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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전쟁’을 바라보는 진보의 시선

보수 세력의 '프레임 전쟁'이 시작됐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8년 동안 한국사회에서는 굵직한 사회적 의제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세력 사이에 몇 차례의 이념전쟁이 벌어졌다. 복지, 인권, 노동, 통일 등을 둘러싼 ‘프레임 전쟁’에서 진보개혁 세력은 보수 세력에게 번번이 선수를 빼앗겼다. 보수 세력의 주장이 옳아서라거나, 논리적인 타당성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보수 세력이 미디어를 장악하고, 사람들에게 보수의 색안경을 씌워 사회를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베스트 셀러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로 유명한 정치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커뮤니케이션학의 개념인 ‘프레이밍 이론’을 통해 현실 정치에서 보수 세력이 어떻게 진보 세력을 압도하게 되었는지를 분석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보수 세력은 치밀한 프레임을 고안해 대중들이 사회적 문제를 바라볼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보수적인 시각을 수용하게 함으로써 사회적인 의제를 선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그동안 각 의제별로 ‘보편적 복지는 공산주의다’, ‘노동귀족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 ‘흡수통일이 대박이다’ 등의 구호를 선점해 효과적으로 홍보해왔다. 이런 구호들은 보수가 장악한 매스 미디어와 ‘종북 프레임’에 의해 뒷받침되며 진보 세력의 대응을 무력화시켰다. 특히 종북 프레임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모든 의제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블랙홀 같은 기능을 했다. 진보 세력이 아무리 옳은 말을 하더라도 ‘종북’ 딱지가 붙으면, 대중들은 물론 진보 지식인들까지 그대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진보개혁 세력은 진보가 표방해야 할 큰 틀의 사고체계, 가치체계에 머무른 나머지 보수 세력이 쏟아내는 파상적인 공세 앞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87년 이후 이데올로기 분야에서 이뤄낸 한국사회의 여러 민주적 성과물들은 이명박, 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진 보수 세력의 공격에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역사전쟁은 이미 오래 전에 시작되었다
이런 ‘프레임 전쟁’에서 그나마 진보가 보수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던 분야가 바로 역사 담론이었다. ‘한국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는 일제 식민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해방 후 미소군정의 한반도 분할통치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38선 남쪽을 점령한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 정책 등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등장한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은 한국사회에 권위주의와 재벌 독점이라는 기형적 정치/경제 구조를 뿌리내리게 했다. 그러나 항일운동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이런 모순을 극복해가는 주요한 원동력이었다’는 진보의 운동사 중심 사관은 그것이 사실에 부합하기도 하려니와 민주화 과정과 맞물려 보급되면서 학계와 대중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역사인식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와 여당은 그간에도 진보 세력의 마지막 남은 보루인 역사 분야를 보수적 시각으로 재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해왔다. 이명박 정부 때 등장한 뉴라이트는 일제강점기의 경제 발전을 실증했다며 항일운동 중심의 근현대사 서술을 비판했고,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의 시장경제적 성과에 주목하여 반독재 민주화 운동 대신 ‘대한민국 건국사’를 역사 서술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뉴라이트 사관은 당시에도 학계와 시민사회의 호된 비판을 받았지만, 이들은 보수 세력의 전폭적인 지원과 정권 차원의 비호를 받으며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역사관을 공론화시켜 왔다.

학계에서는 소수에 불과한 이들 뉴라이트는 학계 내에서의 논쟁 대신 보수와 진보의 갈등에 편승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해왔다. 이들이 역사전쟁의 주요한 전장으로 삼은 곳은 대학이 아니라 중고등학교 교실이었다. 뉴라이트는 중고등학교 교과서가 ‘좌편향’되어 있다며 정부의 검정 교과서에 빨간색 낙인을 찍어 버렸으며, ‘좌편향’ 교과서 필진과 역사교사 그리고 전교조에 대한 색깔론을 펼쳤다.

   
▲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가 교육부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 발표가 있던 날 오전 청와대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사교과서국정화저지네트워크


박근혜 정부의 역사쿠데타
박근혜 정부 들어서 사회에 대한 권위주의적 통제가 강화되고 ‘종북좌파’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세가 심화되자 역사전쟁은 한층 적극적으로 수행되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때 한 번 실패한 바 있는 뉴라이트의 ‘대안교과서’ 제작 시도는 박근혜 정부의 ‘교학사 교과서’로 부활했다. 물론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교학사 교과서는 함량 미달의 편집 내용과 논란이 되는 역사관에도 불구하고 교육부의 검정에 통과해 일선 학교에 배포되었다.

그러나 보수 세력이 만든 ‘교학사 교과서’는 뉴라이트 역사관을 정식 교육과정에 편입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학계와 일선 역사교사 그리고 교육 수요자인 학생과 학부모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함으로써 한계를 드러냈다. 이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와 뉴라이트 역사관에 대한 신념으로 가득 찬 저들의 선택은 역사 교과서의 ‘국정화’라는 역사쿠데타로 귀결되었다.

이상과 같이 박근혜 정권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시도는 단순히 교과서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 오랜 기획 속에서 다듬어져 온 역사전쟁의 일환이다. 복지, 노동, 통일 의제에서 경제민주화, 노동개혁, 통일대박 등의 선전구호를 만들었던 것처럼 이번 역사전쟁 과정에서도 보수의 프레임 만들기는 매우 치밀하게 추진되고 있다. 보수 세력은 수년째 한국사회에서 맹위를 떨치며 진보 세력을 옭죄고 있는 종북 프레임을 이번 역사전쟁의 주력전선으로 설정하고 모든 선전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역사전쟁의 본질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 사안을 친일파 후손들이 선대의 잘못을 덮기 위한 공작이라거나 ‘제사’라고 보면서 권력집단의 개별적 행위로 치부하는 태도나, ‘국정화’에만 주목하여 이번 시도가 교과서 시장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만 비판하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전략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역사전쟁의 본질을 비껴가는 분석이다. 기존의 검정 교과서에서 ‘주체사상을 가르치고 있다’든지, ‘한국의 산업화 역사를 패배주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든지 ‘특정 정파의 역사관을 편향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저들의 주장에 대해 ‘주체사상은 박근혜 정부 들어 가르친 것이다, 원래는 안 가르쳤다’ 거나 ‘패배주의가 아니다, 산업화 역사도 위대하다고 가르쳤다’거나 ‘편향적이 아니다, 획일화가 더 문제다’라고 사안별로 변론하는 것은 보수 세력이 짜 놓은 전략 속에서 싸우는 꼴이며 또 다시 프레임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술이다.

그렇다면 진보 세력이 역사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어떤 아이디어가 필요할까. 우선 보수 세력이 역사전쟁을 추진하는 본질적인 의도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보수 세력이 역사전쟁을 벌인 의도는 단지 교과서 국정화에만, 친일파와 독재자를 미화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종북 프레임에 편승한 보수세력이 펼치는 역사전쟁은 복지, 노동, 통일 의제를 선점해 한국사회를 보수화하려는 치밀한 각본 속에서 추진되는 전략적인 공세다. 각 의제에 대한 보수 세력의 논리를 종합해보면 저들이 만들고 싶은 세상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저들의 역사전쟁이 전략적인 공세라면 진보의 대응도 사안별 반박 논리를 넘어 큰 그림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는 효과적인 구호
‘교과서 국정화 =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만들기’라는 구호에 사람들이 큰 호응을 하는 것은 그동안 한국의 진보 세력과 역사학계가 이룩한 이데올로기적 성과임을 부정해선 안 된다. 국정화 대응 논리를 ‘역사 교육의 다양성’이나 ‘교과서 시장의 공정한 경쟁’으로 국한시키는 것은 전략적인 사고가 아니다. ‘친일, 독재 미화도 문제지만 종북도 문제’라는 식의 양비론은 더욱 경계해야 하는 태도다. 야권은 절대로 역사전쟁을 종북 프레임 속에서 치르고 싶어 하는 보수의 미끼를 물어서는 안 된다.

한편 진보개혁 세력은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국정화 저지 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많은 교수학술단체와 진보 세력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에 참가하고 있으며, 캠퍼스 내에서도 역사학 교수들의 ‘집필 거부 선언’이 이어지고 있다. 대학생들의 대자보 행동과 다양한 방식의 시위 및 캠페인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활동 덕분에 국정화 저지 운동은 국민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점점 많은 세력이 결집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광장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대학생들의 이순신 동상 시위를 시작으로 10월 17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저지 범국민대회에는 천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역사전쟁에서만큼은 결코 밀려서는 안 된다는 진보 세력의 절박함도 매우 크다.

10월 17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진보 세력의) 사슬이 강하기 때문에 도저히 깰 수 없는 현실에서 국정을 채택하게 됐다”면서 “역사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또한, 이번 정국을 평하면서 “좌는 분열하고 있지만 우는 단결하고 있다”고 보고 “이대로 단결하면 다음 총선에서 180석 확보할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이번 역사 전쟁이 내년 총선을 바라보고 정치판을 이념싸움으로 몰고 가려는 의도에서 추진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낸 것이다.

역사전쟁은 박근혜 정권의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전쟁은 박근혜 정권의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 학계와 대학 사회의 저항이 만만치 않으며, 교육의 당사자인 중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또한 이번 역사전쟁을 제대로 이겨내고 향후 정치 지형을 반전시키고자 하는 진보세력의 의지도 점차 결집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교과서 국정화 정국은 여야의 정쟁으로 장내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수 세력을 장외로 끌고 나와 ‘친일, 독재 대 항일, 반독재’의 프레임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이 논쟁의 구도를 ‘친일=독재=이승만,박정희 지지자=어버이연합’에 맞서 ‘항일, 반독재를 외치는 청소년, 대학생’들의 싸움으로 만들어야 한다.

영국의 대처 수상은 강력한 이데올로기 공세를 통해 노동자를 탄압하고 사회를 철저히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는 데 성공하는 듯 했지만, 마지막에 ‘인두세’를 도입하겠다는 무리수를 둠으로써 불명예스럽게 퇴진했다. ‘국정화’가 박근혜 정부의 ‘인두세’가 되어 수세에 몰린 진보 세력이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글은 우리사회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됐습니다.

우리사회연구소  uri-societ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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