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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목회세미나] 대속론의 문제와 예수의 구원 / 김준우교수 특강
방현섭  |  raceer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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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2월 11일 (수) 02:51:01
최종편집 : 2009년 02월 16일 (월) 18:52:19 [조회수 : 5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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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해되지 않았던 대속론의 문제 : 오늘의 현실 속에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왔던 구원론, 대속론이라는 것이, 폭력과 그 희생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교권을 강화시키는 기독교가 있고, 교권을 강화시키는 종교에 맞서서 인간을 해방시키는데 앞장서는 기독교가 있다. 예수를 처형하는데 앞장 선 것이 교권을 강화하는 성전 중심의 종교이다. 그 싸움에서 처형당한 예수의 무덤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교권으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종교가 되었다. 결국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근본적으로 교권을 강화시키는 교회주의같은 시스템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기독교를 찾고 만들어 내는 것에 의미가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것은 이러한 교권을 강화시키는 기독교가 주를 이루고, 주일성수, 경전, 교리 등을 절대화 시키는 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종교 밖의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 증오심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두 개의 기독교가 늘 갈등상황에 있는데, 위기상황-경제위기 같은 상황에서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쉽게 교권강화체제로 기울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결국 교회의 교리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인 것이 되어버리고, 예수의 인간성과 능동성은 약화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대속론도 예수가 무고한 고통에 대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모습으로 비쳐져 폭력은 불가피하고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것으로 이해되었다. 구원, 죄, 속죄의 개념도 철저히 개인적인 의미로 축소되었다.

비유를 보면 예수의 구원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엎게 한다. 예수의 고난은 수동적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다. 예수는 행동가였고 운동가였던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이다. 기존의 믿음은 예수의 저항정신이 빠져 있다. 미래의 희망을 현재의 사랑정신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대속론에서도 반드시 예수의 사랑정신을 바탕으로 한 저항정신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이 기사는 겨자씨와누룩의 안명준 기자가 녹취한 것입니다.

대속론의 문제와 예수의 구원 - 김준우 박사(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인간이 책임을 다할 때 은총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은총만 있고 책임이 부족한 것이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아닌가.


경제위기, 환경위기 등으로 인해서 용산참사처럼 무고한 희생들이 이어질텐데, 이런 현실 속에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왔던 구원론, 대속론이라는 것이 과연 폭력들, 희생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는 한 개가 아니다. 두 개의 기독교가 있다. 교권을 강화시키는 종교, 교권을 강화시키는데 맞서서 인간을 해방시키는데 애를 쓰는 종교가 있다. 예수님을 처형하는데 앞장선, 교권을 강화하는 그런 종교가 예루살렘 성전 종교가 결국은 예수를 처형하는데 앞장 선 것이고, 예수는 그것에 맞서 싸우다가 순교한 것인데, 예수의 무덤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인류역사상 가장 강고한 교권강화체제, 교권을 강화시키는 그런 종교로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 힘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결국 억압적이고 폭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독교와 이것에 맞서서 교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생명을 살리는 그런 종교, 그런 기독교, 이런 두 종교 사이에 갈등과 마찰은 계속되고 있다.

결국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교권을 강화시키는 교회주의, 이런 시스템에 대해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기독교를 찾아내야 되고, 그것을 만들어 나가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는 의미가 있다. 종교를 강화시키고 교권을 강화시키는 그런 종교의 맹점은 그 자체를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주일날, 성직자, 교리들, 거룩한 날, 장소, 경전, 이런 모든 것들을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수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교회나 성경이나 교리나 예배나 제사장들이나 주일이라든가 신학이라든가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들, 수단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것 자체를 목적으로 삼을 정도가 되면 결국은 아주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교권을 강화시키는 예루살렘 성전체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욕을 먹고 비난을 받는 가장 큰 이유는 교권을 강화시키는 교회가 대세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고약스런 문제가 되고, 가장 불행한 것은 종교가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주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멸시하여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작동을 한다는 것이며, 종교가 사탄의 도구가 되는 이유는 자신들의 목적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대속론의 문제가 뭐고 대속론 교리가 낳은 예수 체험은 뭐고 예수의 구원은 뭔가라는 것을 나름대로 생각을 해보았는데 결국은 두 개의 기독교가 늘 갈등관계에 있는데 내가 염려하는 것은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 단순한 교리들 교권강화체제 이런 쪽으로 기울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제일 우려하는 상황이다. IMF가 터졌을 때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반성하고 새로운 배움들이 있었어야 하는데 잘 되지 않고 그 이후 끊임없이 탐욕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기제가 되어 또 다른 경제위기 앞에서 사람들이 더욱 불안해지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한다.

결론적으로 말을 하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점점 더 커지고 인간의 노력이라든가 인간의 싸움 같은 것들은 굉장히 약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교리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되고 예수의 인간성 예수의 능동성 이런 것들은 아주 약화되어 버리는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원죄의 교리든가, 만족설이든가 이런 교리들이 생겨난 과정들이 당시의 어떤 특수한 역사적 상황들이 없었더라면 그런 교리들이 생겨났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교리를 절대화시킨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기독교에서 구원론의 핵심으로 가르친 것이 대속론인데 대속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적극적인 요소들도 있지만 문제들도 많이 가지고 있다. 문제는 예수가 무고한 고통과 죽음에 대해서 아주 자발적으로 복종을 하는 그런 모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하나님이 악마하고 천상에서 거래를 해서 예수를 줄테니 인간의 영혼을 풀어내라는 식의 인간의 역사현실을 떠난 추상적인 천상에서의 거래로 이 세상에서 불의가 외면되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예수도 하나님의 뜻을 행했지만, 대속론에 따르면 예수를 죽인 자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한 것이 되는, 그러니까 폭력이 불가피하고 하나님이 만들어낸 폭력이 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사죄의 복음, 개인적인 사죄의 복음으로 축소가 되고 죄라는 것도 예전에는 우주적인 차원의 의미가 있던 죄가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의 죄로 축소가 되는 것이 대속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데, 어떤 면으로 보면 구원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훨씬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을 자기중심적인, 때로는 아주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영혼구원이 되어버리니까, 영혼구원이 기독교의 모든 변화가 자기의 변화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영혼구원이라는 것으로 축소되었다는 것은 구원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차원과 정치경제적인 차원 보다 폭넓은 차원들이 외면되고 심리적인 차원에 국한시켜버리는 위험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 하나,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여 예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는 명제, 그 진리를 내가 동의해야 예수를 주로 영접하는 것이 되고, 그 동의하는 것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이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저는 이 문제에 굉장히 부대꼈었다.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예수가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그 명제를 믿는 것이 믿음이다 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구원이라는 것은, 비유를 보면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특히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다. 너 죄인이야, 너 쓸모없는 놈이야 이렇게 간주되었던 사람이, 내가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이런 나를 정말로 사랑하시는구나. 자격있다고 외치는 인사이더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런 것이 아니구나. 결국 이것은 눈을 뜨게 되는 것, 보는 것, 믿음이란 눈을 뜨게 되는 것, 예수의 구원의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눈을 뜨게 되는 것이 먼저고, 스스로 별볼일 없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끝까지 나에게서 희망을 가지고 부활하신 다음에 나 같으면 두 번 다시 돌아보지도 않을 나를 찾아오셔서 생선 구워놓고 기다리시는, 나에 대한 희망을 마지막까지 가지고 계시는 분. 먼저 눈을 뜨고 나니까 그 분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그래서 그 분에게 충성을 하게 되고. 이처럼 구원의 순서를 교리같은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오해를 했는데, 그런게 아니다.

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체험하며 살다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면서 구원의 체험이 바뀌게 되었을까 라는 물음이 있는데 답을 얻기가 힘들었다. 예수는 절대로 수동적으로 고난을 당한, 하나님이 보내서 너는 십자가에서 죽어라고 하여 죽은 희생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이세상에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눈부릅뜨고 맞서 싸웠던 행동가였고 저항자였다. 이것이 먼저였다.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 사이에서 큰 느낌의 차이는 예수의 저항정신이 신앙의 그리스도에 있어서 이것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신앙의 그리스도에서 화해자 대속자, 여기에 강조를 할 때 지금 빠지는 것이 무엇이냐면 예수의 저항정신이 제대로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는 미래의 희망을 기다렸던 것이 아니고 미래의 희망을 현재의 사랑으로 바꿨다.

그래서 저나름대로 우리나라의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상생, 미륵하생을 이야기하게 되면,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강권에 의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믿고 금식하면서 광야에서 준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세례 요한이 믿었던 것은 미륵하생 신앙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세례 요한이 처형당할 때까지도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한 예수는 미륵상생 신앙으로,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기다리신다고 가르쳤는데, 이것이 요한복음 기자에 와서는 그동안 역사적인 어떤 비극들을 겪으면서, 뼈저리게 무력감을 느끼면 느낄수록 미륵하생신앙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 당연하였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제가 염려하는 것은 오늘날의 경제위기라는 것이 장기화되고 환경위기라는 것이 장기화될수록 사람들이, 예전의 예수전 연구라는 것이 1차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그러한 비극을 경험하면서 신정통주의로 되돌아갔던 것처럼, 오늘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눈부릅뜨고 저항해야 하고 맞서 싸워야 하고, 해결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더 철저하게 ‘저항과 묵상’을 해야한다.

이는 1960년대에 미국에서 나올 수 있었던 훌륭한 인물들 케네디 대통령, 마틴 루터 킹 목사, 토마스 머튼, 이 사람들이 비명횡사하고 난 후 1970년대 이후의 혼란 속에서 나온 것이 ‘저항과 묵상’이다. 저항을 어떻게 계속할 것이냐가 결국은 음과 양처럼, 이것은 두 개가 아니고 한 개라는 것이다. 결국은 위기의 시대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기도를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그만큼 더 철저하게 저항도 많이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어떤 위기들 속에서 사람들이 쉽게 도피처를 찾는 것이 대속신앙이 도피처로의 가능성이 되지 않을까하는 염려가 크다.

예수님의 구원의 방식이란 새로운 깨달음이 우선되어야 하고 ‘저항과 묵상’을 하나로 묶어서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한다....(녹취 안명준)


특강 Ⅱ
대속론의 문제와 예수의 구원
                                        김 준 우 박사 한국기독교연구소 소장

문제: “예수의 복음”(하나님 나라 복음)은 왜, 어떻게, “예수에 관한 복음”(대속론)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순교자” 예수와 “대속주” 예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 것인가? 예수살기를 위해서 대속론이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고, 어떻게 하나님 나라 복음의 에너지가 될 수 있는가?

1. 올해 경제성장율이 -4%까지 떨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의 해고와 정규직의 고용불안, 자영업자의 폐업, 실업자의 증가, 가족 부양을 책임지지 못하게 된 이들의 죄의식과 스트레스로 인한 가정폭력, 이혼, 노숙자들과 범죄, 자살의 증가를 예상할 수 있다. “시장전체주의” 사회의 반인간성과 반사회성에 적응하면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칠 수밖에 없는 교인들이 경제위기 앞에서 이처럼 실직과 도산이라는 “거세공포”로 인해 더욱 자기보호를 위해 폐쇄적인 삶을 살기 쉬운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 창조성, 연대성을 증진시킬 것인가?

2. 대속론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가?
“한 분 하나님”을 사랑한 예수는 온갖 장벽과 차별을 철폐했는데, 대속론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개인적인 사죄의 복음으로 축소시키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보다는 믿음을 통한 개인의 영혼구원에 집착하게 만들어, 우월감과 증오심, 폭력을 조장하며, 피해자의 고통을 신이 내린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3. 대속론 교리를 낳은 예수 체험은 애당초 무엇이었는가?

4. 이 시대의 목회자에게 예수의 구원은 무엇을 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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