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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태 목사님의 칼럼을 읽고신관 정립을 위해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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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3월 05일 (목) 08:26:00
최종편집 : 2009년 03월 05일 (목) 09:41:22 [조회수 :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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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다른 복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흔히 다른 복음을 이단으로 연결시키지만 본문 자체에서 말하는 바는 그와 다릅니다. 바울 사도 당대의 교회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교회에게 율법 준수 요구가 다른 복음입니다.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을 하였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그 언약의 한 부분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방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현재적인 구원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 믿음입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몽학선생이기도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에게는 다릅니다. 그 당대에 새 언약의 백성들은 두 부류로 구분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 아래에 있다가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새 언약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전자는 율법이 유효하였지만 후자는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전자는 율법을 지켰습니다. 안식일도 지켰습니다. 반면에 후자는 율법이 아예 요구되지 않았습니다.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 후 첫날을 지냈습니다.

바울 사도 당대에 전자에 속한 어떤 이들이 후자에 속한 이들에게 율법 준수를 가르쳤습니다. 일반적으로 율법을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분하는데 준수가 요구된 내용은 도덕법에 해당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르침이 수용되어 따르고 있는 상황에서 바른 사도는 그것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도덕법이라고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이 아니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요구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구분되는 다른 것입니다. 전자는 십계명을 포함한 옛 언약의 율법 자체를 가리킵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옛 언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곧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율법입니다. 다르게는 성령의 율법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성령의 법(롬 8:2)이라고 번역되었는데, 법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노모스로서 로마서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전체에서 율법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를 지켜야 한다면 그것을 율법으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엇인가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은 없다고 오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지켜야만 한다는 것과 배치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두 표현은 관점의 차이이지 같은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지켜야 한다는 것의 내용이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면 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심으로 산다는 것은 현재적으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삶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의 율법을 준수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자신도 사랑하여 그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21). 예수님의 계명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자신이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것과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정화인 하나님 사랑과 내 몸같이 이웃 사랑을 완전케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케 된 율법이 새 언약의 교회에게 요구된 바입니다. 그 요구를 지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심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곧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자기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오직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그렇게 사셨던 것과 같습니다.  

율법과 무관한 새 언약의 백성들을 율법 아래로 이끄는 것을 바울 사도는 다른 복음이라고 정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를 따라 이미 지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집트로 되돌아가겠다고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언약의 시계추를 사람들이 임의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쳐지는 내용 중에 기복신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복의 내용 중에는 물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복신앙은 성경 전체에서 전혀 없는 내용이 아닙니다. 율법의 내용에는 기복신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약속하셨는데, 거기에는 건강이나 물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과율입니다. 조건이 충족되면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율법에는 그러한 인과율이 없습니다. 자유하게 온전한 율법을 지키면 건강이나 물질 등을 복으로 준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자유하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생명의 교제를 누리게 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건강과 물질을 주시는데, 그것은 인과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따른 행하심일 뿐입니다.

기복신앙은 새 언약의 교회를 이전 언약에서의 원리 아래로 되돌리는 것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의 근원적인 이유는 사람이 자기 임의로 하나님을 규정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교회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은 반드시 지키라고 하는 분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교회에게 율법 준수로 이어졌고 다른 복음으로 정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준수하면 눈에 보이는 무엇으로 되갚아주는 분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교회에 기복신앙을 끌어들였고 그것은 다른 복음으로 정죄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인간적인 필요를 앞세워서 하나님을 규정하고 그러한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에 따른 여러 생각들을 펼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류상태 목사님의 글은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제가 초월자의 개념을 실존자와는 구별된 ‘보다 상위의 존재’ 뿐 아니라 ‘법칙, 원리’까지 포함하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계신 분들이 불편을 느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도 신의 속성을 인격체 안에만 가두지 말고 초인격적 속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원화된 세계에서 이웃종교와의 원만한 대화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원화된 세계에서 이웃 종교와의 대화,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길이라는 필요를 앞세워 ‘법칙, 원리’까지 포함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해를 인격체 안에만 가두는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요구된 바가 아닙니다. 사람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규정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규정하면 이웃 종교와 원만한 대화가 이루어지고 갈등을 유발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선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류상태 목사님의 여러 글들에서 실천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하며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그렇지만 위에서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히 선을 그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의 필요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우리에게 알리신 바를 넘어서면 그것은 아무리 좋게 설명되어도 다른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선을 넘지 않고도 이웃 종교와 원만하게 대화하며 갈등을 유발하지 않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쉽지는 않지만 분명히 그 길은 존재합니다. 이제까지 되지 않은 것은 우리 편에서 잘못된 접근을 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한 우리의 잘못을 고쳐야지 하나님을 잘못된 방식으로 규정하려고 해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흔히 진보로 분류되는 분들이 제시하는 글들에서 느끼게 되는 위험성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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