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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이 하나되어 역사하심은...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 삼위일체주일(20090607)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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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6월 01일 (월) 10:48:42
최종편집 : 2009년 06월 01일 (월) 21:02:23 [조회수 :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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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후 첫 번째 주일/ 삼위일체주일(20060607)
성서일과/ 시 29; 이사야 6:1-8; 롬 8:12-17; 요 3:1-17
본문/ 이사야 6:1-8
셋이 하나 되어 역사하심은...

   
          (사 6:1-8)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홀로 유일하신 분이면서 동시에 삼위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창조주이신 성부 하나님, 구속주이신 성자 예수님, 도움의 주이신 성령, 삼위로 하나 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솔직히 셋이면서 하나라는 말은 인간의 논리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면서 또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신비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개입하셔서 역사하시는 모습은 분명 셋이면서 또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은 삼위로 역사하셨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은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 때에 하나님의 신 곧 성령이 활동하고 계셨습니다.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곧 그리스도 예수님이었습니다.
          (요 1:1, 3)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오늘 봉독한 말씀은 이사야의 소명에 관한 것입니다.
소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의 경우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것은 이사야가 소명을 받을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심을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라는 말을 ‘우리’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고 계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 스스로 일컬으시기를 ‘우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이입니다.
우리는 여럿입니다.
두 말이 하나를 가리키고 있으니 하나이면서 또한 여럿이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창조 직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은 후에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창 4: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만물 가운데 가장 사랑하셨던 인간을 동산 밖으로 내 쫓으실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중 하나라고 하십니다.
한 분이시면서 또한 여럿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이 당신을 일컬어 우리라고 하시는 부분에서 느껴지는 것이 없으십니까?
하나님의 탄식이 배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근심과 염려가 보이지 않습니까?
힘들어하시는 것 같은 하나님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까?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심판해야 하는데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동산 밖으로 내치시는 하나님의 고민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멸망의 길을 향해 달려가는 장자 이스라엘을 위해 무언가 하실 말씀이 있는데 그 말을 전할 자가 없어 탄식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곧 삼위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서 고단한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힘든 모습을 발견합니다.
당신의 온 힘을 기울여 역사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혼자로는 감당할 수 없어 여럿이 함께 하시려는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는 죄인을 항해 진노하시고, 근심하시는 성부 하나님이 보입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은 인생이 당신에게 거역함으로 영생을 잃어버린 것에 진노하시며 또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입니다.
어쩔 수 없이 죄에 상응한 징벌을 내릴 수밖에 없는 당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모습입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큰 섭리 가운데 택하신 장자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채 망해가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아픔입니다.

둘째는, 우리가 당할 징벌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시는 성자 예수의 아픔이 보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서 인간이 겪는 고통을 함께 겪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죽으시는 모습입니다.
그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는 이사야의 예언에서 가장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 53:4-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셋째는,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 후에도 여전히 인생을 염려하시는 성령의 탄식입니다.
죄의 종에서 놓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나, 여전히 연약한 육신을 입고 땅에 남아, 유혹과 시련에 봉착하고 있는 인생들을 도우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의 도우심은 바로 탄식으로 하는 간구입니다.
          (롬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분이신 하나님이 삼위로 역사하시는 것은 인생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안간 힘 그리고 그의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찾을 때에는 우리에게 있는 걱정과 염려 그리고 두려움만이 우리에게 있는 전부였습니다.
우리가 주께 바라는 것은 오로지 은혜였고, 긍휼이었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았으나 연약한 자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염려와 탄식은 세상 끝날까지 멈추는 법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은 온 힘으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걱정과 염려를 함께 지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그것입니다.
소명을 받는 자는 삼위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입니다.
그의 엄위한 영광과 더불어 그의 근심과 탄식을 아는 자가 그의 부르심에 응답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전하는 말씀을 통해 삼위일체의 교리를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신비를 사람의 말로 푸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사야가 어떤 경로로 삼위 하나님을 만나 그의 일꾼이 될 수 있었는지를 깨닫고, 우리도 이사야처럼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자가 되리라고 다짐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아무쪼록 삼위로 역사하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간곡한 마음을 느껴 아는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사야가 본 것은 엄위하신 성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천사들의 옹위를 받고 좌정하신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천사들에게는 여섯 날개가 있는데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감히 바로 쳐다볼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또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었는데 이는 겸손과 자기부정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머지 두 날개로 날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는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 번을 외치고 있습니다.
거룩을 세 번 노래하는 것을 삼성창(三聖唱)이라고 하는 데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본문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천사들의 찬미 소리가 하도 커서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연기가 집에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뵐 때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에 연기가 옹기점 연기 같이 자욱했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다고 찬송했습니다.
그의 거룩함에서 영광이 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지으신 자와 지음 받는 자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으로 피조물과는 달리 영광으로 충만한 분인 것입니다.

그 영광을 바로 볼 자가 없습니다.
천사들조차 감히 우러러 볼 수가 없으니 타락한 인생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뵙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깃든 모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그 영광이 그의 얼굴에서 사라질 때까지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다녀야 했습니다.
바울의 말 그대로 모세의 얼굴에 깃든 영광은 없어질 영광이었습니다.
하나님 영광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모세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 그 자체를 직접 바라 본 것입니다.
이사야의 입에서 절망스러운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5] ...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순간 알게 된 것이 자기의 부정함이었습니다.
검은 것이 검은 것 가운데 있으면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검은 것이 흰 것 가운데 놓이면 뚜렷하게 구별이 되는 법입니다.
부정함은 거룩함과 반대되는 말입니다.
부정한 것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스스로의 부정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부정함이 거룩함 앞에 서니 그 더러움은 부인할 수 없도록 뚜렷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십니다.
그가 시작하셨으니 그가 마치실 것입니다.
타락한 인생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된 후 생긴 것이 두려움이었습니다.
          (창 3:10)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두려워하는 것이 잘못이 아닙니다.
거룩하지 못한 자들이 거룩함 앞에서 마땅히 지녀야 할 마음이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있어야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어야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느낀 것도 두려움이엇습니다.
그것도 죽음을 예감하는 심각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이사야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6]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죄를 씻어 부정함을 제하여 주셨습니다.
두 날개로 날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리던 천사 중 하나가 핀 숯 곧 달구어진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에 대며 거기에 깃든 악과 죄가 제하여 졌다고 말했습니다.
스스로 부정함을 고백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이사야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핀 숯이 입술에 닿았으나 입술은 타지 않고 죄가 제하여지는 신비가 나타났습니다.
입술을 태워 더 이상 부정한 말을 하지 않는 것 밖에 길이 없었는데, 태웠으나 타지 않고 죄를 씻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날 이후 하나님의 말씀을 그 입술에 담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언자,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가 된 것입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죄를 사하시는 은혜가 그랬습니다.
타는 숯불을 입술에 대었으나 입술이 타지 않고, 죄는 사하여지는 역사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세상 죄를 그 한 몸에 업고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셨습니다.
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생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몸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죽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체험한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와 같은 것입니다.
죄에 대해 심판하심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형상을 닮게 빚어 만들고, 그 안에 당신의 영을 담아놓은 인생을 죽이시는 일을 차마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죽이심으로 인생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당신이 모욕을 당하시고, 당신이 아파하시고 마침내 당신이 죽으심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인생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 가운데서 죽지 않고 사함을 받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자에게는 값없이 얻는 선물이지만, 그 은혜를 주시는 분에게 따르는 것은 아픔입니다.
하나님이 아파야 인생이 나음을 얻는 것입니다.

성자 예수의 구원의 은총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 임한 것이라면, 이사야의 입술을 정하게 하신 은혜는 하나님의 마음을 태우는 아픔으로 임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입술을 태워야 할 그 고통을 하나님이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니 입술이 아닌 마음이 탔을 것입니다.
자식으로 말미암은 고통이 다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자들 가운데 기독교의 은혜는 싸구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불행히도 구원의 은총을 입은 자들도 값없이 선물로 받았다는 것만 알고, 하나님의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이 잇습니다.
우리가 거저 받았다고 싸구려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태워서 주신 은혜입니다.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매달아 피와 물을 다 쏟으심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아는 자들만이 갚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사야가 그 길을 발견했습니다.

입술이 타는 고통,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고통 없이 부정함을 씻은 이사야에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삼위 하나님이 함께 근심하며 하는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파하시는 마음을 느낀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파하심을 아는 자에게만 들리는 음성입니다.
타지 않고 씻었으니, 거저 받았으니, 다행이라고 여기는 자가 아닙니다.
내게 임한 이 은혜가 나를 대신하여 스스로 태우고 죽이심으로 베푸신 은혜임을 아는 자들이 들을 수 있는 소리입니다.

이사야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사명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심에 참여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염려를 덜어드리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파하는 것이 그가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임하심은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누굴 보낼까 근심하시던 하나님의 결론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임하신 하나님-예수님의 빈 자리를 누구로 채울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진리의 영으로 몸소 오셨으니 곧 성령입니다.

지금도 삼위 하나님은 염려하고 계십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하나님의 이 아픔을 아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근심과 아픔은 당신의 피조물인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미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과 함께 근심하고 아파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부정함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감당할 사명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자신의 부정함이 겹쳐졌을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고민을 느꼈습니다.
태움 없이 씻어 주시는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아픔을 알았습니다.
염려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사명을 깨달았습니다.

오늘도 삼위 하나님은 근심하고 계십니다.
이제 당신이 근심하시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구워할까?
어떻게 도울까?
그런 것들은 이미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 다 이루어졌습니다.
여전히 남아있는 하나님의 근심은 이사야에게 들린 음성 그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아직 양 우리에 들이 못한 자들을 염려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양 우리에 들어 있는 자들이 들어야만 하는 음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당신을 태우는 아픔으로 주신 은혜,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고통으로 주신 은혜를 받은 자들입니다.
부정한 입술을 태워 정하게 하신 은혜를 받은 이사야는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탄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이스라엘에 전하는 자 -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어떤 일이 닥칠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길이었으나 오직 하나 하나님의 근심과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려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무라는 음성으로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안타까운 음성, 아파하시는 음성입니다.
그날 이후 사울은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 앞에 무슨 일이 있을지는 생각할 것도 없었습니다.
(행 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아픔을 느끼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염려하시는 음성을 듣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을 위해서 갈 자를 찾으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길입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 앞에 행하심으로 인도하시고 도우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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