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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교회의날 셋째날과 발제 자료 모음
2009년 09월 21일 (월) 13:44:10 송양현 song-1002@nate.com

교회의 날 세째날 행사가 지난 19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이화여대 신학대학원에서 있었다. 다음은 사진으로 보는 이모저모와 이날 발제한 원문자료들이다.

   
 

 
  ▲ "교회의 날" 플래시 동영상 10분(주최 측 제공)  

   
▲ 교회와 사회선교 대안사례 발표
   
▲ 교회의 민주적 운영 사례발표
   
▲ 교회, 문화찾기 "우리가락 찬송배우기"
   
▲ 기독성소수자와의 만남
   
▲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역사와 비전
   
▲ 청년 마당
   
▲ 당일 운영된 어린이방

낳는 자의 품성이 존중되는 세상을 꿈꾸며

이 경자 ❚ 소설가


사람으로 태어나서 같은 사람끼리 반가움을 가지고 함께 어울려 사는 것. 다섯 개의 손가락처럼 서로 다른 모습과 역할로 존중되는 것. 코스모스와 채송화가 서로 어울려 아무렇지 않은 것. 물과 불이 서로의 도움에 감사하고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환갑을 넘긴 나이의 나는 오늘 이 시간에도 이런 ‘가망 없는 꿈’을 상상하고 그리워하며 우울의 늪에 깊이 빠져든다.
우울하면 생명력이 위축되기 때문에 숨쉬기 어려워진다. 그러니 살기 위해 숨을 크게 쉬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꿈을 꾸는 일을 버려야 한다. 하지만 우울은 계속 되고 꿈을 붙잡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다시 꿈을 상상해 본다.
왜 나는 지금 우울하지? 날씨도 어떤 날을 비가 내리고 어떤 날은 바람이 불고 그렇듯이 나라는 자연생명에 그런 비바람 치는 날이 온 것일까?
그래서 나를 곰곰이 들여다본다. 존재에 비바람이 치는 건 아니다. 이 우울이라는 비바람은 나라는 생명자체의 자연현상이 아니다. 우울은 만든 건 적응하기 싫은 이 사회가치와 질서 때문에 생긴 분노의 감정이다. 분노의 탈(가면)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질서를 만드는 가치는 남성이고 남성적인 것이고 가부장적인 것이다. 나는 이런 체제에 여자로 태어났다. 여자라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 이미 차별적 존재의 불이익을 받는다. 사회적 운명인 생긴 것이다.
남성중심의 사회가 여자의 생존에 대해 요구하는 것은 여자의 생명 그 자체의 특성을 무시하고 도리어 억누르는 부분이 많다.
나는 채송화인데 자꾸 코스모스가 되라고 한다. 채송화는 코스모스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채송화가 꽃밭에서 살아남으려면 흉내라도 내야 하는데 그것이 생명 자체를 교란시킨다는 무서운 이치를 이 사회는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도 채송화는 코스모스가 되려고 노력한다.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낳아서 길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억지로 기를 쓰고 코스모스 흉내를 내보지만 지친다. 자기 생명의 내면으로부터 억지로 끌어내는 힘이어서 마침내 지친다. 몸이 지치면 머지않아 정신적으로 황폐해진다. 자기 모멸감이 너무 깊어서, 분노가 너무 거세어져서.
가부장 사회는 극소수의 지배자와 대다수의 배지배자가 공존하는 사회라서 기본적으로 사람을 끝없이 경쟁하게 한다.
오래전 가부장제가 공고할 땐 자유경쟁조차 불가능했다. 경쟁에 낄 수 있는 층위를 인위적으로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사람을 상업적으로 유효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속삭인다. 자유주의이다. 좀 더 잘 팔리게끔, 좀 더 비싸게 팔리도록, 자유롭게 경쟁하라고 ……한다.
이것이 가부장제, 자본주의가 사람에게 요구하는 생존의 핵심방식이다.
경쟁한다는 것, 상업적으로 판다는 사회행위는 생명을 낳아서 기르는 사람의 정신체계엔 그 인자가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유전자는 가장 좋은 형질의 자식을 낳으려는 노력을 할 뿐이다. 자연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우리에게 자연은, 사람이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일 뿐, 우리의 생태계는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그리고 지배라는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구조에 지나지 않는다. 달도 파고, 화성도 개발한다. 돈이 되면 모든 것을 팔고 산다. 파고 사기 위해 자연은 상품으로 그 존재가 바뀐다.
이런 경쟁 구조에서 살아남은 것. 그것이 이 시대의 위대한 생명이고 정신이다.
이런 정신과 생명은, 낳은 자의 정신과 원천적으로 ‘다르다’. 어미는 낳는 행위 자체로 경쟁하지 않고 팔려고 다듬지 않는다. 이것이 어머니다.(여성 자체가 어머니는 아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낳는 자들에게 ‘어미의 사랑과 헌신이라는 품성’을 개조시킨다.

나는 나의 우울이 이런 시대정신과의 충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10여 년 전, 내가 거의 죽을힘을 다 해 루그호의 모소족을 찾아 간 것은 그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모계사회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서 내가 죽을힘을 다 해 붙잡으려고 한 가치, 그 품성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들은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거울로 남아 있었다.
그들이 가진, 자연에서 익힌 삶의 질서. 그리고 관계. 자연스러운 사랑과 존중.
나는 그곳에서 존재의 평화를 보았다.
지금 모소족의 모계사회는 관광 상품으로 자본주의의 시장에 내던져졌다고 한다. 애석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어제 오후에 산에 올랐다. 어느 대학 뒤뜰을 지나가다가 아직 유치원에도 보낼 수 없는 아이를 둘씩 데리고 있는 아버지들을 보았다. 조금씩 떨어진 데서였다. 나는 그들을 통해 이 시대의 변화를 예감했다. 남자들이 원하지 않아도 실업을 통해, 엄혹한 경쟁체제를 통해 남자로 하여금 여자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폄하되었던 육아와 살림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남자는 여성적인 것들과 혼합되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위해 가정의 밖에서 돈을 벌듯이, 그리하여 남성들의 사회를 자기 경험과 정신에 혼합하게 되었듯이.

세상은 쉬지 않고 변화하고 그 변화는 우주적인데, 인간 개인은 누구나 찰나를 산다.
그 찰나조차 행복하게 하지 않는 편견과 폭력 때문에 나는 오늘 우울하고 또 다른 누구들도 우울할지 모른다. 우리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아는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화를 향해 몸의 방향을 틀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이 우리의 희망이길 바란다.

교회개혁은 여성성 실현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김숙경❚기독여민회 총무



1. 들어가며

여성 억압의 역사는 인류 시원부터라는 설도 있지만 하나의 추측일 뿐이고 그마저도 현재의 시각과는 다른 것이라 속단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농경제 사회 어느 시기부터인가 대다수의 국가들이 가부장제를 근간으로 그 기반을 다졌고 가부장제는 자본주의로 더욱 강고한 함락불능의 성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자유경쟁, 자유선택인 것처럼 위장하는 신자유주의는 푸코가 말한, 자율적으로 권력에 자신을 검열하는 규율권력의 정점이기도 하다. 예전처럼 권력은 소수 특권층이나 제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학교나 감옥 등 여러 가지 형태로 작동한다. 푸코에 의하면, 권력이 처음 작동하는 곳은 인간의 몸이다. 특히 여성의 몸을 성적 욕망의 덩어리(물화)로 치환하면서 여성 스스로 가치폄하고 자율적으로 검열하며 통제하도록 한다. 이러한 실례는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이론은 현대 사회에 시사점을 던져주지만 여성의 억압을 간과한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경계를 넘나들고 스스로 노마드족(?)으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의 거침없는 공세는 여성의 일상조차 위협하고 있다. 한마디로 여성의 빈곤화는 전방위적(영적.육적.물질적 빈곤화)으로 진행 중이다.

한편에서는 체계와 생활세계로 나누고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서의 생활세계를 신사회운동의 잠재력으로 인정한 하버마스나 친밀성이 갖는 구조적 변동을 중시하면서 성해방은 사회적 삶을 광범위하게 정서적으로 재조직하는 매개가 될 수 있다며 생활정치를 이야기 하는 기든스의 인식에서 여성이 인식론적 특권, 저항적 주체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포스터모더니즘과 이후 운동론에서 여성을 재평가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세계에서의 여성은 더욱 피폐해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중층적 억압이 바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여성, 특히 교회가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나는 공간이라는 현실은 참으로 비극일 수밖에 없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인식의 출발은 여성성은 계급성에서 출발해서 사회적소수자의 위치성을 지니며 그것은 기존의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넘어선 새로운 세계의 담지자, 곧 저항적 주체라는 점이다. 나아가 여성성은 생명성을 내포한다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에 대응하는 교회가 가져야 할 지점이라는 것을 거칠게나마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런 점에서 모소족의 모계사회는 농경제사회(문화경제적으로 뒤쳐진?)에나 있을 법한 과거의 일이 아니며 현재이자 우리의 오래된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미리 밝혀 둘 점은 한국교회라는 표현이 모든 교회를 포함하는 것은 아니며 대다수 한국교회의 성적 억압의 경향성을 말한다는 점이다.

2. 우리가 지녀야 할 여성성

우선 여성성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로서 위치를 갖는 성적 계급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생물학적인 성이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성을 지녔다고는 볼 수 없으며 여성이라는 젠더적 섹슈얼리티적 자기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또한 기존의 여성적 특성이라고 하는 부드러움, 화합, 관계중심적 활동 등이 여성 본성적 특성이냐는 질문은 논자가 얘기하기 어려운 무수한 담론들이 존재하기도 하고 이것을 본성화 했을 경우 또 다른 억압이 될 수 있으므로(여성적 특성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이 주변에 너무나 많지 않은가!)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중국 모소족 모계사회 사례를 중심으로 여성성의 가능성과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여성적 특성이 중국 모소족 모계사회에도 현재 진행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한국교회와 다른 점은 그것이 가치폄하나 왜곡찬양하여 여성들에게 올무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에게도 성역할은 있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주로 가사노동이나 농사며 집안경제 관리를 담당하고 남성들은 주로 목축이나 교역을 담당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모계사회도 한 집안에 남성이 없으면 여성이 목축 등의 일을 하기도 하고 남성들은 조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위해 요리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부끄러운 일이거나 억압으로 작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가사노동이나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점은 남성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남성들이 조카들을(결혼제도가 없으므로 아이들은 어머니의 집에서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으며 살아간다)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을 담당하고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긴다는 점이다. 그래서 모소족 남성들은 모성성(여성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떤가? 여성들은 교회에서도 많은 노동을 한다. 기실 교회는 여성 노동력에 기생해서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여성들에게는(특히 평신도 여성) 가치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공간이 또 교회다. 가사노동이나 보살핌 노동이 폄하되는 것은 그 노동의 가진 성격 때문이 아니다. 여성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계사회가 그 사실을 잘 보여주지 않는가? 결국은 권력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과대평가라는 반론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권력을 인식하든 하지 않든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도처에 여러 변형된 형태로 있어서 뚜렷이 인식하기 어려울 뿐이다.

한편 교회의 역할 중 중요한 것은 힘들고 지친 이들을 물가로 인도해서 먹고 쉬게 하는 보살핌 노동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일반사회보다 더욱 여성들(보살핌 노동의 주체로서)을 필요로 한다. 아니 여성들의 보살핌 노동이 없으면 교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살핌노동은 폄하되고 왜곡되며 사후 천국에서나 보상받을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으로 얘기하면서 여성에게 순교자(?)의 역할을 강요하는 것이다. 당회에 참여해서 교회운영권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발언권도 변변히 갖지 못하는 게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300만, 500만 성도운동 등 머릿수 늘리기에만 관심 가질 뿐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억압과 차별, 배제의 정치학적 지형은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성서 속의 여성성은 어떤가? 성서에서도 물론 여성들에 대한 왜곡과 변주가 심심치 않게 있어왔지만 구주 예수야 말로 가장 여성성의 전형이 아닌가? 신약의 등장인물 중 가장 감정이 풍부하고, 말이 많으며 부드럽고 유약하다(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여성적 특질이다!) 게다가 예수는 유유상종이라고 과부와 고아 와 성매매여성들과 함께 어울렸다. 어쩌면 그러한 예수의 여성성이 예수로 하여금 더욱 핍박받는 요인으로 작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또 어쩌면 그런 예수의 여성성이 새로운 세계의 담지자로 작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3. 교회의 ‘여성되기’, ‘여성성갖추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성성이란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생물학적 여성은 여성성을 취득하기 쉬운 위치성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또한 생명에서 중요한 개념인 모성은, 여성학자 사라 러딕이 얘기했듯이 모성이란 출산과 양육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출산행위와 활동으로서의 어머니역할을 구분하면서 남성도 양육자가 될 수 있음을 그래서 모성성을 가질 수 있음을 얘기한다. 즉 새로운 세상의 담지자가 될 수 있음이다. 이것은 비단 개인 남성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도 ‘여성되기’, ‘여성성갖추기’를 할 때 새로운 세상의 담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여성성은 자기 정체성을 갖고 사회적 약자로서 자신의 계급성을 인식하고 모성성으로 중무장(?)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요는 끊임없는 자기성찰과 혁신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여 모두에게 ‘여성되기’를 요구할 수는 없으나 한국교회에서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여성되기’ ‘여성성갖추기’인 것은 두 말할 나위없다.
모계사회가 시사하듯이 어머니의 권위는 존중하되 권력이 집중되지 않고(모계사회에는 권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저 어머니를 가장으로 그 권위를 존중하고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억압하거나 배제. 착취하지 않는다) 골고루 분산됨으로써 평등하면서 모두 행복한 관계를 낳을 수 있다. 교회가 ‘여성성갖추기’를 했을 때 경쟁적 관계가 아닌 협력적 관계로, 교회와 지역사회를, 나아가 한국사회를 행복한 생활세계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단지 우려되는 것은 교회가 가진 권력을 나눌 때 혹은 없앨 때 다소간의 혼란이 잠시 있을 수 있고 이로 인해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수 있다. 일종의 명현반응처럼 고통을 감내해야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진보 안에서도 민주적 운영, 수평적 권력 배분에 대해 공감하면서도 여성적 지도력에 대해 못 미더워하고 예전의 안정적이었던 남성지도력이 있는 공간을 그리워하고 돌아가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 안의 가부장성이다. 이러한 가부장성은 깊이 내면화되어(예를 들면, 여성이 여성목회자 청빙을 반대하는 경우가 많다) 생물학적 여성에게도 존재한다. 우리부터 가부장성을 성찰할 일이다.

4. 나가며

교회의 본질이 섬김이라면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닌 평등성 민주성을 지향해야 하며, 곧 ‘여성되기’ ‘여성성갖추기’를 해야만 교회 본연의 생명성을 유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성은 모성성을 담지하고 모성성은 생명성을 담지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움직임을 속성으로 한다. 생명은 멈추는 순간 부패가 시작되고 더 이상 생명이기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생명성을 거부하면 어떠할지는 지금의 남성적 교회가 가진 문제점으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구체적인 현실에서 교회는 모계사회적 여성성을 지닌 여성지도력이 요구된다. 환상과 속임수로 현혹하는 독점적인 남성적 권력에 기초한 미실적 지도력이 아닌, 소통과 나눔을 주는 여성적인 선덕여왕적 지도력이 필요한 때다. 그런 점에서 모계사회는 한국교회의 미래로서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레즈비언이 되어 레즈비언으로 사는 나의 이야기


들어가며

여기에 쓰는 이야기는 책으로 나올 것을 염두에 두고 이미 쓴 글을 조금 편집했다. 그 책은 여러 저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I. 성장기 이야기

나는 딸 셋 중 둘째로 태어나 두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있고, 일곱 살 차이 나는 동생이 있었다. 동생하고의 나이 터울이 많은 것은 우리 집에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엄마가 아들을 낳으려다보니 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을 보게 된 때문이다. 내가 어려서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후 시골에 사시던 할아버지라도 한번 오실라치면 집안이 발칵 뒤집히곤 했다.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는 없는 아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었다. 예를 들면, 나의 아버지가 장손이면서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둘째 작은 아버지 댁의 차남을 우리 집 아들로 호적에 올려야 한다든가, 씨받이와 같은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 들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할라치면 마치 내가 가정적인 이유로 인해 레즈비언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는다. 직장 사람들은 나를 유년기의 상황으로 인해 가부장적 사회가 만든 레즈비언이라 말하기도 하고, 내가 실제로는 얼마든지 이성애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레즈비언으로 착각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반문을 하곤 한다. 하지만 성적 자기 결정권 (지향?) 이 그리 쉽게 결정내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이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보다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것 같다.
실제로 나에게는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적잖이 있었다. 결혼할 기회도 있었지만 나는 연애도 결혼도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초등학교 가기 전부터 동네 남자 아이들이 밖에서 하는 모든 게임과 놀이를 섭렵했다. 나에게는 남자 아이들과의 놀이가 즐거운 게임이라기보다는 지느냐, 이기느냐의 사투에 가까웠다. 게임이나 놀이에는 두 가지 방식만 존재했다. 지느냐, 이기느냐? 혹은 다 따느냐, 다 잃느냐? 언제나 이분법만이 존재했다. 어른이 되고서도 적과 싸움은 할지언정 동침은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며,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남자에 대한 한계다. 안전함을 느낄 수 없는 존재와 함께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가? 제도라는 즉, 모든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해야 한다든가, 남자는 여자와, 여자는 남자와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제도는 많은 사람들의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 파란불일 때 건너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빨간불로 보이기 때문에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개개인이 내리는 결정을 100% 인정해주어야만 발휘될 수 있는 권리다. 세상이 변화하는데 왜 유독 사랑을 할 수 있는 권리에는 제한이 따르고 검열이 가해져야만 하는지 따져볼 일이다. 이 제한과 검열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가 누구의 사랑을 검열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릴 때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여자아이들하고는 잘 놀지를 못했는데, 여자아이들의 놀이는 격렬함이 없고 승리감이 덜한 놀이들이어서 별로 흥미를 못 느꼈다. 대신 안전함을 느꼈고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과 있으면 마음이 편했고 안전함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나의 성정체성을 상당히 잘 말해준다. 여중, 여고를 다니면서는 어릴 때 남자 아이들에게 가졌던 승부욕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고, 동성친구들과 실제로 경쟁의식을 느껴본 적이 별로 없다. 동성 친구는 지켜주고, 도와주고, 협력해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여학교 시절 동성애로 인해 고민하거나 ‘내가 동성애자가 아닐까?’ 하는 물음을 진지하게 해본 적은 없다. 친구들이 가끔 내 얘기를 하며 좀 색다른 취급을 하곤 했다. “❍ ❍는 남자애처럼 말도 잘 안 해.”, “❍ ❍가 청소하면 이상해.” 등등 남녀의 역할이 고정된 일상생활의 틀에 비춰볼 때 나는 여자 아이도 남자 아이도 아니었다.

II. 호모포비아를 극복하고 나를 찾다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때는 종교에 심취해 종교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물론, 교회에서 어릴 때부터 동성 간의 사랑이 잘못된 사랑이란 걸 배웠고, 동성을 사랑하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이 없었다. 첫사랑 요시꼬를 만나기 전까지는. 신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유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열심히 준비했다. 좀 더 자유로운 세상에 가서 배우고 싶었다. 그러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 있는 대학 철학과 학사과정에 편입했다. 철학과 친구들과 어울리던 중 시낭송회에 갈 기회가 있었고 그곳에서 김소월의 ‘집 생각’이란 시를 영어와 한국어로 읽었다. 한국어로 읽다가 눈물이 났다. 진짜 집 생각이 나서. 친구들이 위로를 많이 해주었다. 그리고 한 친구는 나를 파티에 초대할 테니 같이 가자고 했다. 게이, 레즈비언들이 모인다고 하기에 좀 망설여지긴 했지만,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둘 다 남자 같아 보이던 레즈비언 커플, 여자보다 더 쭉쭉 빵빵한 여자 같은 남자, 그 남자를 안고 춤을 추는 체격 좋고 남성미 넘치는 남자의 게이 커플, 그리고 많은 커플들이 제각각 부둥켜 않고 춤을 추었다. 내 속에 비록 동성애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호모포비아가 느껴졌다. 하지만, 한번 발동한 호기심에 그 후 소모임에도 가게 되었는데 캠퍼스에서 마주친 동양계 학생들, 얼핏 한국인 2 세로 보이는 친구들도 있어서 불편한 마음에 모임을 마치지도 못하고 도망 나오듯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미국인 친구들 중 그 모임의 회장과 친구가 집에 와서 모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나의 성정체성에 대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두 번의 모임을 갖은 후, 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아직 레즈비언으로 살아가기에는 용기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고 내 속의 두려움을 보았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고 인생의 중요한 부분(내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마음의 책갈피에 잘 접어 놓았다. 언젠가 다시 그 페이지를 펴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그 후 10년이 조금 더 지나서야 대학 때 잘 접어서 내 마음의 서재에 꽃아 놓았던 책을 펼칠 기회가 생겼다. 여전히 미국에서 살고 있었고, 병원에서 목사로 일도 하고 공부도 하던 레지던트 사목 시절이었다. 내가 일하던 병원에는 레지던트 및 사목들이 20여 명쯤 되었는데, 오전에는 모여서 수준별로 공부하고 오후에는 3개의 병원을 돌며 순환 근무를 했다. 한국에도 이런 시스템이 생기고 있는데, 임상목회 훈련(Clinical Pastoral Education- CPE) 이라 부른다. 오전에 모여 공부를 할 때 병원에서 일하는 목사가 갖추어야 할 태도라든지 환자나 가족들을 돕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 교육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자기 개방’이었다. 처음에 내 개방을 하고,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단계별로 접하고 충분히 동료들과 상사들과의 대화와 상담을 통해서 배울 수 있도록 되어있는 교육 시스템이었다. 1년 반 동안 5단계 학습과정과 2단계 수준을 거치며 참으로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자기 개방을 하지 못하는 동료들이 중도 하차하는 것을 보기도 했고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자기 개방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가차 없이 메스가 가해졌다. 동료들로부터 때로는 수퍼바이져들로 부터 격려, 질타, 칭찬, 대립 등을 피할 수가 없었는데, 나도 첫 단계에 어려움이 있었다. 내 개방을 한다는 것은 즉, 내가 누구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과연 어디까지를 개방해야 한다는 건지 난감했다. 한국에서의 교육은 너무 지식 교육에 치우쳐서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교육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개인적이고도 친밀한 교육에 익숙하지 않은 내 자신을 발견했고, 그 친절함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성장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성장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설레임도 있었다.
나에 대한 개방의 두려움은 내가 솔직해 졌을 때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는데, 그룹 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동료들 중 성공회에서 집사로써 정치학과 교수를 하다가 게이인 것이 드러나 학교에서 부당 해고를 당한 사람이 있었다. 그 친구로부터 에이즈에 걸린 이야기, 그것을 딛고 일어나기까지의 용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 속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수업시간에 “예수께서 에이즈를 고쳐주셨다.”라고 이야기 했다. 너무 놀라운 말이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는 동성애를 그분을 통해서 고침을 받았다라고 너무나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며 나의 성 정체성의 혼란은 시작되었다. “올 것이 왔군.” 내 속에서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하지만 이 숙제를 풀지 않고는 온전한 크리스챤으로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개신교 목사인 나와, 천주교 신부, 수녀, 성공회 지도자, 무슬림 이맘, 유대교 랍비, 유대교인들 등 종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이 모여서 교육을 받으며, 난 하나님께서 세상 어디에나 계시고, 어떤 것도 하실 수 있는 분임을 느꼈다. 동료들을 통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을 발견했고, 그들이 찾는 진리가 나의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느꼈다. 내가 그동안 말로만 들었던 종교에 관해 그들을 만나서 직접 보고 들으니 생생한 체험이 되었다. 나는 크리스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세상의 많은 다른 종교인들 혹은 비종교인들을 만나는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고 그런 마음에서 우러나는 자유함을 느꼈다. 처음 세 달 동안 교육을 받는 날이면 손수건과 휴지를 한 움큼씩 들고 들어가야만 했다. 아니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하나님이 절에도, 유대교 회당에도, 무슬림들의 회당에도, 하다못해 하나님을 빙자해 거짓 예배 하는 곳에까지 계시다는 걸 알았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내가 레즈비언으로 나고 성장하는 것을 아시고 이제껏 함께 하신 것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을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것이 바로 나의 할 일이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상대의 몫이 될 것이다. 씨를 뿌리는 자의 몫이 바로 나의 몫임을 알기까지 나는 인생을 우회하며 살았다. 세상이 두려워, 사람들이 두려워, 내가 두려워서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가족들이 나로 인해 상처 받게 될까봐.

나가며

얼마 전 경향신문의 김학순 선임기자의 글 ‘서재에서’를 인용하며 나의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희생양’(scapegoat)은 유대교 축제인 속죄의 날 의식에 사용되던 두 마리 염소 가운데 한 마리를 가리킨다. 한 마리는 희생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살려주는데, 이 염소를 ‘풀려난 염소’(escapegoat)라 불렀다. 이 염소는 사람들의 모든 불공평과 죄악을 혼자 뒤집어 쓴 채 영적 황무지를 상징하는 황량한 벌판으로 내쫓긴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주장하는 것은 희생양의 메커니즘을 통해 사회질서의 위기 국면을 돌파하려하지만, 실은 모든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이 언제나 지배자나 권력의 시각에 의해서 메스질 되었다는 것이다. “희생양으로는 늘 사회적 약자가 선택된다. 만만하거나 순진하며, 유별나거나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표적이 되곤 한다. 지라르가 희생양은 희생양으로 몰릴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 고 했듯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뒤집어써야 했던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는 권력의 희생양 찾기를 방증하는 표상의 하나다. 동성애자의 인권은 이미 한국 사회에서 충분히 암묵적으로 드러나지 못하도록 짓눌려 왔고, 어느 면 에서는 희생양으로써의 삶을 짊어지고 왔다. 과연 이러한 표적의 대상에서 공존의 대상으로 바뀔 수는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나의 오명, 우리들의 죄목, 그것은 예수가 덮어 쓴 것이기도 하다. 나의 친구들과, 우리를 지지하는 이들과 이제껏 우리를 지배하고 권력의 희생자로 지목했던 자들을 향해 분연히 일어날 일만 남아있다.

[인터뷰] - 최현숙 진보신당 성정치위원회


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통해 신나는 놀이판 만들 터

2008년 11월 20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상인숙 기자 klbitgoeul@hanmail.net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날은 하늘에서부터 함박눈송이가 춤추며 내려오고 있었다. 달리는 차로 인해 질펀해진 도로와는 달리 인도는 쌓인 눈과 내리는 눈송이로 많이 미끄러웠다. 민주노동당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 최현숙씨-.
위원회 이름만으로도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편견 때문일까. 미끄러운 눈길을 걸어 문래동에 위치한 민주노동당 당사에 들어섰다.
평범한 아줌마에서 천주교 활동가로, 정치가로 삶의 에너지 분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의 인권을 위해 목청 높이는 전사

두 아들 둔 엄마였던 평범한 아줌마에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 장기수후원회 활동과 천주교 여성운동 등을 통한 활동가로, 그리고 정치판에 뛰어들어 민주 노동당 여성위원장 등을 거쳐 성소수자 위원회 위원장을 맡게된 최현숙씨(51세, 아기안나 )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삶을 향한 강력한 에너지가 가감 없이 느껴진다.
정작 그녀는 그런 삶의 궤적들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 속에서 '나'를 찾아가는 길이었다고 말한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이 되던 1984년 세례를 받은 최현숙씨는 자기 안에서 현존하는 하느님을 통해 '이웃과 어떻게 나눌지' '무엇을 통해, 무엇을 해야 자기 삶이 행복할까?'를 고민했고, 끊임없이 평등을 향한 변혁을 시도하게 됐다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부장제에 숨이 막혔는지도 모르겠어요. 어려서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에, 결혼한 후에는 '남편'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적 사고 속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찾는 여정이 쉽지 않았죠, 하지만 예수를 만나면서 깨달아가며 천주교 활동가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평등을 향한 갈망이었습니다. 이웃과의 나눔, 우리 사회에 가장 소외되고 고통 받는 계층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나에게 '사랑하라'라고 말한 것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믿었죠."

세례를 받은 후 성가대를 비롯해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활동 등을 하면서 이웃과의 만남과 나눔의 폭을 넓혀갔던 최현숙씨는 가난한 동네의 주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오히려 그들 삶의 생명력에서 위로받고 행복해하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고통과 가난 속에 살면서도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 속에서 지쳐가는 자신을 씻어내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그때부터 그녀는 인생의 질곡 속에서도 기쁨을 찾을 수 있었고, 인생을 즐거운 '놀이터'로 생각하게 됐다.

"하느님이 나를 부르고 있는 부정할 수 없는 영적 체험도 많이 했다"는 그녀는 세상과는 다른 눈으로 사회를 거꾸로 보기 시작했고, 이 시대 한국 교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느 자리에 설 지를 고민했다. 결국 그녀가 찾은 몫은 가장 철저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 속이었고, 그들이 비전향 장기수들이었다.

때마침 1987년 서준식씨가 비전향장기수로는 처음으로 석방됐고 그녀는 한달음에 그를 찾아가 비전향 장기수들의 이야기를 몇 시간씩 귀담아 들었다. 장기수가족협의회를 만들어 처음에는 소속 본당을 중심으로 소식지도 만들고 후원금도 모집했다. 그러나 곧 본당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꼈고,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의 문을 두드렸다.

" 당시에는 절대적으로 금기시되는 부분이었어요. 비전향장기수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저편에 묻힌 사람들이었죠. 절대로 접촉하면 안 되는 부류라고나 할까요. 사상요? 난 그런 것 모릅니다. 빨갱이니 좌파니 이데올로기니 하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제게 있어 그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나의 이웃이었어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평등을 향한 끝없는 변혁이기도 했구요. 때로 그들이 주체사상을 나에게 주입하고 싶어하기도 했지만 난 받아들이지 않았죠. 조국의 분단이 곧 십자가이고, 신앙적 차원에서 시작한 일이었으니 사상은 그야말로 중요하지 않았죠. 가끔 그들이 사상을 이야기할 때면 빨갱이 이빨이 센가, 예수님 이빨이 센가 한번 해보자는 심정이 되기도 했지요.(웃음)"

장기수 가족 후원회를 통해 정귀남 어머니를 만났다. 정씨 역시 월북한 오빠로 인해 평생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자신 역시 국가보안법을 위반으로 복역하기도 했다. 서준식씨나 정귀남씨 역시 누구에게도 말 못하던 삶을 최현숙씨를 통해 말하기 시작했고, 비전향 장기수들을 위한 교회 내 활동은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1989년부터 비전향 장기수들이 출소하기 시작했고 ,이인모 선생이 송환되고 많은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가거나 남한에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입니다."
천주교 현실 참여 세력이 정치세력화 시도할 때
최현숙씨도 정치에 눈을 돌려
시대가 변했다. 더 이상 사상이 문제가 되지 않았고, 이 땅의 민주화와 사회 변혁을 향한 천주교의 현실 참여 운동이 조금씩 정치 세력화를 시도할 때 최현숙씨도 정치에 눈을 돌린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을 떠날 시점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고, 그녀는 2000년 3월 진보 정당인 민주노동당을 찾아 입당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언제나 신나는 일입니다. 천주교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막연한 부채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저런 것은 퍼져나가야 하는데...라는 생각도 많았구요. 어쩌면 그런 부채감이 진보 정당의 문을 두드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자주통일위원회에서 활동하랬어요. 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민족 개념으로 장기수 후원회 활동을 한 게 아니고 이웃의 개념이었어요. 당연히 다른 사람 옷을 입은 듯 어색했습니다. 그 후 여성위원회 등을 거쳐 지금은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됐지요."

이런저런 활동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다는 것을 느낀 최현숙씨는 당내 활동을 잠정적으로 그만두고 고등학생이었던 둘째 아들과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났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을 찾아 떠난 여행이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를 다시 고민하게 된다. 이 시대 가장 철저하게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런 고민 속에서 성소수자 의제가 떠올랐고 그녀는 당내 성소수자들의 활동에 참여한다.

2002년 민주노동당에 '붉은 이반'이 있었다. 이반의 '이'는 다를 '이(異)'이기도 하고 두 '이(二)'이기도 하단다. 첫번째 반인 일반에 들지 못하는 이반(二班)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민주노동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성소수자들의 단체였다. 2004년 당 차원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정책 모임이 있었고,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당위원회 '붉은 일반'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최현숙씨는 또 하나의 소외계층인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운동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고, 2004년 커밍아웃을 했다.

비로소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인 가부장제를 벗어던지고
'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통해 신나는 놀이판 만들 터

"내 안에 또아리 틀고 있던 새로운 성 정체성을 발견하고 나는 또 다른 변혁을 시도했습니다. 이혼을 통해 그동안 나를 옥죄고 있던 가부장제에서 비로소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여성들에게 집단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가부장제와 싸울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하고픈 내 욕망에서 시작된 변혁, 내 정당한 욕망이며 내가 당면한 문제, 즉 '나'로부터 시작하는 운동을 통해 또 한바탕 신나는 인생의 놀이판을 만들어 볼 작정입니다."

최현숙씨는 오는 4월 치뤄질 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것도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상징성을 고려해 서울 종로구를 택했다. 커밍아웃한 성소수자의 공직 선거 출마는 국내에서 처음이다.

넓은 의미에서 성소수자는 게이, 레즈비언, 성전환자 뿐 아니라 장애인과 노인, 청소년의 성과 지지받지 못하는 다양한 형태의 모든 성 정체성을 포괄하는 용어다. 하지만 좁은 의미로 성소수자는 남자와 여자로 이분화된 성정체성 안에 포함되지 못하는 게이나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등을 일컫는다. 이들에 대한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인구의 5~10%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타인의 문제로 사회의 공감을 이끌어 내며 평등을 향한 변혁을 시도했던 최현숙씨. 이제 자신의 문제를 당당하게 사회에 내놓았다. 하지만 성소수자 문제는 어느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주제다. 국회에 상정된 차별 금지법 조항에서 성소수자 항목도 삭제됐다. 기독교 단체의 강력한 저항 또한 현실의 높은 벽으로 작용한다.

"성소수자들의 인권 실태 조사를 할 때 기독교 세력이 가장 반대를 했습니다. 나의 변혁은 예수로부터 시작됐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예수'와 '그들의 예수'는 무엇이 다를까요? 교회법이니, 성서 해석이니 하며 성소수자를 겁박하는 것은 권력의 시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성소수자들이 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법을 들이대고 윤리를 들이댈 때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만, 이 개인의 사랑이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인 국가 권력과 자본에 무참하게 뭉개져버립니다. 교회도 같은 논리를 적용하고 있는 셈이죠. "

최현숙씨는 "궁극적으로 동성애자는 노동력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국가나 자본으로 대변되는 권력의 환영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정점은 군대를 갔다 온 젊고 힘이 넘치는 남성 노동력이며 튼튼한 청년의 노동력 다음에는 장년의, 그리고 여성과 청소년의 노동력 순으로 순위가 매겨진다. 그 끄트머리 쯤에 장애인의 노동력이 있다."고 노동력 구조를 설명하는 최현숙씨는 "국가가 인정하는 두가지 성-남자와 여자가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노동력이 생산되죠. 부모는 자신의 노동력을 투자해 돈을 벌어 아이를 최고의 노동력으로 키워줍니다. 자본주의가 해야 할 일을 가정을 만든 부모가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부모의 노동력이 쇠퇴되면 국가는 그 부모를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내고, 잘 다듬어진 새로운 노동력을 활용하면 됩니다. 가족이, 가정이 노동력을 확대 재생산하는 기능을 모두 담당하는 것이지요. 개인의 행복보다 국가의 경쟁력을 높일 노동력으로 국민을 평가합니다" 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사회의 성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차별 금지법으로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저출산으로 국가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하지요? 지금처럼 '최상의 노동력' 만 추구하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런 해석이 나오겠지요. 급속도로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고, 저출산으로 인구는 줄어들어 최상의 노동층의 수가 감소하니 국가 권력으로서는 다급하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노동력의 확대 재생산을 효율적으로 한다면 인구가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 60세 정년 퇴임을 한 인력이나 여성 노동력은 완충지대가 될 수 있어요. 비정규직으로 내몰려 값 싼 노동력만 제공할 수밖에 없는 여성 노동자들, 아르바이트나 일용직 등으로 아무렇게나 써먹다가 내버리는 청소년 노동 인력 등을 정상적으로 노동 시장으로 진입시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한정된 재화를 골고루 나누면서도 가장 이익이 되는 효율적 노동력 생산 체제를 다시 구비해야 합니다.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지요. 우리 사회의 성체제와 가부장제, 그리고 노동력을 키워줄 안정된 가정의 유지만을 고집한다면 이는 요원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저는 싸울 겁니다. 힘껏, 목소리를 높여 차별 금지법의 싸움을 계속하겠습니다."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 행복을 나눌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라고 말하는 최현숙씨는 이 놀이판에 함께 참여해 즐거워하든지, 아니면 그냥 구경꾼으로 남든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린다. 당분간 4.9 총선을 위해 행복한 발걸음을 내딛겠다는 그녀는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삶을 뛰어 넘어 성소수자 문제를 사회 이슈화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국제 인권과도 최대한 연대를 해서 우리 사회의 성체제와 성 권력에 문제를 제기하고, 커밍아웃한 성소수자 후보를 통해 성소수자 개개인의 상징적 커밍아웃의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최현숙씨. 그녀에게서는 남성이냐, 여성이냐는 이분적 성개념을 뛰어넘어 이 사회를 향해 행복을 외치는 한 인간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젊은 시절부터 존재의 의미를 찾아 무던히도 헤맸습니다. 나를 찾는 여정에서 결국 예수를 만났고, 내가 만난 예수님은 늘 '나와 함께 놀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거에 교회에 나가기도 했고, 절에도 다녔지요. 불교나 교회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차이를 인정할 뿐이지요. 그분 안에서 행복하게 노는 것, 그것이 내 관심사입니다. 내 삶을 단숨에 단순화시켜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거든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시각의 차이를 인식해 배려해 줄 때 우리 사회는 그녀가 꿈꾸고, 온 힘을 다해 달려가고 있는 행복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역사와 비전


김경중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 총무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진 사람들은 루터 교회(Lutheran)와 연합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개혁파 교회들과도 연합했다. 당시 거의 모든 교회들이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고, 카톨릭 교회는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이탈은 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1529). 그러나 개혁 교회들의 저항(protest)은 계속되었고 그들에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저항자)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운동의 분류

1. 루터란(독일의 비텐베르그를 중심으로)
2.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① 개혁교회(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 중심)
② 아나뱁티스트(스위스 쯔리히)
③ 장로교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중심)
아나뱁티스트 (Anabaptist)

□ 의미: rebaptizer (Widedetäufer)
□ 16세기 당시 로마 카톨릭, 루터파, 캘빈파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은 거의 모두를 지칭했던 말, 그러나 아나뱁티스트 당사자들은 이런 호칭을 거부했고 형제(brethren) 또는 세례에 관한 동일한 입장(baptism-minded)의 사람들이라고 부름

16세기 종교개혁과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배경

마틴 루터(1483-1546)는 인간의 무력감 무능함을 뼈저리게 체험한 후 인간의 선행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부인하였고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주장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항의하여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의 의견서를 붙임으로써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교회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루터는 당시 교회의 영적인 타락과 물질적 부패의 온상이 되어온 면죄부제도를 비롯하여 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례전 (결혼, 성직임명, 종부성사, 견신례, 고행, 미사, 세례)을 부인하고 그 중에서 세례와 주의 만찬(미사로부터 대체)만을 인정하였다. 루터는 교황의 무오성을 부인했고, 오히려 만인 제사장설(종교개혁의 제2원칙)을 주장했다.

독일에는 마틴루터 있었다면 스위스에는 쯔빙글리가 있었다. 그는 스위스 쮜리히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개혁자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설파했고, 구교회의 악습을 비판했으며 교회개혁을 이루는 핵심적인 사안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교회내의 성상들을 제거했고 라틴어 미사대신 독일 교회의 예배를 도입했으며 수도자(수녀)들과 성직자들의 결혼하는 것을 지지했고 자신도 결혼했다. 그는 스위스 의회로부터 모든 개혁 사항들에 대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 개혁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국가의 입장과 사회적 흐름을 너무 앞서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쯔빙글리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다.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와 같은 사람들은 교회 개혁의 속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성경에 따른다면 결코 빠르지 않았고 여겼다. 오히려 쯔빙글리가 지나치게 스위스 시의회의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교회와 믿음에 관한 모든 문제가 있을 때마다 (my lord, my lord 하면서) 쯔빙글리에게 달려가서 그의 의견만을 묻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믿는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성경을 통해서 조언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쯔빙글리의 급진적인 제자들이었던 바로 이 스위스 형제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위스의 쯔빙글리는 개혁에 있어서 국민들이 지나치게 앞서감으로 인해 국가 정책의 반대 입장에 서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았다는 점에서는 독일의 루터와 공통된 생각이었다.

☞ 유아세례와 성인세례에 대한 뜨거운 논쟁 (1525년 1월 17일)

전통적인 국가교회의 개념에 의하면 모든 시민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크리스챤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든 시민은 자동으로 교인이 되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장치는 유아세례였다. 16세기 유아세례 문제가 중요했던 이유는 우선 그 당시 사람들은 유아에게 세례를 줌으로서 유아의 죄가 사해진다는 사실과 유아세례를 통해 아이가 국가교회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부여받기 때문이었다. 유아세례를 나중에 받겠다고 연기한다는 것은 당시 모든 국민이 크리스챤인 기독교 국가사회를 (유아세례를 받지 않은)비그리스도인으로도 구성된 사회로도 나누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쯔빙글리를 비롯한 다른 개혁자들은 이러한 문제(신자들을 위한 성인세례)가 사회적으로 더 많은 이방인들을 생기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기독교사회국가(Christendom) 체제를 확신할 뿐이었다. 쯔빙글리의 주장에 의하면 세례는 신약성경이 유아세례를 실천하라는 명령도 없고 그렇다고 금지한다는 조항도 없는바 구약성경의 증언에 더 비중을 두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구약성경에서의 할례에 해당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언약의 표시로서 보아야만 한다. 나중에 믿음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된 유아들이 세례를 받아야 되는 이유는 그들이 언약의 공동체와 연합되었다는 상징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아나뱁티스트들은 신자의 세례(believers’ baptism)와 교인됨(church membership)은 오직 자기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discipleship) 개인적으로 서약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재세례신자들에게 있어서 유아들의 구원은 아이가 세례를 받았느냐, 않았느냐에 있지 않았다. 유아들은 오히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에 믿는 신자들로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 마땅하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유아세례에 반대 입장은 당시 사회로부터 미움의 대상이 된 사건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쯔빙글리와 스위스 의회는 1525년 1월 17일 열린 회의에서 유아세례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것을 결국 불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쯔빙글리의 급진적인 제자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유아세례를 주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525년 1월 21일 급진적인 제자들은 결국 첫 번째 재세례(신자의 세례)를 서로에게 베풀었다. 그 때부터 그들에겐 Anabaptist(rebaptizer), 재세례를 주고받는 놈들이란 경멸의 호칭이 붙게 되었다.

☞ 신자들을 위한 성인세례가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중요했던 이유
아나뱁티스트 관점에 의하면 누구든지 세례 받기 전에는 자발적인 믿음의 신앙고백이 필요했다. 누구든지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으리라 “The on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막16:16). 유아는 아직 자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정도의 의식이 없으므로 세례를 받아서는 안 되었다. 유아는
1) 그리스도인의 삶의 지침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이고,
2) 너무 어려서 믿음도 가질 수 없는 뿐더러
3) 삶에 대한 헌신도 할 수 없기 때문인데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유아세례 또는 성인 세례 그 자체보다도 진정한 세례란 ‘우리가 그리스도께 돌아오고 헌신했기 때문에 맺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주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수락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에겐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자동으로 교인이 되고 죽을 때까지 그 신분을 유지하는데 유아세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아나뱁티스트들은 납득이 안 갔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국가교회로부터의 분리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의 부재

카톨릭 교회에는 교황이 있었고 루터파에게는 마틴 루터가 있었고 다른 개혁자들에게는 쯔빙글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나뱁티스트 그룹에는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은 특이하다. 물론 나중에는 아나뱁티스트 안에서도 여러 지도자가 나왔지만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나뱁티스트운동이 다양하게 나타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며 이것은 특히 모든 신자들의 제사장 됨(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는 아나뱁티스트의 이해를 더욱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만 때로는 지도자의 부재가 아나뱁티스트 그룹에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아나뱁티스트에 따르면 “모든 지체들은 교회 안에서 동일했다 (all members are equal).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으로 몰고 간 결정적 사건들

1534 뮨스터(독일의 북서부 도시)의 비극

1530년 초 뮨스터의 시민들의 삶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 고무되었고 성인세례를 외치는 광적인 지도자들에게 이끌리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1534년 초 뮨스터에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여기는 두 사람이 도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잔 마티스(Jan Matthys)는 호프만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나 호프만과는 다른 신앙을 고수해던 네덜란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불신자들을 없애버릴 시간이 왔다고 믿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잔 반 리덴(Jan Van Leyden)이었는데 그는 재단사, 상인 출신으로 권력에 굶주린 사람이었다. 이 두 사람과 그들의 추종자들은 아나뱁티즘(재세례신앙운동)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안겨 주었다.

이들이 도착한 후 뮨스터는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뮨스터의 아나뱁티스트들은 시청을 장악했으며 자신들을 추종했던 번하드(Bernhard Knipperdolling)를 시장에 임명했다. 그리고 자기들의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축출했다. 이로 인해 많은 남자들이 다시 돌아올 날을 기약한 채 아내와 자식들만 남겨두고 그곳을 떠나 있어야 했다.
이들은 그 동안 박해를 받던 모든 아나뱁티스트들에게 뮨스터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선포하였다. 많은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이 뮨스터로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거기에서 금방이라도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지방의 카톨릭 비숍은 프로테스탄트와의 연합군을 조직해서 뮨스터를 포위했다. 어리석은 비전과 판단을 앞세웠던 잔 마티스는 그의 추종자들과 함께 나가서 싸워 원수들을 물리치고자 했으나 카톨릭 군대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뮨스터 사건은 아나뱁티스트 운동에 매우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다. 당시의 사회와 통치자들은 평화로운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을 뮨스터의 광신자들과 구분해서 보지 않게 되었다. 이로인해 아나뱁티스트들은 더욱 더 심한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결국 뮨스터 사건은 박해자들로 하여금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을 죽이고 그 신앙운동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아주 좋은 이유를 제공해 준 셈이었다. 실제로 이 뮨스터 사건은 다른 진실된 재세례신앙운동을 비웃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뮨스터의 아나뱁티스들과 평화로운 아나뱁티스들의 공통점이 있었다면 단 한가지 그것은 성인세례를 주었다는 것 뿐이었다. 뮨스터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나뱁티스트들이 강조했던 사랑과 비폭력, 자발적인 신앙, 교회와 국가의 분리, 윤리적 삶의 기준, 제자도 등에 대해서는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오직 이단을 축출해야 한다는 범국민적인 여론만을 상기시켜주었을 뿐이다.

아나뱁티즘(재세례신앙)의 특징 비교
☞ 하나님의 은혜
□ 성직자들의 성례전을 통해 받을 수 있다 (로마 카톨릭)
□ 믿음으로 말미암은 내적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다(루터파)
□ 제자로서의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문제이다 (아나뱁티즘)
☞ 교회
□ 성스러운 기관/제도(institution)이다 (가톨릭)
□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도구 역할을 한다 (루터파)
□ 개인적으로 경건한 신앙생활을 돕기 위한 자원 그룹이다(경건주의)
□ as the Body of Christ 그리스도의 몸이다! (아나뱁티즘)
○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철저한 순종
○ 폭력사용의 금지
○ 정치적 권위, 영향으로부터의 자유, 국가교회를 배격함
○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를 반대,
○ 폭력 사용하는 정부를 거부함
○ 하나님 나라 애국주의 vs. 평화주의?
○ 대한민국의 국민 vs. 하나님 나라의 백성!

아나뱁티스트 비전 (Harold S. Bender)
☞ 제자도에 대하여
□ 기독교의 본질!
□ 회개(repentance), 재세례(rebaptism), 거듭남(regeneration)을 수반한다.
□ 진정한 회심, 자발적 신앙고백, 중세교회의 대중교회 개념에는 없었던 자발적인 신앙고백에 입각한 교회 멤버쉽(정회원)을 주장, 국가교회는 유아세례의 정신에 반하는 바로 이러한 입장을 수용할 수 없었음!
□ 자유교회 --> 아나뱁티스트가 국가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 것은 유아세례를 통한 모든 국민의 교인 자격 획득이 성경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 유아세례는 국가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 신호탄에 불과함!
□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 살겠다는 생활양식의 총체적 변화를 의미, 하나님의 은혜의 내적 경험에 대한 외적인 삶의 표현을 강조, 믿음(faith)과 함께 사랑의 실천(following Christ)을 더 강조, 말로서만 외치지 않고 삶으로 성취!
□ 1527년 쯔빙글리가 스위스 형제단에 대한 쓴 논평 If you investigate their life and conduct, it seems at first cofntact irreproachable, pious, unassuming, attractive, yea, above this world. Even those who are inclined to be critical will say that their lives are excellent. 여러분이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의 삶과 행위를 조사해 본다면 우선 나무랄 데 없고, 경건하며, 겸손하여 이 세상 누구보다도 그 삶에 매력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비방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의 삶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공동체
□ 진정한 형제애와 사랑을 실천하는 곳으로서의 교회
□ 유아세례가 아닌 신자의 세례를 통한 교회 (자발적) 멤버쉽
□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방식
□ 세상적 가치를 따르지 않는 비순응자(non-conformist)-로마서 12;1
□ 나눔, 상호원조
□ 후터라이트: 1528년 - 현재 (북미에 약 450개 이상)
□ 부르더호프: 1920년대 - 현재
☞ 평화와 비폭력에 대하여
□ Peace(영어), 샬롬(히브리) , 살람(아랍), 에이레네(헬라), 팍스(라틴), 평안(중국).
□ 모든 인간관계에서의 사랑과 비폭력을 실천하는 윤리, 인간의 목숨을 해하는 어떠한 싸움이나 전쟁도 반대함,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공통된 핵심가치
□ 아나뱁티스트가 평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 성경적 명령(행 10)
□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의 핵심가치: 샬롬, 온전함, 만족, 안전, 웰빙
□ 서신서의 시작: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화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고전/후, 갈, 엡,빌,골, 데전/후,딤전/후,디도서, 빌몬, 벧전, 벧후]
□ 서신서의 마지막: 은혜 or 평화와 은혜 [고후, 갈, 엡…….]
□ 사랑의 결과: 하나님의 평화는 전에 원수였던 관계를 회복시키셨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셨다. (엡 1:10, 2: 16), 평화는 복음의 심장이다! Peace is central to the Gospel!
□ 평화신학의 발전
●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 - John Howard Yoder
●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
● 예수의 정치
● 회복적 사법(정의) Restorative Justice
● 갈등전환 Conflict Transformation
● 또래중재 Peer Mediation
● 메노나이트 화해 조정위원회 Mennonite Conciliation service
● KAC 평화건설자교육 프로그램 KAC Peacebuilders Program

청년 대학 교회 관련 워크샵


1. 개요
진보적 한국 기독청년학생운동이 침체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흩어져 있는 진보적 기독청년학생들이 손쉽게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면 기독청년학생운동의 활성화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에 진보적 기독청년‧대학생에게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방안으로서 청년대학교회를 설립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본 워크샵에서는 교회 설립 준비 과정의 일환으로 다양한 기독청년‧대학생의 의견을 모으고, 청년대학교회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2. 일시 : 2009년 9월 19일(토) 오후 4시 ~6시
장소 : 이화여대 대학교회 108호 세미나실

3. 워크샵 주제
“니들 , 교회 어디까지 가봤니?”
-청년학생을 위한 교회를 찾아서...

4. 담당
KSCF 소모임 - ‘교회의 삶과 사명’

시간
프로그램
내용
4:00 ~ 4:10
동영상 시청
교회에 대하여 학생들의 이야기를 인터뷰형식으로 동영상을 제작하여 상영한다.
청년대학교회 관련 설문지 배부
워크샵 쉬는 시간 등을 이용해 설문지를 작성하도록 한다.
4:10 ~ 4:30
비즈토의 1
교회와 관련된 몇 가지 주제를 던져주고 현재 제도교회의 문제점들을 되짚어본다.
4:30 ~ 4:40
토의 내용 공유
각 그룹의 토의내용을 발표하고 정리한다.
4:40 ~ 5:00
비즈토의 2
참여자 각자가 가지고 있는 바람직한 교회상에 대하여 토론하며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그려본다.
5:00 ~ 5:10
토의 내용 공유
각 그룹의 토의내용을 발표하고 정리한다.
5:10 ~ 5:20
휴식
5:20 ~ 5:40
기조 발제
청년대학교회 설립에 관한 제안서 성격의 기조발제.
5:40 ~ 6:00
Devil`s Advocate
기조발제에 대하여 청중들이 비판적 시각으로 질문하고 발제자가 대답하면서 ‘청년대학교회’의 방향을
함께 모색해 본다.

2009년 교회의날이 오기까지


2004년 10월,
서울과 수도권 지역의 50여 교회와 기독교 선교단체/기관들이 “평화 ․ 생명 ․ 연대”를 주제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과 대학로 등지에서 종교개혁연합기념제를 치르고 2005년 ‘교회의 날’을 열기로 선언한 것이 ‘교회의 날’의 시작입니다.

2005년 ‘교회의날’은
2005년 을사늑약 100년, 해방/분단 60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이 땅에서 그 영향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는 현실을 반성하면서, “평화를 이루는 교회”(마태 5:9)라는 주제로 2005년 10월 25일~29일까지 다채로운 행사를 하였습니다.

일시
행사 및 내용
25일 오후 7시
연동교회
※ 여는 예배
주제: 평화를 이루는 교회
드라마 형식의 예배, 하늘말씀(목회자), 땅의 소리(평신도), 성만찬 등
26일 오후 7시
향린교회
※ 정의, 평화, 생명을 향한 평신도 성례전
우리 가락으로 드리는 예배
목회자(설교자) 중심이 아닌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의 모델 제시
27일 오후 7시
기독교회관강당
※ 교회의 날 대 토론회
주제: 건강한 교회 만들기
교회개혁실천연대 주관, 발제없이 패널 발언 후 자유토론으로 진행
패널: 김반석(기장청년회전국연합회), 노치준(광주다일교회 예장통합 사회봉사부 총무), 박종권(향린교회 교우), 백종국(경상대), 홍보연(기독교여성상담소 국장)
29일 오후 2-9시
감리교신학대학
※ 교회의 날 심포지엄 2
주제: 치유와 화해를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발제: 황홍렬(한민족평화선교연구소 연구실장)
※ 노동 - 서울외국인이주노동자센터
방글라데시 전통음식 바자, 이주노동자밴드 공연
※ 생명 - 한국교회의 생명밥상 빈그릇 서약캠페인
하루 100원 모아 이웃 사랑 실천하기
※ 여성 - 교회의 날 새롭게 쓰는 주기도문 워크샵
다양한 번역의 주기도문 전시, 주기도문 다시 쓰기와 신작 주기도문 노래 발표
※ 닫는 예배(어우러짐 예배)
뮤지컬, 영상, 퍼포먼스 등으로 설교


2005년에 이어 2007년에 제2회 교회의날 행사를 열었습니다. 2007년으로 한국교회는 ‘평양 대각성 100주년’을 맞이하여 10만의 대규모 인파가 동원된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여론은 이에 무관심 하였고, 국내외 언론을 집중시켰던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의 진행과정에서 개신교회에 쏟아졌던 극도의 불신감을 보이는 등 교회에 대한 안팎의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따가운 시기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종교개혁 주간을 맞이하는 2007 교회의 날 조직위원회는 ‘2007 교회의 날’을 통해 겸허한 반성과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가지려 하였습니다.

2007년 교회의날은
위와 같은 취지로 다음과 같은 주제를 결정하였습니다. ‘入! 교회 出! - 교회, 길을 묻다.’ 이 주제는 우리의 삶의 자리, 한국의 역사 속에 들어온 교회가 자본주의, 대형화와 물량화, 몰 신학화의 늪에서 그 방향성을 잃고 이기주의 집단으로 전락한 지금, 교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들에게 현재의 문제와 그 갈 길을 묻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2007년 10월 22일(월)~28일(일)까지 7일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향린 교회 등에서 2007년 교회의날 행사를 치렀습니다. 2007년 교회의날 행사에서 중점을 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2007년 교회의 날’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눈다.
2) 이를 통해 교회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한국교회의 역할과 필요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바람직한 방향을 모색한다.
3) 기독교 진영이 시행하고 있는 기타 행사와의 주제 및 내용의 차별성을 두며, 2007 대선과 같은 정치적 현안 등에 대한 ‘정치권 줄서기’식의 논제를 과제로 삼지 않는다.
4) 교회 및 평신도 주체로 준비하고 진행됨을 원칙으로 한다. 

 

구 분

행 사 명

세부 사항

시간 / 장소

10/22

(월)

여는 예배

◈ 2007년 교회의날을 여는 예배

(기독교 전통과 한국 문화가 어우러진 예배 드리기)

19:00/연세대

신과대학 예배실

10/23

(화)

물음 하나:

“이웃에게 길을 묻기”

◈ 개신교/교회에 대한 외부의 비판/방향 경청

(안티 개신교인, 이웃종교인, 비종교인, 교회 출석 경험자, 내부 비판자)

19:00/연세대

신과대학예배실

10/24

(수)

함께

만드는 예배

◈ 성서와 교회 전통에 입각한 예배/

새롭게 해석하고 참된 예배를 함께 만들며 참여하기

19:00/향린교회

예배실

10/25

(목)

물음 둘:

“자신에게 길을 묻기”

◈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 나눔 / 문화 행사 /

◈ 물음하나 시간을 통해 도출된 비판에 대한 반성과 답변의 장(평신도, 목회자, 신학자, 신학생 등)

14:00/

19:00/향린교회

예배실

10/26

(금)

교회!

다시보기

◈ 비판 없이 공유되고 있는 개신교 문화에 대한 의미 바로 알기(문화, 선교, 베스트셀러 등)

19:00/연세대

신과대학예배실

10/27

(토)

물음 셋 :

물음과 실천을 다짐하기

◈청년! 교회를 생각하다 (14:00~15:30)

- UCC 영화제, 자기 교회 소개

◈ 소수자들에게 길을 묻다 (15:30~17:00)

- 사회적 소수자들이 자신과 교회에 대해 말하고 함께 대안을 생각하는 자리

◈ 교인들의 수다(17:00~18:30)

각 교회의 평신도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우리 교회 이야기”

◈ 함께 나누는 문화 마당(18:30~20:00)

14:00/연세대

신과대학

10/28 (일)

닫는 예배

◈ ‘함께 만드는 예배’(24,수)에서 구성된 공동예배문을 참여 교회들이 주일예배로 드림

각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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