사는 영어로 'threw in' 또는 'gave in' 그리고 'contributed out'이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던지다, 기부하다라는 뜻입니다.
길가에 앉은 거지에게 동전을 던져주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와 관련되어 사용되어진 단어는 모두 'put in'입니다.
이는 '두다, 맡기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 부자들은 비록 많은 양의 헌금을 드렸을지라도 그 헌금을 드리는 자세는 마치 적선하듯 헌금 통에 던졌음에 반해, 가난한 과부는 비록 두 렙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액수의 헌금이지만, 소중하게 하나님께 맡기듯 드렸다는 말입니다.

여러 부자들의 드린 많은 양의 헌금은 단지 기증에 불과했지만, 가난한 과부의 드린 극히 적은 양의 헌금은 그녀의 전부 곧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금하는 자들이 기억해야 할 두 번째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헌금의 양이 아니라, 우리가 주께 맡기는 마음의 질을 따지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예물을 요구하시는 것은 주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예물은 주께 맡기는 마음, 주를 의뢰함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인 것을 깨닫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은 자신의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44절을 다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여기에 보면, 왜 주님께서 여러 부자들이 드린 그 많은 헌금보다 한 가난한 과부가 드린 보잘것없는 두 렙돈을 더 귀중히 보시는가에 대한 이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풍족한 것들 중에 일부를 드린 것에 불과하지만, 과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분'이 아닌 '전부'를 받으시고, '전체'로 드리는 우리들의 삶을 기뻐하십니다.
결국, 과부의 두 렙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모든 소유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한 과부는 비록 부자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극히 적은 양의 헌금을 드렸지만 그녀에게는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다 드렸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예물을 드려도 그것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으면 그것은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예물일지라도 그것이 그가 가진 것의 전부라면 그는 누구보다 많은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생활비 전부를 드렸다는 것은 그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살겠다는 마음의 고백입니다.
다윗이 말했습니다.
          (삼하 22:30)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목숨까지도 주께 맡겼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을 존귀하고, 평안하고, 견고하게 해 주심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께 온전히 맡기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살피시고, 지키시고, 채워주시는 은혜로 사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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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돌 (211.226.30.45)
2009-11-13 11:24:53
수슬 때문에....
목 디스크 수술 때문에 지난 두 주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정상적으로 설교를 올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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