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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교회의날 둘째날 교회의 역할 세미나 열려...
2009년 09월 18일 (금) 10:55:52 송양현 song-1002@nate.com

2009 교회의날 두번째날 행사가 17일 목요일 저녁 기독교백주년기념관에서 있었다. 이날은 '교회의 3가지 역할 세미나'라는 주제로 '예배', '교회의 민주적 운영', '교회와 사회선교'에 대한 주제발제가 있었다.
   
▲ 교회의 3가지 역할 세미나 / 교회의 민주적 운영 ⓒ 당당뉴스 송양현

이날 세미나에서는 특별히 첫날 여는 예배에서 빵과 포두주가 아닌 밥과 김치와 쌈, 물로 성찬을 대신 한것에 대해 적잖히 놀라면서도 한국교회 토착화라는 새로운 시도에 감탄을 했다는 평이 나왔다. 또한, 교회의 민주적 운영에서는 아직도 한국교회가 민주적이지 못한 부분들이 지적되면서 19일 토요일 오후 2시 교회의 민주적 운영 대안 사례발표에 관심이 모아졌으며, 교회와 사회선교 역시 교회의 사회참여에 많은 관심은 있으나 실제적인 참여에 대한 대안 사례를 하는 토요일 오후 2시에 관심이 모아졌다.
   
▲ 교회의 3가지 역할 세미나 / 교회와 사회선교 ⓒ 당당뉴스 송양현

다음은 이날 세미나 발제 원문을 게제한 것이다.

예배 새로 보기


고상균 노은아 박상희 한문덕 ❚교회의 날 예배기획팀



Ⅰ. 들어가는 말

어느 종교이든지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과 신앙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의례가 없는 종교는 없다. 그리스도교인은 매주일 교회당에 모여 예배함으로써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 강화하며, 신앙적인 가치를 학습할 뿐만 아니라 내면화한다. 예배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로마 12:1-2), 좁은 의미에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교회 공동체의 예배는 평일의 개인의 일상적인 삶이 예배가 되게 하는 사건의 정점에 놓여 있기에 이 공적예배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리스도인의 삶이 좌우된다.
예배가 신앙인의 삶에 있어서 이렇게 중요함에도 한국교회는 예배에 대해 충분히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하였다. 특히 예배와 관련해서는 목회자 중심의 구성과 기획이 이루어졌기에 만인사제설이라는 종교개혁 전통도 상실되고, 평신도들은 예배에 의무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참여하게 됨으로써 점차적으로 예배에 대한 감흥이 사라지게 되었다. 더 이상 예배를 통해 신앙경험을 몸으로 표현하고 지속할 수 없다면 이것은 정말 큰일이라 할 수 있다. 많은 목회자들이 예배에 관하여 고심하고, 예배 참여자들 또한 예배의 갱신을 원하지만 실제적으로 많은 교회들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번 교회의 날에서는 이런 문제점들을 함께 나누고자 예배에 대해 다시 한 번 새롭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다. 본 발제에서는 아래의 다섯 가지 질문을 중심으로 예배에 대해 살피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예배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한국교회의 예배가 좀 더 의미 있고 생동감 있게 펼쳐지기를 기대해 본다.

1) 예배란 무엇인가?(예배의 본질 물음)
2) 예배의 내용과 틀은 어떠해야 하는가?(예배의 형식과 내용 물음)
3) 예배의 각 구성요소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구성요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예배의 구성요소와 관계에 대한 물음)
4) 그리스도교 전통의 예배역사와 현대 세계교회의 예배 흐름에 비추어 볼 때, 한국교회의 예배의 장점과 보완될 점은 무엇인가?(한국교회의 예배 성찰)
5)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예배를 위해 새롭게 도입할 부분이 나 각 교회에서 각 교회의 사정에 맞게 예배를 창출할 경우 무엇을 고려 하고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예배의 갱신을 위한 제언)

Ⅱ.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말씀과 행위로 자신의 삶을 희생하였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본성이 드러났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고, 이 신앙이 바로 인간을 예배에로 이끈다. 바로 이 신앙의 근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Gottesdienst)이며, 우리의 신앙은 그것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인간을 예배에 부르는 존재는 하나님이시기에 예배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놓여 있고, 인간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예배로 나아가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봉사(Gottesdienst)가 이루어진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인간은 만난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은 사적 개인이 아니라, 교회공동체 구성원 전체이고, 그럼으로 예배는 개인의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교회라고 하는 공적인 공간에서 회중이 함께 드리는 공적예배가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있다. 교회 공동체는 예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서 나타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또 마지막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이미 맛봄으로써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구별된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이런 모든 과정의 주도자는 하나님이시며 예배 참여자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큰 기쁨과 은총을 누리게 된다.

Ⅲ. 예배의 내용과 틀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고 예배를 주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에 예배에 참여하는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몸짓, 가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드려져야 한다. 예배의 순서를 맡은 이들, 설교자, 찬양대(성가대) 등이 하나님께 올릴 영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 마치 예배를 진행하는 인도자, 설교자, 기도자, 찬양대 등이 배우이고, 예배의 회중이 관객인 것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예배참여자 모두가 배우들이며 유일한 관객은 하나님이시다. 찬송의 경우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을 잘 선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찬송 531장(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의 경우는 전도를 목적으로 지어진 찬송이기에 예배시간에는 적합하지 않다. 부모님 생신잔치를 차려놓고 사람들이 안 왔다고 부모님에게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손님들 빨리 오라는 노래를 불러서야 되겠는가? 이처럼 예배의 내용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기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내용을 가지고 어떤 틀로 예배를 구성하고 기획하여야 하는가? 모든 공적인 예배의 순서는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고,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예배를 하나님과의 공동체적 만남이라고 규정한다면, 최소한의 순서와 절차라는 형식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세계로 ‘들어감’(개회/모임 예전), 그런 거룩한 경지와의 ‘만남’(말씀/성만찬 예전), 하나님의 영역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파송예전)의 구조을 의미한다. 이 전체 구조에 해당하는 각 구성요소들 전부가 예배이지 이 중 하나만이 예배는 아니다. 예배의 전 과정은 하나의 통합체이고, 그 과정을 이루는 순서들은 통합체를 이루는 원리에 따라 유기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설교가 중심이 되어 마치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으로 생각되어지고 나머지 예배의 구성요소는 부차적으로 여겨져 교인들이 설교시간 맞춰 교회오고 설교 끝나면 나가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임-만남(말씀/성찬)-보냄의 삼중구조나 모임-말씀-성찬-보냄의 사중구조가 예배의 씨줄이라면 각 전체 구조를 이어주는 기도와 찬송은 예배의 날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구조가 유기적으로 이어져서 하나의 예배가 완성되며 이 예배를 통해 신앙인은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예배의 틀은 ‘묵도-찬송-기도-찬송-설교-기도-찬송-축도-찬송’의 형태이다. 이 예배형식은 19세기 미국에서 유행한 천막집회의 주일낮예배 형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세계교회는 그리스도교 찬송가가 발전되기 이전 ‘시편송’을 포함한 ‘예배응답송’만으로 ‘주일예배’를 구성했던 예배의 원형을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역마다 또 시기마다 주일예배의 틀은 바뀌었고, 어느 것 하나를 고집할 수는 없다. 학자마다 서로의 주장도 다르다. 그러나 제 멋대로 예배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예배를 연구하는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구성요소들을 중심으로 예배의 틀을 그려보자면 아래와 같다.

모임(시작-예배에의 부름-예배 집례자와 회중의 인사-죄의 고백/용서의 간구-용서의 선언-하느님께 감사와 영광(시편교독과 송영)-오늘의 기도)

모임송/입례송 → <예배부름>/<인사> → <찬송> → 시편송 → <고백의 기도>/<용서의 간구> → 자비송 → <용서의 선언> → 영광송 → <오늘의 기도>/<본 기도>/<집도(集禱)>

말씀(성경봉독-설교-신앙고백)

말씀송 → <제1성서(구약성서)> → 시편송 → <사도서신> → 알렐루야/층계송 → <복음서> → 말씀송 → <찬양> → <설교> → <중보의 기도> → 기도송 → <사도신조>/<각종 신조> → 신조송

성만찬(감사의 예물-죄의 고백/평화의 인사-성만찬기도-성만찬 제정사-성령임재의 기원- 성별-중보와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영광송-분병례-감사의 기도)

<봉헌> → 봉헌송 → <준비기도> → 성만찬 기도(삼중대화 → 감사기도 → 삼성송(Sanctus) → <성만찬 제정사> → 기념송 → <성령임재의 기원> → 분병례(주의 기도/주기도송 → 평화의 인사 → 어린양송(Agnus Dei)) → 성만찬 참여 → 성만찬송 → 감사기도

보냄(알림 → 파송사 → 축도(민수기 6:24-26; 고후 13:13; 목사의 축도 → 회중의 아멘 → 성가대의 송영)

경배송/찬양송 → <친교의 말씀/알림> → <찬송> → <보내는 말씀/파송사> → <축복기도> → 보냄송

Ⅳ. 예배의 구성요소들

위에서 제시한 예배의 틀과 각 구성요소들은 그리스도교 예배의 오랜 역사 속에서 첨가되어 지속된 것들이다. 각각의 요소마다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각 요소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져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는 각 예배의 구성요소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겠다. 모임-말씀-성찬-보냄의 예전에 따른 각 구성요소들은 개 교회의 사정에 맞게 빼거나 더할 수 있을 것이다.

1. “개회예전”의 구성요소들

* 시작
타종과 묵도의 문제: 일제의 유산이긴 하지만, 한국의 예배참여자들에게 오래도록 익숙하기에 안정감을 제공하고 있다. 타종 대신 타징을 하여 예배의 토착화 노력을 기울이는 경우도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 역시 타종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순서가 예배참여자들에게 어떤 신앙적 의미를 제공하는가이다.
회중의 찬송과 입당: 예배참여자 모두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상징한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신학적 의미를 살릴 수 있으며, 한 목소리로 첫 찬양을 드리기에 하나의 공동체의 의미를 살리는 동시에 목회자 중심의 예배에서 상실된 회중의 권위회복을 나타낼 수 있다.

* 예배에의 부름
하나님의 초대를 나타내며 우리가 왜, 어떻게, 누구를 향하여 예배 드리는지에 대한 분명한 윤곽을 그릴 수 있다.

* 예배 집례자와 회중의 인사
예배 집례에 대한 회중의 승인. 고대로부터 내려온 유대인들의 인사법이 자연스럽게 예배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사사기 6:12, 룻기 2:4, 누가복음 1:28, 데살로니가후서 3:16 등)

* 죄의 고백/용서의 간구/용서의 선언
죄의 고백은 흠없는 예배자로서 예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으며 깔뱅이 공동체 전체가 행하도록 도입하였다. 용서의 간구와 용서의 선언이 모두 들어가야 한다.

*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용서가 선언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 기도/오늘의 기도/ 본 기도/ 집도(集禱: 오라치오 콜렉타)
기도란 사적으로 혹은 공적으로 소리를 내든 마음으로 하든, 개인적으로 하든 집단적으로 하는 신앙인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모든 것으로 다음의 네 가지 특징을 지닌다. 1.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 2. 인간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 3. 인간에게 필요한 바를 하나님께 구하는 것, 4.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좁은 의미에서 기도는 개회예전의 마지막 순서의 기도를 말한다. 이 기도는 3세기 이후 도입되었다. 원시 그리스도교 예배에서는 성만찬 전 감사의 기도만을 올렸다. 그러다가 초대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자유기도가 시작되었고, 4세기에는 자유기도문을 사전 심사하기도 하였다. 6세기 이후 별도기도문 등장하고 오늘날은 오늘의 기도 또는 본 기도/집도 등으로 불려 시행된다.
오늘의 기도에서는 1. 전 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염원을 모은다. 2. 예배와 관련된 주제를 모은다(오늘의 기도). 3. 집례자가 목양자로서 보이는 책임과 정성(목회기도) 등의 내용이 들어가야 하고, “기도권고(다함께 기도합시다.)- 침묵 - 기도 - 회중의 아멘”으로 진행된다. 기도에 포함되어야 할 신학적 내용은 1. 하나님을 부름, 2.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말씀과 행위에서 계시되었음을 기억하고 영육간의 문제에 대해 간구, 3.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 등이다. 이런 내용이 잘 들어가 있는 독일 개신교의 예배서의 기도문을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온 세상을 그로부터 나오는 빛으로 채우소서.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당신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또한 성령과 함께 살아계시며 영원히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삶의 보호자이신 하나님, 당신은 목자로서 당신 피조물을 지키시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당신 보호 아래 두시며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우리에게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당신의 고요와 평화 속에 거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사는 동안 지금처럼 늘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아멘.”

한국교회의 대표기도는 19세기 미국에서 행해진 ‘목회기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기도는 목회자가 설교 전에 기록된 예배서 없이 눈을 감고 즉석에서 고백, 찬양, 감사, 봉헌, 중보, 간구까지 포함하는 매우 긴 기도를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은 한국말이 익숙지 않아 즉석에서 긴 기도를 드릴 수 없었으므로 선교사들을 수행하던 한국인 조사나 전도사 또는 장로에게 기도를 맡기게 되었고 이것이 한국교회의 대표기도 관행이 되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기도 전통에서 보았을 때, 한국에서 행하고 있는 대표기도는 그 성격이 모호하고, 기도가 길어져 지루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그 성격을 분명히 하여 각 교회의 사정에 맞게 조정할 필요가 있다. 즉 개회기도/목회기도/목회자의 설교전 감화기도/중보기도 등으로 구분하여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다.

2. “말씀예전”의 구성요소들

말씀예전(성경봉독-설교-신앙고백)은 성서봉독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를 통해 현시대를 향한 그분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전달받은 후 이에 우리는 신앙고백으로 응답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 성서봉독
성서봉독은 두 본문(제1성서=구약, 제2성서=신약), 세 본문(제1성서=구약, 서신서, 복음서)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두 본문 또는 세 본문이 서로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서신서 봉독후 사순절 기간 제외하고 보통 할렐루야 송을 부른다. 성서봉독은 그 자체로 중요하기에 공예배에서 반복적으로 읽혀질 필요가 있다. 성서본문은 성서일과에 맞추어 교회력에 따라 읽혀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예배참여자의 적극적 참여를 위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개방하여야 한다.

* 설교
설교란 인간의 언어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언어의 한계를 인식할 필요가 있음과 동시에 과거의 신앙고백적 진술을 오늘에 맞게 되살려야 한다.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말씀선포의 책임이 있기에, 대화설교, 그룹설교 등 설교의 변화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예배의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는 예배참여자들의 비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설교의 내용이다. 설교의 형식이나 내용/길이 등을 잘 조절하고 구성하려는 설교자의 노력이 요청된다.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개신교의 예배에서는 더욱더 설교의 질의 문제가 과제로 남게 된다.

* 신앙고백(응답의 말)
신앙고백의 기원은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 신앙고백문이다. 예배에 신앙고백순서가 들어간 것은 5세기 후반 동방정교회이며, 교회 일치운동의 입장에서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고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앙고백문은 과거의 신앙진술(성서봉독)과 오늘의 맞게 재진술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지닐 뿐 만 아니라 신앙고백문은 말씀을 매듭짓고 성만찬을 시작하는 자리에 놓여 자연스럽게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말씀 예전까지는 누구나 예배에 참석하도록 초대할 수 있다. 신앙고백을 개회예전에 놓아 둔다면 처음부터 예배에 참여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신앙고백문은 사도신조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외에도 각 교단이나 교회에서 만든 신조로도 고백할 수 있다.

3. “성만찬예전”의 구성요소들

성만찬/성찬/주님의 만찬은 원시 그리스도교 예배부터 예배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임에도 개신교 예배에서는 그동안 많이 소홀히 여겨졌다. 설교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전달받고 주님의 식탁을 통해 그 말씀과 뜻을 심화시킨다. 성만찬 예전의 절차는, 먹고 마시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일상적인 행위를 신앙적으로 고양시키고 유의미하게 해 주는 것이다.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과 성 목요일의 최후의 만찬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의 만찬,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의 만찬에도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모든 차원을 맛보게 되고, 예배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성만찬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성만찬은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것이기에 성만찬을 성찬보로 덮는 것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예식을 거행하는 목회자와 배병배잔 위원들이 흰 장갑을 끼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일본의 예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만찬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문제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사회윤리적 책임과 연결된다. 비세례자들의 성만찬 참여 문제는 늘 논란거리가 된다. 주님의 잔치에 누구나 올 수 있는 개방성의 문제와 세례를 받지 않아 철저한 회개를 하지 않은 이의 성만찬 참여는 신앙의 격을 낮춘다는 주장이 맞서는 것이다. 각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협의 하에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배 공간에서 그리스도 임재의 상징은 주의 만찬 식탁이기에 성만찬은 매주 시행되어야 하며 성만찬 후에는 반드시 주의 식탁에서 먹고 마신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성만찬의 재료가 되는 빵과 포도주는 기본적으로 노동의 산물로써 음식의 재분배라고 하는 사회경제적 함의를 가질 뿐만 아니라 신앙의 고양이라고 하는 종교적 기능을 갖는다. 한국적 상황에 맞게 떡과 오미자차와 같은 것을 대체할 수도 있겠다. 다만 성찬이 가지고 있는 본 뜻을 잘 살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4. “보냄예전”의 구성요소들

예배의 마지막 부분은 폐회예전이나 마무리예전이 아니라 파송예전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예식에선 없었으나 4-6세기 다른 사회적 의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리를 잡았다. 친교의 소식을 나누는 것은 공동체의 관심사를 널리 알리는 것으로써 주님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로서 서로의 상황을 알리고 기도해 주는 것은 좋은 것이다. 흔히 광고라고 하는데 그렇게 쓰는 것보다는 친교의 나눔이나 알림 정도가 좋겠다. 파송의 말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가는 교우들을 격려하고 결단하게 할 수 있다. 축복기도는 사람을 보내거나 예식을 마감하면서 축복하는 유대인들의 오랜 풍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10세기 전후하여 예전적인 요소로서 공식적으로 예배에 들어왔다. 축복기도를 통해 이제 시작되는 한 주 동안의 삶과 경험을, 그리고 일상의 기쁨과 고통을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두고 이제 세상으로 흩어져 각자의 사명을 다하는 데 필요한 하나님의 힘과 은총을 전달한다. 축복기도는 민수기 6장 24-26절과 고린도후서 13장 13절로 내용을 삼는다.
보통 축도는 목사가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게 하여 안수할 때처럼 하는데 이는 매우 권위적으로 보이기에 최근 예배갱신운동을 이끄는 학자들은 손바닥이 보이도록 어깨 넓이로 벌려서 하는 축도 방식을 권장하며, 공동축도나 평신도에 의한 축도도 제안한다. 축도와 회중의 아멘과 성가대의 송영으로 모든 예배를 마치면 자리에 그대로 앉아 오르간 후주를 들으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 예배를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Ⅴ. 그리스도교 예배 전통과 세계교회의 예배 흐름에서 본 한국교회 예배

1. 현대 세계 예전 운동의 흐름

현대 세계 예전 운동의 흐름은 크게 축제화, 상황화, 세계화라는 말로 요약 할 수 있다.
축제화란 예배는 메시아적 잔치로써의 예배를 일컫는 것이다. 말과 행동, 움직임과 리듬이 있는 예배를 기획하고 온 회중이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하며, 말로만 진행되는 것이 아닌 육감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예배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예배의 형식성이 조금 파괴되더라도 좀 더 자유로운 양식을 개발하여 판에 박은 주보에서 해방되어 자발성과 즉흥성을 도입한다. 매주 축제의 예배가 어렵다면 절기별로라도 축제적인 예배를 시도한다. 한국에서는 열린 예배라는 것으로 많이 알려진 구도자 예배나 이미지예배, 신오순절 운동과 제3의 물결/빈야드 운동 등에서 예배의 축제적 표현을 중요하게 드러내고 있다.
상황화란 예배의 문화적 창출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현대의 문화적 상황과 각 지역적 또는 민족적 전통을 그리스도교의 예전과 조화하려는 시도이다. 예배의 지역성과 하나의 교회라는 보편성을 잘 조화시키는 것이 과제라 하겠다.
세계화란 자기의 예배전통 뿐만 아니라 이미 발굴되고 진행되는 세계 예배의 공동유산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고고학의 발달과 예배신학의 연구 성과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예배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세계교회협의회 등을 통하여 전세계 교회의 예배가 서로 교류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 전 세계교회가 같은 예배의 공동 유산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공동예배의 회복을 들 수 있는데 1,000년 가까이 성직자와 목회자가 예배를 독점하여 평신도를 사실상 방관자로 전락시켜 온 것을 교회의 유기체적 표현으로서의 공동체 회중 전체가 예배에 참여하는 공동예배로 바꾸는 것이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사제 중심의 예배라기보다 회중 중심의 예배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가톨릭 전통에서 중요시한 성만찬과 개신교 전통에서 중요하게 여긴 말씀예전이 서로 보완되며, 교회력과 성서일과의 사용을 통해 전 교회가 하나의 교회가 되어가는 것 등이다.

2. 한국교회의 예배

한국교회의 예배는 “기도원 영성을 갖고 있는 회중들이 같은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하여, 전도를 지향하는 복음주의적 분위기를 가진 말씀형식의 예배”라고 특징지어 말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을 지닌 한국교회의 예배는 여러 가지 장점도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단점도 많다. 한국교회 예배는 고난(일제식민지,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의 신앙체험들이 여전히 예배 속에 살아 있고, 신앙고백과 마음이 담긴 찬송이 불리며, 예배를 우선순위로 두는 것의 일상화 되어 있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기도원 영성이 가지고 있는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역동적인 삶의 과정을 극복하고, 전도와 종교생활에도 열심을 낸다. 그러나 예배신학의 부재 및 지속적인 예배 교육과 훈련의 부재하고, 목회자 중심의 예배 기획(특히 설교자 중심 예배)과 진행으로 설교 시간이 유난히 길고 다른 예배 구성요소와의 관계에서도 설교만 유독 부각된다. 따라서 예배참여자는 설교하는 목회자를 설교내용에 따라 평가하고 즐기는 형태로 예배가 왜곡되기 쉽다.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 앞에서 목회자와 평신도는 어떻게 예배를 만들 것인가 함께 논의하는 구조의 필요하다. 성가대의 찬양 또한 마치 연주회에서 연주를 감상하듯이 성가대가 회중들 앞에서 찬양을 하는데 이것보다는 성가대가 회중과 함께 어떻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인지, 성가대의 찬양들이 예배 전체와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지 연구가 필요하다.
예배 구성과 참여에 있어서 예배 참여자들이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 구조는 예배의 공공성과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하며 특히 예배와 삶의 일치를 호소하는 예배의 기본(시편 15편, 사무엘하 6장 3절 이하, 아모스 5장 21-24절, 호세아 6장 1절 이하, 요한복음 4장 19-24절, 마태복음 5장 22-24절; 23장 23절, 로마서 12장 1-2절, 사도행전 2장 42-47절)적 요구에 도달하지 못하게 만든다. 예배 인도, 기도, 교독, 연도와 중보기도, 평신도 설교, 공동축도, 특별절기에 가족과 함께 드리는 예배 등을 통하여 예배와 삶이 일치되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예배참여자들이 되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예배에 대한 몰이해는 지적, 정의적, 의지적 욕구를 지닌 예배 참여자들로 하여금 감정 중심의 경향으로 흐르게 만들 위험이 있으며, 의례가 주는 깊이를 상실한 채 표면적 말초신경의 자극을 예배의 감동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열린 예배는 예배의 형식성이나 구태성을 극복하는 좋은 시도임에는 틀림없으나 세속문화의 뒤꽁무니를 좇을 위험이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Ⅵ. 한국교회의 예배갱신을 위하여

위에서 살핀 예배의 본질과 내용 그리고 틀, 각각의 구성요소의 관계, 세계교회의 흐름과 한국교회예배의 성찰을 깊게 생각하면 각 교회가 처한 상황에서 예배 갱신에 대하여 서로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크게 생각해야 할 것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으로 하겠다.
우선 한국교회의 예배 갱신을 위해서는 예배가 공동체적 경험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개인의 사적 체험으로서의 예배가 아닌 공동체가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예배를 구성하도록 회중 전체가 목회자와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예배에 대하여 충분히 숙지하여 회중들에게 알려주고 회중과 함께 각 교회공동체에 가장 알맞은 예배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둘째 예배가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예배가 준비될 필요성이 있다. 예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되어 왔다. 오늘의 예배가 감흥이 없는 것은 아마도 세속적 문화의 발달 속에서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동기가 약화된 것이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고, 특히 세속문화에 민감한 젊은이들의 경우 기존의 종교의례는 구태의연하여 어떠한 매력도 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기 쉽다. 가정예배의 활성화, 가족이 함께 드리는 주일예배, 세대 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특별예배/절기예배 등을 기획하고 준비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교회는 성서적 전통과 현대 문화(지역 문화)와의 조화를 이루는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 가톨릭과 개신교 합쳐 이제 200년 갓 넘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예배 신학은 2000년이 넘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 동시에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겪으면서 자신의 전통과 지역성에 대한 고찰을 하지 못하였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발전하고 한국사회가 발전하면 반드시 그리스도교 전통과 한국 문화와 사회의 실정을 고려한 예배가 요청될 것이다. 예식의 순서와 구성요소는 그리스도교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그 내용을 담고 표현하는 것은 얼마든지 오늘의 한국적 상황과 전통을 고려할 수 있다. 예배 공간의 한국화, 우리 가락 찬양과 악기의 도입, 성만찬 그릇의 한국적 토기/도자기/목기 사용, 성만찬 음식의 한국화 등 교회 공동체가 함께 얼마든지 자신의 공동체 상황에 맞는 예배 형식을 창안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말씀과 성례전의 균형 잡힌 예배가 반드시 필요하다. 개신교 예배에서 매주 성찬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문제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설교의 시간을 줄이고, 성만찬의 분병례의 방법을 잘 연구하면 얼마든지 말씀 예전과 성만찬 예전을 균형 있게 갖춘 예배가 가능할 것이다. 특히 200명 미만의 교회가 한국교회의 8-90%인 것을 생각할 때 이 정도 규모에서는 얼마든지 말씀과 성만찬이 함께 가능한 예배가 가능하다. 이 두 가지 예전의 바른 회복은 시급하다 하겠다.
다섯째 한국교회의 예배가 고려해야 할 것은 예배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이다. 목회자의 편협하고 권위적인 태도, 예배 참여자들의 경직된 사고 등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오히려 방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의 예배참여자들은 다양한 종교적 욕구를 지니고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한다. 목회자의 성향이나 전통에 무조건 따르기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예배회중으로 하여금 다양한 예배를 경험하고 서로 협의 하에 예배를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개방적 태도와 자세가 필요하다. 개신교라고 해서 가톨릭이나 동방정교회에서 배우지 못할 이유는 없으며, 떼제 공동체나 다른 수도원 전통에서도 배울 수 있다. 더불어 한국의 여러 가지 의례에서도 얼마든지 그리스도교적인 예배의 틀을 차용해 올 수 있다. 예배 구성원이 여성이라면 여성에게 유의미한 예배를, 예배 구성원이 주로 청년이라면 청년의 문화를 수용하는 예배를 기획하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려는 자세이며 이런 것들이 세상의 문화와 대조되고 구별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한다면 어떤 예전이든지 과감하게 시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Ⅶ. 나가는 말

들어가는 말에서도 말했지만 예배란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의례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을 재현하여 그 신앙을 강화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온 몸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곧 예배자의 삶에 반영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그 예배자를 통해 세상 구석구석에서 조금씩 싹을 틔울 것이다. 예배를 새롭게 배우고 느끼기 위한 2009 교회의 날의 작은 몸짓이 예배를 준비하고 기획하고 기대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본 글을 마친다.

※ 참고문헌

박근원, 『오늘의 예배론』, 대한기독교서회, 1992.
빌리암 나아겔/박근원 역, 『그리스도교 예배의 역사』, 대한기독교서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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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바른신학 균형목회 세미나 자료집, 『바른 예배 바른 설교』, 한들출판사, 2008.
장자끄 폰 알멘/박근원 역, 『구원의 축제』, 도서출판 진흥, 1993.
조기연, 『묻고 답하는 예배학 카페』, 대한기독교서회, 2009.
한국문화신학회 편, 『한국문화와 예배』, 한들출판사, 1999.
한국신학논총, 『기독교대학의 채플 이대로 좋은가』, 전국신학대학협의회, 2009, Vol. 8
한국기독교장로회, 『희년예배서』
미국장로교 한영찬송가 『찬송과 예배』

* 참조: 예배의 회복을 위한 30가지 신학적 명제

Ⅰ. 예배 이해

1. 하나님을 아는 만큼 예배할 수 있다.(예배의 대상)
2. 예배를 드리는 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예배의 효과)
3. 가장 성서적이고 올바른 예배가 어떤 예배인지를 우리는 알 수 없다.(예배의 다양성)
4. 예배의 목표로서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영화)’와 ‘은혜를 받기 위해서(성화)’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예배의 목표)
5. 예배의 모습과 분위기는 예배의 초점이 성부, 성자, 성령 중 누구에게 맞추어 져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예배의 정의)
6. 예배는 이해와 경험을 필요로 하는데, 이 두 요소를 균형 있게 고려할수록 건 강한 예배다.
7. 예배를 신학적의 한 분야로 이해하기보다, 모든 신학을 예배적 관점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예배자가 건강하다.(예배적 신학)
8. 예배의 이해를 돕는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는 “신비”이다.
9. 감동적인 예배는 예배자가 감동하는 예배가 아니라, 주님이 감동하는 예배다.

Ⅱ. 예배와 문화

10. 예배의 모습은 문화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예배의 역사)
11. 예배에는 변할 수 있는 것과 변치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예배의 원리)
12. 열린 예배(구도자 예배)를 할 수 있는 교회가 따로 있다.(회중의 문화)
13. 아멘 없이도 은혜로운 교회가 있다.(회중 이해)
14. 감격 없이도 드릴 수 있는 예배자가 더 건강하다.(예배의 정당성)
15. 회중을 세분화하여 예배하는 것보다 함께 드릴수록 의미가 있다.(공동 예배의 의의)
16. 예배의 활성화는 모든 예배와 주일 예배를 따로 구별하는데서부터 시작된다. (주일 예배의 고유성)

Ⅲ. 예배와 예전

17. 예배의 순서와 예전적 표현을 존중할수록 성숙한 예배자다.(예배순서의 의의)
18. 교회력은 성지(팔레스타인)에 가는 것보다 더 실감나게 성서 시대를 맛보게 한다.(교회력의 효과)
19.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에서 태어나고 성찬으로 자라난다.(세례와 성찬의 중 요성)
20. 예배의 모든 요소에 성찬의 의미가 잘 담겨있을수록 건강한 예배다.(그리스도 중심의 예배)
21. 성찬의 감정적인 분위기는 하늘나라 식탁을 대하게 될 때의 분위기이다.
22. 예배 안의 모든 요소, 즉 시간과 공간, 언어, 음악, 미술, 건축, 움직임과 몸짓, 음성과 침묵, 밖을 바라봄과 안을 성찰함(눈을 감음)을 가치 있게 여기는 예배 자일수록 복되다.
23. 박수를 쳐도 되는가, 찬송할 때 일어나야 하는가, 기도할 때 단을 바라보아야 하는가, 복음성가를 부를 수 있는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 회중 의 전통과 약속의 문제다.

Ⅳ. 예배의 내용

24. 예배의 시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초대함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초대에 대 한 감사로 시작된다.(예배에로의 부름)
25. 예배는 ‘간구적 내용이 없는 기도’(감사, 인정)가 더 가치를 드러내는 장소다.
26. 예배의 장소는 우주의 모형이기도 하고, 가정집의 안방과도 같다.(예배와 건축)
27. 헌금은 모든 소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표이다.
28. 기도의 가치는 고인의 기도를 얼마나 귀히 여기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29. 예배 때 사용되는 말(언어)는 즉흥적이지 않을수록 좋다.
30. 찬송과 세속적인 노래의 구분은 음악적 장르와 성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 나님의 계시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노래인가에 달려 있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



정성규 ❚ 예인교회 목사


1. 제왕적 권위와 자발적 협조
지난 8월 15일자 [시사인(100호 특집)]에서 ‘2009 대한민국 신뢰를 묻다’는 제목으로 대한민국 신뢰도를 여론조사(실시기관 : 미디어리서치, 전국19세 이상 성인남녀 1,000명)하였습니다. 그 중에 종교에 대한 신뢰도는 천주교 66.6%, 불교 59.8%, 개신교 26.9%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수치는 개신교의 신뢰수준이 천주교와 불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것이기에 충격적입니다. 오마이뉴스에서 시민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백찬홍씨는 [아무리 '개독교'라 불러도 한국교회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기사에서 ‘개신교’ 하면 ‘목회자들의 비리’와 ‘세습’, ‘물신주의’와 ‘성장주의’, ‘수구 보수적인 행태’, ‘전도 중심적인 패권적 선교방식’과 같은 이미지들이 떠오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불신의 배경에 대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초대형교회 목회자들의 비리나 도덕적 문제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정치인이나 재벌 총수의 경우, 사회적 비난을 감안해서 스스로 2선으로 물러나거나 수천억이 넘는 재산을 사회에 헌납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의 목회자들은 사법부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각종 비리들이 공중파 TV와 주요 언론에 보도 되더라도 건재합니다. 그 이유는 목회자의 제왕적 권위에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협조하고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교인 서로 간의 인간적 유대감과 목회자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결과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초대형 교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난 7월 29일 CBS TV를 통해 보도된 서울 양천구 신월동 S교회의 경우, 9억 5천 만 원이 들어가는 교회건축을 하면서 전체 건축비의 80%이상인 7억 9천 만 원을 금융권 대출을 받았고, 담임목사의 요구에 억지로 보증을 선 한 장로는 교회가 부채를 갚지 못해 파산하면서 자신의 집이 경매 처리되어 모든 재산을 날리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결국 경매된 교회를 되찾기 위해서 다른 교회의 명의를 무단으로 도용하는 불법을 저지르고도 교회측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지난 2월 16일 MBC [뉴스 후]에 보도된 인천 만수동 00교회 담임목사의 경우, 부동산 투기, 불투명한 교회재정 운영을 하다가 그 교회 장로에게 고소를 당해 지난 6월 13일 인천지방법원에서 업무상배임 및 부동산실명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교회의 담임목사는 건재합니다. 오히려 범죄 사실을 지적한 성도들을 사탄의 앞잡이로 몰아붙이는 일에 성도들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이 한두 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가 운영하는 교회문제상담소의 2008년도 상담 건수는 전화상담 63교회(138회), 방문상담 35교회(64회)입니다. 2009년 8월 현재까지 전화 59교회(116회), 방문 28교회(41회)로 아직 4개월이 남은 것을 감안할 때 상담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를 5만 교회로 볼 때, 이에 비해 상담 숫자는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회자와 교회문제를 거론하면 저주받는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사례별로 분석하면 ‘재정(전횡과 불투명) 문제’가 가장 크고, ‘목사의 독단적 교회 운영’, ‘세습’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교회 운영이 비민주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며, 목회자와 당회가 전횡을 하더라도 막을 방도가 없다는 개신교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실을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이것은 몇몇 목회자나, 운동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모든 성도가 주체가 되어 개신교를 정상화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은 더 이상 목회자에게 종속된 수족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와 성도 하나님으로부터 동일한 자격을 부여받은 자로서 ‘고민 - 문제제기 - 토론 - 협력 - 개혁’하여 교회의 주인이 목회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정상화의 핵심이 민주적 교회 운영입니다.

2. 민주적 운영, 비 성경적인가?
교회의 민주적 운영에 반대하는 분들 대다수가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라는 주장을 합니다. 아무생각 없이 들으면 맞는 말 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틀린 말 입니다. 왜냐하면, ‘신본주의’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이요, ‘민주주의’ 반대 역시 ‘신본주의’가 아니라 ‘독재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와 신본주의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므로 이들의 주장은 개연성이 없습니다. 더욱이 교회를 ‘신본주의’라고 말하는 분들은 ‘하나님의 유일하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목회자의 유일함’을 말하고 있기에 위험합니다.
소명은 목사, 선교사에게만 부여된 것이 아닙니다. 믿는 자는 모두 소명자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소명자는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 직장, 사회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목사가 교회와 사회에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부름을 받았듯이 소명자인 성도 모두는 자신에게 맡겨진 일(직업과 전공)을 통해 사회는 물론 교회에 복음을 실현할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칼빈은 이를 만인제사장직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주장은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비 성경적이다’는 것입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공동대표인 백종국 교수는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예외 없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견제와 균형을 원칙으로 삼는 체제이므로 이러한 죄의 본성이 부지불식간에 교회 안에 퍼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니버(Niebuhr)는 이에 대해 ‘인간은 정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설파한 바 있으며, 템플(Temple)은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정당하게 다루는 형태의 구조이며, 민주적 원리는 기독교의 산물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 교회 운영은 성경적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민주적 교회 운영은 현실적인 이유도 충분하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가 과거에 목회자 중심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개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목사가 가장 근대적 교육을 많이 받고 대부분의 일에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회중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과거처럼 교회의 특정 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랬다가는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렇듯 민주적 교회 운영은 성경의 정신을 충분히 반영한 것이며, 현실적으로 그 필요가 요청되고 있는 것입니다.


3. 잃어버린 민주적 교회운영
민주적 교회 운영을 개신교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있그렇지 않습니다. 민주적 교회 운영은 초기 개신교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완상 장로는 초기 개신교의 특징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을 ‘외세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 정열’과 ‘씨알들이 참정할 수 있는 민주주의 체제를 세우려는 노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초기 개신교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가 처음부터 마찰 없이 함께 만났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두 이념은 ‘서로 갈등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입니다. 민주주의는 특수주의요, 민주주의는 보편주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기 개신교에서는 민족주의의 정열과 민주주의의 열망이 어울려 애국애족 사상과 실천 운동으로 구현되었습니다. 특히 교회와 미션스쿨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훈련도장의 역할은 물론이요, 실천의 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초기 개신교’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천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회 운영 방식 자체가 한국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민주적 방식이었습니다. 개체 교회 안에서 보면 일반교인들과 함께 모이는 공동회의, 제직회, 당회 등의 운영에서부터 밑으로부터의 의사와 의지를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습니다. 개체교회와 노회 및 총회의 관계에서도 서구 의회민주주의 형식을 취했습니다. 각 교회 대표와 각 노회 대표가 총회에 참석하여 중요한 의결을 하였던 것입니다. 교회 안의 삶을 통해 민주적 조직 운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민주적 운영이 결국 한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그것이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3.1운동, 한글사수운동, 국사 지키기 운동, 물산장려운동, 교육계몽운동 등입니다.

그러나 해방 이후 개신교는 초기 민주적 요소들을 상실하여 권위주의적인 이승만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외래문화 직수입과 보급에 앞장서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이견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근본주의 성향이 득세했고, 70년대 이후 카리스마적인 목회자의 활동으로 양적 성장이 교회운동의 초점이 되면서 개신교의 민주적 교회 운영은 실종되고 만 것입니다.


4. 민주적 교회 운영 어떻게?
그렇다면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사명
① 목회자의 독점 탈피 : 대다수의 교회의 사명은 전적으로 목회자에 의해서 나옵니다. 목회자가 심사숙고해서 올해의 사명을 정하면 그 순간부터 교회는 목회자가 공포한 사명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성도와 재정은 그 일에 동원됩니다. 물론 탁월한 목회자의 선견자적 식견이 너무나 뛰어난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개신교 내에서는 목회자의 사명 정하기가 너무도 일반적입니다. 목회자가 선견자적 식견이 전혀 없는데 교회의 사명을 독점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민주적 교회 운영이 어려운 것은 교회 사명을 목회자가 독점하기 때문입니다.

② 하나님의 마음인 성도 : 교회의 비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구체적인 내용(사명, 핵심가치, 사역)은 하나님의 마음으로서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함께 교회의 사명을 찾고, 교회 내부적으로 해당년도의 구체적 목표를 정하는 공식적인 모임이 필요합니다. 민주적 교회의 운영의 시작이 바로 이런 모임에서 이뤄지기에 정말 중요합니다.

③ 평가의 기준 : 교회를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의 평가를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불량한 태도요, 직무 회피입니다. 이 땅에 청지기로 보냄 받은 성도는 최종 평가를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알기에 그 분께 보다 나은 결과를 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유용한 방법이 교회 평가입니다. 평가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교회의 사명, 핵심가치, 사역 등’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2) 복음적 분업
①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 : 성경에서 말하는 직분은 장로(감독)와 집사뿐입니다. 그 외에 직분에 대해서는 로마서 12:3-8에서 은사에 따른 직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예언자(믿음의 분수)’, ‘섬기는 자(섬기는 일)’, ‘가르치는 자(가르치는 일)’, ‘권위 하는 자(권위 하는 일)’, ‘구제하는 자(성실함)’, ‘다스리는 자(부지런함)’, ‘긍휼을 베푸는 자(즐거움)’입니다. 이들은 한 몸을 이룬 지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유기체적 분업자들 입니다. 성도들은 자신이 교회의 일부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나눠진 역할을 수행해야합니다. 약한 지체를 더 존귀하게 여겨 평균케 하시는 은혜를 따라 살아야 할 존재임을 자각하고 맡겨진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2:4-31)

② 현 직분제의 정비 : 개신교의 직분은 성경이 말해준 직분과는 다르게 진화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안수집사, 서리집사 등 다양한 직분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언급하지 않은 직분을 필요에 따라 만들고, 오히려 성경에서 언급한 은사에 따른 직분은 약화 시키는 것은 개신교의 큰 잘못입니다. 따라서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 성경적 직분으로 돌아가 성도가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사역할 때 교회는 수평적인 관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③ 집중된 교회 권력의 분리 : 교회 권력의 분리를 위해서 목회, 행정(재정), 사역의 독립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대부분의 교회는 세 영역을 목회자 또는 당회가 독점했습니다. 교회의 모든 문제가 목회자와 당회를 통해 양산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목회는 목사와 장로를 중심으로 설교, 성경공부, 심방, 예배인도, 의식 등을, 행정은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교회의 모든 행정과 사역보조, 의견수렴, 재정 운영을, 사역은 각 담당자 그룹이 담당해야 합니다.

3) 정관
① 교단 총회에 대한 오해 : 개 교회에 분규가 발생하면 상회(上會)의 법, 즉 교단의 헌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단 총회는 개 교회들의 협의체일 뿐 교회의 상회가 될 수 없습니다. 법적 효력은 개교회의 정관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민주적 운영을 위해서는 정관을 만들어야 합니다.

② 성경적 원칙 세우기 : 지금까지 개신교는 무원칙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 왔습니다. 정관이란 공개된 원칙입니다. 정관이 있으면 일하는데 불편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관은 무원칙과 편법을 막아 주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고 정관 자체가 성경만큼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의 정신을 벗어나 교회 일치를 무너뜨리는 제멋대로 정관은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다만 각 교단은 개 교회가 성경적인 정관을 갖도록 권장해야 합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에서 내 놓은 [모범 정관]은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③ 투명성 : 교회의 운영은 투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정, 의사결정처럼 중요한 내용은 100% 공개해야 합니다. 비밀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또 감사가 필요합니다.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사명, 핵심가치에 따라 사역했는지 살펴보고,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감사는 필요합니다.

4) 재정
① 교회 문제의 핵심 : 교회 재정은 항상 교회 문제의 핵심이 됩니다. 교회에서 재정을 담당하는 재정팀은 목회자의 수족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원칙에 따라 재정이 집행되기보다 목사의 뜻을 뒷받침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최효윤 회계사는 ‘교회의 재정 운영이 제사장이 활약했던 구약시대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은 관리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효율적 관리, 운영을 위한 인식전환이 필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재정관리 수준을 “제대로 배울 데도 없고, 물어볼 곳도 없고, 프로그램도 없다.”고 말면서 개신교의 재정 관리 수준을 ‘최하’라고 평가했습니다.

② 재정관리 원칙 :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제공하는 교회재정관리 10대 원칙은 교회가 재정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만큼 신경 써야 할 분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민사회운동을 하는 운동가가 재정이 투명하지 못하면 그가 이룬 모든 결실이 치명타를 입듯이 교회 역시 재정운영을 잘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이 오히려 불명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③ 사회적 분담 : 국가는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됩니다. 그래서 세금을 국민의 의무로 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구제, 봉사를 통해 사회에 적극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물론 소극적 측면에서 교역자 및 유급직원에게 지급하는 소득에서 발생하는 소득세 및 사회보험 분담금을 납부해야 합니다.

5) 소통
① 소통 안 되는 교회 : 교회의 문제는 직분과 정관의 문제이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서로 소통할 줄 모르는 것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소통 안 되는 교회가 된 것은 몇몇의 일방적인 발언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소통할 줄 아는 열린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열린 마음이란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통이 되기 위해서는 나의 발언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의견을 듣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② 소통의 장 : 복음적 분업으로 목회, 행정, 사역, 감사가 독립되어 있고, 정관을 갖고 있더라도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면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어렵습니다. 따라서 소통을 위한 장치가 필요합니다. 민주적 운영을 위해서는 교인총회, 운영위원회, 직원회(사역보고회), 사역(부서)별 모임과 같은 소통의 방법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구역(셀)과 같은 작은 모임까지도 민주적 소통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6) 교육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요소들이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사명, 복음적 분업, 정관, 재정, 소통을 이해하기 위한 교육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5. 맺으면서
지난 8월 15-16일 강화 남산유스호스텔에서 개혁교회 네트워크 연합 수련회가 “건강한 교회! 행복한 성도!”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본래 다섯 교회가 소속되어 있지만 사정이 있어 세 교회만 참여한 이번 수련회는 성도가 수련회의 주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성도들이 했고 대부분의 순서도 성도들에 의해서 진행하였습니다. 특히 개회예배와 주일예배의 설교는 장로들이 담당했습니다. 총 12개 그룹으로 나누어 '성장이냐? 성숙이냐?', '교회 중심성 강화냐? 개인 자율성 강화냐?', '민주적 운영이냐? 리더십 강화냐?' 등 개혁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들의 현실적인 고민을 주제로 토론했습니다. 성도들은 활발하게 토론에 참여하면서 건강하고 민주적인 교회를 향한 열망을 담아내었으며, 때론 목회자나 당회가 준 상처를 내놓고 서로를 위로하는 시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존 교회에서 경험한 목회자와 당회의 권위주의와 전횡을 지적했고, 민주적 교회 운영을 위해서 성도들의 의식개혁과 교회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룹 토론 후 이어진 기도회에서는 자신이 받고 싶은 복과 미래의 번성이 아닌 교회개혁을 주제로 기도하여 이전보다 더 큰 영감과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수련회를 마친 후 한 성도는 ‘교회 개혁과 민주적 운영에 대해 이렇게 관심 많은 분들을 만나게 돼서 기쁘다’고 했고 ‘전에 다니던 교회에서는 문제를 뻔히 보고도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교회운영은 물론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다른 성도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매우 좋았습니다. 1박 2일 짧은 수련회였지만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민주적 교회 운영을 모토로 하는 형제 교회들의 우정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여서 행복했다.’고 하였습니다.

교회가 많이 아픕니다. 그것은 성도의 아픔입니다. 물론 성숙하기 위해서 아픔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성도의 아픔은 무지의 소산이요, 기득권의 폭력입니다. 교회의 민주적 운영은 아픔을 해소하고 건강하면서도 행복한 교회로 가는 좋은 길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 어떻게 할 것인가?


이혁배 ❚숭실대 교수/기독교윤리



1. 기독교 이미지

종교-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한국기독교는 동질적이지 않다. 단순화의 오류를 무릅쓰고 유형화해본다면 한국기독교는 보수적 부문과 진보적 부문으로 나뉜다. 이 두 부문 중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쪽은 물론 전자이다. 선교초기부터 한국기독교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적 부문은 정치적 보수주의를 지속적으로 견지해왔다. 그럼에도 보수적 부문은 세속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두어온 자신들의 신앙적 전통에 충실하면서 최근까지 정치적 신념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이전까지 누리던 정치적 특혜들이 사라지자 참여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2003년 1월부터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해오고 있다.
최근 들어 보수적 기독교는 현실정치에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고 보수 정치세력도 보수적 기독교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변화의 물결을 거부하는 보수 정치세력에게 보수적 기독교는 최고의 정치적 파트너로 간주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 진영과 보수적 기독교는 자연스럽게 연대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명박 정부가 탄생했다. 이를 계기로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민주화운동을 이끌면서 진보세력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한국기독교는 근자에 들어와 보수세력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현재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에는 ‘이명박 정부 = 한국기독교 = 정치적 보수주의’ 라는 등식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이 등식은 한국기독교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가뜩이나 ‘개독교’로 불릴 만큼 기독교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악화되고 기독교인구가 감소하면서 기독교의 위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상황에서 이런 부정적 등식화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기독교에 결정타를 가했다. 이 등식화는 이명박 정부와 정치적 보수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의식 있는 시민들, 특히 젊은 세대와 기독교의 거리를 더욱 벌리고 말았다.
한국기독교 전체가 정치적 보수주의를 표방한다고 싸잡아 비판받는 것은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게는 억울한 일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는 다른 형태의 기독교를 추구한다고 강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판단해보면 대중의 이런 인식에는 객관적이고 타당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행동하지 않는 정치적 진보는 현실세계에서는 정치적 보수로 간주된다. 정치에는 중립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기독교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이라는 대중의 인식에는 기독교의 보수적 부문이 주류라는 사실과 아울러 기독교의 진보적 부문이 수행하고 있는 사회참여가 침체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가 정치적 보수주의를 옹호한다는 세간의 주장에 대해 진보진영의 기독교도 일정정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적 기독교는 이명박 정부와 한국기독교, 그리고 정치적 보수주의가 동일시되는 대중의 인식 틀을 수정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진보적 기독교 진영은 자신의 사회참여를 보다 설득력 있고 강도 높게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대중에게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도 건재하고 있음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이 방안보다 더 적절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2. 사회참여 검토

앞으로 진보적 기독교가 사회참여를 제대로 해나가려면 이전부터 지금까지 이루어진 기독교의 사회참여과정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경험을 철저히 인식해야 미래의 방향이 올바로 설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는 크게 네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노동자 및 빈민운동, 인권 및 민주화운동, 통일운동, 시민운동이 그것이다.

(1) 노동자에 대한 본격적인 산업선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산업전도를 시행한 1957년부터 시작되었다. 이어서 몇몇의 교단들이 산업전도에 참여했다. 산업전도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산업전도는 노동자의 권익과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산업선교로 진일보했다. 이에 따라 그 명칭도 도시산업선교로 바뀌었다.
도시산업선교는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 노동조합의 결성, 교육, 단체행동 등을 적극 지원했다. 도시산업선교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도시산업선교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했다. 그 이유는 첫째, 1987년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일반 노동운동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성장하면서 도시산업선교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도시산업선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던 해외교회들이 원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도시산업선교와 함께 일어났던 선교활동은 빈민선교였다. 빈민선교는, 1960년대 초 성공회가 부산에서 전쟁피난민 정착사업을 실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 도시문제연구소가 설립되면서 빈민선교는 본격화되었다. 그 후 경기도 광주대단지 사건이 발생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1971년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가 조직되고 답십리에 빈민센터가 설립되었다.
수도권에서 시작된 빈민선교는 1970년대 후반부터 지방 도시들로까지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 수도권도시선교회는 한국특수지역선교회로 개편되었다. 하지만 한국특수지역선교회는 얼마 지속하지 못하고 1979년 해체되면서 공식적인 빈민선교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후 일반 사회운동은 체제변혁운동으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기독교사회운동도 체제변혁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 시기 기독교사회변혁운동의 중심축은 민중교회운동이었다. 민중교회운동은 도시산업선교와 빈민선교의 맥을 이으면서 1983년부터 전개되기 시작했다. 민중교회는 예배, 신앙훈련, 야학, 공부방, 탁아소, 노동자교육, 건강교육, 의료진료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민중교회는 노동운동의 보호막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1983년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정부의 탄압이 다소 누그러들기는 했지만 세속적 공간에서 노동자에 대한 교육이나 노동조합의 결성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민중교회는 노동운동의 요람구실을 톡톡히 해냈다. 민중교회들은 1988년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을 창립하면서 운동의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
1980년대 말 동구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체제변혁을 지향하던 일반 민중운동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민중교회운동도 여기서 예외일 수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민중교회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95년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은 총회에서 민중을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 장애인, 여성, 양심수, 외국인 노동자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정의하면서 계급운동의 형태에서 벗어나 운동의 외연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 박정희 정권은 1969년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이에 진보적 기독교지도자들이 삼선개헌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참여해서 개헌반대운동에 앞장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도 성명을 통해 개헌반대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반면 보수적 기독교지도자들은 진보적 교계지도자들의 개헌반대운동이 성직의 권위를 도용하는 일이라고 비판하면서 박정희 정권을 옹호했다. 급조된 대한기독교연합회도 삼선개헌을 지지했다. 이런 교계의 찬반논쟁은 한국기독교가 보수적 부문과 진보적 부문으로 나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은 독재적인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이에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독교인 구속자가 늘어나고 정부의 인권탄압이 심해지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74년 인권위원회를 창설했다. 인권위원회는 그 당시 고난당하는 이들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면서 인권운동의 구심점역할을 수행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세력은 민주화운동진영을 탄압했다. 이에 기독교청년 김의기가 투신하고, 기독교노동자 김종태가 분신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는 이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 1984년 진보적 목회자들이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를 결성하여 기독교민주화운동을 선도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는 정권퇴진만이 민주화의 유일한 길이라며 강력히 저항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와 23개 지역 인권위원회는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을 전개했다.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는 정권퇴진을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기도회에 돌입했다. 이런 개헌서명과 단식기도회는 전국에 있는 목회자들의 성명서발표와 금식기도회를 촉발시키면서 6월 민주화운동의 서막을 열었다.

(3) 한국기독교는 1960년대만 하더라도 반공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진보적 기독교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다가 1972년 남북한 간의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이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통일운동의 중요성을 깊이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자각 아래 통일 및 사회정의 기독교협의회를 구성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 민주적 변혁이 민족통일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사회과학적 인식이 사회전반에 확산되었다. 기독교 진보진영도 이런 인식을 수용하면서 사회의 변혁이 통일의 성취와 별개가 아님을 강조했다. 나아가 민중이 통일운동의 주체임도 내세웠다.
진보적 기독교진영의 이런 주장들은 1988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으로 결실을 맺었다. 여기서 남북한이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주변국이 그것을 보장한다는 전제 아래 미군이 철수하고 군비가 축소되어야 한다고 제안되었다. 이 선언은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 선언을 계기로 금기시되던 통일논의가 자유로워지고 민간 측 통일운동이 급격히 확산되었다. 또한 정부의 7・7선언이 이어지면서 남북한 간의 총리급 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마침내 1991년에는 남북의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조인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 북한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을 계속했다. 이에 보수적 기독교진영이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1990년과 1991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사랑의 쌀 나누기운동과 사랑의 의약품 보내기운동을 전개했다. 이외에도 남북나눔운동, 한민족복지재단, 굿네이버스, 월드비전 등이 북한에 물자를 원조했다. 이 단체들은 남북대화나 통일정책를 추진하기보다는 북한주민들의 경제적 곤궁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졌다.

(4) 권위주의적 정치체계가 지배하던 시절 사회운동은 민중운동과 동일시되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사회운동은 체제변혁을 지향하는 민중운동과 체제 내적인 개혁을 추구하는 시민운동으로 분화되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80년대 말 민중운동이 이념적으로 기대고 있던 동구사회주의가 붕괴되었다. 게다가 새로 들어선 노태우 정권이 민중과 중산층으로서의 시민을 분리시키면서 민중의 저항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로 인해 시민운동은 민중운동을 압도하게 되었다.
사회운동의 이런 지형변화는 기독교 사회운동진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민주화운동 이전의 기독교 사회운동은 민중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그 당시 기독교 사회운동은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면서 기존의 사회경제적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는 급진적 종교운동이었다. 하지만 일반 사회운동이 분화되면서 기독교 사회운동도 기독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으로 나뉘게 되었다. 나아가 일반 사회운동의 구도가 그대로 반영되면서 후자가 전자를 제치고 기독교 사회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기독교 시민운동은 환경운동, 여성운동, 이주노동자운동 등 다양한 부문에 걸쳐 전개되었다. 진보적 기독교진영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시민사회적 이슈는 환경문제였다. 1981년 한국교회사회선교협회가 한국공해문제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몇 차례의 조직 확대를 거쳐 1996년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출범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기독교 시민운동은 이주노동자문제로까지 활동영역을 확장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유린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진보적 기독교진영은 이주노동자를 지원하는 단체들을 설립했다. 이런 가운데 1992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산하에 한국교회외국인노동자선교위원회를 조직했다.
한편 198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의 보수적 부문에서도 사회참여의 흐름이 생겨났다. 이로 인해 한국기독교의 전통적 등식, 곧 종교적 보수주의 = 정치적 보수주의, 그리고 종교적 진보주의 = 정치적 진보주의가 부분적으로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보수적 부문의 사회참여, 그리고 바로 앞에서 지적된 기독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화를 고려해보면 이 시기부터 한국기독교 안에는 크게 네 부류의 집단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집단, 종교적으로 보수적이고 정치적으로 개혁적인 집단, 종교적으로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개혁적인 집단, 종교적으로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집단이 그것이다.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개혁적인 지식인들이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결성해서 기독교시민운동을 전개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은 검소절제운동, 교회갱신운동, 음란문화추방운동 등을 펼쳤다. 1989년에는 개혁적인 복음주의 청년들이 한국사회의 대표적 시민운동단체 가운데 하나인 경제정의실천연합을 설립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은 주택문제와 재벌문제를 비롯한 경제정의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개혁적인 복음주의자들이 시민운동을 펼치게 된 배경으로는 보수적 기독교진영이 권위주의적 정치체제에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역사적 과오에 대한 철저한 반성, 그리고 기독교 진보진영이 사회참여와 관련해서 지녀왔던 도덕적 우위성에 대한 적극적 대응을 들 수 있다. 이런 배경 아래 시민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개혁적인 복음주의자들은 1990년대에 들어서 기독교 시민운동의 주도세력으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3. 경제적 민주화

1960년대부터 1987년까지 기독교 사회운동은 주로 정치적 민주화 실현에 진력했다. 하지만 그 이후 기독교 사회운동은 일반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문제에 그리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계층 간 불평등구조가 급격하게 심화되었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시장의 불평등효과를 완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을 통해 절차적 민주주의가 구현된 이후 한국사회에는 시장의 불평등구조를 제어할 사회경제적 제도가 구축되지 못했다.
이런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적 민주화로까지 관심의 지평을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근자에 와서 이명박 정부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가벼이 넘겨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오늘의 기독교 사회운동이 퇴보하고 있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방어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라고 판단된다.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메커니즘은 신자유주의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면서 강자의 이해관계가 관철되는 방향으로 사회경제구조를 재구성하고 있다. 이런 신자유주의가 주는 폐해는 실로 막대하다. 신자유주의의 수용으로 서민경제가 파산상태에 이르고 있다. 청년실업자가 넘쳐나고 비정규직노동자의 비율이 증가하고 영세자영업자가 새로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기독교는 거시적인 전망을 가지면서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경제적 민주화의 구현을 정부에게 강력하게 촉구할 필요가 있다. 본래 민주화란 모든 사회구성원들을 그들과 관련된 결정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적 민주화란 모든 경제주체, 특히 서민계층을 새로이 형성되는 소득과 부에 참여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기독교가 이런 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정부를 향해 경제정책 거버넌스(governance)의 구축을 요구해야 한다.
통상적인 입장에서 보면 기독교가 직접적으로 경제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경제적 민주화는 경제정책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데 경제정책의 수립・시행주체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조직이 아니라 정부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시민사회와 더불어 정부가 구사하는 경제정책이 올바른 궤도에 들어서도록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만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와 시민사회는 경제정책의 압력주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통상적 구분법이 기계적으로 적용될 경우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기독교나 시민사회의 영향력과 기여도는 상당정도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경제정책 거버넌스이다. 경제정책 거버넌스란 경제부문에서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대신 시민사회와 협력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특별히 경제정책의 수립과정에서 정부와 시민사회가 협력하는 방식을 뜻한다.
경제영역에서 시장도 실패하지만 정부도 실패한다. 지금과 같이 경제위기가 닥친 경우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이 제안되지만 이때에도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은 낮지 않다. 이런 이유에서 시장의 실패를 역설하며 정부의 개입만을 내세우는 입장은 적절하지 않다. 정부의 개입으로 생겨나는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는 경제정책의 수립과정에 시민사회가 관여할 필요가 있다.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데는 전문가적 지식뿐만 아니라 시민적 지식도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추상적이고 일반화된 전문지식 외에 시민들이 생활현장에서 경험하면서 습득한 지식도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에서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시민적 지식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경제정책 거버넌스가 이런 통로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기독교는 시민사회와 연대하여 이명박 정부에게 경제정책 거버넌스의 구축을 강력하게 요청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많은 주체들이 경제정책에 관한 정부의 각종 정보를 제한 없이 제공받으면서 경제정책수립과정에 참여하는 상시적 통로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서민들로 하여금 새로 형성되는 소득과 부에 참여하도록 하는 경제적 민주화 방안을 정부와 허심탄회하게 논의하고 구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경제정책 거버넌스의 구축은 시민사회가 경제민주화의 실현에 직접적이고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미미한 상태에서는 정부 - 심지어 개혁적인 성향을 띤 정부라고 하더라도 - 가 경제정책 거버넌스의 구축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다. 따라서 기독교는 자신이 속해 있는 시민사회를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특히 시민사회의 핵심적 주체인 NGO를 재정, 인력, 시설의 측면에서 적극 지원해야 한다.

4. 포지티브 전략

이제까지 한국기독교의 사회참여는 정부와 보수기득권층을 비판하는 네거티브 전략에 의존해왔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 지금은 비판만 할 때가 아니라 대안도 제시해야 할 시기이다. 그럼에도 기독교 진보진영은 여전히 외부사회와 기독교내부에 포진해 있는 보수세력의 행태와 제도화에 비판만을 가할 뿐 긍정적인 방향에서 어떤 사회경제적 모델로 나가야 하는지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기독교 진보진영의 대중적 설득력과 현실적응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진보진영은 사회운동의 방향을 네거티브 전략에서 포지티브 전략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기독교 진보진영이 운동적 활력을 회복할 수 있고 전체 시민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기독교 진보진영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이유를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으로는 시장경제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를 꼽을 수 있다. 실제로 진보적 기독교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시장경제 자체를 악마적인 경제체제로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나이브하다.
현대사회에서 실제적으로 기능해온 경제체제에는 두 가지 형태만이 존재할 뿐이다. 곧 자원의 배분을 정부가 담당하는 중앙관리경제체제와 자원의 배분을 시장에 맡기는 시장경제체제가 그것이다. 이런 정황에서 시장경제체제를 악마화하면서 부정한다는 것은 곧 바로 중앙관리경제체제의 수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구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중앙관리경제체제의 비효율성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중앙관리경제체제의 도입을 주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시장경제체제를 채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곧 시장경제에는 미국식 시장경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시장경제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존재한다. 경우에 따라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시장경제모델도 존재한다. 기독교 진보진영은 이런 경제적 사실들을 직시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하면서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시장경제모델을 주조해내는 데 기여해야 한다.
그렇다면 시장경제체제를 인간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 무척 까다로운 질문이다. 이런 질문에 답변하기에 앞서 우리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시장경제체제의 다양한 형태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런 형태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네 가지이다.
첫 번째는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이다. 이는 미국의 경제모델로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 경제모델은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한다. 그렇다고 이 경제모델이 철저한 자유방임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는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소유관계를 규정하고 경제와 관련된 법률을 개정할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한다. 또한 정부는 계약의 준수를 강제하고 경쟁을 촉진하고 통화제도를 마련한다. 이렇게 보면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는 순수한 의미의 시장경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장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정부의 개입을 최대한 자제하는 시장경제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 기업들은 은행보다는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 기업들이 간접금융보다는 직접금융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제모델에서는 주주가치(shareholder value)가 가장 중요한 경영지표로 간주된다. 그런데 주주는 자신이 투자한 기업이 이익을 보장하지 않으면 곧바로 투자처를 바꾸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 경제모델에서 투자자본은 단기적인 성격을 지닌다.
두 번째는 사회적 시장경제이다. 이는 독일의 경제모델로서 시장에서의 자유경쟁과 사회적 조정을 결합시키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이 모델은 경제주체들의 개인적 자유를 보장하되 이것을 절대적으로 고집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과 연결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 경제모델의 하위목표는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경제주체의 사업의욕, 혁신마인드, 수행능력 등을 고양하여 효율적인 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적 생산물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두 번째 하위목표는 사회보험, 공적 부조, 사회복지서비스, 주택건축지원금 등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나아가 노사공동결정제도를 통해서도 구현될 수 있다. 노사공동결정제도란 기업가의 단독결정제도와는 반대로 기업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도 기업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는 제도이다. 기업결정과정에의 노동자 참여는 이사회를 통제하는 감독위원회에 그들의 대표를 파견하면서 실현된다.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기업들은 자본시장보다는 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와 달리 기업들이 간접금융에 의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영자들은 단기이익을 요구하는 주주들의 압력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경영전략을 세울 수 있다. 장기적인 성과를 중시하는 금융부문은 실물부문을 뒷받침하는 본래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금융부문은 실문부분으로부터 독립되기 어렵고, 그래서 금융부문에 대한 실문부문의 우위성이 관철된다.
세 번째는 민주주의적 시장경제이다. 이는 스웨덴의 경제모델로서 생산영역에서는 자유경쟁을 허용하지만 분배영역에서는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관철시킨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간섭은 주로 두 가지 정책, 곧 연대적 임금정책과 평등주의적 재정정책을 통해 구체화된다.
연대적 임금정책은 사회적 생산물의 분배를 전적으로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 근거한다. 이 경제모델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인간의 성취이다. 따라서 노동에 대한 임금을 정하는 기준은 기업의 이윤수준이나 노동시장에서의 수요변동이 아니라 노동의 종류이다. 그래서 노동의 종류에 따라서만 임금이 차이가 나게 된다. 이렇게 임금의 차이가 노동의 종류에만 근거한다는 것은 모든 기업에서 동일노동에 대해 동일임금이 지불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평등주의적 재정정책은 두 가지 목적을 지닌다. 하나는 정부에게 복지사회의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전체적으로 복리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전자에서보다 후자에서 평등주의적 경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남은 물론이다. 연대적 임금정책의 시행으로 노동의 종류에 따른 임금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생겨난 임금격차는 평등주의적 재정정책을 통해 재조정되는 것이다.
분배영역에서 민주주의적 시장경제는 사회적 시장경제와 차이를 보이지만 금융영역에서는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민주주의적 시장경제에서 기업들은 자본시장보다는 은행, 특히 상업은행을 통해 자금을 조달한다. 따라서 기업들은 단기적 이익에 집착하는 주주들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경제모델의 경우 기업에 투자되는 자본의 인내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네 번째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이다. 이는 중국의 경제모델로서 생산수단, 특히 대규모 생산수단의 공동소유가 관철되는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중앙관리경제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양자의 의미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비교경제론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방식과 관련되는데 전자에서는 공동적 소유, 후자에서는 개인적 소유가 강조된다. 반면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앙관리경제와 시장경제는 경제자원을 배분하는 방식과 연관되는데 전자에서는 자원배분이 정부의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고, 후자에서는 그것이 시장에 의해 시행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사회주의는 중앙관리경제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와도 결합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성립 가능한 것이다.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는 생산수단의 공동적 소유를 강조한다는 면에서 다른 시장경제형태들과 차이점을 갖는다. 하지만 이 경제모델이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는 정의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의 수립을 방해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긍정된다. 특히 중소 규모의 생산수단에 대한 개인적 소유는 건전한 경쟁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사항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자원배분을 완전히 시장에 맡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시장은 정부에 의해 상당한 정도로 규제되고 있다. 이 경제모델이 추구하는 최우선적 목표는 국가안정을 강화하는 경제발전에 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부는 금융부문의 자유화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 부문에 대해 엄격한 통제를 가한다. 또한 수입부문의 완전한 자유화에도 반대하면서 선택적으로 수입을 규제한다.
이 네 가지 시장경제모델들 가운데 자유주의적 시장경제는 시장에서의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경제적 약자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그들을 전체사회 안으로 통합시킬 수 없다는 약점을 지닌다. 더욱이 이번 국제금융위기를 계기로 시장의 자율성이 시장의 자기조정으로 연결되지 않고 오히려 파괴적일 수 있음이 입증되었다. 한편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는 생산수단의 공동적 소유를 주장하기에 현재 한국의 경제상황에서는 실현되기 어려운 이상주의적인 경제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남은 것은 사회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적 시장경제이다. 물론 우리사회는 독일이나 스웨덴과 역사적 경험, 사회경제적 조건, 정신문화적 수준 등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두 경제모델들을 우리사회에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독일과 스웨덴의 경제모델들은 한국사회가 미국식 자유주의적 시장경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패러다임을 구축하는데 적지 않은 참고가 될 수 있다. 특히 이 두 경제모델들이 내세우는 투자자본의 높은 인내성은 우리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한국기독교는 시민사회와 더불어 앞으로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인 사회경제적 모델을 제안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적 시장경제의 구조나 내용을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5. 북한경제위기 해결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1990년대에 들어 한국기독교, 특히 보수적 기독교진영은 북한 주민에 대한 식량과 의료품 지원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물자원조는 기아상태에 빠져있는 북한주민들에게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그들의 경제적 삶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이란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임시방편적 조치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북한당국이 사회구성원들의 빈곤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의 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실제로 북한정부는 이런 인식 아래서 2002년부터 대대적으로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해왔다. 그 내용의 골자는 식량배급제의 단계적 폐지, 기업자율권의 대폭확대, 달러대 원화환율의 현실화, 가족영농제의 도입, 생산된 곡물의 개인처분권의 확대 등이다.
그런데 이런 시장경제적 개혁조처가 기존의 중앙관리경제체제를 지양하고 본격적인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것인지에 관해 북한경제를 연구하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렇게 사실적 차원에서 북한의 시장경제체제로의 이행정도를 둘러싸고 상이한 분석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당위적 차원에서 북한경제가 시장경제체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에 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렇다면 앞으로 북한은 어떤 형태의 시장경제를 지향해야 하는가? 앞에서 살펴본 시장경제의 형태 가운데 현재의 북한경제체제와 가장 큰 친화성을 갖고 있는 것은 생산수단의 공동소유를 주창하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이다. 물론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의 모델이 북한사회에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제공하는 통찰들은 중시되어야 한다. 특히 시장경제체계의 효율성과 사회주의국가 특유의 평등성을 결합시키는 문제, 개인적 소유방식과 공동적 소유방식을 공존시키는 문제 등은 북한경제의 장기적 진로와 관련해서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다.
1992년부터 전개되고 있는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경제가 그러하듯이 북한경제도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맞는 북한적 특색을 가진 시장경제 모델을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북한사회는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경제체제에 관한 개방적이면서도 비판적인 담론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사회경제적 모델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기독교는 진보적인 경제학자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사회과학자들과 협력하여 북한당국을 이론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새로운 경제체제 모델로의 전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북한을 재정적으로 충실하게 원조할 필요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기독교는 최근 발표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3·1선언’이 제시한 방안, 곧 지역교회들이 자체 예산의 1%를 떼어 평화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6. 시민운동의 급진화

일반 사회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사회운동에서도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연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기독교 민중운동이 소멸했기 때문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기독교 민중운동은 미약하게나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면 민중의 사회경제적 여건이 향상되었기 때문일까?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최근 용산참사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여전히 민중의 삶은 고달프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사회운동에서 민중적 이슈가 사장되고 있는 것은 운동의 헤게모니를 잡은 기독교 시민운동이 퇴행적이고 반(反)복음적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우리사회의 음지에는 아직도 철거민이 존재하고 영세공장 노동자가 존재한다. 기독교의 복음이 내세우는 핵심적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인 한 우리사회에 가장 밑바닥에 있는 민중의 권익은 계속 옹호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만이 한국기독교가 이제까지 전개해온 사회선교의 전통을 되살리는 길이다.
원론적인 의미에서 현대 시민운동은 계급운동이나 계층운동이 아니다. 오늘의 시민운동에서 이야기하는 시민은 근대유럽에서 말하는 부르주아와 동일시될 수 없다. 현대 시민운동에서 가리키는 시민은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받고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의 시민운동에서 이런 시민의 보편성이 항상 관철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시민운동이 시민의 보편성에 철저하지 않으면 그것은 계층운동으로 전락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권익과는 무관한 중간층운동으로 귀착하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시민운동은 민중운동과 대립하게 되면서 민중운동과의 연대가 실현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 민중운동진영의 진단에 따르면 현재 기독교 사회운동은 민중의 문제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민중신학을 공부하는 신학생들이 졸업 후 민중교회로 진출하지 않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기관이나 교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세입자들의 처지를 직접적으로 대변해주는 현장교회가 거의 없다. 이런 사실들은 기독교 사회운동의 주류인 시민운동이 중간층운동으로 굳어져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데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첫째, 앞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기독교 시민운동이 형성되는 초기부터 정부가 바닥계층으로서의 민중과 중간계층으로서의 시민을 분리시키면서 민중운동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민중운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때부터 생겨난 기독교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리가 지금까지 관성적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기독교 시민운동의 주류세력인 개혁적 복음주의자들이 민중지향성을 철저하게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개혁적 복음주의자들은 본래 종교적이고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인 주류 기독교 출신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류 기독교는 신앙적 기초와 물적인 토대를 제공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이들은 주류 기독교와 철저하게 단절하기 어렵고, 그래서 시민운동의 급진성을 담보하기 힘들다. 그 결과 기독교 시민운동은 보수화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오늘의 주제와 관련해서 발제자가 관심을 갖는 것은 두 번째 이유이다. 기독교 시민운동이 민중운동과 강고한 연대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보다 급진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종교적으로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개혁적인 기독교세력과 종교적으로 진보적이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기독교세력이 더욱 분발하여 개혁적 복음주의자들을 민중적 이슈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견인할 필요가 있다.
발제자가 기독교 시민운동이 민중운동과 연대해야 한다고 제안한다고 해서 과거처럼 기독교 사회운동이 민중운동에 의해 주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민중은 수적인 측면에서나 영향력 측면에서 사회운동을 주도하기 어렵다. 그래서 민중운동만으로는 사회전체에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런 한계로 인해 민중운동은 시민운동과 결합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중운동진영은 시민운동을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시민운동진영과 보조를 맞추면서 그들로 하여금 민중적 이슈를 수용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기독교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의 연대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중운동이 기독교 사회운동의 도덕적 정당성과 신앙적 당위성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민중이야말로 성서에서 말하는 ‘지극히 작은 자’이고 이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져도 기독교 사회운동에서 바닥계층인 민중은 결코 배제될 수 없는 것이다.

7. 대안교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기독교 사회참여의 실질적 주체는 소수의 기독교적 엘리트들과 기독교연합기구들, 특히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였다. 하지만 원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기독교 사회참여의 주체는 이런 지도자적 인물이나 연합단체에만 한정될 수 없다. 보통의 기독교인과 지역교회도 엄연한 주체이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기독교는 사회참여의 주체를 다양화해서 평범한 기독교인들과 지역교회들도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신앙인을 일반 사회운동이나 기독교 사회운동에 참여시켜 한국사회의 진보적 형성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개개의 기독교인들을 각성된 시민으로 교육하는 것은 기독교가 우리사회의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형성에 공헌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대부분의 지역교회들에서는 ‘기독교인은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할 수 있지만 그가 속해 있는 교회의 이름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암묵적으로 세워져있다. 적지 않은 진보적 교회들에서조차 이런 원칙들이 관철되고 있다. 하지만 전체사회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원칙은 나이브하다.
사회개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를 통해 사회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지역교회와 상관없이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보다 엄밀하게 판단해보면 사회운동에의 교회적인 참여가 개별적인 참여보다 사회를 개혁하는데 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의 동원이란 측면에서 지역교회와 사회운동진영은 서로 경쟁관계 내지 갈등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지역교회에 출석하면서 소득의 10%가 넘는 금액을 헌금하는 기독교인이 사회운동단체를 시간적이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말하는 것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노동의 강도가 증대되고 소비수준이 소득수준에 비해 빠르게 상승해가는 현대인의 생활조건에서 교회활동과 사회운동 모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로 주변을 돌아보면 지역교회를 열심히 섬기면서 동시에 사회운동에 열성을 보이는 기독교인을 발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제약성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지역교회는 사회운동진영에게는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로 비쳐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이 개별적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권유될 수 있어도 그들이 속한 지역교회가 자체적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지닐 수 없다. 지역교회 자체가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한 전체 기독교계의 사회참여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사회참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까지 지역교회가 기독교 사회운동의 뒷전으로 물러나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역교회가 위치한 지역에는 자영업자, 주부, 비경제활동 노인 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의 수가 임금노동자의 수에 맞먹는 1천 5백만 명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들을 각성된 시민으로 만드는 것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해당지역을 진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지역교회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에 있다.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수적인 면에서나 영향력 면에서 보수적 교회들은 진보적 교회들을 압도하고 있다. 심지어 진보적인 목회자들이 섬기는 교회들도 보수화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교회적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기존의 보수적인 교회들을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개혁할 수 있을까? 보수적인 교회의 상층부가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교회의 구조나 방향을 바꾸는 일에 찬성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관성이 주는 무게를 생각해보면 이런 개혁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구도보다는 진보성을 담보하면서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대안교회들이 새로 설립되는 방안이 더 현실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첫째는 대안교회를 지향하는 목회자의 경제적 생활을 어떻게 안정화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치적이고 신앙적으로 보수적인 교회들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진보적인 신앙을 내세우는 대안교회가 해당지역에 자리를 잡고 일정 궤도에 들어서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주류교회에 대해 어느 정도 경쟁력을 갖춘 대안교회가 뿌리내리는 데는 적지 않은 세월이 소요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대안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이 이런 과도기를 큰 위기감 없이 통과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들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교단을 향해 목회자최저생활보장제의 도입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대안교회 설립을 위한 기금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둘째는 어떤 지역에 대안교회를 설립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치밀한 전략 없이 아무 곳에나 대안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기독교 사회운동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앞으로 대안교회들은 자신이 위치한 지역을 진보적으로 재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신중하게 타진해야 한다. 현재 이런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빈곤계층이나 중하위계층이 거주하는 영구임대아파트단지나 국민임대아파트단지이다. 대안교회들을 꿈꾸는 진보적 목회자들은 이곳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 사회운동을 비롯한 모든 사회운동이 쇠퇴하게 된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지역적 분산이다. 함께 거주하지 않으면 운동성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법이다. 영구임대아파트나 국민임대아파트의 건립은 가정경제적 차원에서 서민들의 주거생활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정책방안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사회운동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고무적인 조치이기도 하다. 기존의 사회경제적 질서와 제도에 비판적일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사회경제를 간절히 희구하는 서민들이 함께 거주하며 운동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새로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은 대안교회가 결코 간과하거나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대목이다.

 
   
▲ 교회의 3가지 역할 세미나 / 예배 ⓒ 당당뉴스 송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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