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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아름다와라미리보는 교회력 설교/오순절 후 열여덟 번째 주일(20091004)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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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10월 01일 (목) 00:07:11
최종편집 : 2009년 10월 01일 (목) 00:59:32 [조회수 : 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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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열여덟 번째 주일(20061008)
성서일과/ 시 8; 창 2:18-24; 시 26; 히 1:1-4, 2:5-12; 막 10:2-16
본문/ 시 8:1-9
참 아름다와라

          (시 8:1-9)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사람이 무엇이관대...

   
오늘 말씀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움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늘의 시 8편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습니다.
          [1,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런데 시인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찬양하는 이유가 색다릅니다.
하나님 지으신 만물의 아름다움에 사람을 견주어 보니 사람은 너무나 보잘 것이 없습니다.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그런데 그런 사람을 영화롭고 존귀하게 하셔서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땅에서는 들짐승의 아름다움에 견줄 수가 없고, 새와 같이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물속에 머물러서는 숨조차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 모든 것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5]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따지고 보면 무엇 하나 나을게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을 사랑하시는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게 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에서 사람은 참으로 이해 못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사와 사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천사는 사람을 돕는 존재로 그려지고, 사탄은 사람을 해치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천사와 사탄은 항렬이 같은 존재입니다.
다 같이 실체가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한 천사가 패하여 사탄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음미할만합니다.

천사는 흰색으로 묘사되고, 사탄은 검은 색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흑과 백은 보색입니다.
서로 반대되는 색을 보색이라고 하지만 이때 쓰는 보라는 말은 반대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충하다고 할 때 쓰는 그 보(補)입니다.
相應-서로 응하는 색이 보색입니다.
즉 흑과 백은 상응하는 색, 한 가지 색의 다른 쪽입니다.
모든 색이 합쳐지면 검은 색이 되고, 모든 색이 빠지면 흰색이 되는 것입니다.
천사보다 조금 못한 사람은 사탄보다 조금 덜한 사람의 다른 쪽 모습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존재가 어디 사탄뿐입니까?
피조물 중에 하나님을 거역한 유일한 존재가 사람입니다.
사탄보다 조금 덜하다는 말이 성립하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천사와 사탄은 내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의 서로 다른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실체가 없다는 점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시인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사탄보다 조금 덜한 존재일 수도 있는데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아름답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네가 뭔데...
지가 뭐길래...
이런 마음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이 마음이어야 비로소 보입니다.
그리고 노래하게 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렇게 찬송하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름다움은 하나 됨에서 온전해집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창세기를 보면 인간의 아름다움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으므로 완전해집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 하신 것은 온전히 아름답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함께함으로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에 남자와 여자는 하나였습니다.
달리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드셨으니 근본이 하나입니다.
          [23]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그러나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험에 걸린 하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만 내 탓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여자 때문이라며 아담이 하와를 남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였을 때에는 벗고 살았습니다.
둘이 되니 부끄러움이 생겨 나뭇잎으로 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창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하나님조차 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이 된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두 사람은 나무 그늘 아래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깊고 넓은 구럭이 생겼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죄로 말미암아 생겼습니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은 둘이 하나일 때는 생겨나지 않는 현상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여야 할 것이 둘이 된 그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오심은 둘을 하나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입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오신 것은 하나님이 사람과 하나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이면서 사람과 하나가 되신 분입니다.
주님은 모든 면에서, 그 약함까지도 사람과 같이 되셨으나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는데 죄는 없으셨습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없는 태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히브리서는 오늘의 시 8 편에 나오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시라고 말합니다.
          (히 2:9-10)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그는 시편에 나오는 사람과 달리 천사보다 나은 사람입니다.
시편이 천사보다 못하다고 한 것은 그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을 온전케 하셨다고 합니다.

그가 죽음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 되게 하신 일입니다.
끊어진 것을 잇는 일이요, 갈리진 것을 메꾸는 일이고, 헤어진 것을 만나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를 일러 화목케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골 1: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게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렇습니다.
그는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어 이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고후 5:19)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다 이루었다 하심도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남남이 된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하나 되게 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한 두려움이 하나님을 피해 숨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숨는 일조차 번거로운 일이 되자 아예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갈 길을 얻은 것입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믿는 자는 주님이 이루신 일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거나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에게 피하며, 그를 의뢰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는 자는 주의 남기신 뜻을 이루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늘로 가시기 전 간곡히 기도하셨습니다.
그가 가장 애써 간구한 것은 땅에 남은 자들이 하나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 됨은 그의 죽으심으로 이루겠거니와 사람 사이의 하나 됨은 믿는 자들이 힘써 이루어야 할 과제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마가복음은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시험하는 장면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것은 그저 맞느냐, 틀리느냐 혹은 아느냐, 모르느냐를 따지기 위한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지나가고 계신 곳은 갈릴리에서 유대 땅을 향해 요단강을 건넌 곳, 베뢰아 근방입니다.
그곳은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이 다스리던 곳이었습니다.
요한은 헤롯이 아내를 버리고 그 동생의 아내와 결혼한 것을 두고 비난하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 세례 요한과 같은 꼴이 되게 하려고 올무를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습니까?
먼저 모세는 어떻게 하라고 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명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는 것으로 이혼하게 했다고 바리새인들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막 10:6-9)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예수님도 이혼을 절대로 불허하신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마 19:9) 『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음행하면 이혼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음행은 하나 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를 둘로 나누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이미 둘이 된 것이니 사실 이혼증서를 쓸 것도 없는 일입니다.
이미 남남인 것입니다.

이혼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 된 것을 둘로 나누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둘이어도 하나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님을 부르는 만큼이나 많이 쓰는 말이 시험입니다.
시험이 좋아서 그럴 리는 없을 테고, 원치 않는 일이긴 해도, 끊이지 않고 시험이 닥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험의 종류와 양상도 다양하기만 합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 있습니다.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어떤 시험이든지 시험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입니다.
그러나 때로 자기를 시험해 달라고 간구하기도 합니다.
          (시 26:2)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수도 있습니다.
          (시 106: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하나님을 시험하면 안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시험을 받는 분도 아닙니다.
          (눅 4: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그런데 또 한편 하나님은 당신을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피하고 싶은 것이 시험이지만, 피할 길이 없습니다.
시험이 오는 이유도 다양하고, 시험의 모습도 다 달라서 한 마디로 시험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시험은 두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은혜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시험의 종류에 따라 대처하는 법도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시험이 어렵고, 무섭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모든 시험에 공통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시험이든지 그 시험이 목표하는 바는 하나 됨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당신과 하나 되어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마귀의 시험도 본질은 같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이간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욥입니다.
욥기에 보면 마귀의 시험이지만 하나님이 그 시험을 승인하십니다.
마귀의 시험이나 하나님의 시험이나 하나 되었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 가운데 늘 도사리고 있는 시험은 사람과 사람을 남남 되게 하는 것입니다.
불신하게 합니다.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게 합니다.
마침내 살인에 이르게까지 됩니다.
모두가 시험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욥처럼 인내해야 되겠습니다.
욥의 아내는 고통 받고 있는 욥을 버리고 갔습니다.
떠나면서 내뱉습니다.
          (욥 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이 대답합니다.
          (욥 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약 5: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룻처럼 더욱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에게 각기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라고 말합니다.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말에 수긍하여, 울며 제 길로 갔습니다.
사실 남자들 없는 세 과부는 아무런 연고 없는 남남입니다.
서로 살 길을 찾아 가는 것을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고집을 부려 나오미와 동행을 합니다.
룻이 말합니다.
          (룻 1:16-17) 16]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 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룻은 다윗의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다윗의 혈통을 따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룻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을 예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이겨야 하겠습니다.
광야에서 주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세 가지 유혹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마 4:4)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7] ...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0] ...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오직 말씀으로 이겼습니다.
그것도 새로 말씀을 지어내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말씀을 ‘기록되었으되’ 라는 말로 시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 하셨습니다.
          (막 10:6-9) [6]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하시더라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하나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인 곳이 천국입니다.

모두가 남인 곳이 지옥입니다.
하나님이 남이 되면 우상입니다.
사람이 남이 되면 원수입니다.
자연이 남이 되면 파헤쳐야만 할 장애물입니다.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것이 시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내로, 사랑으로 그리고 말씀으로 승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 하나님과 만물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자들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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