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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의 마지막 도리[사설] 국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최순실 모녀가 있었다

“인류의 역사는 정의와 평화를 향해 도도하게 전진해 온 위대한 진보의 역사입니다. 독일이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끝에서 위대한 진보를 선도했듯이, 인류의 위대한 또 하나의 진보는 동쪽 끝 한반도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독일 통일이 역사적 필연이듯이, 한국의 통일도 역사적 필연입니다. 인간의 존엄, 자유와 번영을 향한 열망은 그 무엇으로도 억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4년 3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이 구동독지역 작센주의 드레스덴공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 했던 연설의 일부분이다. 그 해 초 박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밝힌 ‘통일대박론’의 구체화라는 점에서 이 연설은 국내외의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JTBC> 취재 결과 이 연설문은 박 대통령의 비선 실세라고 하는 최순실 씨에게 연설 하루 전날 이메일로 전달됐다. 위의 인용 부분을 비롯해 연설문 여러 군데에 빨간 색으로 표시가 됐다. 최 씨의 컴퓨터에서 발견된 만큼 정황상 최 씨가 고쳤을 가능성이 높다. 드레스덴 연설 외에도 40개가 넘는 연설문이 대통령의 연설 전에 최 씨에게 전달됐다는 게 <JTBC>의 설명이다.

그동안 최씨가 설립과 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에 재벌들의 돈 수백억 원이 흘러가고, 최씨 딸의 이화여대 특혜 입학과 부실한 학사 운영, 독일에서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최씨와 딸에 대한 특혜성 지원 등 끊임없는 추문의 뒤에는 청와대의 비호가 있다는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그런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차에 대통령의 연설문까지 미리 받아서 수정했다는 보도는 비선 실세에 의한 국정 논단, 국기 문란이란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다.

최고 권력자에게 비선 실세가 존재한다는 것은 민주적인 절차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각계각층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고, 그 과정에서 잘못된 정책이 있으면 수정하고 더욱 더 국민 의견을 수렴해 정책에 반영하자는 게 민주사회 대한민국 청와대의 존재 이유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 정권에서는 ‘국민’이 있어야 할 자리를 ‘최씨’가 대신해버렸다. 대통령은 국민의 눈치를 보고 의견을 수렴하는 게 아니라 비선 실세의 눈치를 보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국정원 간첩조작 사건, NLL 대화록 공개, 세월호 참사,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 북한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제재 일변도 자세 등 그동안 박근혜 정권이 보여준 비정상적이고 몰상식한 모습이 왜 그랬을까 이제야 짐짓 이해가 된다. 국민의 목소리, 국민의 분노, 국민의 슬픈 처지를 헤아렸다면 당장 대통령이 나서서 사과하고 일벌백계 했어야 할 일들을 끊임없이 다른 사건으로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처신해 왔던 것은 대통령 눈앞에 국민이 있었던 게 아니라 비선 실세 최순실 씨 모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사적인 관계가 있을 수 있고, 종교의 자유는 보장돼 있다. 그러나 그 사적인 관계나 종교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담은 연설을 좌지우지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의 불행으로 이어진다.

지금 비선 실세를 통해 국정을 농단하게 내버려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국민들은 엄청난 분노와 함께 허탈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이런 대통령에게 더 이상 국정을 맡길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여론이다. 하야(下野), 탄핵, 사임 이야기가 언론에, SNS에 수도 없이 올라오는 이유다. 개헌도, 남북관계도, 국정개혁도 오롯이 국민의 요구에 맡기는 것, 거기에 방해가 되는 것은 과감히 잘라내는 것(심지어 자신마저도), 그것이 국민과 역사 앞에 박 대통령이 마지막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대통령은 불행했던 가족사와 어두웠던 현대사를 헤쳐왔던 초심으로 돌아가서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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