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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설교] 부활 세 번째 주일(20090426)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박성규  |  theos53@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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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4월 21일 (화) 22:30:47
최종편집 : 2009년 04월 22일 (수) 22:37:04 [조회수 : 2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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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세 번째 주일(20090426)
성서일과/ 시 4: 행 3:12-19; 요일 3:1-7; 눅 24:36-48
본문/ 요한 1 서 3:1-7
설교/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요일 3:1-7)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느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 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보혜사 성령의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은혜가 성도들에게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오직 믿음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말씀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을 그 누구보다 확실히 믿고 전했습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기에 이를 하나님의 은혜라 하고,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죄가 깊은 곳에 은혜도 크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여기까지 말하게 되면 반드시 따라붙는 질문이 하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럼 죄를 지어도 상관없는 일이 아니냐?
심지어 더 큰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더 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도 그런 질문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롬 6: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럴 수 없다고 합니다.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내가 세상에 대하여 죽고 세상이 나를 대하여 죽었는데, 어찌 죽은 몸으로 다시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에 있던 천사의 말을 생각하게 합니다. 
(눅 24:5) ..... 어찌하여 산 자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오늘 사도 요한을 통해 주시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구원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여전히 피할 수 없는 죄 가운데 머물러 사는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해 어떤 자세로 살아야할 것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더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도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죄는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안에 거하는 자는 죄를 범하지 않고, 범죄하는 자는 그를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삶의 목적-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스땅달이 쓴 ‘적과 흑’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시골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난 줄리앙 소렐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아버지와 형들로부터 홀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출중하게 잘 생긴 외모와 라틴어 성서를 모두 외울 정도로 좋은 머리를 가졌고, 큰 야심과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마음에 품고 살았습니다.
평민의 아들로 섬마을에서 태어나 프랑스 황제가 된 나폴레옹이 그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왕정이 복구된 후에는 나폴레옹처럼 군인으로 출세할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줄리앙은 신부에게서 라틴어와 신학을 배워 마음에도 없는 성직자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평민들에게는 성직자만이 유일한 출세의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적과 흑’의 적은 군인의 붉은 옷, 흑은 성직자의 검은 옷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뛰어난 라틴어 실력 덕에 시장(市長)의 집 가정교사가 된 줄리앙은 잘 생긴 외모를 앞세워 그 집 안주인을 유혹했고, 그 소문은 곧 동네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할 수 없이 고향을 떠난 쥴리앙은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교장에게 인정을 받아 파리에 있는 귀족의 비서로 추천을 받습니다.
출세의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줄리앙은 거기서도 계획적으로 주인의 딸을 유혹하여 임신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딸의 임신을 안 귀족은 할 수 없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전에 있던 집에서 여주인을 유혹했던 일이 들통이 나고 말았습니다.
귀족의 딸과 결혼해서 출세를 하려던 쥴리앙의 야심은 깨졌습니다.
쥴리앙은 자기의 꿈이 깨어진 것이 전에 사귀었던 주인 집 아내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맙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죽은 줄 알았던 그 부인이 요행으로 살아나서 감옥에 간 쥴리앙을 만나는데, 쥴리앙이 그 부인의 진실한 사랑을 알고 새사람이 되지만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뒤집어 놓은 것 같지 않습니까?
요셉도 꿈을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도 형들의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유혹을 당하여 이기었지만, 쥴리앙은 유혹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쥴리앙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무엇이 두 사람의 운명을 이렇듯 다르게 만들었을까요?

꿈, 소망의 근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나중에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세운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슨 일을 이루려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다 이루어지자 비로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쥴리앙의 꿈은 땅에 속한 야심(野心)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정한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두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지식이 필요할 때는 지식을 동원하고, 잘 생긴 외모를 무기로 여자들을 유혹하여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신학교조차도 자기가 품은 야심을 위하여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의 꿈이 깨어지자 모든 것을 자기를 사랑한 여자의 탓으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은 말합니다.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느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우리가 죄의 종이었을 때는 세상에 속한 욕심이 우리의 꿈과 소망의 근거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꿈과 소망이 하나님의 사랑하심에 이끌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은 다시 말합니다.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은 우리 스스로가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세운 계획을 따라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장차 그와 같을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그를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말했습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 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의로움도 그렇고,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부족하고, 지금 당장은 만족할 만하지 못해도, 하나님 앞에 설 그 때에는 온전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땅에 두었던 소망의 줄을 하늘에 옮겨 맨 사람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뵙는 것 그것이 하나님 자녀가 사는 목적입니다.
꿈을 땅에 심은 사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런 방법, 저런 수단을 동원하다가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소망이 하늘에 있는 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이루려 하지 않고, 그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소망이 하늘에 있는 자는 결코 죄를 범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소망을 하늘에 두고 살게 되면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소망의 줄을 옮겨 매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소망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소망을 하늘에 두는 자들은 땅에 속한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습니까?
하늘에 닿은 소망의 줄을 굳게 잡아, 놓치지 마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먹 가까이에 있으면 검은 게 묻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죄를 피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죄와 더불어 산다고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이니 죄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고, 거짓말입니다.

죄악이 가득한 세상에 살면서도 홀로 의로웠던 노아, 온 세상이 멸망하는 가운데 구원을 얻은 그도 술에 취하니 허물을 보였습니다.
믿음의 아비라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기지를 않아 웃었고, 생명을 구하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받은 야곱은 남 속이는 것을 우습게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도 간음의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죄를 범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정이 그러니 우리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노아도, 다윗도, 아브라함도... 바울의 말마따나 세상에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으니 하물며 나랴? 하는 심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에 앞서 이미 요한이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요일 1:8-10)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죄를 죄로 알고,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를 지었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미쁘신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다 같이 죄라고 부르지만 죄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죄라고 하면 될 것을 성경은 거의 모든 죄에 대하여 각기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을 그만큼 중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그 많은 종류의 죄를 다 열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2:31-32) 『[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죄의 종류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입니다.
모든 죄가 다 용서 받을 수 있는데 오직 하나의 죄가 사함을 받지 못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성령의 일,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살리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성령을 불어 넣어 생령 곧 살아있는 생명이 되게 하셨습니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에 힘줄과 살이 돋고, 가죽이 덮여도 그것은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겔 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생기 곧 하나님의 영이 있어야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겔 37: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아담 이후 인간 세계에 처음 나타난 범죄가 사기도, 도둑질도, 강도도 아닌 살인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은 살인자 가인의 계보를 하나님의 구원계획에서 제외하고,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 셋의 계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둘째, 소통하게 합니다.
홍수 심판을 받은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목적으로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일에서 인간의 교만을 보시고, 그들이 쌓던 탑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다시는 악한 일로 하나가 되게 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날 임한 성령의 처음 역사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한 제자들이 제각기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이 다른 족속에게 배우지도 않은 말을 해서 뜻을 통했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저주가 풀렸다는 뜻입니다.
소통케 하시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막힌 벽을 헐고, 건널 수 없는 구렁을 메워 서로 오가게 하는 역사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합니다.
다른 뜻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오직 한 분이시니 모든 사람이 한 식구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제자들에게 땅에서 백배나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한 새식구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이 능력을 부인하는 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내 생명의 근원으로, 내 삶의 중심으로, 그를 둘러 모든 사람을 식구로 여기지 않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일러 배역하는 죄-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는 죄, 피조물이 창조주를 부인하는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하십니까?
살리는 일, 하나 되게 하는 일, 식구 되게 하는 성령의 일을 힘써서 행하는 자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죄의 사함을 받을지라도 그 값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더 확실하게 말하면 생명을 바쳐야만 씻을 수 있는 죄라는 뜻입니다.
본문 말씀입니다.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죄가 불법이면 주님은 법입니다.
법은 심은 대로 거두는 원리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모든 법이 이 원리를 따라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죄의 열매입니다.
죄를 심었기 때문에 죽음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죄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말합니다.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그가 죄 없이 죽음으로 우리의 죽을 죄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으로 밖에는 씻을 수 없는 죄, 곧 용서받지 못할 죄는 더 이상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또 말합니다.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더 이상 죽을 죄 때문에 죄를 더하는 삶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받아 그를 아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여전히 짓는 죄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령을 훼방하는 죄,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라면 다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시 말합니다.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했다고 합니다.
애당초 의를 행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가는 자입니다.
그를 보고, 아는 자들입니다.
지금은 온전치 못해도 언젠가는 그의 계신 그대로 그를 보게 되리라는 것을 믿고 사는 자들입니다.
여전히 약하고 추한 몸으로, 죄로 물든 세상에 사는 탓에 죄 짓는 일 자체를 피할 도리는 없으나 지은 죄로 말미암아 아파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법이 아니시기에 아무리 사소한 죄라고 할지라도 그를 속일 수가 없고, 그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죄의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죄 때문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지, 죄의 값을 치루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우리 죄 값을 대신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조차도 당신의 법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죄에 따르는 모든 심판과 징벌을 피해 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엄위하신 법(法)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는 이름 그대로 남을 속이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평생에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자였으나, 남을 속인 죄의 대가는 치러야만 했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서 20년을 종살이하듯 그를 섬겨야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속아서 가장 사랑했던 아들 요셉이 죽었다고 믿고, 가슴에 묻고 산 세월이 또 이십여 년이었습니다.
평생 속이며 산 죄의 값을 치루고 살았던 셈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그 위-왕의 자리를 영원히 하시겠다는 약속을 받을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죄를 범했을 때, 그 죄에 합당한 징계를 받았습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어도, 심판을 피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는 불의한 자식을 낳은 죄 때문에 그 자식을 잃었고, 부정한 사랑을 한 까닭에 가장 사랑하는 자식에 의해 처첩들이 능욕을 당하는 수치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슬픔과 부끄러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의로워서 구원받는 것은 정말 아닙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죽어야 할 죄의 값을 치루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요, 마귀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법을 이루려 하심이지, 법 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짓는 죄는 더 이상 죽음으로 씻을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죄를 안 짓게 되었다거나,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은 영원합니다.
생명으로 대가를 치루지 않는다 할지라도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 죄의 값입니다.
야곱도, 다윗도, 하나님 자신도 피해 갈 수 없었던 하나님의 엄위하신 법에 따른 정죄와 징벌이 반드시 있습니다.
회개하는 자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나마 긍휼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시 마귀에게 속하지 않을 수 있는 한 가지 길입니다.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은 ‘나사로는 웃었다’라는 희곡을 썼습니다.
주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는 사람이 변했습니다.
변한 것 중에 가장 크게 변한 것은 그가 자주 히죽히죽 웃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웃을 일이 아닌데도 그는 웃었습니다.
싸움하는 것을 보고도 웃었고, 지나가는 높은 사람을 보고도 웃었습니다.
심지어 초상집에 가서도 웃었습니다.

그가 웃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죽어 하나님 앞에 갔다 왔습니다.
다시 세상에 와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니 웃음밖에 안 나왔습니다.
땅에서, 세상에서 무언가 이루려고 애를 쓰고 싸우는 것도 우스웠고, 가진 것 좀 있다고 거들먹거리는 모습도 우스웠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모습들이 모두 우습기만 했던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도 그렇게 살았으려니 생각하니 민망해서 웃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온전히 알게 되니, 땅에 속한 것이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가 실없이 웃게 된 이유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이 다른 게 아닙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처럼 사는 것입니다.
하늘에 주소를 둔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고,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손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회개한 자의 삶입니다.
욕심을 따라 산 죄, 세상 풍조를 거슬러 살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만큼은 결단코 범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얼굴을 볼 날이 올 것입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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