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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2009년 5·6월호
정연복  |  pkom545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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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4월 27일 (월) 12:36:49
최종편집 : 2009년 04월 27일 (월) 21:39:22 [조회수 : 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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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77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의 내용과 어울릴 만한 기도문들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이 설교를 준비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09년 3·4월호 중 3월 다섯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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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를 위한 <설교자노트> 2009년 5·6월호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저는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1997년부터 격월로 나오는 <설교자노트>라는 책을 번역해 왔습니다.

지금까지 78권이 나온 <설교자노트>는 '교회력에 맞춘' 설교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 그리고 그 본문에 따른 미국의 실력 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최신의 설교를 번역하고, 아울러 설교 내용에 적합한 기도문과 예화 자료를 풍부하게 제공하여 목회자들의 설교 준비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책입니다. 특히 <설교자노트>에 실린 설교들은 설교자들에게 성서에 충실하면서도 독창적인 설교 아이디어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자노트>는 시중 서점에서는 팔지 않고 신청하시는 목회자들에게 직접 우송합니다. '영성적이며 공동체적이며 생태학적인 신앙 공동체를 위한 자료'인 <설교자노트>를 구입하기 원하는 분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전화: 031-929-5731)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자노트>는 격월로 나오며 두달치 분량의 설교 자료를 담고 있는데, 2009년 5·6월호 중 5월 넷째 주 설교 자료를 참고로 첨부합니다.

설교 제목: 식탁 대화로 시작된 부활

* 성경 본문: 누가 24:44-53
* 성경 주석

누가는 그의 두 권의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 중 첫 번째 책을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명령, 그리고 그의 승천에 관한 보도로 끝맺는다. 이 마지막 장면들은 적어도 세 가지 목적에 이바지한다: 누가복음 서두의 "질서정연한 보도"(누가 1:1-4)의 끝맺음; 누가복음의 중심 주제인 메시아적 고난의 필요성 요약(누가 9:22, 44; 12:50; 13:32-34; 17;25; 18:31-33; 24:26-27); 그리고 후속편인 사도행전으로 넘어가기 위한 문학적 교량 역할(행전 1:1-11 참조).

부활의 증거를 제자들에게 제시한 후(누가 24:13-43 참조), 누가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보도한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누가 24:44). 불행하게도, 이 경우에 예수가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 정확히 무엇인지 밝힐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누가가 저술한 두 권의 책(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애매성이 전체적으로 풀리지 않는 반면, 그것은 어떤 잠재적인 조명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모세의 율법과 예수의 부활 사이의 느슨한 연결이 누가 20:37에서 가능하다(누가 16:16, 29, 31; 행전 3:22, 23; 7:37 참조).

덧붙여, 누가는 예언자들과 그들의 말, 특히 이사야의 말을 가끔 언급하는 반면(예를 들어, 누가 1:70; 3:4; 4:17; 11:30, 32; 18:31; 22:37; 24:25, 27; 행전 7:48-50; 8:28-35; 13:15; 15:15-17; 28:25), 예언자 신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마태복음에서처럼 흔하지는 않다. 시편의 경우, 누가복음에는 시편이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반면, 사도행전에서는 종종 언급된다(예를 들어, 누가 20:42; 행전 1;16, 20; 2:25-28, 31, 34; 4:25; 13:33, 35).

구약성경의 언급들을 우리가 눈에 띄게 정확히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누가는 예수가 "성서를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누가 24:45)고 단언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이 지점까지는, 제자들은 성경의 의미, 그리고 그것과 예수의 상호 관련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능력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예수의 장래 운명에 관한 예언들과 관련해서는 특히 그렇다(누가 2:48-50; 9:44-45; 18:31-34; 22:22-23). 사실, 그들에게 외부적으로 강제된 제자들의 영적 맹목성의 상태는, 예수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어 그들이 볼 수 있게 될 때에야 비로소 제거된다(누가 24:13-35; 특히 16절, 31-32절 참조).

이전에, 예수는 엠마오 도상에서 성경을 두 제자에게 열어 주었다. 이제, 그는 다른 제자들도 두 가지 기본적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도 성경을 열어 준다. 첫째 진리는 그들이 방금 보았고 경험한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십자가 처형이 처음에는 실망과 불신앙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누가 24:46)고 성경은 예언했음을 그들은 깨달아야 한다. 그들과 또 남들이 그 문제에 관한 예수의 빈번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이 가르침(예를 들어, 누가 9:22; 13:32-34; 18:31-34; 23:35, 39; 24:6-7, 25-26)을 이제 올바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으뜸가는 본질적 기초이기 때문이다(고전 15:3-11 참조).

복음의 기초 교의(敎義)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 준 후, 이제 예수는 그들이 올바로 파악해야 할 둘째 진리로 나아간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  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누가 24:47; 행전 1:8 참조).

누가가 누가복음에서 앞서 시종일관 예시했고(예를 들어, 누가 1:77; 3:3; 5:32; 17:3), 사도행전에서도 반복해서 언급하는(예를 들어, 행전 5:31; 10:43; 13:38; 26:18) 이 심판과 은총의 메시지는 모든 장소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어야 한다. 이 축복이 모두에게 속한다는 것을 제자들이 깨닫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행전 11;18; 15:1-21; 20:21 참조), 이제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누가 24:48)이라고 말한다. 이 말씀으로써 예수는 복음을 널리 선포할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는데, 복음 전파는 누가가 그의 두 번째 책에서 한결같이 강조하는 기능이다(행전 1:8, 22; 2:32; 3:15; 5:32; 10:39, 41; 13:31; 22:15, 20; 23:11; 특히 누가 1:2의 "목격 증인"[eyewitnesses] 참조).

그러나 이 부활 이후의 만남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명령을 실행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하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누가 24:49; 행전 1:4-5 참조). 제사장 스가랴가 아들 요한이 할례를 받을 때까지는 말문이 막혀 말을 할 수 없었듯이(누가 1:20, 64), 제자들은 말씀의 능력을 부여받을 때까지는 침묵한 채로 기다려야 한다.

그의 지상 사명의 핵심 목표를 설명하고, 그리고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들의 역할에 관해 제자들에게 가르친 후, 예수는 "그들을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셨다"(누가 24:50; 누가 19:29 참조). 예수가 제자들에게 한 이 마지막 말씀에 관한 누가의 보도는 실제 사건의 대강의 줄거리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의 축복의 정확한 말들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의 행동에 강조점이 있다. 예수는 베다니에서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그리고 또한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갈" 때, 제자들을 축복해 주었다(누가 24:51; 누가 2:15 참조).

예수의 명령과 격려의 말에 대한 응답으로, 제자들은 엎드려 예수를 경배하며, 그리고 예수가 그들에게 지시한 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우울하고 풀이 죽은 채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기쁨에 넘쳐"(누가 24:52) 돌아갔다. 왜냐하면 수십 년 전에 천사들이 들판의 목동들에게 "오늘 밤 너희의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분은 바로 주님이신 그리스도이시다"(누가 2:8-11 참조)라고 선언했던 바로 그 구세주가 지상에서 살았었고 죽었고 부활했음을 이제 제자들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믿을 수 없는 사건의 증인이었으며, 그리고 그들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많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큰 기쁨에 동참할 것이다(행전 8:8; 15:3 참조). 그러나 그 정해진 시간까지는, "그들은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지냈다"(누가 24:53). 이 성전은 과거에 그들이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약속들에 관해 종종 들었던 곳, 그리고 예수에게서 확실히 많은 축복을 받기도 했던 곳이다(누가 24:53; 누가 2:46; 20:1; 21:37-38; 행전 2:46; 5:20, 25, 42 참조).  

* 설교 본문

제자들의 사명은 빈 무덤 방문이 아니라 구운 생선 한 조각을 놓고 나누는 대화로 시작된다. 식탁 담화(table talk)의 힘을 절대로 과소평가하지 말라.

애덤 벨로우는 신선하고 놀라운 방식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는 책을 썼다. 『족벌주의 찬양』(In Praise of Nepotism)이라는 책에서, 그는 친척들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관습을 옹호하며, 그리고 많은 "자수성가한"(self-made) 사람들이 실제로는 전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그들은 "가족이 만들어 준"(family-made) 사람들이다. 성경 속의 아브라함과 다윗 왕,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자들 세대의 형성에서는 가족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아담 벨로우에 따르면, 족벌주의는 요컨대 가족적 유산의 전달 통로가 되며, 그리고 우리의 전체 사회를 결합시키는 관대함과 감사의 순환으로 귀결된다.

이런 방식으로 설명되는 족벌주의는 그리 나쁘지 않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한 무리의 여자들, 두 천사, 그리고 한 깜짝 놀란 사도가 등장하는 부활절 아침 이야기에 친숙하다. 그러나 부활절 오후의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은 벨로우의 논제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여기에서 주장하려는 것은, 빈 무덤은 우리의 믿음에 엄청나게 중요한 반면, 기독교 운동이 힘차게 나아가도록 박차를 가한 것은 빈 무덤 이후의 식탁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이라는 사실이다.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다. 그리고 두 천사가 그들에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했다고 그들은 사도들에게 보고한다. 그러나 여자들은 적어도 맨 처음에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수의밖에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어떻게 된 일인가 이상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간다(누가 24:1-12).

이 부활절 아침에 뒤이어 부활절 오후의 이야기가 뒤따르는데, 그것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알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두 제자(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 요한 24:18)가 예루살렘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엠마오라는 동네로 걸어간다. 도중에, 그들은 한 신비한 낯선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은 그들에게 성경을 해석해 준다. 날이 저물어, 그 낯선 사람도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게 된다. 그들이 식탁에 함께 앉았을 때, 그 낯선 사람은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었다." 바로 이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려 그 낯선 사람이 누구인지 인식한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런 다음, 그분은 바람처럼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우리를 부활절 저녁으로 데려다주는 것은 어느 것인가? 그 다음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마도 열 명 중 하나도 안 될 것이다. 부활절 저녁은 부활절 아침의 힘찬 활력과는 거리가 멀다. 그 주된 이유는, 부활절 저녁은 빈 무덤이 아니라 식탁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식탁 대화가 중요하지 않고 색다른 의미도 없으며 심지어 지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의 이런 생각은 전혀 틀린다.

서둘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는 11명의 제자와 그들의 동료들이 한 식탁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두 제자가 길에서 자신이 당한 일과 빵을 떼어 줄 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예수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가 그들 가운데 나타난다. 그들은 너무나 놀라고 무서워서 자신들이 유령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고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발을 보아라. 틀림없이 나다! 자, 만져보아라. 유령은 뼈와 살이 없지만 보다시피 나에게는 있지 않느냐?"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이 결코 유령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그들에게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은 그에게 구운 생선 한 토막을 주며, 그리고 그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먹는다(누가 24:33-43 참조).

그런 다음, 식탁에 함께 둘러앉은 채로, 예수는 그들에게 말한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며,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 실현되었다고, 즉 메시아(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이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는다는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에서 비롯하여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그들에게 말한다(44-47절).

사도들은 회개와 용서를 선언하는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인지 의아해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식탁을 가로질러 몸을 그들에게로 기울인 채로, 예수는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나는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48-49절 참조).

그런 다음, 그는 그들을 식탁, 즉 틀림없이 더러운 접시들이 여전히 뒤덮여 있을 식탁을 떠나 바깥으로 이끈다. 그는 그들을 베다니 근처로 데리고 나가서 두 손을 들어 축복해 주면서 하늘로 올라간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부활절 저녁은 이 승천 장면으로 끝난다. 사도들은 승천하는 예수를 경배하고 기쁨에 넘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계속한다(50-53절).

여기에서, 부활절 저녁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주목하라. 사도들의 사명은 빈 무덤 방문이 아니라 음식, 즉 구운 생선이 가득한 식탁과 그 식탁에서의 대화로 시작된다. 우리는 그것을 "저녁 식탁의 제자직"(Dining-table Discipleship)이라고 부르자.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함께 빵을 뗄 때 벌어지는 일의 의미심장한 중요성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식탁에서 부활한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성만찬의 신학, 선교 신학, 제자직의 실천신학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30-31절)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사도들에게 그들의 '진격 명령'(marching orders)을 저녁식사를 마친 이후의 대화의 일부로서 주었다.

제자들의 족벌주의.

우리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유대에 관해 생각할 때, 예수와 제자들 사이에 식탁 주변에서 오가는 족벌주의 색채가 짙은 식탁 담화에는 심오한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분명하다. 복음을 설교하는 것은 예수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그것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는 가족적 유산, 즉 회개와 용서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제자들이 그의 임재 앞에서 느끼고 있는 감사와 관대함의 순환, 즉 부활이 죽음을 정복했음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을 향한 관대함을 튼튼히 유지하기를 원한다.

영적 족벌주의의 놀라운 행동 속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포함한 모든 것을 그의 영적 형제자매들에게 맡긴다. 그는 성령을 보내 줄 것을 약속하면서 말한다.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나의 증인들이다"(48절). 그러나 그는 그 무슨 이기적인 목표들을 염두에 두고서 그들에게 이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도록 성령의 권능 가운데 세상 속으로 파송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식탁 주변에서 시작된다. 

제자들이 그들의 사명에 착수할 때, 그들은 "자수성가한"(self-made)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에 의해 형성된"(Jesus-shaped) 사람들이다. 그들은 감사와 관대함의 순환을 유지하며, 그리고 그들의 메시아의 유산을 힘차게 계승하고 전달한다. 누가복음은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지냈다"953절)고 보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이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소유를 공유하여 "그들 사이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행전 4;34)고 보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관대함이다. 사도행전은 또한 베드로가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행전 10:43)고 선언한다고 우리에게 말하는데, 그것이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유산이다.

예수는 그의 '가족적 가치들'(family values)을 세상에 널리 선포하고 전달할 책임을 그의 제자들에게 부여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우리는 자녀들, 손자와 손녀들, 친구와 이웃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식탁 대화를 어떻게 더 훌륭히 사용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감사에 관해 말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현대인의 문제점들 중 하나는 삶의 좋은 것들을 선물보다는 자신이 당연히 받을 권리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 현대인은 참된 감사를 낳는 놀라움과 경이로움의 감각을 잃었다. 코네티컷 주에서 목회를 하는 심리 요법 의사인 존 샌들은 말한다: "우리가 선물을 받고 있음을 인식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감사는 이 기쁨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경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샌들은 감사를 사람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드는 한 가지 특성으로 이해하고 실천할 것을 권고한다.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선물보다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선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만족을 낳는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순수한 선물로 받아들였기에 엄청난 감사와 만족을 느꼈고,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미했다.

기독교인들의 또 다른 가족적 가치는 관대함, 즉 식탁 주변의 대화에 의해 형성되는 관대함이다. 너무도 종종, 우리는 우리의 자비로운 베풂에 관한 결정들을 우리 자신에게만 한정된 사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그러나 베풂을 하나의 가족적 가치로서 다루며, 그리고 가족적 관대함의 구체적 실천에 관한 결정들에 자녀들을 포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은 집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내쫓는 행동들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자녀들이 그들 자신을 단지 받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당당한 기부자로서 간주하도록 가르친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관대함의 문화를 창출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가능성들도 포함된다. 우선적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용서와 새 생명을 받게 된다는 메시지가 바로 그렇다. 예수 자신이 오늘 본문의 47절에서 이것을 언급한다.

그 다음으로, 사랑이 있다. 당신은 예수의 삶과 일의 핵심에 이르지 않고서는 십자가에 관해 논의할 수 없다. 예수는 이타적인 사랑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

문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모범을 보였던 그 사랑과 봉사를 어떻게 행할 수 있을까?

『복음을 제약하지 말라』는 책에서 마샤 그레이스는 강조한다: "사람들이 교회를 들여다볼 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삶의 중심으로 삼은 사람들과 결합되기를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사교 클럽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예수의 메시지를 세상에 널리 보급하기 원하는 모든 사람의 삶의 한 주요 부분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당신이 교회 바깥 사람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키기 시작할 때, 그들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심지어 완전히 변형되기를 원하고 있음을 인식하라. 그들은 남들에게 환영을 받고 용납된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 그리고 영적 성장을 체험하는 방법에 관해 배우기를 원한다. 그들은 예수와의 관계에서 오는 용서와 새 생명을 원한다. 기쁜 소식은,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와 제자들의 가족적 가치들에 의해 틀이 지어졌기 때문에 남들도 이런 종류의 변형을 경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도? 우리는 얼마든지 기도할 수 있다. 따뜻한 환영? 그것은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용서와 새 생명? 우리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 행한 것에 관해 말할 수 있고, 이로써 우리는 남들을 그들이 갈망하는 영적 성장으로 이끌 수 있다. 이런 다양한 일이 우리 가정의 식탁, 혹은 교회의 식탁 주변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부활절 아침 이야기는 늘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놓여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죽음을 정복하셨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절 저녁 이야기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것은 식탁 대화로 말미암아 기독교라는 한 강력한 영적 운동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식탁 대화를, 그리고 교회의 벽을 훌쩍 뛰어넘어 장터에서의 개방적인 대화를 계속하자.

<가능한 설교 주제들>
* 사도들의 사명은 빈 무덤이 아니라 식탁 대화로 시작된다.
* 기독교인의 가족적 가치들: 감사, 관대함, 그리고 용서와 새 생명의 메시지.
* 효과적인 복음 전도는 기도, 환대, 그리고 영적 성장을 위한 기회들을 통해 성취된다.   

* 예화

+ 오월에는

오월에는
생각들이 바르게 하소서

밝은 마음들이 살아올라
슬픔과 괴로움의 편린들은
멀어지게 하소서

들풀의 속삭임에
마음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게 하시고
따사로운 햇살 한 자락에도
감사가 풍요롭게 하소서

오월에는
사랑하는 일에 충실하게 하소서

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보다
한 사람의 마음을 아프지 않도록 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하소서

멀어졌던 마음들이 돌아와
푸른 그늘 속에 보금자리를 열게 하시고
들꽃의 작은 미소에도
즐거움이 넘치게 하소서

오월에는
마음이 비워지게 하소서

천년 변함없는 계절의 진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에 순응하며
참된 행복을 체득하게 하소서

하늘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낮아지게 하시고
초록이 짙어질수록
욕망의 빛은 흐려지게 하소서

오월에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과
가장 아름다운 겸손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곽경석)

+ 하나님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

하나님을 발견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분의 창조물 안에서
그분을 보는 것이고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섬김으로써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전체의 한 부분이고,
모든 것은 전하는 수단이며,
나는 그분을
나머지 인류로부터 떨어져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나의 동포들은
나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고,
자력 수단도 없고,
활동력도 없어,
나는 그들을 섬기는 일에
나 자신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만일 내가
히말라야 동굴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리라고
내 자신을 설득할 수 있다면,
나는 당장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인류와 떨어져서는
그분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

+ 나에게 질문하기

요한 웨슬리는 나태함과 게으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일곱 가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대답했다고 합니다.

1. 나는 오늘 마음에 흡족할 만큼 충분히 기도했는가?
2. 나는 오늘 매 순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했는가?
3. 나는 오늘 모든 경우에 '감사하다'고 말했는가?
4. 나는 오늘 욕심을 내는 것이 없었는가?
5. 나는 오늘 두려워한 일이 없었는가?
6. 나는 오늘 하나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꼈는가?
7. 나는 오늘 말과 행동을 하나님이 기쁘시게 했는가?

오늘도 하루를 열심히 산 다음 잠자리에 들기 전 꼭 일곱 가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져보겠습니다. 모든 질문에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최용우·전도사)

+ 부활하신 분을 만난 표지

부활하신 분을
따르기를 열망하는 그대여,
그대는 어떤 표지로
그대가 그분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아내겠는가?

그분을 따르기 위해
그대가 내적으로 겪는 투쟁들,
그대 안에서 이따금 마음의 눈물을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시련들,

이 모든 싸움이 그대를
화석처럼 굳어지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그대의 삶의 원천으로 변화될 때
그대는 그분과의 만남을 의식할 수 있다.
(로제 수사·떼제 설립자)

+ 십자가의 길과 역경을 견디는 힘
 
"너 자신을 버리고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은 실천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무서운 말씀이 있다. 그것은 최후 심판의 자리에서 주님이 "너희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저 영원한 지옥 불구덩이로 들어가라!"(마 25:41)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주님이 그들더러 좇으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꺼이 따르는 사람은 이 영원한 저주의 말씀을 들어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주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때 하늘에서는 십자가의 표가 나타날 것이며, 그들이 세상에 살 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했던 십자가의 종들은 큰 확신과 안도감을 가지고 그들의 심판자이신 그리스도께로 달려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지기를 두려워하느냐? 십자가야말로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이며 그밖에 다른 길은 없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고, 십자가에 영생이 있고, 십자가에 하늘의 온갖 축복이 가득 담겨 있다. 십자가에는 영혼의 능력과 심령의 기쁨과 높은 미덕과 성결이 충만하다. 십자가의 공로가 아니고서는 영혼의 구원도 영생의 소망도 결코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 그리하면 당신은 영생에 이를 것이다. 주님은 당신보다 앞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위해 죽으심으로써, 당신도  주님 자신과 같은 고난의 길을 걷게 하셨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필요하다면 죽음까지고 함께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고, 당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에 참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도 참여할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의 본받아』)
 
+ 예수의 기도-민중의 필수적 요구
   
기도는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자의 필요에 의한 요구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원시 교단의 범례적 기도의 틀을 부셔버리고
민중의 필수적 요구로서 그 틀을 구축한다.
생활의 실제에 부딪치지 않고서는
영원한 생명 따위를 문제삼지 못한다.
예수라는 사나이는,
당신은 어떻게 기도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내일의 빵이 필요한데"라고 살짝 토를 달았다.
(田川建三, 김명식 역, 『예수라는 사나이-역설적 반항아의 삶과 죽음』)

+ 삶보다 귀한 죽음

막심 고리키(1868-1936)의 소설 『어머니』는
이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념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아들의 어머니가
서서히 의식화되는 과정을 그려 주고 있다.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하면서도
매일같이 남편의 매를 맞으며 살아야 했던 인생,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아온 그녀의 인생이
이념으로 거듭나게 되는 변화를 그려 준다.
역사의 진리가 무엇이며
정의를 위한 실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이야기해 준다.
어머니는 그들의 이념 운동에
자기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며,
죽음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신감을 얻게 된다.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는 신념을 얻게 된 것이다.

그 이야기 속의 한 동료가 죽자 사람들이 슬퍼했다.
그러나 어떤 동료는 말했다:
'죽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건 무엇인가요?
무엇이 죽었을까?
예르고(죽은 사람의 이름)에 대한 나의 존경심이 죽었나요?
그에 대한 나의 동지로서의 사랑이?
그의 정신적 노동의 기억이?
그러한 노동이 죽었나요?
영웅으로서의 그에 대한 우리의 인상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단 말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죽었나요?
그가 가졌던 가장 좋은 것들은 나에게서 결코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아요.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그가 죽었다"고 말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진리와 행복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고통을 당한
그의 인간성과 그의 영향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완전히 잊어버리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 모든 것이 살아 있는 우리의 가슴속에
항상 살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립니다.
살아 남아 있는 사람들 속에 함께 살아남아
항상 빛이 되어 주는 '생명'을
너무 쉽게 매장해 버리지 맙시다.
교회는 파괴되었지만 하느님은 영원합니다.

역사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역사의 보답을 받을 것이며,
역사를 위해 죽는 사람은 역사와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이다.
육신의 생명은 유한한 것이며,
자기 육신을 위해 산 사람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죽고 만다.
(소홍렬·철학자)

+ 밥이냐 말씀이냐?

우리는 흔히 '밥'과 '말씀'을 대립시킨다.
밥과 말씀 중 어느 하나라는 식으로 양자택일을 생각한다.
그래서 "밥이 제일이다",
"아니다. 말씀이 제일이다" 하고 싸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밥과 말씀은
구별될 수는 있어도 결코 분리될 수는 없다.
사람은 밥을 먹고산다.
말씀으로 밥을 대신할 수가 없다.
말씀은 말씀이지 밥이 아니다.
말씀으로 굶주린 배를 채울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은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다.
우리의 몸은 밥으로 살 수 있지만,
혼은 말씀을 먹어야 산다.
사람은 밥도 먹고 말씀도 먹어야 한다.

밥과 말씀은 서로 타협의 관계에 있지 않다.
밥과 말씀은 동일한 실재이며 현실이다.
밥과 말씀은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밥은 말씀이고 말씀은 밥이다.
밥은 말씀을 살자는 것이고,
말씀은 밥을 먹자는 것이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사람답게 살자는 것이고,
사람이 말씀을 배우는 것은 밥을 제대로 먹자는 것이다.
그래서 밥과 말씀은 둘이 아니고 하나다.

밥이 절실한 문제로 등장할 때는
밥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진정한 말씀이 된다.
밥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할 때,
말씀은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들고 나와도
'참 말씀'일 수가 없다.  
(송기득, 『예수와 인간화』)      

+ 내 살은 참된 음식이다

언뜻 보기에 일흔 살쯤 되어 보이지만
실은 마흔 살밖에 되지 않은 어느 부인이
미사가 끝난 후 신부에게 다가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신부님, 저는 먼저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정말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성체를 나눠주시는 것을 보고,
성체인 그 하얀 밀떡 조각을
굶주림을 조금이라도 채워볼 욕심으로
그냥 받아 모시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신부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신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음식이며,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보프 형제, 김수복 역, 『해방신학 입문』, 한마당)

+ 밥의 세 가지 의미

예수님은 밥인데, 밥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밥은 필수 음식입니다. 밥은 절대로 사치품이 아닙니다. 밥은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그러므로 밥 먹는 것이 자랑일 수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밥 먹은 것을 자랑하는 분이 있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이 밥이라는 상징에 적용하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우리 삶의 액세서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밥이란 뜻은 모든 사람의 구미에 맞는 음식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짠 음식을 못 먹습니다. 어떤 사람은 단 음식을 못 먹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고기를 못 먹습니다. 그러나 밥을 못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이 밥에 숨겨진 예수님의 뜻입니다.

셋째, 밥은 매일 먹는 음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과의 교제도 하루도 끊이지 않고 매일같이 이루어져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밥은 매일 먹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일용할 영적 양식입니다. 매일 교제함으로 채워야 할 분이 바로 우리 영혼의 밥이 되신 예수님입니다.
(전병욱·목사)

+ 성만찬 새로 이해하기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저녁 먹는 자리에서 빵을 떼어주며 "이건 내 살이라" 했고, 포도주를 따라주면서 "이건 내 피다"라고 했다.

여기서 빵과 포도주가 정말 예수의 살과 피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뒤면 사라질 자신의 살과 피의 길을 가르쳐준 것이다.

세상의 모든 목숨은 희생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온몸을 희생하고, 그 자식은 또 그 자식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가 이어져 왔다.

어머니 아버지의 희생만이 아니라 우리가 먹고 있는 모든 먹을거리는 자연에서 얻는다. 공기로 숨을 쉬고 물을 마시고 온갖 동식물을 잡아먹고 산다.

결국 우리 몸 속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와서 살이 되고 피가 되어 움직인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 내 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나는 자연의 일부이며 또한 하느님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이 사람들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하느님이 계신다고 하신 것은 백 번 옳은 말씀이다.
(권정생 산문집,『우리들의 하느님』)

+ 밥이 되신 예수, 밥이 되신 하느님

어찌 보면 예수님의 일생은
밥에서 시작해서 밥으로 끝난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 베들레헴.
'베트(집)'라는 말과 '레헴(빵, 양식, 밥)'이라는 말의
합성어인 베들레헴.
그러니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밥집'이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가 눕혀진 자리는 어디였던가?
구유.
이곳도 가축들의 먹이통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복음 선포와 나눔이 이루어진 자리는 어디였나?
밥상 공동체였다. 잔치였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사업상 친밀해지기 위해서도 그러하지만)
요즘도 친밀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 친밀함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다.
특히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이들,
자신이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던 죄인들,
가난하고 못난 변두리 인생들과 여자들 등등....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밥상에서
다시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이 밥상 공동체에서
자신을 새롭게 알아간다.
'아, 나도 사람이었구나!'
식사 자체로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거니와,
예수님과 함께 한 밥상 공동체는
사람을 회복시키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상징이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앞당겨 이루는 일이었다.
사실 4복음서에서
'잔치'는 하느님 나라의 표상이 아니던가.

그분은 먹보요 술꾼이라는 비아냥까지 받았다.
그리고 그분은 4천 명, 5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자리, 최후의 만찬.
죽음을 앞두고 당신을 제자들의 가슴과 뇌리에
박아주고 싶으셨던 예수님이 택하신 방법 또한
함께 밥을 먹는 것이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식을 행하시오.... 받아먹으시오.
이것 내 몸, 이것 내 피!"
하느님의 아들이, 하느님이 인간의 밥이다!
밥은 자신을 죽여 남을 살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그대들의 밥이 되듯이,
그대들도 서로 밥이 되어 주시오!"
이것이 성체성사의 본뜻이 아닐까.
(이종한, [신앙인 아카데미] 강의에서)

+ 최상의 요리가 남았다

조리사로 약 40년 간 미국 서부 지역 각종 기독교 수련회의 음식을 담당했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아는가?

수련회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안내에 따라 식사 때마다 포크를 하나만 사용해야 했다. 식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쓴 음식 접시가 다 모아지면 그녀는 후식을 먹기 전에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포크를 계속해서 붙잡고 있어야 합니다. 가장 맛있는 요리는 아직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녀가 수련회 때마다 사람들에게 입버릇처럼 들려준 이 깜찍한 말 때문에 그녀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임종을 앞두고 아주 독특하고 인상적인 유언을 남겼다. 관 속에 누운 자신의 손에 반드시 포크를 쥐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녀의 유언은 포크와 함께 살아온 그녀의 인생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녀가 포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던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그녀는 "아직 하나님 나라에서 먹을 최상의 요리가 남았다"는 자신의 확신을 후세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 예배 자료

+ 예배에의 부름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는 당신 앞에서 범죄하였나이다.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에게는 당신 이외에 다른 왕이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완전한 회개 가운데서 우리를 당신께 돌아가게 하소서.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의 이름을 구원의 책 속에 기록하소서.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 왕이시여,
우리 안에 비록 선한 일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우리는 온 세상 안에서 당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오 하느님, 우리 조상의 하느님이시여,
영광 가운데 온 세상을 다스리소서.
(기원 전 유대교 회당에서 드리던 기도)

+ 한 목소리로 드리는 기도

주님,
제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주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시고,
역경이 닥쳐와 희망이 사라져 갈 때도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주님,
밤이 어두울수록 길잡이가 필요하듯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주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작자 미상)

+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

하나님!
나에게 약간의 빵과 기름을 주소서.
한 움큼의 고기와
그 고기를 끓이기 위한 빈 냄비를 주소서.
(로버트 헤릭)

+ 식사할 때의 기도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 있고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땀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땅에 밥으로 오셔서 우리의 밥이 되어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이 밥 먹고 밥이 되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

밥상을 베푸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 드리며
맑은 마음, 밝은 얼굴, 바른 믿음, 바른 삶으로
이웃을 살리는 삶이기를 다짐하며
감사히 진지를 들겠습니다.
(다일공동체, '진지기도')

+ 헌신에 대한 묵상기도  
 
주님,
고집스러운 제 생활태도를
온유함과 겸손으로 변화시켜 주소서.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던 저입니다.
제가 착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심지어 잘못을 깨달은 순간에도
체면이 깎일까 두려워
제 생각을 고집하던 저입니다.

주님,
미움을 받을 줄 알면서도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신 주님,
고집스러운 제 생활태도를
온유함과 겸손으로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
조금은 너그러울 수 있게
조금은 인내할 줄 알게 해 주소서.

주님,
마음이 상했을 때,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게 해주시고
넉넉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지켜 주소서.

주님
너무도 편협하고 옹색한 제 마음을
슬기로운 마음으로,
지혜로운 마음으로,
그렇게 지켜 주소서.
저는 아주 옹졸하고 잘 흥분하는
결점 투성이랍니다.
지금도...

저를 고쳐, 당신을 닮게 하소서.
(작자 미상, '저를 고쳐, 당신을 닮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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