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 정강길칼럼
무신론 진영이 설명하지 못하는 난점에 대하여현대 무신론자들의 비판을 비껴갈 뿐더러 보다 더 설득적인 새로운 유신론
정강길  |  minjung21@paran.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입력 : 2009년 04월 07일 (화) 21:43:04
최종편집 : 2009년 04월 08일 (수) 00:58:48 [조회수 : 3795]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우리는 언뜻 보기에 유신론보다 무신론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기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고전적 유신론>(=초월적 유신론)보다는 나는 오히려 현대의 무신론이 훨씬 더 설득력 있을 뿐더러 훨씬 더 낫다고 보고 있는 입장이다. 고전적 유신론은 초자연주의를 받아들임으로서 반합리주의를 내포하고 있기에 적어도 21세기 현대 자연과학의 세례를 입고 있는 현대인들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기존 기독교는 결국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극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

오늘날에는 무신론에 대한 논의들도 나름대로 발달하여 신관에 대한 논의를 지나 일종의 <삶의 방식>으로서 얘기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무신론을 인정한다하더라도 무신론 역시 설명 못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신론에 대한 일종의 <귀류법적 논증>이기도 한데, 크게 보면 그것은 일단 두 가지로서 얘기될 수 있겠다.

첫째는 이 우주는 어째서 지속적으로 창발적인 새로움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점이며, 둘째는 질서와 혼돈이라는 그 대비의 느낌을 알 수 있는 그 근거 혹은 그 기준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하는 점이다. (* 사실 두 가지 외에 다른 하나가 더 있지만 이것은 좀더 깊은 철학적 논의에 속하기에 여기선 생략하고자 함..)
 
어떻게 해서 이 우주는 매순간마다 과거에 없던 새로움들을 끊임없이 발하고 있는 것인가? 만일 무(無)에서 유(有)가 나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논리적 모순이다. 게다가 대비의 느낌에 대한 그 근거나 기준이 그저 모든 개별자들에게 있다고 볼 경우 그 역시 상대주의로 귀결되는 것이기에 하나마나한 얘기밖에 안된다.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좀더 복잡한 전문적인 철학논의로 들어가기에 여기선 대략 간단하게만 언급해둔다면, 전자는 새로움의 기원에 대한 것이며, 후자는 비교적 느낌의 시원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만일 신은 없고 오로지 이 세계만 있다고 했을 때 이러한 사안들은 무신론 주장의 난점으로서 남아 있는데, 현대 사상가들 가운데서 이 부분을 해결한 사람이 바로 화이트헤드다.
 
그는 자신의 철학에서 신 존재를 미리 전제하고서 논의를 전개해나간 것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그 어떤 'X'라는 존재를 설정할 수밖에 없는 논리적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 'X'를 단지 ‘신’이라고 부른 것뿐이다.
무엇보다 이렇게 설정되어 나온 신은 우리의 경험 현실과도 충돌되지 않는다. 이것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현실적 존재만이 근거가 된다는 <존재론적 원리>ontological principle를 견지해서 나온 것이었다. 결국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신은 모든 가능태들이 거할 수 있는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로 설정된다.
 
그는 말하길, “나는 엄밀한 기술적(descriptive)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면, 신 개념을 나의 체계에서 포함시키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한 그의 대표저서인 Process and Reality『과정과 실재』(이하 PR)에서는 ”<신>God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이 믿기 어려운 사실―존재할 수 없는 것임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PR 350/601, 과학과 근대세계』도 참조). 물론 그렇게 해서 제시된 신은 과거의 주류 기독교의 신 개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 개념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신>의 리차드 도킨슨의 무신론 주장들이 비판하고 공격하는 유신론은 전적으로 기존의 고전적 유신론에 해당하지 백두가 말하는 새로운 유신론에는 해당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다윈의 진화론을 포함하여 현대 자연과학의 모든 성과들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이 새로운 유신론이 바로 백두철학의 유신론이며, 이러한 그의 신관은 <범재신론>에 해당되고 있는 신의 양태다. 나 자신은 기존 기독교의 초월신론과 대비된다는 점에서 <포월신론>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좀더 쉽게 일상적 경험과 관련지어 말해보자.

예를 들면, 나는 내 머리 속에 이전에 없던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을 때 도대체 그것이 어디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물론 새로운 생각도 물리적인 뇌 세포의 활동들에 기반해서 그러한 생각이 나온 것이라고도 보지만 전적으로 그러하진 않다. 만일 단백질 덩어리 활동에만 기반해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은 이전 것들에 대한 반복과 재생산이 될 뿐이기에 자연세계에 온갖 새로운 다양성들이 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에는 <새로움>novelty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엄밀한 지점이 있다.

바로 지금 여기서 정작 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지점은 이미 물리적으로 현실화되기 이전에 해당하는 가능성들 혹은 그때까지의 현실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온갖 상상적 개념들을 두고서 하는 얘기다. (물론 이것들도 중에서도 나중에 현실화되는 것들도 있고 안되는 것들도 있을 것이리라..)

이를 테면, 세계 안에 최초로 출현한 핸드폰을 떠올려보자. 그것은 분명히 처음엔 그 어떤 아이디어(idea)에서 나온 것이다. 이 아이디어를 좀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낯선 정보에 해당한다. 즉, 그때까지의 현실 세계가 현실화하지 못했던 낯선 정보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우연적으로 새롭고도 창발적으로 세계 안에 생겨나고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화되기 이전에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디어들 혹은 정보들의 저장고가 있어야만 한다. 이 아이디어 혹은 정보들은 가능태로 존재하는 것들이지 현실태로 존재하는 것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새로움>novelty이란 것도 바로 이 아이디어가 현실 세계 안에 현실화됨으로써 일어나는 사태를 두고 우리가 일컫는 표현인 것이다.

관념론이 아닌 <경험론의 원리>는 아무리 아이디어나 정보들이 어디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찌되었든 세계 안의 현실태를 통해서만이 확인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하며 또한 그러한 현실태만이 우리한테 현실적 사실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때 이 경험론의 원리를 충실히 따른다고 할 경우 우리 안에는 또 다른 현실적 존재 하나를 새로이 상정할 수 밖에 없다. 즉, 세계 안에 실현을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아이디어들(혹은 그때까지도 현실화되지 못한 정보들)을 충분히 저장하고 있는 그러한 현실태로서의 존재말이다.

그런데 이 현실태만큼은 변화하는 시간 세계 안에 있지 않다. 왜냐하면 변화하는 시간 세계 안에 없는 아이디어(혹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는 현실태이기에 시간적인 현실태라면 당연히 이러한 사태와는 모순이 되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 세계에는 없는 <비시긴적인 현실태>가 하나 더 필요될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바로 그 현실태가 백두에게선 바로 신God 존재에 해당한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내가 그 어떤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다고 할 경우 겉으로 봤을 땐 나는 그 일이 내가 한 것으로 보이긴 해도 도무지 어떤 점에서 나로선 내 능력 밖의 일로 여겨진다. 나는 그 순간이야말로 내게 있어 말할 수 없는 신비를 겪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전에는 결코 찾아볼 수 없던 새롭게 가능한 사태를 떠올렸을 경우 그때의 그 가능한 형태 자체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우리가 일상적 경험에서도 흔히 겪는 이 같은 새로움의 출현은 인간 사태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이미 빅뱅부터 지금 현재까지 겪어왔던 엄청난 우주적 변화들을 생각해보라. 그동안 이 우주에는 무수한 새로움들이 출현했었고 또한 소멸했으며 또한 지금 이 순간과 앞으로도 거듭거듭 생경한 새로움들이 우리 앞에 출현하고 있다. 이때 가능한 형태 그 자체는 우리가 결국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지는 철저히 우리 자신의 선택과 몫에 달려 있다.

최종적인 새로움은 바로 우리 자신의 주체적 참여까지 내포한다. God+Others은 결국 나(I) 자신의 주체적 선택을 통해서 비로소 세계 안에 확인된다. 바로 그래서 모든 삼라만상은 결국 GIO(God+I+Others)의 사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P.S -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무신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썼지만, 솔직히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낡은 유신론만큼 도킨슨나 히친스 같은 무신론자들을 그다지 비판하고 싶진 않다. 왜냐하면 현재로선 이러한 무신론자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정신나간 짓들을 벌이는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종교 근본주의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그나마 이성적이라고 보는 기존의 무신론자들에 비하면 훨씬 더 비이성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전근대적인 중세를 살고 있는 근본주의자들인 것이다.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무신론자들보다도 이러한 유신론자들이야말로 
여전히 더욱 시급한 변혁의 대상이 아닐 수 없기에..!!!

[관련기사]

정강길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를 추천하시면 "금주의 좋은 기사" 랭킹에 반영됩니다   추천수 : 3113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의견나누기(0개)
0 / 최대 22400바이트 (한글 11200자)
- 금지어 사용시 댓글이 제한 될 수 있습니다.
* [댓글운영원칙] 욕설, 반말, 인신공격, 저주 등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지 않은 글과 도배성, 광고성, 허위성 댓글은 통보 없이 삭제합니다.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20-012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2가 35 기사연빌딩 401호 ☎ 02-393-4002(팩스 겸용)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심자득
제호 : 당당뉴스  |  등록번호 : 서울아00390  |  등록연월일 : 2007.7.2  |  발행인 겸 편집인 심자득(010-5246-1339)
Copyright © 2005 당당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dangdang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