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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종교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다름’과 ‘틀림’은 다르다
류상태  |  shalom77@cho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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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5년 11월 02일 (수) 00:00:00 [조회수 : 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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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자기가 사는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 영감이 모처럼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해가 서산에 질 무렵, 영감은 두 청년이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보고 그들에게 물었다. “이보게, 젊은이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리 다투는가?”

한 청년이 말했다. “아, 이 멍청한 녀석이 해가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오른다지 뭐요? 어떻게 뜨거운 불덩어리가 물 속에서 튀어오를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해는 항상 산 위에서 솟아오른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더니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고집을 피우지 뭡니까?”

이 말을 듣고 있던 또 한 청년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채 말했다. “바다라곤 가 본 적이 없는 무식한 녀석이 내 말을 알아들을 리가 있나? 해는 분명히 바다 속에서 솟아오른단 말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영감이 점잖게 젊은이들을 타일렀다. “이 사람들아. 젊은 사람들이 그런 어처구니 없는 얘기를 하면 되나? 나는 수십 년을 살아왔지만 해가 우리 집 지붕 위에서 떠오르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네.”

이윽고 세 사람은 격렬한 싸움판을 벌이게 되었다. 자기가 틀림없이 체험한 사실, 두 눈으로 분명히 확인한 사실을 부정하는 어리석은 상대방을 조소하면서.

비유가 너무 극단적인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자. 볼펜이 어떻게 생겼는가. 길쭉하게 생겼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볼펜을 보는 위치에 따라서 “원형으로 생겼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원통형으로 생겼다”고 말하면 사실에 좀 더 가까울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말도 볼펜의 모양을 ‘전부, 정확히’ 묘사한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말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컵의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가. (내가 보기에는) 원형으로 생겼다. 이 말을 가지고 시비걸 필요가 없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그렇게 보이는 부분이 있다는 말이니까. 컵이나 볼펜의 전체 모양을 보려면 이리 저리 각도를 달리 해서 보아야 한다. 한 쪽 방향에서만 줄곧 보는 사람은 제 모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리 저리 제 모습을 보았다 해도 그 생김을 묘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종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말이 있다. “하나만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를 배우고, 기독교 내에서 여러 체험을 하고,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웠다 하여, 마치 종교의 세계를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진리를 다 안 것처럼 말한다면 그것은 우매함을 넘어 우물 안 개구리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 가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인이 직접 체험했다 하니 그보다 더 확실한 깨달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 중에는 자신의 체험을 아직 미명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전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전도하기도 한다. 앉은뱅이 영감이 “태양은 우리 집 지붕 위로 떠오르는 것을 두 눈으로 똑바로 보고 체험했다”고 외치는 꼴이다.

자기와 다른 견해, 다른 체험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 그 의견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자기 견해와 다르다고 해서 틀렸다고 단정해서는 안된다. 서로 다른 의견이 제시될 때, 누군가의 의견이 틀리는 경우도 있지만, 틀리는게 아니라 그냥 ‘다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범하기 쉬운 오류가 있다.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이므로 그 말씀을 배우고 듣는 나, 즉 ‘해석자로서의 나’의 견해도 절대적으로 옳다는 잘못된 확신을 갖는 경우다. 나는 보수 신앙을 갖고 있는 목사들 중에 이런 식의 논리적 오류에 심하게 빠져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 보았다.

이 잘못된 확신으로 수백년 전, 천주교는 개신교를 이단으로 정죄했고 개신교도 천주교를 정죄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사탄의 하수인으로 몰아세우며 엄청난 피를 흘렸다. 유럽의 30년 전쟁이 바로 개신교와 천주교의 싸움이었다. 그들이 믿는다는 하느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우리의 경험이나 이성(理性)은 한계가 있다.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절대자이며 전능자이신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 말씀을 들으며 그 분의 한없는 은혜 아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여전히 신 앞에 잘못을 범할 수 있고, 신의 뜻을 잘못 이해하며, 잘못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인간이 만든 어느 특정 신념체계 안에, 특히 그 개념이나 문자, 그리고 교리적 설명 안에 갇힐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떠야 한다. 사실 신이 ‘전지전능’하다느니 ‘인격신’이라느니 하는 이런 모든 규정 자체가, 좋게 말하면 “신을 우리의 눈높이로 해석하는 것”이지만, 부정적으로 말하면 “신을 우리 잣대로 제한하는 것”일 수 있다.

특정 종교만이 신의 진리를 담보하고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오만이다. 또한 무지다. 아니, 무지와 오만을 넘어 신을 모독하는 것이며 인간 세상에 분열과 갈등을 몰고 오는 무서운 편견이다.

우리가 ‘다름’과 ‘틀림’의 차이를 잘 이해하고 인정하면,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많은 사람들의 ‘다른 모습’을 보고도 혼란스러워하거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오히려 이해하며 기뻐할 수 있는 ‘다양성의 시각’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생각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종교가 다르고, 이념이 다르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존중하는 건전하고 상식적인 신앙인격인이 되는 것은 성령충만하고 헌신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글을 마치기 전에, 인도의 수도사이며 예수회 신부였던 앤소니 드 멜로의 글을 하나 소개하고 싶다.


종교적 신조는
실재의 진술이 아니라 한 암시,
인간의 사고가 못 미치는 저편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한 실마리입니다.

요컨대, 종교적 신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그 손가락 연구에서 넘어서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빨기에 열중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써서 자기 눈을 후벼냅니다.

이들은 종교로 말미암아 눈이 먼
고집쟁이 맹신자들입니다.

그 손가락에서 충분히 떨어져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종교가는 참으로 드뭅니다.

이들은 신조를 넘어가 버렸기에
신성모독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분도출판사 간 <일분 헛소리>에서.


p.s. ‘앉은뱅이 영감’이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글의 의도를 명확히 하기 위해 표현을 바꾸지 않았다. 요즘에는 이런 병으로 고생하는 분을 거의 볼 수 없지만 혹 표현에 거슬림을 느끼는 분이 있다면 양해를 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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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완 (58.142.228.50)
2005-11-04 09:53:34
당당뉴스는 열린 기독교 대안언론의 場으로 마련되었습니다.
당당뉴스는 열린 場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어느 특정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당뉴스의 카피가 그러하듯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 뉴스"이며 무엇보다도 "세상과 교회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기를 원하는, 아직은 전문기자 하나없이 운영자 한사람으로 운영되는 기독교 대안언론일뿐입니다.

여기서의 당당한 토론과 주장과 소식들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나도기자(게릴라기자)들에 의해서 채워져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취재외에는 누구든지(단 명백한 이단성 글이나 상업적 글을 제외하곤) 자유롭게 올릴 수 있습니다.
혹 다른 의견이나 반론, 다른 쪽의 입장이 있다면 글을 올리면 됩니다.

당당뉴스는 가끔 허락받고 퍼오기는 할망정 아직 누구에게 특별히 글을 청탁하거나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각지의 나도기자가 올리는 글을 99% 그대로 올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혹자는 당당뉴스 기사중에 허접한 기사가 있다고들도 하지만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당당뉴스가 추구하는 컨셉중에 하나이니까요!

혹 다른 의견이 있거나 다른 입장의 분들도 그저 글을 올리면 거의 100% 실리기는 합니다.
다만 그 글이 오래도록 탑기사로 있든지, 기사가 금새 밀려나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당당뉴스 운영자인 저의 몫일 뿐입니다.
자발적이고 열정적인 편집자를 구하고 있으니 근간 모양새가 좀 나아지긴 할껍니다.

혹시나 나도기자들이 올리는 글이 당당뉴스 지면에 다 구현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많은 기사가 올라오게 된다면 그때는 당연히 기사들을 취사선택하게 되긴 하겠지요.
뭐 그럴 정도로 많은 기사가 올라오게 되는 날은 아직 멀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해가 되셨는지요, 의견을 주신 황동수님도 한번 글을 올려보시기 바랍니다, 하하하... 혹 평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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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수 (61.77.95.175)
2005-11-03 16:47:43
아쉬움
류목사님의 주장들은 적어도 감리교목사들은 4-6년동안 공부하고 고민한 내용들입니다. 좀더 진지한 자세로 "성서"에로의 탐구를 요청하는 바 입니다. 그렇다고 류목사님의 글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당당뉴스관계자여러분 , 이필완목사님, 류목사님의 글이 당당뉴스와 동일한 입장인지 묻고싶구요.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의견을 가진 분들에게 글을 부탁하기도 하시고, 학원 종교자유에 관해서도 감리교내 교목으로 계시는 많은 분들에게 의견을 묻고 공평한 정론을 이끌어 가는 게 옳지 않을까요?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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