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경 목사의 영화일기

《플랜 75》 (Plan 75, 2022)

가까운 어느 미래,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일본은 소위 국가의 경제력을 갈아먹기만 한다는 노인들에 대한 혐오와 증오범죄가 폭증된 상태다. 이에 국가는 노인들을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길을 연다. 국회가 ‘플랜 75’ 법안을 가결시킨 것이다. 이 법안으로 이제 75세 이상 되는 모든 노인들은 모든 장례절차를 포함한 경제 지원과 함께 자발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니게 된다. 간단히 말하자면 정부가 제공하는 안락사 서비스인 것이다. 의사나 가족의 동의도 필요 없는 파격적인 자율 선택, ‘플랜 75’ 제안을 받아들인 노인에게는 신청하자마자 준비금 명목으로 100만원 상당의 현금이 주어지고, 장례 시에는 무료 합동 화장서비스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조치가 과연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까? 이 합법적인 사회적 살인에 대한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효율을 앞세우며 시행하는 사회의 모든 조치 이면에는 언제나 숫자에 가려지고 지워진 ‘사람’이 있다. 영화는 ‘플랜 75’를 둘러싼 네 명의 인물을 통하여 바로 이 ‘사람’을 드러낸다. 독거노인 미치는 호텔에서 객실 정리 업무를 하며 꿋꿋하게 홀로 살아가던 노인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강제 퇴직을 당한 그녀는 충분히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플랜 75’를 신청할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다. ‘플랜 75’의 신청과 홍보를 담당하고 있는 히로무는 자신의 업무에 성실한 공무원이다. 그러나 우연히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삼촌을 신청자로 만난 이후 노인들을 대상으로만 대하던 자신의 태도에 균열이 일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플랜 75’의 상담 콜센터 직원 요코는 신청자 노인들과 정기적으로 대화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상담사로서의 그녀의 주된 업무는 언제라도 변심할 수 있는 노인들의 결심을 유지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내담자로 만난 미치와의 교감 속에서 요코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이주노동자 마리아는 심장병에 걸린 딸의 치료비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요양원에서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는 더 나은 보수를 위해 ‘플랜 75’의 마지막 단계로 직장을 옮긴다. 그 일은 노인들의 시신과 유품을 처리하는 일이다. 노인들의 삶을 돕던 일이 노인들의 죽음을 돕는 일로 변하면서 그녀의 마음 역시 점점 더 황폐해져만 간다.

영화 속 라디오에서는 ‘플랜 75’가 실시되고 3년 만에 무려 1조 엔의 경제 효과를 달성했으며 그로 인해 향후 10년 내로 ‘플랜 65’로의 확대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흐른다. 근 미래의 가상현실을 다루고 있기에 이상하게도 SF 장르로 분류되는 이 영화를 통하여 이야카와 치에 감독은 장밋빛 사회적 전망 이면에, 찬란한 경제적 효율성 이면에 언제나 숨겨지고 가려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보자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가치와 생의 아름다움을 보자고 말한다. 감독은 2016년 일본에서 발생한 장애인 살인 사건이 이 영화의 방아쇠가 되었다고 말했다.20대였던 범인이 저지른 이 증오범죄로 말미암아 중증장애인 19명이 살해당했고 27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혐오와 무관심이 지속된다면 언제든 끔찍한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감독의 이 통찰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에도 똑같이 유효하다.

하나님의 숨이 머무르는 모든 인간은 그가 누구이든, 그가 어떠하든, 고귀하고 거룩하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고백한다면 여기에 무슨 설명과 이유가 더 필요할까? 그러므로 숫자로 사람을 대치하려는 모든 시도와 이익으로 사람을 저울질하려는 모든 시도는 사탄적이다. 사탄적이라는 말은 악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혹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고삐 풀린 자본이 점점 더 주인 되어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는 방식으로 사람을 보는 연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유혹은 언제나 생각보다 강하고 예상보다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