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범대, 아나운서, 언론인을 지망했으나 모두 포기하고 4지망으로 정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취직 걱정 없다는 소리에 고등고시를 보았는데 첫 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두 번째 시험에 합격을 하였다. 이렇게 법조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군복무 후 검사생활을 하면서 목사와 장로가 다투는 사건을 담당한 적이 있었다. 서로 다른 주장에 대질을 하게 되었는데 화해가 가능한 사건임에도 화해를 거부하고 다투는 것을 보면서 법대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검사직을 버리고 변호사가 되었다.

이때가 박정희 정권에서 시국사범이 늘어나고 있던 시점이었다. 정권에 미움 받고 싶지도 않았지만 혈혈단신 법정에 서는 이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변호를 맡게 되었다. 1973년 남산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가 열렸는데 끝날 무렵에 정권을 비방하는 문구가 적힌 전단지가 살포된 일이 있었는데 그 일(남산부활절예배사건 / 내란예비음모사건)로 목사들이 대거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성역으로써의 교회가 지켜졌었는데 그 사건을 담당하면서 성역이 깨진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유신시대에 저항운동이 활발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긴급조치 1호를 발효하였다. 이 긴급조치위반자 중에 기독교인, 목사가 많았는데 이 사건의 변호사로 선임이 되었다. 기독교인 변호사들이 많았는데 의외로 모두 거부하여 나에게로 배당되었다. 서슬 퍼런 유신조치에 맞서서 굽히지 않고 싸우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응원을 하고 격려하고 엉터리 같은 재판과 싸우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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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 재건사건으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연루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결단으로 저항운동을 하는데 반해 나는 변호를 하면서도 기독교인이 아니라 어색한 점이 있어 기독교 책을 보고 변호하기로 하였다. 아내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여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단상단하가 때아닌 성경논쟁이 벌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기독교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많은 접촉을 하게 되었다. 자기를 내던지면서 운동을 하던 신앙인들을 보면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생기게 되었다.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 인해 교회를 떠났는데 이제는 그들의 행함 있는 믿음으로 인해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되었다.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때에 NCC에 교회인권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불신자임에도 내가 위원이 되었다. 이때 신자도 아닌데 목사, 장로 소리를 많이 듣기도 하였다. 처 할아버지의 ‘교회에 나가라’는 편지를 열네 통을 받으면서 교회에 나가기로 마음을 먹고 여러 교회를 다녀 보았다. 그렇게 약 30여 개 교회를 다녀보다가 조승혁 목사가 담임하던 회원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75년에는 내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일이 생겼다. 변호사협회 회장에게 들어온 외압과 부당한 구속에 대해 기자실에서 얘기를 했더니만 그것이 기사화되고 그것으로 인해 구속이 되었다. 문제는 예전에 썼던 사형제를 반대하는 부드러운 글로, 사형제를 반대하면 남파간첩들의 사형도 반대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3일간 갇혔다. 그 후에도 또 구속이 되었다. 감옥에서 내가 변호했던 이들도 만났고 인혁당 구속자들 사형 당하던 때도 감옥에 있었다. 감옥생활을 하면서 성경통독을 열심히 하였다. 필기도구가 반입되지 않아 손톱을 길러 손톱으로 눌러 줄을 치면서 성경을 읽었다.

출옥 후 변호사 자격이 박탈되어 삼민사라는 출판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영세한 출판사라 직접 교정을 보게 되었는데 이때 기독교서적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보니 신앙으로써 기독교가 아니라 지식으로써의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식을 통한 믿음도 중요함을 깨닫게 되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피살, 80년에 전두환 일당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자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이 조작되어 이유 없이 끌려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자술서를 쓰는데 종교란에 차마 기독교라는 말을 쓰기에 부끄러웠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기독교라고 썼는데 이것이 내면적인 다짐이 되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주동자들 역시 기독교인들이었다. 일반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법정에서는 당당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인이 되면 저렇게 당당해지는구나 하는 감명을 받았다. 이 재판으로 4년을 받았다. 항소를 하자 남한산성 군형무소로 보내졌다. 이때 루마니아 범브란트 목사의 ‘하나님의 지하운동’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 목사는 14년을 징역을 살았지만 나야 다 합쳐봐야 7년이라는 생각에 옥살이가 어렵지 않았다.

1980년 12월이 되자 성탄절 특사를 받고 싶은 마음에 기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나가지 못하고 이듬해 5월에 석가탄신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친구모임에서 석가탄신일에 주지를 하는 친구의 절에 방문하여 얼떨결에 발언을 하게 되었는데 이 때 성탄절 특사로 못나오고 석가탄신일 특사로 나오게 되었다고 얘기를 했더니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다. 마치 예수 보다 석가가 더 대단하다는 식으로 발언한 것이 돼서 그걸 수습하느라고 농담을 했던 적도 있다.

복권이 되어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시작한 변호사 일이 돈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쉬울 것도 없었다. 시국사건 변호하지 말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시국사건을 맡았다.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감사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도 일을 하였다.

지난 인생을 돌아보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내가 이런 어려운 일을 견뎌내면서 버틴 것이 신기한 일이다.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 혼자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만큼이라도 감리교인이 되고 기독교를 알게 된 것은 좋은 피고인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 피고인들에게 감화가 되어 내가 기독교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좋은 피고인들을 만든 독재자 같은 이에게도 좋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볼 때 큰 악역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잔인하고 포악무도한 이들이지만 한국기독교가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그들도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 많기에 나도 하나님께 잘 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의리의 신학’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참된 믿음은 ‘편안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혼자 편안한 것이 아니다. 함께 편안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고생도 사서 하게 되는 것이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아야 이 세상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하나님과 나와의 직통전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형제 자매와의 관계도 중요하다. 그들을 돌아보고 그들에게 의를 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더욱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있지 않은가. 수직적인 사랑보다도 수평적인 사랑을 더욱 실천하는 것이 더 신앙적이라는 것을 그동안의 삶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이번 예수포럼에는 60여명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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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도 예수살기를 고민합니다.
이름값 하면서 살기를 원하는데 갈 길이 아직 먼 사람...
방현섭 목사입니다. 행복한 하루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