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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110주년, 시일야방성대곡

오늘은 110년 전 '을사늑약'이 실질적으로 강제된 날이다. 흔히 11월 17일이 ‘을사조약’이 ‘늑약(勒約)’된 날로 알고 있으나, 그것은 ‘늑약’을 공포한 날짜를 17일로 했기 때문이고, 실제적으로 '체결, 조인'된 시각은 18일 오후 2시경이었다. 기존의 연구를 통해 110년 전 이 날을 되돌아보면서 감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제는 그 10여년 전 청일전쟁을 통해 한국에서 청나라의 영향력을 내몰았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에다 요동반도와 대만을 할양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러시아, 프랑스, 독일 세 나라의 ‘3국 간섭’을 불러왔고, 결국 요동반도를 되돌려주어야 했다. 3국 간섭을 통해 러시아는 한국과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켰고, 한국에서는 친로파가 대두, 그 뒤 친일파와 친로파의 끝없는 쟁투가 계속되었다.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이권을 두고 결국 일본과 러시아는 충돌하게 되었는데, 이게 1904년 2월에 발발한 ‘노일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의 남하세력을 막으려는 영국, 미국은 일본을 도왔다. 일본은 여순의 러시아 요새와 봉천을 점령(1905.3)하고. 이어 동해에서 러시아 발트함대를 격파(1905.5)하여 승기를 잡았다.

‘을사늑약’은 결국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하에서 이뤄졌다. 일본은 ‘을사늑약’에 앞서 미국과 영국, 러시아의 동의를 얻었다. 1905년 7월에 미국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가츠라(桂太郞) 사이에 소위 ‘가츠라-태프트’ 밀약이 이뤄졌고,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을 통해 영국의 동의를 얻었으며,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이 해 9월에는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조약이 조인되어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용인받았다. 이렇게 일제는 당시 강대국의 동의를 얻어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려는 계획을 착착 진행시켰다.

영국, 미국, 러시아의 국제적 승인을 받은 일제는 한국을 '보호국화'하기 위해 그 해 10월 28일 각료회의에서 8개항의 대책을 결정했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는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 미마시(三增久米吉) 영사 등과 함께 병력 증원, 궁궐경계 등 준비에 착수했고, 일진회(一進會)를 움직여 사전에 조약찬성 성명을 발표, 여론을 조작하는 한편 한국의 원로 및 현임 대신들에게도 손을 뻗쳤다. 이렇게 사전 정지작업이 진행되던 11월 9일 이토(伊藤博文)가 일왕의 친서를 갖고 특사 자격으로 내한, 그 이튿날 광무(光武)황제를 알현, 조약의 체결을 겁박했다. 16일에는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이 일본 공사로부터 조약체결을 강요받았다.

11월 17일 오후 3시부터 수옥헌(漱玉軒: 重明殿)에서 열린 군신회의에서는 아무런 결론이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일본 측 요구를 거절하기로 합의했다. 일제 측은 오후 8시경 폐회하고 돌아가는 대신들을 다시 강제로 모이게 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놓고는 이토가 밤 12시 반까지 대신들을 겁박했다.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이 강력하게 반대하자 그를 끌어내어 다른 방에 유페시켰다. 이런 공포분위기에서 학부대신 이완용이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조건으로 동의했고 이어서 다른 네 대신도 이완용을 따라 찬성에 가담했다. ‘을사오적’의 찬성을 근거로 이토는 황제의 윤허도 받지 않고 외부의 관인(官印)을 강제로 탈취하여 조약문에 조인하고 이를 발표했다. 이렇게 강제로 체결 조인된 일시가 11월 18일 오후 2시경이었다.

   
▲ 을사늑약 체결 후 찍은 기념사진 ⓒ독립기념관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양국 조약문의 원본에는 이 조약의 명칭이 적혀 있지 않다. 그 뒤 ‘한일협상조약’ ‘을사조약’이니 ‘일한조약’ ‘한국보호조약’이라고 했고, 최근에는 강제로 이뤄졌다 하여 ‘을사늑약’이라 하지만 아직도 정식 명칭은 없다. 이 조약은 회의 참석자들을 겁박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무효에 해당될 뿐 아니라 황제의 승인, 서명, 국새(國璽)의 날인도 없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불법조약이며 그 뒤 국제학회에서도 계속 문제가 되었다.

이날 밤 수옥헌(중명전) 내외에는 하세가와가 거느린 중무장한 일본군이 몇 겹으로 둘러싸 있었고 서울 시내도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이날 밤의 일본군의 상황을 <한국사>(42권, 국사편찬위원회, 2003)는 일본인의 연구를 인용, 이렇게 전한다. “일본군은 일본 공사관 앞, 기타 서울시내 전역을 철통같이 경계하였으며, 특히 시내의 각 성문에는 야포, 기관총까지 갖춘 부대를 배치해 놓고 있었다. 다른 별동부대도 검을 찬 채 시가지를 시위행진하였고 본회의장인 궁내에도 착검한 헌병 경찰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236쪽)

이렇게 정식명칭도 없는 ‘늑약’에 의해 한국의 외교권은 강탈되고 말았다. 한국의 외교는 동경 외무성에서 대행하게 되었고, 해외의 동포들은 주재국 일본 외교관의 ‘보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 “전적으로 외교에 관한 사항을 감리”하기 위해 한국 황제의 궐하(闕下)에 통감(統監)을 두게 되었고 개항장 등에는 일본인 이사관을 두도록 했다. 이로써 ‘통감정치’가 시작되어 한국은 반식민지상태로 들어갔다. 이 늑약에서 한국 측의 요구는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함을 보증한다”는 것뿐이다. 황실의 안녕·존엄과 나라의 외교권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 장지연이 황성신문에서 이 ‘늑약’을 두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했던 소리가 110년이 지난 지금, 내 귀에 쟁쟁하다.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이만열  mahnyo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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