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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미국의 시각은 원래 달랐다

“일본은 안보·경제·안정과 관련해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동맹(our most important ally)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이런 상황이 지속돼왔다. 남한도 비슷하게 동북아의 안정과 관련해 중요한 파트너다. 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더 큰 발자국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의 공통 이해가 자리하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이 일-한-중 3개국을 차례로 방문하면서 <인디펜던트 저널 리뷰>(IJR)과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일본을 최고 동맹국으로 규정하면서 한국은 그 하부 구조로 본 것이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관점이 직접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에서 파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오바마 정부는 한미 동맹을 외교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라는 의미의 린치핀(linchpin)으로, 미일 동맹을 동북아 안정의 주춧돌이라는 의미에서 코너스톤(cornerstone)에 비유했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중요한 건 한미·미일 동맹에 대한 미국의 수사(修辭)가 아니다. 수사 속에 감춰진 실제적인 시각을 간파하는 것이다. 틸러슨이 말한 것처럼 미국이 일본과 한국을 대하는 차별적인 시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해방 전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어 온 것이다. 재일 저술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정경모 선생의 저서 『시대의 불침번』(한겨레출판, 2010)을 통해 그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

“미국은 일본인이 중국인이나 조선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민족적 우월감을 십분 이용할 필요가 있다. 공산진영을 압도하고 있는 서방쪽 일원으로서 자신들이 동등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일본인들에게 주어야 된다.”

미국, 패전한 일본에 “자신감을 줘야 한다”

1952년 미국 대선에서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국무장관이 된 덜레스가 집필한 ‘메모랜덤’(각서) 내용 일부다. 2차 세계대전 전범국가인 일본을 냉전체제의 전위대로 활용하겠다는 미국의 저의가 엿보인다. 정 선생에 따르면 기독교 장로인 덜레스는 6.25 전쟁이 터지기 일주일 전인 6월 18일 당시 국방장관이던 허풍선이 신성모를 대동하고 38선 일대를 시찰한 후, 다음날 한국 국회에서 “당신들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라고 열변을 토해 특히 반공사상에 불타고 있던 한국의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한다. 정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 부대 통역장교로 근무했었다.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미국 측의 이 같은 언행은 2차 세계대전 종전과 코리아의 해방 상황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 미국이 인천에 공식 당도하기 이틀 전인 1945년 9월 6일 미군 선견대가 비밀리에 비행기로 서울로 날아와 조선총복부의 일본인들과 흥겨운 술잔치로 시간을 보내면서 밀담을 주고받았다. 이튿날인 9월 7일 오전 10시, 미국 측 해리스 준장과 총독부 측 엔도 정무총감이 총감 응접실에서 실무 회의를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해리스는 ‘미군이 앞으로 행정을 시행함에 있어 현존하는 총독부의 인원과 시설을 그대로 사용하려는데 이의는 없겠는가?’라고 운을 뗐다. 일본 입장에서는 전범 처벌을 받아도 모자란 판에 해리스의 이 말은 쾌재도 그런 쾌재가 없었다. 엔도 총감이 “지금 장군(해리스)께서 하신 말씀은 중대사항이니만치 문서로 남겨도 되겠는가”라고 묻자 해리스는 “본건을 정식으로 결정하는 것은 뒤에 올 하지 중장이며, 본관의 임무는 우리의 뜻을 간단히 알리고 그 준비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하라”고 답변했다.

하지 중장 “조선은 미국의 적, 일본은 미국의 우호 국민”

그렇다면 하지 중장은 어떤 입장이었을까. 인천 상륙을 나흘 앞둔 9월 4일 하지 중장은 휘하 제24군단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내렸다. “조선인들은 미국의 적으로 규정되며, 따라서 항복에 부수되는 모든 조건을 이행할 의무를 지니는 한편 일본인들은 우리의 우호 국민으로 간주한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환영 나온 한인들을 위압적으로 대하는가 하면 경인가도를 달려 서울로 향하는 길에서도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했다. 조선인을 미국의 적으로 규정한 마당에 언제 어디서건 ‘적들’의 테러가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히려 한국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해방군으로 맞이해주는 모습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미국은 1947년, 국무성 안에 정책기획본부를 설치한다. 본부장을 맡은 인물은 조지 케넌. 국무성 정책기획본부의 첫 작업은 한반도를 일본의 재지배에 맡긴다는 ‘케넌 설계도’ 작성이었다. 한마디로 조선 반도에서 만주에 이르는 일본의 구식민지는 다시 한번 일본에 통치를 맡기는 편이 미국에 이득이라는 것이다. 피식민지 백성이 당했을 끔찍한 고통에 대한 조금의 휴머니즘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정 선생이 소개한 ‘케넌 설계도’ 내용이다.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일본이 영향력과 제반 활동이 조선에서 만주에 이르는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반대할 이유가 없게 될 날은 반드시 올 것인데, 그 날은 우리 예상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대한 소련의 압력을 완화하고 저지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인 유일한 방도인 까닭이다. 힘의 균형을 이용한다는 구상은 미국의 외교 정책상 새로운 것은 아니며, 현재의 국제 정세에 비추어 이와 같은 정책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시 한번 이러한 정책을 채용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하다는 것이 우리(국무부 정책기획본부)의 일치된 견해이다.”

정 선생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 전범 처리 과정의 일화 한 토막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진주만 폭격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 이하 7명의 A급 전범이 도쿄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된 것이 1948년 12월 23일이었소이다. 그런데 극동재판에서 똑같이 A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시 노부스케 만은 처음부터 기소조차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조 등이 처형된 다음날인 12월 24일에 자유의 몸으로 옥문을 빠져나와 당시 요시다 내각 관방장관으로 있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일본 총리)의 관저로 직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외다. 미군이 기시에게 베푼 이런 특전은 석방되던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는 점으로 보아 정치적으로도 특별한 뜻을 지닌 것이었겠는데, 미국이 기시에게 건 기대는 무엇이었겠소이까.”

기시 노부스케에서 아베 신조까지

‘일본 우익의 원조’라고 불리는 기시 노부스케. 그의 『옥중일기』는 ‘케넌 설계도’와 일치하는 한반도 재지배 구상을 담고 있다며 정 선생은 기시의 『옥중일기』 내용을 소개했다. “동아시아 전체의 적화를 몰고 올 중국 공산군의 제패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달러와 무기 원조를 통해 장제스를 돕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국은 미국 자신의 군대를 동원하여 마오쩌둥을 제압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미국 자신의 군대라는 것은 성조기 아래서 싸울 일본의 의용군으로 편성하는 것이 타당하다.”(1948. 11. 4)

기시의 이 같은 우익적인 사상과 정치력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자가 기시의 외손자인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다. 아베는 2003년 일본 자민당 간사장 및 원내총무, 2006년 제90대 일본 총리, 2005년 10월 관방장관, 2006년 9월 자민당 총재에 이어 2012년 12월 제96대 일본 총리에 올랐고, 3선 총리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달 10일 미국 백악관엗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오른쪽)과 아베 총리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했을 때 미국의 반응은 어땠을까. 라디오로 미군 영어방송을 청취했다는 정 선생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은 매그루더였고 미국의 대리대사는 마셜 그린이었다. 둘 다 각자 발표한 성명은 ‘미국이 인정하는 것은 장면 총리의 합헌 정권(constitutional government)뿐이며 제멋대로 쿠데타를 일으켜 계엄령을 발포한 이른바 군사정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미국은 이 같은 성명을 거의 매 시간마다 한 번씩 방송하면서 행방을 감춘 장면 총리에게 조속한 사태 수습을 호소했다. 하지만 “쿠데타 발발 2~3일 뒤부터는 슬슬 미국 측의 태도가 달라지더니 5월 18일쯤에 이르러서는 누가 들어도 거의 확실하게 쿠데타 정권을 인정한다는 쪽으로 말이 변했다”는 게 정 선생의 전언이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쿠데타 직후 미국과 일본은 어떻게 움직였을까. 이케다 하야토 총리는 6월 19일 미국으로 건너갔고, 7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한국 문제를 토의했다. 그때 이케다는 다음과 같은 말로 케네디를 설득했다. “한국은 태곳적 오쿠니누시(大國主)의 시대부터 일본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나라로, 만일 부산에 적기가 나부끼게 된다면 일본은 고사하고 미국으로서도 곤란할 것이 아니겠는가. 박 정권이 민주주의 정권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겠으나, 한국과 같은 나라에 대해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백년을 기다리는 것(百年河淸)이나 마찬가지다. 박은 이미 반공을 국시로 선언하고 있는 터이니만큼 일본으로서는 박의 반공 정권을 밀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위해 경제 원조가 필요하다면 일본은 미국을 대신해 경제 원조를 개시할 용의가 있다.”(『전후 일본의 외교』(戰後日本の外交, 三省堂, 1983) 재인용.

박정희, 미·일의 ‘구원’ 손길에 반공법·유신헌법으로 답하다

일본의 발빠른 행보로 구사일생이 된 박정희는 케네디의 미국과 미일 양국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기해 ‘반공법’을 공포했다. 이에 대한 호응으로 케네디의 미국 정부는 7월 29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같은 해 11월 12일 도쿄를 거쳐 미국에 간 박(박정희)은 11월 14일 워싱턴에서 케네디를 만나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

그후 박정희의 일본에 대한 충성과 일본의 반응을 정 선생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박은 그로부터 일본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자기 정권을 ‘유신정권’이라 하지 않았소이까. 그 유신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서 따온 말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외다. 이듬해엔 1962년 2월 요시다 일본 총리는 역시 한국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케네디를 만났지요.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일본으로 돌아온 요시다는 자신만만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소이다. ‘우리 일본은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 히로부미)의 길을 따라 다시 한번 조선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일본의 공통이해가 자리하고 있다는 틸러슨 미 국무장관의 발언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정 선생이 일본 잡지 <세카이> 1987년 3월호에 게재한 브루스 커밍스의 글 「한국 위기에 대한 미국의 반응」 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의 입장으로 보면 한국은 일본을 방위하는 전초기지라는 점에서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을 뿐 그 나라로서의 민주주의나 인권 문제는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고, △관변 측 미국인들의 외교사령적인 발언이 무엇이든간에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실천할 만한 능력은 없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본심인 것이 사실이며, △한국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는 권위주의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다, △한국인(조선인)에 대한 미국인들의 멸시는 역사적으로 1905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보호령화)를 인정한 것도 조선 민족은 자치 능력이 없다고 하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20세기의 전 기간을 통해 조선인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는 미숙한 민족이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일본 내지 미국의 관리(보호화, 식민지 지배, 미 군정, 신탁통치, 한미합동사령부) 없이는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전제 아래 정책을 수립해왔다는 것이 역사가 브루스 커밍스의 결론이라는 게 정 선생의 설명이다.

여기서 태프트-가쓰라 밀약과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은 1905년 7월 미국 육군 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 사이에 맺은 밀약으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고, 미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태프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을 포함해 80여 명의 일행을 이끌고 필리핀에 도착하기 전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해 일본 천황의 알현을 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훗날 태프트는 제27대 미국 대통령에, 가쓰라는 제11, 13, 15대 일본 총리에 올라 한일 합방을 주도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보다 두 달 앞서 맺은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중재로 1905년 러일 전쟁을 종결하기 위한 조약이다. 조약 체결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루스벨트 는 일본 대표단 일원인 가네코 겐타로를 백악관으로 불러 점심을 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언질을 줬다. “카리브 해 연안 지역의 쿠바를 미국이 지배하듯이 황해 연안 지역의 조선을 일본이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미국은 인정한다.”

이런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도 변한 게 없었다.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 10월 26일부터 5월 18일 광주시민혁명 직전까지인 1980년 5월 17일을 ‘서울의 봄’이라고 한다. 계엄령 해제와 김대중을 비롯한 야당 인사에 대한 복권 조치 등으로 서울은 모처럼 숨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전두환 퇴진과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시민·학생들을 향해 미국은 “버릇없이 자란 망나니들(spoiled brats)”(주한 미국 대사 워커), “한국인이란 ‘이게 너희 지도자’라고 누군가 목에 방울이라도 달아주면 무조건 따라가는 들쥐들(lemmings)이나 다름이 없다”(주한미군사령관 위컴)며 비뚤어진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로부터 30년도 더 지난 지금, 미국이 한국을 대하는 시선은 달라졌을까?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의 발언은 그렇지 않다는 걸 반증하고 있다.

김성원 기자  ukoreanew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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