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고명재 지음, 난다 출판)

애정하는 작가의 책을 읽다가 “당신의 언어는 팽이처럼 저를 곤두선 채 돌고 싶게 만듭니다.” 이렇게 그의 글을 표현하는 문장에 너무나 궁금했던 시인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일 년에 한 번은 꼭 친가 식구들이 살고 있는 LA로 휴가를 가는데, LA에 가면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국 서점에 꼭 들른다. 서가에는 많은 신간과 베스트 셀러들이 비치되어 있었지만 내 눈에 들어온 책은, 고명재 시인의 연노랑 빛 시집 한 권과 무채색 표지의 산문집이었다. 내가 궁금해했던 바로 그 시인! 
참 오랜만이라 느껴졌다. 마주 앉아 그의 생에 대한, 그가 걸어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고 싶은 작가는.
시인의 시집도 정말 좋지만, 이번엔 산문집을 소개하고 싶었다. 이 산문은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고 너무너무 보고 싶어 썼던 글’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눈물이 차오르거나, 눈물이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순간들이 퍽 많았는데, 처음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을 때는 고명재 시인이 자신의 ‘시 쓰는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대목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자의식과 자기 연민을 빼는 것에도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아주 느리게 나는 ‘나’를 버리기 시작했다. 내 시가 별로라는 것, 내가 재능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걸 인정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천천히 ‘나’라는 사람이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 그 대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남’이 참 많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별게 아니다, 나의 시도 별게 아니다, 하지만 나도 용감하게 사랑할 수가 있다. 세상에는 정말이지 아름다운 시와 소설이 많았고 또한 아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런 그들을 응원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다보니 시 쓰는 일도 더욱 행복해졌다. 매일 밑줄을 긋고 어떤 책에는 입술을 대었고 어떤 책에는 이마를 기대며 끝나지 말라고 말했다. 틈틈이 시를 쓰면서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다.

 너는 평생 아무도 보지 않을 시를 쓸 거야. 홀로 그냥 쓰다가 사라질 거야.
 너는 남의 글만 읽다가 지워질 거야. 흔적도 없이. 아무도 모르게. 그래도 괜찮니.

 응. 괜찮아.
 이제는 괜찮아. 정말 괜찮아.

 이렇게 대답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시에 대한 사랑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그게 어떤 차이를 지닌 건진 알 수 없지만 ‘나’라는 걸 버리고 나니 모든 게 시원해졌다. 그 빈자리에 타자들이 찾아왔다. 아픈 사람들의 눈이 자주 보였고 나를 둘러싼 사랑의 둘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닭’중에서)

시인의 책을 읽다가 깜짝 깜짝 놀랐다. 이렇게나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 갈 수가 있구나 하고. 당선 뒤에는 자신도 자기 재능을 의심하며 씨름하는 10년의 시간이 있었다고. 가끔 나는 신랑한테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는데, ‘내가 죽고 나서야 세상이 내 달란트를 알아봐주는 것이 아닐까’하는, 화창한 날 카페 야외 테라스 앉아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사연이 있는 여자처럼 울었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대목에서 깊은 공감을 하고 위로를 받을 테다.

“너는 능히 할 거야.
 선하게 클 거야. 
 너는 오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될 거야.

 한때 나를 키우던 비구니가 어느 여름날,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수십 년 시간이 흘러 어느 겨울날, 나는 정말 시인이 되어버렸다. 나는 그가 살던 사찰에 가서 불상 앞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스님 나 시인 됐어요. 선하게 쓸게요. 서늘한 대웅전 바닥에 이마를 대면서. 아주 오래 아름다움을 말하는 사람이 될게요. 능선처럼 강물처럼 그렇게 쓸게요. 그후로 나는 ‘가능성’이나 ‘능선’같은 말만 보아도 갑자기 멈춰 서는 첫눈이 된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능, 하면 승僧과 등이 자꾸 생각나. 능소화처럼 힘차게 살던 여름의 우리. 나를 키워낸 비구니의 이름은 혜능이었다.” (‘능이버섯’중에서)

이 책의 시작점이라는, 어린 시절 그를 키워낸 비구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된 글들. 시인의 글로만 접해도 시인은 참 단정하고 선한 어른의 곁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구나 라고 느껴졌다.

“썩지 않는 시절이 있다. 고기 같은 거, 보온과 보냉이 필요한 것들을 감싸는 흰 방. 단칸방에 살던 시절 우리 가족은 겨울이 오면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세숫대야의 찬물과 섞어 머리를 감았다. 그러지 못한 날에는 물이 너무 시려서 동생과 나는 비명을 꺅꺅 질러대면서 부엌에 쪼그려앉아 머리를 감았다. 그렇게 겨울에 머리를 감는 건 방학 숙제보다 오래 미루고 싶은 일. 그때의 나는 부엌에서 머리를 감는 게 부끄러워 친구들에겐 집 주소를 숨기곤 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그때 나는 한줌도 불행하지 않았다. 몸은 춥지만 겨울은 정말 따듯하구나. 사람과 사람이 포개지면 그게 보온이구나. 좋은 부모, 좋은 사랑은 그런 걸 해낸다. 캄캄한 환경을 넘어설 무릎과 용기를 주는 것. 그때 우리가 살던 집은 너무 좁아서 가족 넷이 누우면 어깨가 겹치곤 했는데, 나는 그게 정말이지 행복했다. 매일 밤마다 가족이 나란히 꼭 붙은 채로 종알종알 떠들다가 잠들곤 했다.” (‘스티로폼’중에서)

아이에게 행복은, 그런 것이로구나.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안전하고 따듯한 사랑의 울타리. 

“반찬가게를 하는 엄마와 시장에 가면 멸치를 고르는 데 제법 많은 시간을 쓴다. 다시용 멸치서부터 각종 볶음용까지 굵기와 색깔, 습도, 모양, 원산지 등을 꼼꼼히 살피며 엄마는 손끝으로 멸치를 만진다. 질 좋은 멸치를 싸게 산 날은 엄마가 유난히 웃는다. 엄마가 웃으면 배가 따듯해진다. 그래서 손끝으로 엄마가 멸치를 만질 때 나는 이번엔 좋은 멸치를 만나게 해줘요 기도한다. 저렇게 작은 게, 세밀한 게, 반짝이는 게, 우리 가족 전부를 먹여 살렸다. 웬만해선 오 센티미터를 잘 넘지 않는 게, 손톱보다 작게 은빛으로 반짝이는 게, 우리 가족을 구했다. 그 덕에 학교도 다녔다. 그래서 나는 멸치라는 바닷물고기가 늘 애틋하고 미안하고 사랑스럽다.

 집안이 폭삭 망하고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다 돈을 어찌어찌 겨우 모아 엄마는 할머니 집 앞으로 돌아왔다. ‘엄마, 나 엄마 집 앞에서 반찬 만들래.’ 돌아온 엄마는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고 할머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머니 집 맞은편엔 작은 시장이 있는데 엄마와 아빠는 여기에 아주 작은 가게를 열게 되었다. 그후로 수십 년, 엄마와 아빠는 반찬을 만들며 지금까지 용감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노동의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나는 늘 간판만 봐도 가슴이 아프다. 할머니도 그랬다. 말년의 할머니는 딸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며 가슴을 쿡쿡 눌렀다. 그러면서도 매일 엄마 가게에 들렀다. 아픈데도 매일 들러서 아픈 걸 봤다. 참 이상하지, 사랑은 그렇게 묘한 방식으로 지속되는 애틋한 마음의 운동.

 나랑 할머니는 둥근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엄마가 갖가지 반찬을 만드는 걸 보고는 했다. 특히 나는 엄마가 멸치를 볶을 때 이상한 기대감에 부풀곤 했는데 그건 순전히 멸치의 아름다운 빛깔과 달궈진 팬 위에서의 우아한 궤적 때문이었다. 은빛 멸치를 팬에 올리고 볶기 시작하면 엄마의 손짓 한 번에 얘들이 튀어 올랐다. 팬 위에서 차글차글 소리를 내면서 공중으로 휙휙 떼로 날아가는데 그 모습이 자유로운 헤엄 같았다. 저렇게 떼로 움직이며 살아갔겠지. 무엇보다도 나는 멸치의 빛깔이 좋았다. 은화같은 멸치들이 몇 분 사이에 팬 위에서 금빛으로 눌어붙었다. 그럼 좀, 덜 가난해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럼 좀, 할머니가 덜 슬퍼할 것 같아서 그럼 좀, 환기를 할까요? 명랑하게 말하고 가게 문을 활짝 열고 볕을 쬐었다. 그렇게 삼대(三代)가 멸치 냄새로 매캐한 가게에서 가슴 졸이며 서로를 훔쳐보았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햇빛, 은빛, 금빛도, 낡은 팬도, 멸치도, 물엿도 할머니 백발도 돌이켜보면 모든 게 햇살 속에 있었다. 그 모든 게 사랑의 풍경이었다.” (‘빛’중에서)

멸치를 볶는 것에 대한 묘사가 이렇게나 예술적이고 가슴 찡하고 아름다울 일인가. 그의 문장들을 읽어내리다 보면 나도 모르 그 시간, 그 곳에 가있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아픔으로 쓰여질 수 있는 시간들을 사랑이라 말하는. 같은 시간을 똑같이 살아내도 이렇게 표현해낼 수 있었을까 나는. 시인이 지나온 눈물겹도록 아름답고 진한 사랑의 시간들, 사랑으로 쓰여진 날들. 

한때 나를 키워준 비구니에게⋯⋯로 시작하는 이 책의 말미에 시인은 이렇게 남겼다. 

“보고 싶을 때마다 이 글을 썼습니다. 
마음을 다해 당신 앞에 놓으려고요.

생각해보면 마음은 한 번도 보인 적 없어요.
단 한 번도 가시광선 아래에 드러난 적 없어요.

그럼에도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는 아름다운 사실.

그래서 이젠 만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마음에만 존재해도 괜찮습니다.

볼 수 없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어요.

이것은 참 흔하고 놀라운 끈기입니다.
그걸 꽃처럼 쥐고 살아갈게요.”

책을 읽는 동안 뱃속이 데워지고 뭉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책 한 권을 읽는데 계절이 바뀌었다. 오래오래 찬찬히 음미하며 읽고 싶어서 마음이 순해지고 맑아지고픈 기분이 드는 순간마다 꺼내어 조금씩 읽어내린 탓이다. 첫장부터 끝까지 시인의 언어로 사랑을 노래하는 책. 그를 키워낸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 그가 받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어떻게든 그의 곁엔 늘 시가 함께했기에 그는 사랑을 쥐고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고 말한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살아도, 가난 속에 있을지라도 사랑이 있다면, 사랑 안에 있다면 그 사랑을 지켜낼 수 있는 거군요. 우리를 일으키고 우리의 생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되어지게 만드는 것은 결국엔 사랑이었지, 이 계절 이곳에서 나는 당신처럼, 나를 둘러싼 사랑의 둘레를 떠올려봅니다. 시인에게 시와 함께 당신 안의 맑음을, 아름다움을, 사랑을 끝끝내 지켜내 주어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다.

김은진 ( (윌로우리버 연합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