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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나(만)의 것? 혹은 주님의 것?'은혜'는 독점할 수 있는게 아니다.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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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년 11월 14일 (월) 00:00:00 [조회수 : 3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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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KBS-TV의 <열린음악회>를 보게 되었다. 민해경씨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을 오랜만에 들었다. 20여년 전,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위기감(?)을 느끼며 심각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어수선해지고 심각해지기는 마찬가지다.

노랫말에서,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자란 젊은이가 어느 땐가 당돌하게 도전장(?)을 낸다. “부모님은 나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지만, 나는 아직도 아쉬워하는데...” 라는 내용으로 시작되는 이 가사에서 드러나는 젊은이의 소원은 “아직도 부족하니 더 많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다.

부모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사랑, 자식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식의 삶의 방식을 존중하지 않는 부모의 사랑, 그것은 넘치도록 주어졌다 해도 자식 입장에서는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노래의 후반부는 부모에게 정중하지만 도발적인 요청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주세요.” 작사자가 별 생각없이 넣었는지, 아니면 그 부분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맡겨달라는 부분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그냥 맡겨달라... 부모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겠다. “내가 어떻게 널 낳았는데, 내가 어떻게 널 키웠는데, 그냥 맡겨달라니... 그럼 나는 너에게 무어냐? 너와 내가 그런 관계더냐?”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이 노래 가사의 주인공이 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이 노랫말을 통해 부모님에 대한 자기의 아쉬움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매우 순종적이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부모님이 하라는대로 했고, 시키는대로 했노라고 고백한다. 흔히 말하는 범생이였단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맹목적인 순종만 할 수는 없노라고, ‘모범생’도 싫고 ‘착한 아이’도 싫고, 그냥 “내 인생을 찾고 싶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낌없이 내어주는 부모의 사랑이 왜 자식에게 온전한 행복과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자식으로 하여금 자기 인생이 “빼앗겼다”는 느낌을 갖게 하였을까? 왜 자식은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그렇게 부담스러워하게 된 것일까?

이쯤 되면 부모나 자식이나 그 때까지의 관계 설정에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식이 그런 인식을 갖게 되었다면, 갈등이 있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풀어야 한다. 이제는 더 이상 시키는대로 순종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식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부모님은 여전히 말잘듣는 착한 딸아들로 남기를 원하겠지만, 부모님이 원하신다고 하여, 동의할 수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는 일방적인 ‘사랑의 방식’에 대해 마냥 입다물고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희생이고, 더 나은 삶과 행복의 가능성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 가사의 주인공은 “내 인생의 나의 것”이라고, “그냥 나에게 말겨달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관계가 파괴되는 아픔을 각오하면서...

부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점이 있다. 더 이상 ‘품 안에 자식’이 아니다. 또한 냉정히 생각해 보면, ‘내가 생각하는 아이의 행복’과 ‘실제 아이의 행복’은 다를 수 있다. 서운하더라도 아이의 건강한 반항을 수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시키는대로 순종만 하는 ‘착한 아이’는 자율성이 없는 아이, 로봇과 같은 아이로 자랄 수 있다. 온실 속의 화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아이가 집 밖에서, 거친 사회에서 잘 자랄 수 있을까. 자식이 크면 품에서 내려놓아야 한다. 스스로 걷게 하고, 스스로 서게 하고, 결국 스스로 집 밖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성서에,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있다. 말 잘듣고 착한(?) 첫째 아이와 달리, 둘째 아이는 당돌하고 순종적이지 않다. 이 말썽꾸러기가 아버지와 담판을 벌인다. 자기에게 돌아올 재산의 몫을 미리 달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둘째에게 줄 재산을 나누어주자 그 돈을 갖고 나가, 방탕한 생활을 하며 다 써 버린다. 돈이 있을 때는 늘 주변에 사람이 있고 외롭지 않았지만, 돈이 떨어지자 모두 떠나고 외톨이가 된다. 먹을게 없어 돼지 사료로 배를 채우기도 한다. 외로움과 허기짐의 끝에서,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비로소 눈을 뜬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진한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낀 것이다. 전에도 아버지의 사랑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느끼지 못했었다. 이제 비로소 느껴지는 아버지의 사랑, 아,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오묘하며 가슴 저리도록 그립고 고마운지...

둘째는 비로소 세상의 밝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풍요 속에서가 아니라, 빈궁 가운데서 느낀 가슴벅찬 밝음, 그것은 이 말썽꾸러기의 삶에 진한 의미를 새겨주는 값진 체험이었다. 세상이 새로워졌다. 아버지가 그리워졌다.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일방적이다. 아버지가 그를 용서할까.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둘째가 저 멀리 나타났을 때, 아버지는 먼 발치에서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맨발로 뛰쳐나간 아버지는 아들을 얼싸안고 잔치를 벌인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어찌 기뻐하지 않으랴...”

사실 아버지는 바뀐 것이 없었다. 아들이 바뀐 것이다. 전에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첫째가 문제를 제기한다. 아버지 재산을 다 날려버린 저 천하의 못된 놈을 어찌 그냥 받아주느냐는 것이다. 첫째의 마음 속에는 억울함이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나는 이렇게 착하게 살아왔는데, 나는 아버지 말씀을 하나도 거역하지 않고 다 순종했는데, 재산의 절반을 날린 저 놈을 아버지가 나와 똑같이 대해주면 나로서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이 비유 이야기는 예수께서 직접 들려준 것으로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인식한 하나님의 모습이다. 여기에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자식을 품는 넉넉한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구약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신, 심판하는 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예수는 그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주기도문에서 가르쳐 주셨다.

문제는, 이 아버지의 참 모습을, 늘 품 안에 있고, 반항할 줄 모르고, 늘 순종하기만 했던 첫째는 아직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의심했던 아이, 말썽꾸러기, 아버지 속을 뒤집어놓고 뛰쳐나갔던 둘째가, 아버지의 속 깊고 진솔한 사랑의 의미를 뼈에 사무치도록 깨닫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첫째 아들들이 너무 많다.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첫째아이처럼, 늘 교회에 있고, 교회의 가르침 속에 있으면서,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너그럽다. 그래서 허랑방탕한 둘째가 돌아왔을 때, 아무 조건없이 품어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 대해, 아마도 한국 교회의 독실한 첫째아들들은 이렇게 반론을 제기할 것 같다. “한가지 조건이 있었다. ‘돌아와야 한다’는 단 하나의 조건...”

그렇다. 돌아온 다음에야 둘째는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다시 누릴 수 있었다. (이미 아버지를 새롭게 깨달은 시점부터 마음으로는 통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집 안엷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집 밖으로 뛰쳐나가 그를 안았다. 중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아버지’다.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럼 하나님은 누군가? 기독교의 하나님? 그렇다. 기독교의 하나님 맞다. 그러면 무슬림의 하나님은? 그 역시 이름만 다를 뿐 하나님이다. 힌두교의 하나님은? 그 분은 다른 분일까? 개념과 시스템에 매이지 말라. 기독교라는 집, 이슬람교라는 집, 힌두교라는 집의 모양새는 서로 다를지라도, 그들이 경배하는 ‘궁극자’를 어느 한 종교 시스템만이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신은 ‘전능자’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다. 스스로 존재하는 전능자를 어찌 자기 집 안에 가둘 수 있겠는가.

첫째로서의 권리를 독점하려는 자들이여, 차라리 둘째가 되라. 아버지 집을 뛰쳐나가라. 나가서 넓은 세상을 보고, 허기지고 굶주리고, 외로움과 쓸쓸함에 젖어보라. 그러면 하나님의 참 사랑과 자비에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지금 당신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당신들이 만든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사람과 교리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 그것은 당신들의 성서가 이미 ‘우상’이라고 규정지은 것이다.

의심하지 않는 믿음은 병든 믿음이다. 의심하지 못하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의심하지 않고는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없다. 사람이 만든 하나님, 개념과 교리 속에 갇힌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면 의심하라. 의심하고 또 의심하라.

다시 민해경씨의 노래 ‘내 인생은 나의 것’으로 돌아와서... “그냥 나에게 맡겨 주세요.”는 아무래도 너무했다. 조금 더 진도가 나가면 “당신과 나는 이제 남이다”라고 선언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혹시 부모님과 절교 선언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탕자의 비유(‘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라고도 한다)>에서, 둘째도 부모의 사랑을 부담스러워했었던 것 같다. 독립하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집을 나갔다. 그런데 가출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아버지의 진솔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관계를 떠나 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것인지, 아니 불가능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에 학을 뗀 사람들 중에, 또한 종교의 역기능에 치를 떠는 사람들 중에, 신적 존재와 종교의 영성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영성이니 초월성이니 하는 언급을 하는 것조차 역겨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해 보자. 홀로 내던져진 존재가 있는가? 나홀로 이 세상에 와서 나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우리)가 여기에 있기까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은혜’가 있었다. 부모님과 그 사랑, 선생님과 친구들, 그리고 그들의 보살핌과 위로, 따뜻한 햇볕, 공기, 물, 발딛고 설 수 있게 해 주는 땅, 여름철 땀방울을 식혀주는 바람과 대지를 적셔주는 비, 넉넉하게 품어주는 자연... 이 모든 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랴...

그 ‘은혜’, 그것들의 존재, 그것들의 상호 연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 힘... 그것을 신의 선물로, 혹은, 신의 분깃으로, 혹은 신 자체로 이해하면 어떨까. 그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아니, 나는 무슨 ‘학적’으로 말하는게 아니다. ‘학적’으로야 아무려면 어떤가. 이렇게 이해하면 어떻고 저렇게 이해하면 어떤가. 단지 내가 체험한 은혜, 나를 살게 하는 그 은혜가, 그 현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 아닌가. 그것만은 인정할만 하지 않은가.

아니, 인정하고 말고를 떠나서, 개념을 넘어 현실로 가자. 우리를 살게 하는 것, 숨쉬게 하고 생동하게 하는 무수한 존재들, 그것들과 관계맺지 않고, 그것들에 감사하지 않고, 나홀로 살 수 있단 말인가? 누가? 누가 나를 둘러싸고 보호해주며, 생동하고 춤추게 하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한 그것들을 떠나 혼자 존재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 은혜는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느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은혜 속에 춤추고 싶다. 그 은혜 속에 행복하고 싶다.

제발 그 ‘은혜’에 대하여, “은혜는 여기에만 있고, 이 방식대로 해야만 은혜가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지 말라. “그 은혜의 의미를 깨달으려면 이 시스템 안에 들어와야만 한다”고 강요하지 말라. 그것은 어느 누가, 어느 공동체만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풍요롭고 너무나 자비로운 그 은혜는,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것이기에, 누구나 마음의 문을 열면 스며들 수 있도록, 보편적으로 편재해 있는 것이다.

은혜를 독점하려는 사람들이여,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라. 그것은 은혜의 무한한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해치는 것이며, 획일화하고 박제화하는 것이다. 혹 그래야만 당신들이 행복할 수 있다면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다만 “너도 이리 들어와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말아 달라. 내가 당신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 당신들이 강요하지만 않으면, 나도 당신들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

은혜를 부정하는 사람들이여, ‘은혜’를 독점하려는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모든 교리, 모든 시스템을 다 부정하고 공격해도 좋다. 그러나 은혜 자체마저 함부로 부정하지는 말라. 아니, 개인적으로는 부정해도 좋다. 그건 각자의 선택이고 자유이니까... 그러나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쫓아다니면서 “그건 허깨비에 불과하니 벗어나라”고 강요하지는 말라. 당신들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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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수 (211.51.79.238)
2005-11-14 22:33:29
자유하시지요
-류목사님의 사상과 삶에서 자유하시라고 말하고 싶네요. 목사님이 혐오하는 근본주의자들과 동일하게 변해가는 모습에 민망합니다. 성숙한 말과 행동이 보고싶네요.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실것이고요 그러면 류목사님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위치는 어디인가요? 파니카? 존 힉? 바티칸공의회? 그러나 그 대답이 무엇이든 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 말해주는 것이고 그 삶은 우리 인생의 마지막장 이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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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환 (218.53.65.188)
2005-11-14 15:26:27
무엇을 지적하고자 하시는지요?
지적의 대상이 너무 피상적이고 지극히 개인의 어떤 심리적 현상에서 나온 것을 지적의 대상으로 열거해 나가는 것 같습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대상과 주제가 명확하길 바랍니다.
즉, 어떤 글에나 독자를 향하여 약간의 영양가라도 미치는 소득이 있어야 겠지 않습니까?

꽤 장문으로 무슨 말씀을 하고자 하기는 하시는 것 같은데 실상은 아무런 의미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늦되어 그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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