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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하나님의 큰 뜻으로 다시 세워지는 교회이철한 목사 지음, 예문교회 담임설교자이며, 미래교회연구소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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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5월 08일 (금) 20:00:19
최종편집 : 2009년 05월 08일 (금) 20:03:13 [조회수 : 2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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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하나님의 큰 뜻으로 다시 세워지는 교회 - 이철한 목사 지음

하나님의 큰 뜻으로 다시 세워지는 교회 (부제:3년 후 살아남는 교회10%)출간
미래교회연구소 이철한 목사 신간 사인회

일시 : 2009년 5월23일 오후 3시
장소 : 영풍문고 종로점
매장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33번지 영풍빌딩 B1, B2
연락처 : 02)399-5600 016. 835-0233

저자소개
2008년 현재 교보추천 5권 선정 작가.
예문교회 담임설교자이며, 미래교회연구소대표.

2003년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협의회(한독선연·총회장 김상복 목사) 제7회 목사 안수식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미국 크리스탈교회 음악감독으로, 호원신학대학원대학 학과장으로, 96년 캐나다연합성가대 지휘자로, 기독음대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합동총회신학교 교회음악 교수로 역임하였음.
2006년 목동 제자교회에서 천관웅 목사의 찬양으로 시작된 ‘10년 후 한국교회’란 제목의 미래특강과 여성가족부가 주최하는 ‘디지털시대 여성, 청소년 인력개발 프로젝트’에 선정된 전문직 여성클럽에서의 ‘Next Generation을 위한 아름다운 멘토링’ 발간 시 ‘21세기 왜 멘토링이 화두인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였고, 2007년 우리은행 사보 3월호에 ‘인생의 열매를 맺기 위한 좋은 습관’과 2008년 기업은행 6월호에 ‘잠재력, 나의 브랜드를 만든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기고하였음.
2008년 케이블TV방송인 ‘일자리 방송Jcbn’의 일자리 와이드 &뉴스에 출연, ‘직장인의 성공 습관’에 관하여 강의하였으며, 주간조선(weekly chosun) 2000호 기념 특집호 멘토링 열풍에 대하여 전문가 기고란에서 ‘멘토시대 왜 열광하나!’라는 제목으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멘토링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음.
저서 중 <멘티&멘토>는 장안대학의 학부 교재로 채택이 되었으며, <열정>은 청소년 잡지 매거진s 창간호에 소개되었고, <글로벌리더들의 행복습관>은 kbs2 라디오 경제포커스에 소개되는 동시에 현 극동대학 교수이며 세계화전략연구소 서울 센터장인 전형구 교수의 기업경영에 있어 독서의 중요성을 소개한 저서 <독서경영관리>에 자기계발 분야에서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소개되었음.
현재 예문교회 설교자, 미래교회연구소 대표.

[교보추천 도서]
<세상사는 동안 확실하게 꼭 알아야 할 51가지>, <헛수고하는 사람과 열매 맺는 사람>, <멘토의 지혜>, <16살 네 꿈을 펼쳐 미래를 정복하라>, <열정>

[저서]
<10년 후 한국교회><멘티&멘토><글로벌리더들의 행복습관><열정><직장인 39가지 성공법칙><브랜드의 원리><성공을 위한 자기계발 습관><행복한 몰입><시크릿의 허상><자신을 자극시키는 56가지 멘토링><멘티&멘토 코칭><하나님의 길 인간의 교회>외 다수.





























목차
서문. 신기루와 같은 믿음을 버려야 한다

1장 죽기 살기로 교회 갱신

01 영적 감각이 있는 리더 세우기
02 3년 후 위기 속에서 살아남는 교회는 10%
03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나는 사람
04 풍부한 영성을 가진 예배자
05 하나님 앞에서는 ‘쇼맨 쉽’을 버려야 한다.
06 콘셉트 예배
07 실패한 리더와 회복하시는 하나님
08 한국교회는 누구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09 순종만이 교회도 기업도 일으킬 수 있다 .
10 명품, 브랜드 인생이 되어라

2장 교회를 향한 기름 부음

11 한국교회, 작은 정치판에서 벗어나라
12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목회
13 한국교회 리포트
14 하나님과의 약속과 자기관리
15 목회 성장을 위해 꼭 알아야 할 것
16 사역의 시작됨
17 새로운 교회의 건축모델
18 교회 안에서의 음악
19 다원주의 종교

3장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 듣기

20 하나님의 리더십
21 목회자는 하나님의 메신저이다
22 설교도 디자인이다
23 유머설교의 장점과 강해설교의 문제점
24 제대로 된 교육이 세상에서도 능력을 발한다
25 셀 교회의 장점과 문제점
26 부흥지향적인 목회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회가 아니다 .
27 교회가 슈퍼보다 더 많아요
28 교회가 부흥하기 원한다면

4장 다시 시작하는 한국 교회

29 청지기의 삶
30 믿음의 근원을 회복하라
31 준비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32 한국교회의 허와 실
33 미래의 한국교회의 부흥
34 미래의 새로운 목회
35 미래에 인기를 끄는 목회자
36 목회의 성공은 여리고성 전투에 있다
37 복음의 진정한 의미






















서문

신기루와 같은 믿음을 버려야 한다.


교인들은 건물이 큰 교회를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기는 해도 실질적으로 건물이 작은 교회나 어려운 교회를 만나면 귀찮게 여기고 배척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정받는 교회의 기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주님의 사랑을 입에 달고 다닌다.
외형적으로 ‘편하다, 편안하다’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잘못될 것을 뻔히 아는데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다주는 부모는 없다. 때로는 호통으로, 때로는 시랑의 매로 바른 길을 가게하며 깨닫게 해주는 것이 부모 된 참 사랑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고집과 욕심으로, ‘소돔이 좋사오니’하며 가버린 조카 롯이 고통당할 것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던 것이다.
세상이나 교회는 지금 모두 다 맘모니즘으로 흐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맘모니즘 우상숭배가 만연하다.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 신앙의 중심을 보지 않고 교회의 겉모습만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구약에는 예수님이 오실 때, 작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시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힘은 감춰진 보배와 같이 언약궤에 가리워져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는 누구도 알 수 없게 비밀스럽게 선지자를 통하여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보면  반지의 힘은 엄청 강하다. 그래서 악의 세력 사우론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반지를 되찾기 위하여 전달자의 사명을 가진 호빗족의 프로도를 쫓는다. 엄청난 능력을 가진 반지는 누구나 가지고 싶은 것일 수가 있다. 하지만 그 반지가 만들어진 배경과 의미를 알아야 한다.
오늘날 현대교회를 보면 중요한 계시는 잊어버리고 작은 반지의 힘에 집착하지만 정작 그것을 찾지 못해서 환장하는 것 같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다수의 한국교회의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이러한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앙의 본질은 작은 교회라도 사명이 있는 교회,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라면 그것을 인정하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작은 마을, 누추한 구유에서 왜 태어나셨을까? 그리고 그것을 알고 찾아온 동방 박사들의 숫자는 왜 3명뿐이었을까? 왕이신 그분 앞에 왜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사람들이 좇지 않았던 것일까?
세상의 기준이라면 수만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러 왔어야 마땅한 일이지만 현실을 그렇지가 않았다. 결국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는 예수님을 몰라 봤다. 바로 앞에 서 있지 않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고 외면하였다는 것이다.
현대교회는 성도들을 성량갑 속에 갇혀 있게 해놓고 더 작은 공간 속으로 들어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건물을 크고 웅장하게 지어놓고서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면 이상한 제자훈련, 수없이 많은 성경공부들로 성도들은 기계화되어 간다. 제비 무리들처럼 모아놓고 성경구절 누가 누가 더 많이 외우고 있나? 자랑하기 대회를 연다. 성경 구절 많이 외우기 대회를 참가한 제비들은 부모가 주는 먹이를 하나라도 더 먼저 먹으려고 아등바등 거린다.
필자는 이런 문제를 가지고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노 목사님 한 분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 대하여 상당히 걱정 어린 말씀을 하신다. “성경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조금만 다르면 이단으로 몰아가는 풍조는 상당히 걱정스러운 일이다. 이것은 제대로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성경을 알려면 제대로 알고, 그리고 무엇이 진짜인지를 가르쳐주는 사도로서의 가르침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교회 성도는 자신의 교회와는 조금 다르다고 이상한 교회라고 몰아붙인다. 찬양을 크게 하니 이상하고, 안수를 하니 이상한 이단집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순간에 그 교회는 이단교회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알고 보니 자신의 교회와 같은 교단 소속의 교회였다. 이런 실수를 하는 교회가 아직도 많이 있을 줄 안다.
교회가 시대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니까 세상이 교회를 보고 멍청하다는 소리를 한다. 이런 교회들은 세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성도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자랑하듯 말하고, 멀쩡한 교회를 이단이라 정죄해서 결국에는 교회가 교회를 죽이고 핍박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연결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참된 가르침을 절대 놓지 말아야 한다. 말로, 문자로 잘못 전해진 것들,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의 진실을 밝히 드러내 수술하고, 이젠 좀더 확실한 복음을 부르짖어야 한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영적인 사이즈를 넓혀라.
필자는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의 사이즈가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교회를 무지하게 크게 지어놓고 좋은 프로그램을 가져와서 대문 짝 만하게 포스트를 만들어 동네방네 부쳐 놓으면, 옆 교회 성도들까지 교회를 한번 옮겨 볼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웃거린다. 
‘크다’는 것은 건물이 큰 것이지 본질이 큰 것은 아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은근슬쩍 교회 건물이 큰 것이 교회가 큰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도가 많이 모이면 훨씬 더 좋고 힘이 세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또 그렇게 보이도록 설명서를 만들어 전도지에 붙여 돌린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가 없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지식적인 공부만 하게 만드는 목회자들이 대형교회를 이끌게 되면 그 교회는 곧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바벨탑을 쌓았다는 탄식이 들려오는 것이다.     
건물이 크다는 것이 교회가 자랑할 첫 번째 항목이 아니라는 것을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큰 것을 자랑하는 것은 교회사이즈를 넓히기 위해서 억지춘향을 만드는 일이다. 현 시대는 사람도 브랜드이다. 그러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해서 그 교회 담임목사가 유명 브랜드인 것은 아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는 경우는 전도 프로그램을 잘 활용한다든지 교회의 여러 가지 시스템을 가지고 활용한 덕분인 경우가 많다.
어느 신도시의 교회는 프로그램을 잘 활용해서 한 달에 수백 명이 모이는 교회로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가 외형적으로 사이즈가 늘어나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덩어리 집단이 된 것이지 큰 능력을 발휘하는 단계는 아직 안 된 것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이 다시 배워야 한다. 미래적 제자훈련의 도입이 시급하다. 교회론이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맘모니즘으로 사이즈로 움직이다보면 교회는 자신들만의 성지로 변질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들을 막으려면 제자훈련을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 듣기 싫어해도 새롭고 제대로 된 교회론을 가르쳐야 한다. 본질적인 교회론, 제대로 된 교재를 구입하여 읽고, 다시 한 번 구역에서 돌아가면서 공부하며 발표하게 하는 것은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새로운 교회론을 통과한 자를 직분자로 세우면 그들은 교회 세우는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막연히 글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여서 제대로 된 제자훈련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것을 다시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
현재의 한국교회의 모습 속에서는 대안을 찾을 수가 없다. 그렇기에 교회를 세우고 많은 교회 안에 교인들이 직분을 받고 있어도 세상에 나가서는 졸아들고, 작은 교회를 보면 색안경을 쓰고 무시하는 변질된 복음의 행태가 계속되는 것이다.
교회는 사이즈가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되며, 수많은 성도들을 이용하여 이득권을 행사하는 회원 집단이 되어서도 안 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성경공부를 많이 한다고 해도, 성경구절을 많이 외운다고 해도 은혜 받기도, 변화되기도 쉽지 않다. 
성도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하는 몫이 목회자에게 있다. 성도들이 몰라도, 잘 이해하지 못해도 한 달에 한 번씩 아니면, 15일에 한 번씩 가르쳐 주어야 한다. 안 들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한 달에 한 번씩 메일로 충격을 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영화관에서 포인터가 쌓인 고객에게 공짜로 영화를 볼 수 있는 티켓을 나눠주는 것처럼 누적이 되어 복음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인식을 갖게 된다.
듣기 싫어한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물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 러내리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고랑을 파야 하는데 삽을 동원하고, 안 되면 포크레인을 사용해서라도 물길을 내면 된다. 승리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영적 감각이 있는 리더 세우기



어느 청소년 수련원에서 “하나님과 돈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물었더니 청소년들이 거침없이 “돈이요”라고 대답했다. 요즘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에서도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놀이를 하며 돈 때문에 폭력도 서슴치 않는다. 더 나아가 청소년 성매매 등, 위험수위를 넘은 돈 맛에 어린 영혼들이 썩어간다. 돈과 권력, 개발과 성장에 미쳐버린 어른들이 추태를 부린 영향이다. 돈이 우상이 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이 시대의 풍조가 되었다.
자살의 사유는 조금씩 다르겠지만, 악성루머라 할지라도 돈 문제가 밑바닥에 깔려있지 않은 경우가 별로 없다. 생명을 스스로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물질만능의 풍조가 만들어낸, 사랑 없는 메마른 경쟁사회의 모습인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자살 1위라’는 불명예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가장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다가왔다.
맘모니즘은 성도들이 아파트를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게 만들고, 교회는 성장의 척도가 건물의 크기가 되게 만든다. 결국 성도들이 변해야 교회 전체가 변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교회를 봐서는 답을 절대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을 가르쳐주는 설교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헛갈리는 인생을 살게 되고 이중적인 잣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답이 없는 추상적인 먹구름만 꽉 찬 세상에서 짓눌린다.
준비되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절대로 귀한 것, 영적인 부분을 나눠서는 안 된다. 영적인 것은 나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영성은 바로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안 되면 물질에 대한 욕심이 가득 찬 성도들만 양성하게 되는 양적 성장만을 강요하는 교회가 되고 만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을 증거 했듯이 작은 자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 바람직한 목회방향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미래의 한국교회는 없다. 큰 교회들이 가진 재정으로 가끔씩 성도들과 같이 주변의 작은 교회들에 방문하면서 서로 나눌 수 있는 이벤트를 실행하는 교회가 되는 것도 좋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선교의 관점과 교회의 관점이 제대로 정립되어야 한다. 현시대 교회는 신앙의 높은 장벽을 넘어서 돈이 우선 되고 있다. 성도가 구원의 단계를 넘지 못하고, 절제 없는 사랑을 외치고, 그러다보니 무분별한 죄인들까지도 사랑하고, 잘못 된 사람을 초청해 강사로 세운다. 어떤 목사는 “돈이 없으면 큰 교회가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말을 한다. 그의 말은 맞는 것 같지만, 교회는 돈을 가지고 돌아가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방의 어느 교회는 500명이 넘어서 1000명의 교회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물론 교회가 성장 되었으니 당연히 자랑스러운 일이겠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가슴 아픈 현실이 있다. 큰 마트가 나타나면 작은 슈퍼는 문을 닫게 되는 것처럼, 큰 교회 옆에 작은 교회가 있으면 그 교회는 얼마 못가 문을 닫게 된다.
이런 식이라면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현실에서는 죽어가는 영혼들은 어떻게 만날 것인가! 기름진 교회들의 문턱을 낮추는 데 있어서 신자들이 해야 할 몫이 있다. 그들이 교회도, 목회자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단 가리기에 방심하지 않지만 더 큰 이단이 물질을 앞세워 나타나면 그곳이 성지가 되고 새 주인이 세워지는 구도적 악순환에 노출되어 있다. 신자들이 스스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이 없는 가운데 신자 수만을 늘리려는 데 힘을 다 쓰게 되면, 그 교회의 미래는 보장될 수가 없다.
신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교회를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보다 물질의 사이즈가 더 커지면 사람의 아들이 만들어놓은 휘황찬란한 소돔과 고모라의 바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유럽교회가 그렇게 부흥하였고 여러 나라로 복음이 흘러들어 갔지만, 결국 그들의 현재의 모습은 박물관과 나이트클럽, 이슬람교회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그들이 건물과 현상만 바라보고 쫒아 갔기 때문이다. 깨어 있어서 주님을 기다린 다섯 처녀가 아닌, 적당히 기름을 준비하고 흥청망청 방만한 태도로 주님을 기다린 나머지 다섯 처녀의 삶을 최고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건물은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모임이 적당한 크기와 규모를 가지게 되면 더 큰 크기의 건물을 원하게 된다. 그래서 또다시 신자 늘리기에 급급해지는데 이러한 모습은 유럽교회로 가는 전철을 타는 것과 같다. 머지않아 우리의 눈으로 직접 황망하게 변한 교회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시급히 행할 것은 더 이상 우파 좌파로 나뉘지 말고, 자신의 교회건물이 더 크다고 자랑도 하지 말고, 주변의 작은 교회들이 흘리고 있는 눈물을 볼 수 있고, 그들이 있어 오늘날 큰 교회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교단이든지 소속 된 상태에서는 좀더 자유롭게 목회를 할 수가 없다. 어떤 이는 이런 교단의 장치들이 자신을 보호해 주는 것이라 생각하며 목회를 하지만,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서는 개혁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있다. 큰 교회는 갈수록 부흥되고, 또 그 부흥을 누리지만 주변의 작은 교회는 더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당연시 하고 자신의 교회만 부흥된다며 자랑한다. 그러나 부흥이전에 주님은 더 큰 신앙의 사이즈를 원하고 계신다.
보기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교회의 반석이신 예수님은 왜 그렇게 작은 자의 모습으로 왔다가 고통을 당하고 가셨는가 말이다. 그 부분이 중요하다. 서로의 교회를 인정하고, 하나 되고, 연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되면 굳이 교회가 장로교, 감리교, 순복음으로 나뉠 필요도 없다. 교단 교파 나누기에 낭비되는 비용을 줄이고 그 비용으로 작은 교회를 지원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가 변화해야 한다. 이권에 쉽게 놀아나는 사람들의 잘못은 말은 잘하면서 정작 자신은 죄의 자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교회의 성장은 건물의 성장이 아니다. 교회를 건축했으면 그 자체로서도 교회는 존재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숙된 면모가 필요하다. 교역자들은 신학교 때부터 의식 있고 개혁적인 부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 군사정부와도 대치했던 몇 몇 의식 있는 교회들을 보라. 그들의 교회는 지금도 초라하다. 하지만 그 교회들은 세상에서 인정을 받고 있다.
큰 교회에 나가는 것만이 자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작은 교회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는 의식 있는 성도이다. 척박한 광야일지라도 하나님은 성도의 눈물로 뿌려진 씨앗은 자라나게 하신다. 이 땅의 작고 초라한 교회들에게도 빛나는 열매가 맺혀지길, 그날을 기대한다.























3년 후 위기 속에서 살아남는 교회는 10%



사람은 누구나 그 속을 알기 전까지는 일단 구조적으로 욕심을 가지게 된다. 교회에 소속된 성도는 자신의 교회가 지금보다 더 커지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로 교회를 바라보면 안 된다. 성도들은 교회를 잘 키워야 한다. 그러나 교회를 크게 성장시키려고만 하는 것은 좋은 방향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한 교회가 지교회로 여러 교회를 만드는 것, 작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교회가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지원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원도 그 교회가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게 될 때까지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를 성장시킬 것인가! 자꾸 큰 교회로 새 성전으로 건물만 지으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셀교회를 세우는 것, 100명 미만의 교회로 나눠서 다른 교회 이름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일차적으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땅을 구입한다. 그리고 적당한 사이즈의 교회를 세우게 된다.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청년들이 찬양할 수 있는 악기를 구입하여 준다. 그런 다음 교회 안에 말씀의 기준이 세워지게 담임 목사의 설교가 계속 들려지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가 앞에 장사가 잘 되지 않는 카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카페 안에는 공연이나 강의를 할 수 있는 무대가 준비되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곳을 임대해서 악기를 넣고 찬양예배를 시간마다 드리되 악기 소리는 밖으로 흘러나가게 해서 지나다니던 청년들이 관심을 가지고 들어올 수 있도록 유도한다. 찬양팀은 외국 ccm 번안 곡을 빠르게 배워서 공연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지금은 사역자들이 미래적인 대안이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앉아만 있다. 목회가 안 된다고 하기보다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위와 같은 방법으로 성도들을 모으고 그들이 찬양하게 하는 것이 결국은 교회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6개월만 예배를 드리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문이 나고 주변의 청년들이 하나 둘 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새로운 예배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예배 시작하기 전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게 된다.
현대예배는 컨텐프러리-워쉽 예배가 되어야 한다. 예배자의 영성과 그룹사운드 밴의 찬양팀과의 뜨거운 찬양, 스텐드 공연에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연을 보는 듯한 예배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리 확보가 중요하다. 그들은 교회에 오면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아 예배드리려고 할 것이며 헌신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다. 자연스럽게 일어나서 찬양하게 되고 성령이 이끄는 대로 춤을 추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밴드는 꼭 영성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세상 밖에서는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제2의 서태지라고 불리는 밴드가 신비감을 주는 댄서들을 활용하여 인기를 누리고 있다. 교회 ccm밴드들도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곡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 ccm을 카피하여 부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신의 곡을 만들어 부르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미래목회는 워쉽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워십 예배는 좋은 가사와 세상을 삼킬 수 있는 곡들이 등장되어야 한다. 또 이러한 찬양팀들이 공연할 수 있는 교회가 더 많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꼭 대학가 근처라야 한다. 그러면 21세기 새로운 교회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더 영성 있는 젊은이들이 만들어지는 공간이 되고 대학가들은 더욱 깔끔한 거리로 탈바꿈하게 된다.
호주에는 달린 첵이라는 찬양사역자가 있다. 그녀는 수많은 나라에 영향력을 주는 영성 있는 찬양사역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러한 찬양사역자가 나와 주길 바란다. 한국적인 좋은 아이디어가 외국에 프랜차이즈 하게 되면 한국은 예배 수출국이 되는 것이다.
























나는 죽고 예수가 살아나는 사람



다급한 자들은 병이 낫기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찾아 간다. 그래서 때론 간절함이 종교를 초월하기도 하며, 무지한 신앙이 기준을 지킬 수 없게도 만든다. 다양한 질병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얼마나 많겠는가! 다리를 다쳐서 지지대를 이용하지 않고는 평생 걸을 수 없는 사람, 사고로 평생 앉아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가 하루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가능하다면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주는 기회를 기독교가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증거도 간절해지는 것이다.
기독교는 성도들에게 기도와 위로를 주는 사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은사를 개인적인 구조로 사용하다보니 말들이 많다. 현대 한국교회의 신유사역은 시골교회들만 전문적으로 하는 사역이 되어 버렸다. 큰 교회들은 신유사역보다는 지적사역에만 치중을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신유사역을 하는 단체들이 오해를 받고, 때로는 푸닥거리 하는 식으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혼란의 요소를 타파해야 한다. 이를테면 연합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교단은 교단대로 교회는 교회대로 문을 닫고 있다. 교회가 크면 가고, 안 크면 안 가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현실적인 부분이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 가에 따라 성도는 교회에 가고 안 가고를 결정한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학교에서 많이 배운 것만을 자랑하여 왔다. 하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광야학교를 경험해야 한다. 교회는 세상보다 훨씬 큰 사이즈로, 백화점보다 훨씬 더 좋은 인테리어로, 더 좋은 음식과 음료들로 성도들에게 서비스하고 있다.-물론 그것을 미끼로 성도들이 교회에 정착하게 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것은 백화점들이 손님을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 이벤트를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좀더 좋은 교회, 좀더 좋은 차를 추구하는 것이 교회라면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시스템적인 교회가 되는 것이다. 필자는 이런 것을 추구하는 성도들은 언제든지 더 좋은 시스템의 교회가
들어서면 옮겨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는 성도들을 교회의 사이즈로 양육하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성도들은 교회에서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세상에 나가면 기를 못 편다.
서점을 가 봐도 세상이고, 음식점을 가도 세상이고, 도시의 밤하늘을 봐도 모든 것이 다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부대끼면서 버스를 타지만 자신의 종교카드를 보이면서 버스를 타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버스 안에도 기독교, 불교, 이단들까지도 함께 목적지를 향해 함께 가게 된다.
신앙인들은 평생 타종교와 같이 생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신앙의 기준을 세상의 시스템이나 사이즈에 맞추게 되면 성도들은 나의 교회라는 소속감을 가지지 않게 된다. 성도들에게 소속감을 주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선교를 하는 것이며 성도들도 이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사이즈에 대한 문제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21세기는 자유로운 영성이 해결되어야 성도들이 마음껏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올 수가 있다. 이것은 비단 아무리 좋은 인테리어의 교회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담임목회자들은 자주 해외를 다니면서 아니면 시골교회를 다니면서 목회를 하고, 선교를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훨씬 더 풍요롭게 경험할 수가 있게 된다.
한곳에 안착하려는 정신은 목회에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물이 고이면 분명히 썩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담임목사는 해외에 나가서 그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든, 6개월이든 목회를 해보아야 한다. 그 나라 말을 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지금은 기존의 시스템을 뛰어넘는 대안이 필요하다. 교회가 세상의 시스템을 가져와 쓰다보면 항상 세상에서 쓴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미래를 열 수 있는 개혁적인 구조가 교회에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기존의 목회를 지키되 담임목사와 부목사들은 사이즈를 넓혀서 해외와 농촌에 자주 들어가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
 
 















풍부한 영성을 가진 예배자



아들이 묻습니다.
“아빠는 설교 본문이 무엇이었어요?”
“요셉의 구덩이.”
“예?”
“응, 요셉이 형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구덩이에 빠지게 되는 사건 말이야.”
“아!”
“설교 내용은 어땠어요?”
“요셉은 꿈꾸는 사람이었다. 우리도 꿈을 꾸어야 한다. 꿈꾸는 자가 되어야 한다. 꿈꾸는 자가 그 삶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 어려움은 하나님의 자리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통하여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다.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아들, 이 설교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
“음, 어려움에 처하면 그 다음에 다 잘된다는 것.”
“그래, 그것도 문제이긴 하지.” “더 문제는 신앙생활을 인간 중심으로 만든다는 것이지. 모든 교회는 하나님 중심을 말하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인간 중심이 경우가 많단다. 우리는 꿈을 꾸고 하나님은 그 꿈을 이루어주시는 분, 곧 우리를 위하여서만 존재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지.”
옆에 있던 아내가 한 마디 합니다. 아내는 비판적인 저의 모습에 대해 평소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설교에 은혜를 받고 좋은데, 또 초를 치는 제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니,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잖아요?” 요셉의 꿈과 관련하여 인간 중심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반박입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실 일을 꿈으로 보여주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꿈이었단 말이야.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어. 요셉에게는 꿈으로 그것을 나타내셨지만 아들에게는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내지 않으셔. 그러므로 아들아, 너는 하나님께서 너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마음을 써야 한다. 그것을 찾고 그것을 너의 꿈으로 삼아야 한다.

위의 가족의 대화를 엿보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한국교회는 아직까지도 신앙이 말싸움에 그치고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는 방식이 모두가 다 다르다. 그래서 서로의 의견이 맞지 않으면 갑론을박 해가면서 싸우게 된다. 말씀을 못 뛰어넘으니 세상에서도 영향력은커녕 가정에서도 기준이 서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그런 부분을 알고부터 기도를 더 많이 하게 된다.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살아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성도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지. 10년을 넘게 교회에 다니고 제자훈련을 받고 교사로 임명받아서 활동을 해도 주변에서 신앙 색깔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말씀 속에서 살려고 하지만, 세상은 훨씬 말씀을 능가하는 파괴적인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터지고, 한 가지 말씀을 가지고 너와 나의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분쟁이 일어난다. 지금 한국교회는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의 내면을 들춰보면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이 당장 직면한 아픔이나, 슬픔을 알지 못한 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조금 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인생은 말씀이전에 말씀에 대한 순종이 먼저여야 한다. 이런 자들을 치유하려면 사역을 하기도 전에 이미 진이 다 빠진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많이 몰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신학자로 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많이 배운 바리세인이나 사두개인을 원하지 않으셨다. 
현장에서 예수님의 정신을 가지고 사는 인생들이 더욱 귀한 것이다. 영혼구원에 더 많이 집중하면 주님으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게 된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 중, 쉼 없이 병자들을 고치시고 위로하셨다. 목회자들은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먼저 무엇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좁은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조금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사역을 하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쇼맨 쉽’을 버려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말할 때 그분의 한 면인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말을 하기 이전에 내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을 자세가 되었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믿음은 쉽게 자라나지 않는 것이지만 자꾸 들음으로써 자라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듣기도 전에 자꾸 뛰쳐나가는 것이다.
“너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자복할 수 있는 신앙이 있느냐?”고 주님은 물어보신다. 인생을 살다보면 고난도 있고 좌절도 있다. 그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고백이다. 하나님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바라보지 않고 집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받지 못한다.
자신이 잘못 선택한 길에서 탕자처럼 돌이키려 하기보다 그 자리에서 꼼짝 하지 않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이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논하기 전에 인간의 잘못된 눈을 고쳐야 한다. 보는 시야를 달리해야 하는 것이다.
창세기 시대는 국가의 기틀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합지졸과 같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질서의 중요성을 말씀하신다. 한국사회가 약한 것이 바로 질서의식이다. 질서와 기준점은 교회가 가르쳐주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다. 성도들이 교회에 와서 큰 소리를 치는데, 교회는 잠잠해야 할 곳이며 정작 큰 소리를 내야 하는 곳은 세상이다. 세상에 나가서 대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은 큰 교회를 이룬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이다. 그는 교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난을 지나왔다고 한다. 목회를 하는 동안 성도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까 자라나지 못하는 성도들은 만나면 성경만 가지고 이야기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세상을 잘 몰랐고 그래서 실패를 했다고 한다. 성도들은 만나면 서로 자랑하기가 바쁜데,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 논한다. 성경을 알았다면 그 다음은 세상에 나가서 그 성경을 뛰어넘는 능력을 나타내야 맞는 것이다.
사람들은 지기 싫어해서 남이 어떤 꿈을 꿨다고 하면 자신은 꾸지도 않았으면서도 더 큰 꿈을 꿨다고 말한다. 이는 화합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사람도 나쁘고, 박쥐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나쁘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판 가롯 유다와 같이 될 가능성이 높다.
영향력은 엄청 중요하지만 영향력 이전에 교회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기본을 가르치는 일이다. 특히 초신자와 같은 경우에는 신앙에 대하여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면 헛갈려서 오히려 갈 길을 가지 못한다. 가르칠 기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일조이다. 어느 탈북자는 십일조생활 만큼은 틀림없이 했더니 어려운 일이 생길 때에도 주님이 냉장고를 채워주시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테스트이다. 십일조를 안 하는 사람이면 그가 아무리 천사와 같아보여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십일조가 바로 신앙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에게 때때로 테스트가 오는 것은 부패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또 다른 배려이다.
신앙으로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제자를 삼을 기회가 온다. 자신이 속한 단체든, 학교든, 가정이든, 다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교회에 가고 싶어 하는 본성이 존재한다. 그들을 초청해 질서를 깨닫게 해주고, 해야 할 봉사를 하게 하면 그는 은혜를 받기 시작한다. 그들이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하고 왔다고 해도 자신이 가진 은사를 활용하게 함으로써 감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청소년 시절에 기타를 잘 치는 친구가 있어 그에게 교회에 같이 가자고 권했더니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 잔득 기대를 하고 왔다. 찬양할 때 기타를 칠 사람이 없으니 한번 해보라고 하자 그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은사를 활용함으로써 큰 은혜와 감격을 받게 되었다.
교회는 환상이 아닌 현실이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만나는 것이다. 영혼에 대한 갈망,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척도가 중요하다. 무조건 열어놓고 누구나 다 오라고 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모든 문제 가운데 승리하신다. 영혼에게 말씀을 잘 전했는데 튕겨나가면 순간 마음이 아프겠지만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주님과 나는 승리한 것이다.
















콘셉트 예배



세상의 흩어진 족속을 변화시키려면 그 나라의 언어를 알아야 하고 그래야 뒤집어 놓을 수가 있다. 무조건 실력이 많다고 해서 그 영혼이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선교하는 자에게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만나게 하시고 가르치게 하신다. 이 시대 선교여행이 중요한 것은 성도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글로벌 리더들을 만나보면 역시나 비범한 구석이 많음을 느낀다. 그들의 경쟁 상대는 세계 속에 있고 그들 속에서 쉬지 않고 활동을 한다. 한국 사람들끼리만 경쟁하면 오합지졸이 되고, 독 안에 든 게밖에 안 된다. 경제든 종교든 넓은 세계를 보아야 한다. 미국, 인도, 중국, 아랍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종교와 연관이 돼 있다. 이슬람교, 불교, 유교에서 우리는 승리를 거두야 한다.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서 주님은 교회를 세우셨다. 포커스가 짧은 사람은 미래를 보지 못하고 “ ~카더라”는 뜬소문에 휘둘리는 인생이 되고 만다. 이런 이들에게는 본질설교를 해야 한다. 본질설교는 지식설교보다 더 퀄리티가 있고, 변화를 이뤄내는데도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특히 목사님의 설교는 세상의 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능력도 인정도 받을 수가 있다. 하나님의 언어를 하는 사람은 세상과 교회에서 모두 인정을 받게 된다. 교회 안에서는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자세와 의지가 안 되면 하나님 그가 스스로 깨닫고 돌아올 수 있게 내버려 두신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와서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순종하면 건강과 승진이 보장된다.
본질의 중요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은 시대가 변해도 변질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은 모두 물질 앞에 무릎을 꿇었고, 교회도 사이즈로 판단을 하고 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한 기준점은 크기보다 그의 노력이다. 건물의 크고 작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 몸이 성전이 되는 것이다.
예배드리는 자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축도이다. 이유는 예배자의 자세 때문이다. 축도가 끝나기 전에 뛰쳐나가는 사람이 많은데 이것은 아주 잘못된 기준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누구의 교회냐”가 아니라, “나의 교회”가 되면 이러한 일은 발생되지 않는다.
현시대는 예배에도 컨셉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오면 그에 맞는 말씀으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예배가 아름다워진다. 교회의 문제를 가지고 세상에서 풀 수 없고, 세상의 답을 가지고 와서 교회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모든 문제는 다 내려놓고 와서 하나님 앞에서 해결 받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것이며 우리는 그 길을 순종하며 가는 것이다.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도울 교재가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 1주일에 한 장씩 가르치면 1년 동안 교재 한 권을 뗄 수 있게 되고 더불어 그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이 배운다는 것은 배움에 합리성과 타당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개 성도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교회의 건물이나, 주보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가이며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면 “이단이 아닌가?” 의심부터 한다. 그들은 늘 담임목사님이 뭘 하고 있는 지 신경을 쓰고, 그에게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물론 성도가 담임 목사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에게 합당한 일꾼이고자하는 것은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우려되는 것은 주님이 배재된 신앙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면 세상살이 가운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어려움에서 해방되는 길은 집은 없어도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면 그와 그의 가정이 살아난다. 기본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다. 이러한 자세가 되지 않으면 위험한 길을 갈 수가 있다.
현재 기독교가 천주교에게 어퍼컷트를 맞고 해롱해롱한 상태이다. 기독교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넘을 인물이 없는 것 같다. 김수환 추기경은 권력 앞에서 용감했고, 어려운 자들 앞에서 선행을 베풀었다. 이것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지는 일이며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되는 일이다.
브랜드 호텔에는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걸어놓는다. 훌륭한 작품은 늘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고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시대가 변해도 작품을 통해서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다. 교회가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시대가 변해도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다. 우리가 평소 생각하던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닌, 주님의 생애와 그의 행적을 사실 그대로 증거 함으로써 믿음을 주는 것이다.
복음증거에 있어 특히 청년들을 잡으려면 그들에게 필요한 메시지와 프로그램이다. 필자가 권하는 현시대의 청년 목회는 피자목회이다. 청년들은 먹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예배 후 피자를 먹게 해주면 예배 도중에 빠져나가는 이가 없다. 특히 피자를 구울 때의 냄새는 너무 강력해서 다음 주일 예배까지 기다리게 만든다.
피자를 만들 때는 간사가 밀가루 반죽을 펼쳐놓고 청년들이 각자 분담해서 준비해온 재료를 하나씩 토핑하게 하면 된다. 처음엔 실패를 할 수도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발전해 창의적인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다. 예배는 참여의식을 길러 주는 것이 중요하다. 피자를 굽는 것은 단지 그 행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청년들이 스스로 예배에 동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피자목회는 미래 청년목회의 큰 대안이 될 것이다. 참여도가 높을수록 그에게는 자긍심이 높아지고 은혜 또한 스스로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피자목회를 하면 피자 냄새뿐만 아니라 그 소문이 동네방네 퍼져나가고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목회는 한 단계 더 뛰어난 발상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지명된 소수의 사람이 음식을 만들어 다수에게 먹을 수 있도록 했지만 이젠 그것을 통합해 연합을 이루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참여하지 않으면 연합이 안 되고, 연합이 안 되니까 힘을 잃는 것이다. 연합을 이루는 것은 성도가 내 교회라는 인식을 갖게 만들어준다.
“네 사역에 믿음이 있느냐?”를 주님은 물어보신다. 신앙이 뿌리로 내려가게 하기 위해서는 살릴 자는 살리고 좋은 것은 귀하게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게 해야 받은 사람이 관리를 하게 되며 마귀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 성숙된 믿음을 가지고 잘 자라나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예배를 잘 드리고 전도를 잘 하기 때문이다.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구별하면 그것은 좋은 땅이 되고 좋은 땅에는 주님이 좋은 씨앗을 내리신다. 좋은 선택은 좋은 땅이 되는 것이다. 주님이 주신 좋은 씨앗을 뿌려야 수확도 크다. 심는 자에게는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심는 것을 잘 하지 못하고 있다. 심는 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에 잠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은 교회에 와서 배우는 것이다. 잘 배운 사람은 끝까지 예배 참석하고 중간에 방정을 떨지 않는다.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는 것에 부담 갖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기준을 세우면 주님이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마음엔 뿌듯함을 주시기 때문이다. 문제가 닥치기 전에 깨닫고 주님처럼 사명을 감당해야 악순환을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사명자라면 목숨을 다해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사기꾼들은 적은 것을 줌으로 독약을 먹게 해서 큰돈을 단번에 빼앗아 간다. 이단에 넘어가는 요소이며, 사기꾼에게 당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화근덩어리가 된다.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어떠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에 참여하는 자가 축복도 받는다.



















실패한 리더와 회복하시는 하나님



당신은 어느 회사에 근무하십니까? 이 질문은 어떻게 보면 어떤 사람 밑에서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을 잘못 만나면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잘 만나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사람은 앉고 일어섬을 잘 해야 한다. 복 받을 자리에 앉고 일어서는 분별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잘하는 것이 있다. 바로 담임목사님의 가르침인 설교를 매 주마다 다시 셀그룹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다. 반복효과로 결속력을 강화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교회의 힘이 된다. 그렇게까지 가르치는 데는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영화 ‘맘마미아’를 10번 이상 봤다는 사람들이 출현한다. 그들은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보는 것이다. 최근 광고 중에 “집 나가지 마라” 라는 광고가 있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에 나오는 철없는 남자가 집 나가서 잘 때가 없자 쓰레기통에서 잠을 자고 나오는 몰골이 참으로 리얼하다. 그 광고는 우리들의 문제, 대한민국의 현실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다. 가정이 흔들리고 대한민국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강요로 하는 것과 자신이 좋아서 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세상사이다. 그래서 때로는 좋지 않은 것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은 허상의 구름이 가득하게 덮여 있고, 우리는 그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추종자를 모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기준을 잡기가 힘들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왔다면 이제는 갈 곳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갈 바를 어디에 가서 물어볼 필요가 없다. 내가 있는 곳에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단단한 그릇에 자신을 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준을 못 잡는 자들의 문제는 직업의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직업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의 문제이기도 하다. 성공하는 자들의 특징은 자신의 직업의 흐름과 생리를 바로 캐치하여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느냐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어느 환경에서도 인정받는 자로서 설 수 있는 가이다. 그것은 성공이기 전에 마음의 자세가 긍정적일 수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는 말이 있듯이 답답한 사람들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여우는 머리가 있기 때문에 시대를 보는 눈을 가지고 있다. 시대는 눈을 원하고, 눈을 통하여 손으로 작품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결국 그런 자들만이 세상에서 인정을 받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누구를 위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



그동안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극성적인 예배를 드려왔다. 안식일 예배로는 부족해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토요찬양연습, 구역예배, 전도회 예배 등 교인들을 옭아매기 위한 모임에 힘썼다. 자주 모이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불편하게 강요하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가서 기쁘게 예배드리고 오는 것으로는 만족하기가 어렵다는 것인데, 그래서인지 교회가 광적인 종교 활동을 강요한다. 이것은 한번 들어온 교인은 어떻게든지 놓치지 않겠다는 교회의 기업화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헌금의 강요에 대한 것도 문제이다. 헌금은 외국처럼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처음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솔직히 헌금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을 꺼리게 된다. 외국의 경우 헌금함은 예배당 입구에 두고 내고 싶은 사람만 낸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보는 가운데 헌금함을 돌리며, 반강제적으로 헌금을 내게 만든다. 안내면 그만인 것 같지만 주위의 눈치가 무섭고 창피해서 억지로 낼 수밖에 없다.
어떤 교회는 예배가 끝나면 일천번제 헌금, 건축헌금, 감사헌금, 새 성전 건축헌금, 새 성전 성구 구입헌금, 기도원 헌금, 결연 헌금, 구제ㆍ호스피스 헌금 등의 헌금봉투가 수거된다. 정말 경악할 만한 일은 똑같은 종류의 헌금을 이름만 살짝 바꿔서 늘려 놓았을 뿐 아니라 주보에 천 구좌 헌금운동. 목표 : 5천 구좌 / 1구좌 당 300만원(전부 합하면 150억 원)이라고 적혀 있는 것이다.
못사는 서민들은 헌금 때문에라도 교회 가기가 부담스럽다고 말한다. 그들은 천 원 짜리 한 장을 떳떳하게 그리고 정성스럽게 헌금함에 못 넣는다. 또 교회 권사나 장로님들은 십일조는 무지 자랑하듯 내면서 일반 헌금은 1~2천원만 낸다. 십일조는 교회 관계자에게 “나 이만큼 벌고 있소”라는 일종의 자랑일수도 있지만 주일헌금은 누가 얼마를 냈는지 표가 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헌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주로 장로가 되는 게 한국교회의 시스템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믿음 좋은 무리들은 거의 다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헌금은커녕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의 식사를 위해 이적까지 행하셔야 했다. 성직자를 포함한 종교인들은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는 그것이 대우받기 위함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일부 교회 목사님들을 보면 남에게 대우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며 베푸는 것보다는 받는 것이 습관화되어 버린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스스로 낮아지려는 진실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장로나 안수집사도 마찬가지이다. 왜들 그리 그 자리에 앉지 못해서 안달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안수집사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잘 다니던 교회를 어느 날 떠나고 말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장로선거에서 떨어져 장로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충격이 컸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믿음이 강해보였고 교회의 요직을 맡아 열심을 냈으며, 기도도 잘 하던 그가 장로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고 섬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다른 교회로 간 것일까? 은근히 성도들도 감투에 목을 매는 것을 볼 수 있다. 작은 테두리 안에서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안 되고는 큰 문제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신앙인의 자세와 의지이다.
개척교회에서 고생하시는 많은 목사님들도 마찬가지로 큰 교회를 목표로 수고하는 것이라면, 그들도 역시 기존의 큰 교회 목사님처럼 힘 있고,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리를 원하는 것이다. 과연 부흥! 부흥을 외치는 그 부흥은 교인들의 영적, 질적, 깨달음의 부흥인가! 아니면 교세 확장을 통해 더욱 부유하고자 하는 숫자적 부흥인가!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서면 도시의 화려한 불빛사이로 비치는 수많은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어쩌면 공동묘지를 연상시킬 정도로 많은 십자가들이 세워져 있다. 이 십자가들이 세상에서 제 역할을 감당해주길 간절히 빌어보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한국교회의 기업화에 회의가 느껴진다. 하나님을 이용해 장사하는 거짓 종교기업가들이 문제인 것이다.
성도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광적인 예수쟁이나 바리새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부족한 나를 보며, 남을 비판하거나 그 부족함을 찾기보다는, 내가 이해받기를 원하듯, 그들을 이해해주며 보듬어 줄 수 있어야 한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거짓된 위선으로 포장하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부족한 나를 알기에 주님께 의지하고 주님의 뜻에 따라 나를 맡기는 것이다. 내 능력 밖의 희생이나 강요로 마지못해 하는 봉사를 통해 주님께 억지로 잘 보이려 해서는 안 된다.
성경말씀은 전체적으로 모두 균형 있게 묵상해야 하듯이, 오늘날 교회들도 자신들의 공동체만 옳다고 할 것이 아니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도 그런 시각을 통하여 균형 잡히고 통찰 있는 깨달음을 얻는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과 다르면 악이고 이단이라고 한다. 이단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좀더 신중해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의 한국교회처럼 판단하는 것은 매우 교만하고 위험한 일로 잘못하다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확연하게 예수님을 욕보이는 단체가 아니라면 이단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교만한 독선으로써 영적으로 스스로는 죽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누가 이단인지 판단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다. 종교역사는 주류를 이루는 종교에 편승하지 못하면 무조건 이단으로 분류해 왔다. 한국교회는 한기총에 가입되지 않은 모든 종교를 이단으로 매도해 버린다. 성경에서 알려주는 이단의 의미를 알지도 못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다. 사두개인,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이단으로 매도했지만 결과적으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못 박은 이단들이었다. (행5:38, 3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오히려 타락한 개신교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개신교가 예수님이 인정하는 정통교회라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들이 수면으로 떠올라 있다. 먹구름이 거치지 않으면 햇빛을 볼 수 없듯이 주님의 이름으로 십자가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문제들이 씻겨나가야 할 모순이다. 자신들 유리한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원래 교리에서 없는 것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교회에서의 헌금문제를 보았을 때, 한국교회는 전부다 이단인 것만 같다! 제발 있지도 않은 헌금명목을 만들어서 성도들의 고혈을 빨아내 교회건물 치장하는데 허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었던 것처럼 현시대도 과거적 고난을 당하고 있다. 시작과 마지막,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제2의 부흥을 노래하기 전에 정비해야 할 것은 정비하고 감당해야 할 것은 감당해야 한다. 과거 김익두 목사님과 같이 한국교회의 부흥을 이끌었던 불의 사역을 경험하지 않고는 메마른 현대인들을 목회현장으로 끌어 올 수가 없다.
“예수님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씩은 삼위일체에 대한 의심이 올 때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라면 난 예수님보다는 하나님에 대해 더 확신이 간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온 하나님보다는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더 확신한다. 예수님의 부활과 그의 승천이 거짓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영적예배가 되지 않고 영성의 중요한 부분도 짚어주지 못하게 되면 설교를 하는 목사조차도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무료감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입장만 전하는 설교를 하게 된다. 부드러운 반주로 때로는 강한 비트로 감성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예배도 좋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달콤, 시원하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갈 때는 그 맛이 사라져버리는 것처럼 순간적인 감각만을 터치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매주 각 교회마다 주제가 다르게 설교를 하지만 성도들은 무엇을 들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대가 요구해서 “나는 그 교회에 다닌다”라고 성도들은 말한다. “그 교회에 가면 명품가방과 같은 설교를 들을 수 있고, 그 교회에 가면 명품 옷도 볼 수 있고, 강대상도 명품이고 모든 것이 다 명품이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를 이용한 교회의 인기 끌기 작전이다. 실제로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어떤 교회는 기업을 경영하듯 교회를 경영을 하며 하나님을 세우기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만 갖추고 그 외에는 다 해도 좋다는 방식을 취해 결국 목사를 스타로 만들었다.
한국교회는 자연적인 성장을 잘 알지 못한다. 자연적인 성장이 어려운 이유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하고 폄하하지 말아야 하는데 예배가 죽고 찬양이 식었으며 말씀이 세상 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골을 넣기 위해서는 골대를 향하여 정확히 볼을 쏴야하고, 정확한 볼을 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바른 영성이다. 교회를 이끄는 담임목사님들은 하나같이 타협식 설교를 하고 있는데 타협적 영성은 절대적으로 자연적 성장을 이끌 수 없다. 한국교회의 영성과 목회는 전인격적으로 회복되기를 소원하고 회개해야 한다. 교회 안에 다원주의가 들어올 수 없도록 뼛속에 사무치는 강한 메시지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직시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개척교회에서 대형교회로 단계적으로 교회의 사이즈가 커져 갈 때, 교회는 이전을 하거나 건축을 하게 된다. 이럴 때는 교회의 성구들이 교체되기 십상이다. 이때가 중요하다. 교회의 성물은 어느 것 하나라도 성도들이 함부로 결정해 임의로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 강대상을 사는 문제, 앰프나 방송 시스템의 교체 등 이 모든 것 하나하나에 담임 목사님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 교회가 규모와 질서가 없이는 성장을 이룬 것 같아도 곧바로 무너지고 만다. 정의로운 질서와 권위가 세워지지 않은 교회는 사단의 표적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좌파우파를 나누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하나님의 질서를 배워야 한다. 권위가 사라진 교회는 성도들이 늘 다툼에 노출되어 있거나 그래서 결국은 떠나가고 만다. 권위가 없는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려 하지 않고 같이 예배를 드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예배드릴 때 이미 마음이 콩밭에 가 있거나 교회를 무시하는 마음이 잔뜩 올라온다. 교회는 세상과는 달라 사도적 권위를 세울 수 있을 때만이 훌륭한 목회자로 인정받을 수 있으며, 진정한 제자를 만들 나갈 수 있다.
한국교회의 권위상실과 회복에 대하여 바로잡을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이 문제만큼은 더 이상 늦추어져서는 안 된다. 한국교회는 어느 동네에서나 쉽게 십자가를 걸어놓고 자신만의 성지로 불신자들에게 인식시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가 세워지며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나는 교회로 다시 한 번 더 세상의 주목을 끌고 그들의 영혼을 이끌 낼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제 더 이상 시골교회, 도시교회, 개척교회, 대형교회로 사이즈 나누기를 그만하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교단·교파도 그만 나누고 복음 안에서 하나 되어 진정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썩어져 냄새나는 곳을 치유하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물론 개척교회는 앞으로도 물질적으로 부족하고, 일꾼이 없어서 힘들고, 목회자의 권위가 서지 않아 말씀이 무시되는 악순환으로 더욱 더 힘들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눈물이며 복음의 씨앗이라는 마음으로 끝까지 사명을 잘 감당해주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개척교회 목회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현시대는 전문가 목회시대이기 때문에 전문가적 서비스가 없는 목회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려하는 것과 같다. 목회자 스스로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목회에 대한 준비를 철저히 해서 세상 가운데로 나오길 바란다.
지난 시절 한국교회는 깊은 감성과 영성을 터치해왔으며 못 배워도 자식을 가르치겠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제자훈련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고 더불어 엄청난 부흥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제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이다. 예배 속에서 진정한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될 때 세상을 끌어안을 수가 있고 미래를 볼 수가 있다. 세상을 이끌어줄 수 있는 교회와 리더만이 영향력 있는 성도를 만들게 된다. 이런 면에서부터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해결하려는 모습들이 보여 지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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