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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사이

요 며칠 사이, 착잡한 상황이 전개되어 실의에 잠기기도 했지만, 그런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사건들도 있었다.

지난 9월 17일은 윤이상 선생의 100회 탄신을 맞는 날이었다. 올해를 기념하기 위해 출간한 『윤이상 평전』(박선욱, 2017, 삼인)을 읽으면서, 아직도 우리 곁에 모시지 못한 세계적인 예술가를 기억한다. 1967년 6월, 그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는다. 김형욱의 중앙정보부와 박정희의 통치가 윤 선생을 어떻게 대접했는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는 그 후 추방되어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조국을 다시 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그가 펼친 예술혼의 바탕은 통영 앞바다와 웅비하는 사신도였는데, 정작 그 예술혼의 본바닥인 한반도에서는 그를 포용하지 못하고 분단의 희생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세계 음악을 격상시킨 그 악보마저 베를린 어느 은행의 금고 속에 잠재우고 있어서 우리들의 무성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의 탄신 100주년을 이런 식으로 무의미하게 맞아도 되는 것인가, 비감한 마음이다.

19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엔 총회 석상에서 행한 ‘북한 완전 파괴’의 의도를 담은 초강경 연설은 많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미국은 엄청난 힘과 인내가 있지만,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 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했단다. 이게 세계를 보듬고 이끌어가야 할 초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이 할 말인가, 경악한다. 이 말은 ‘한반도 위기설’이 나도는 지난 8월에 언급한 ‘화염과 분노’ 발언보다 훨씬 거칠다. 아무리 ‘막말의 달인’이라고 하지만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다는 것은 미국 국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이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은 자국 의회에서 행한 것이지만, 트럼프의 이번 발언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세계를 향한 것이기에 더 심각하다. 북한을 겨냥한 그 말은 미국 언론들과 우방국들을 놀라게 했다. 욕하면서 닮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트럼프와 김정은은 서로를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의심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9일 유엔총회에서 기조연설 하고 있는 모습(왼쪽)과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유엔총회 기조연설 하는 모습.

‘사드 반대와 문재인 정부 성공’을 외치며 19일 분신을 기도한 ‘독일 망명객' 조영삼(58)씨가 20일 오전에 숨졌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그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가 경남 진영에 거주할 때 거동이 불편한 그를 돌보며 심지어는 대소변을 받아냈다고 한다. 1993년 3월 이인모 씨가 북송되자, 그는 1995년 정부의 승인 없이 방북했고, 이 때문에 독일로 망명했다. 2012년 독일에서 귀국한 그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의 형을 살았다. 그를 아는 김영만은 그를 두고 사람들의 평가와는 달리 “사고의 균형이 잡혀 있었고, 맹목적인 종북이 아니라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운동가였다"고 했다. 그의 국가보안법 위반사건 변론을 맡은 이덕우 변호사도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그의 시신은 한강성심병원에 안치되어 있으며, 장례위원회가 조직, 사회장이 준비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문 대통령은 조영삼 님의 뜻을 깊이 새겨 사드 철회의 길로 돌아설 것을 촉구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21일에는 국회에서 힘겨루기를 하던 김명수 대법원장 인준문제가 해결되었다. 도덕성에 흠결을 발견하지 못한 야당은 다소 엉뚱한 문제를 들어 그의 인준을 반대했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이제 사법부 개혁의 책임이 주어졌다.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도 강력한 사법부 개혁이다. 우리 사법부에 주어진 과거의 불명예가 “유전무죄” “무전유죄”였을지라도 지금은 그것일 수 없다. 언론들은 새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블랙 리스트’ 문제를 해결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 동안 도무지 이해 못한 더 시급한 일이 있다. 양승태 체제 하에서 뭉개버린, 제18대 대선 무효소송 건이다. 6개월 안에 해결해야 할 선거소송이 3년 6개월이 지나기까지 그것도 대법원에서 재판 개시조차 하지 않았다. 국민의 투표권을 무시한 이런 행위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규명하여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신임 대법원장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21일 밤 11경, TV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 총회에서 행한 연설을 듣는다. 트럼프로 인해 식상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문 대통령은 먼저 촛불 혁명을 소개한 후,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북한에게 평화의 길을 선택하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은 ‘베를린 선언’을 상기시키듯, “우리는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이나 인위적인 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서 북한을 향해 “핵무기를 검증 가능하게,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포기할 것을 촉구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또 내년에 치를 평창올림픽을 언급하면서 “민주주의 위기 앞에서 대한민국 국민들이 들었던 촛불처럼 평화의 위기 앞에서 평창이 평화의 빛을 밝히는 촛불이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비핵화를 위해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의 연설의 주조는 평화였다는 점에서 트럼프의 것과는 대조가 되었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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