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 > 박성규 설교
미리 보는 교회력 설교 성령강림주일(20090531)長吁短嘆(장우단탄/ 긴 한숨, 짧은 탄식)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9년 05월 25일 (월) 07:42:31
최종편집 : 2009년 05월 26일 (화) 00:58:44 [조회수 : 2752]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텔레그램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성령강림주일(20090531)
겔 37:1-14; 시 104:24-34; 롬 8:22-27; 요 15:26-27, 16:4-15
본문/ 로마서 8:22-27 

장우단탄(長吁短嘆), 긴 한숨 짧은 탄식

 

 

   
         (롬 8:22-27)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장우단탄(長吁短嘆), 긴 한숨 짧은 탄식이라는 말입니다.
운동권, 좌파, 빨갱이... 마침내 노무현 추종자라는 딱지가 붙어, 순탄하던 제 목회의 길에 큰 굴곡을 만났습니다.
운동권, 좌파라는 추궁에야 예수님도 그렇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 있다 쳐도, 목사가 예수 아닌 그 누구를 추종한다는 말에는 거부감이 들었드랬습니다.
그러나 부인하지 않았고,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어찌 남다른 소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長吁短嘆, 오직 이 말에 모든 것을 담고, 그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에 대해 지금 말한다는 것은 바다에 물 한바가지 더하는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 아침에도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합시다.
성경은 그 어느 경우에도 충분히 나침반과 잣대로서의 구실을 할 것입니다.
꼭 짚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하십니다.
온 나라가 탄식으로 가득한 오늘, 성경은 성령도 함께 탄식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탄식하는 소리가 들립니까?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탄식의 연속입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와 기도로 이루어진 시편은 찬양만큼이나 많은 탄식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편을 그 종류대로 분류할 때 탄식시라는 항목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날마다 탄식합니다.
          (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하루 중에도 탄식이 끊어지는 시간이 없습니다.
          (시 55:17)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탄식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신음과 슬픔 그리고 재앙으로 이어지는 탄식이 있습니다.
          (욥 23:2)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

반면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구원의 손길을 뻗어 주시는 탄식도 있습니다.
          (시 12:5)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의 눌림과 궁핍한 자의 탄식을 인하여 내가 이제 일어나 저를 그 원하는 안전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관통하는 낱말도 탄식입니다.
인생만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 아래에서부터 하늘 위까지 탄식이 들리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살피는 가운데 탄식이 그치고, 기쁨이 찾아드는 은혜가 있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 35:10)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성경이 말하는 탄식 소리가 여러분의 귀에 들리십니까?
듣는 자는 소망이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는 찬송도 하지 못하지만 탄식하지도 못하고, 탄식소리를 듣지도 못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소리가 들리고 있습니까?

피조물 곧 만물이 함께 탄식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사람만 탄식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 곧 생명이 있는 모든 것 아니 산과 물, 돌과 흙까지 함께 고통 속에 탄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타락하기 전에는 피조물들의 탄식소리가 없었습니다.
하나하나 지으실 때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있었습니다.

빛이 있으니 어둠까지도 아름다웠습니다.
          (창 1:18) 『...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은 땅과 어우러져 좋았습니다.
          (창 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에는 풀과 나무가 무성하여 아름다웠습니다.
          (창 1: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바다에는 온갖 종류의 물고기와 바다 생물들로 살게 하시고, 공중에는 날아다니는 새들을 지어 살게 하시니 그 또한 아름다웠습니다.
          (창 1: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마지막으로 인생을 지으시고, 당신이 지으신 만물을 그에게 맡기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일을 다 마치시고 내려다보시니 더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창 1: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무엇이 보이십니까?
하나님 지으신 만물이 서로 얽혀 어우러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동해에서 떠올라 서산으로 지는 해는 더 없이 아름답습니다.
해가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어둠을 깨고 올라오는 일출의 때와 어둠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기 직전 일몰의 시간입니다.
어둠과 어깨를 견주고 있을 때 밝음이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 지으신 만물이 그렇습니다.
전혀 상반되는 것 같아도 본시 하나인 것입니다.
어둠이 빛에서 나누인 것 같이 물은 땅에서 나누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흙 곧 땅에서 나누어진 존재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물은 서로 연하여 있다는 뜻입니다.
나누어져 있어 다른 것처럼 보여도 서로 얽혀 하나입니다.
본시 하나이니 그 중에 하나가 아프면 모두가 함께 아파합니다.
하나가 탄식하면 함께 탄식하게 됩니다.

피조물이 함께 탄식하게 된 것은 오로지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 지으신 세계의 터전이 땅인데, 인간이 그 죄로 저주를 받을 때, 땅이 함께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 3:17-18)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한 번 파헤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종신토록 땅을 파헤치며 살아야 합니다.
한 번 파헤치기 시작한 땅에서는 먹을 수 없는 것들, 아프게 하는 것들이 함께 자라게 됩니다.
땅을 파는 수고뿐 아니라 필요 없는 것들을 걷어내는 수고가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파헤치는 자도 수고로울뿐더러 땅은 파헤쳐지는 아픔으로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생명이 땅을 딛고 삽니다.
하늘을 나는 새도 땅에 잇대어 그 보금자리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바다의 밑도 결국은 땅이니, 바다의 고기도 땅에 기대야만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 땅이 파헤쳐지니 만물이 함께 고통을 받고 탄식하며,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욕심에서 나왔습니다.
먹지 말라 하신 말씀을 어긴 것이 곧 죄였습니다.
먹지 말라고 하신 까닭은 꼭 먹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을 먹는 것이 욕심입니다.
가질 필요가 없는데 가지려 하는 것이 욕심입니다.
그 욕심이 곧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한 번 파 헤쳐진 땅에 이미 죄로 물든 인간의 욕심이 더해지니, 땅은 더 넓게, 더 깊이 파헤쳐지기 시작하고, 만물의 탄식하는 소리는 깊어만 갔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이 내는 탄식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탄식이 아닌 피조물의 탄식소리를 듣게 된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탄식이 깊은 신음으로 변한 후에야 인간은 만물의 탄식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때늦게 땅의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나섰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될 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지으신 만물을 맡아 다스리게 하신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탄식하는 까닭은 인간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인생이 자신의 탄식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입에서 나오는 탄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가지지 못해서 나오는 탄식이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것이 없어 발하는 탄식이 아닙니다.
춥고, 더워서 나오는 탄식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만물을 탄식하게 만든 그 죄의 괴로움을 느낌으로 내뱉는 탄식,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자신과 만물을 함께 탄식케 하고, 신음케 하는 죄의 본성을 깨달음으로 나오는 탄식입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라는 것은 먼저 그리스도인 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속으로 탄식한다고 합니다.
세상의 일, 육의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는 것이 아니요, 속사람의 일, 영의 일로 탄식한다는 뜻입니다.

탄식하는 그 자체는 아픔이요, 슬픔이지만 스스로 탄식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더 큰 아픔과 슬픔입니다.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아픔은 누구나 느낄 수 있습니다.
아픔이 그것뿐이라면 다행한 일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뼈는 붙고, 살은 다시 솟아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장이 잘못되면 어렵습니다.
고칠 수 없을 만큼 덧나지 않으면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몸속에 암을 키우면서도 알지 못하고 지내다가, 온 몸에 암이 퍼진 후에야 병원을 찾아갔으나 이미 늦어 죽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이 잘못되면 어떻습니까?
죽은 다음에야 아픔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주님이 들려주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옥에서 고통 받는 부자는 땅에서 날마다 연락을 누리던 자입니다.
          (눅 16: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연락(宴樂)은 잔치를 베풀며 즐거워했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 나사로는 어땠습니까?
산다는 게 아픔이요, 탄식이었습니다.
          (눅 16: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벗어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치던 부자가 말합니다.
          (눅 16:27-28) 『[27] ...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천사를 보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사로를 보내라고 합니다.
그의 형제들이 나사로의 말을 듣기 전에 나사로를 보게 하라는 뜻입니다.
아픔을 모르는 삶과 아픔을 아는 삶의 차이를 알게 하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합니다.
          (눅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만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자는 속사람의 깊은 아픔을 아는 자입니다.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탄식 소리를 듣는 자입니다.
아픔을 모르고는 믿을 수 없습니다.
너무 아파서, 치료할 길이 없어서, 나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깊은 탄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탄식은 인간의 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를 깨달은 자에게서 나옵니다.
          (롬 7:21-23) 『[21] ...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인간의 탄식은 바로 이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 끼어서 생기는 아픔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은 이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아픔을 모르는 인간은 패망하게 됩니다.
유다의 멸망을 예언한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로 불립니다.
그가 탄식합니다.
          (렘 4: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눈물로 예언하는 예레미야와는 달리 거짓 선지자들은 말했습니다.
          (렘 23:16-17)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 [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멸망이 문턱에 서 있는 자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평안하다고, 재앙은 없다고, 괜찮을 거라고, 다 잘 될 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픔으로 인해 탄식치 못하고, 애써 감추고 있는 형국입니다.
여호와를 멸시하지 않는 자, 마음이 강퍅하지 않은 자 곧 여호와를 믿는 자는 자신의 아픔을 숨기지 않습니다.
          (시 38:9)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의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의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구원도 없습니다.
아픔을 모르는 미련한 자, 둔한 자가 되지 말고 주 앞에서 영혼의 곤핍함을 알아 탄식하는 자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는 자의 탄식은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서기까지 멈추지를 않습니다. 
          [23-24] ...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양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아들이 되어 그의 나라를 상속받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의 구속은 썩을 육체에 갇혀 사는 인생에서 영원한 삶으로의 구원을 뜻합니다.
양자됨과 구속, 그것이 탄식하는 자의 소망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구속은 아직은 소망으로 남아 있습니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은 소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소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약속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고후 5: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다른 말로 하면 육의 몸을 입고 땅에서 사는 동안은 탄식을 그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참음으로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비록 죄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 끼어 당하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다시 이전의 미련하고 우준한 상태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음으로 기다리는 동안에 성령의 탄식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참음으로 기다리는 자, 탄식하며 하늘 처소를 사모하는 자를 위해 성령이 도와주십니다.
본문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합니다.
참고 기다리기가 힘에 부칩니다.
언제 탄식하는 소리가 변해 신음이 되고, 비명이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니 탄식하기를 그치고, 육을 위해 연락하는 자리로 돌아가게 될지 모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목적은 끝까지 참게 하려 함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얻은 생명을 하나라도 잃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은 함께 탄식하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께서 가장 확실하게 인생을 도우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도 그런 뜻입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말합니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성령의 탄식이 인생의 탄식과 다른 것은 인생의 탄식이 아픔이라면, 성령의 탄식은 아픔이 아니라 동정이요, 기도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탄식이 아니요, 죄 없는 이, 죄 사함의 권세를 지닌 이의 탄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고통을 보셨습니다.
불쌍히 여기시며, 민망히 여기실 때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물러갔습니다.
통분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을 때는 죽어 무덤에 묻힌 자가 다시 사는 큰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본문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27]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성령의 탄식 곧 성령의 간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간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근심이 그럴진대 탄식이라고 다르겠습니까?
또 기도라고 하면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도우심을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연약한 우리를 위해 간구하며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소망하는 나라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 5:13-14)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탄식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함께 여호와를 찬양하는 곳입니다.
믿지 않는 자도 피조물의 탄식과 신음소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탄식소리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알아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죄 사함의 은총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간이 살기에 충분할 만큼 넓지만 인간의 욕심을 채울 만큼 넓지는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에서 비롯된 죄, 그 죄로 말미암은 탄식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영의 소리에 민감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시 19: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같은 류 끼리 통한다는 뜻입니다.
물은 물과 섞이고, 기름은 기름과 섞입니다.
그러나 물과 기름은 섞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은 영의 소리를 듣고, 육은 육의 소리를 듣습니다.
성령 충만하여야 내 영혼의 소리,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자들도 탄식하는 가운데 참음으로 기다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온전한 구속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되어, 내 영의 탄식하는 소리를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믿는 자가 되어, 믿는 자를 돕기 위해 탄식하며, 간구하는 성령의 소리를 듣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탄식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이김으로 탄식을 그치고, 주님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 모든 피조물과 함께 주를 찬송하는 그 날을 소망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관련기사]

박성규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145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1개)
 * 100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20000byte)
 * [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올린 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백말 (58.234.103.237)
2009-05-27 12:39:13
저에게도 탁식소리를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소리를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저에게도 탄식소리를 주셨습니다. 5월23일 새벽기도시간에 교회에 가서 엎드리어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죄 죄 죄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후 또기도하는데 제가 감당하거나 절제할수없는 애통함과 탄식이 저를 압도하여 하나님앞에 사람들앞에 숨길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저의 깊음 속에서 끌어넘치는 슬푼애통함이 흘러 지금도 그시간을 기억하면 참을수 없는 아품이 가득합니다. 왜 이런일이 일어났는지 알수없었고 그저 주님이 성령이 애통하는 것밖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설교말씀을 읽고 저도 기도하여 얻은 결론은 진정으로 사랑을 하지못한죄, 선을 행하기를 하나 악이 함께 있는죄 인간의 욕심의 죄들이 가득함을 알고 주님께서 친히 저를 다스리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주님의 다스림을 기다리고 또 그렇게 간구하며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에게 많은 은혜로 부어주심 감사드립니다.
리플달기
0 0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