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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의 피가 아직은 깨지않은듯 평온한 마을 오웬 사운드인디언 원주민의 존재는 보이지 않아...., 난 성이 김, 당신은 이름이 김 , 방앗간이 있던 잉글리스 폭포, 캐나다 깊숙이까지 파고든 중국산 싼 물건들, 어디 가도 묵을 방이 있음에 감사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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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2월 04일 (수) 20:34:37
최종편집 : 2009년 02월 04일 (수) 21:26:58 [조회수 : 4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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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인디언의 피가 아직은 깨지않은듯 평온한 마을 오웬 사운드  

인디언 원주민의 존재는 보이지 않아....  

“자, 지금부터 내가 사는 오웬 사운드 관광을 시작해 보죠.”

오웬 사운드에서는 이종희 선생님이 모텔방을 하나 잡아 놓았습니다. 짐을 풀어 놓고 하루 일정으로 관광을 하기로 했습니다. 이종희 선생님이 운전을 하고 가는 길에 이야기하고, 도착해서는 돌아보고, 가면서 또 이야기하고, 먼 길은 나 혼자 내려서 구경하고 사진 찍고 돌아오고, 20년 동안 쌓인 이야기를 시루떡처럼 관광의 사이사이로 켜켜이 풀어내었습니다.

   
▲ 휴런호에 접한 항구

오웬 사운드는 작은 도시였습니다. 마을을 들어서는 입구에 22,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고 소개를 했습니다. 캐나다는 인구가 적어서인지 어느 동네를 가나 그 동네의 인구를 명기해 놓아서, 인구로 그 동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 놓았습니다. 오웬 사운드는 그만한 인구로 캐나다에서는 작은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마을 가운데에 있는 박물관에는 과거에는 엄청 큰 도시였음을 말해 주었습니다. 육지로는 남쪽에서 철도가 들어오고, 호수에 접해 있어서 북쪽에서 큰 배가 드나들고 있습니다. 북쪽의 휴런호와 접해 있어서, 남쪽의 온타리오호를 기차로 연결하여 토론토까지 이어지는 기점인 셈입니다. 지금 기차는 없고, 옛날 역 자리에 박물관만 하나 남아 있습니다.

   
▲ 박물관에는 인디언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항구에는 주로 레져용 배가 정박해 있었습니다. 돛이 높은 요트가 주를 이루었는데, 이는 바람이 많지만 파도는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시내는 자그마니 남쪽으로는 언덕을 두고 북쪽으로는 호수를 둔 언덕 아래 있었습니다.

“저 붉은 벽돌로 된 건물들이 400년이 되었데요. 개척시대에 서구인들이 들어와서 지었던 건물들이지요. 고색을 드러나잖아요?

“저 건물 봐요. 저것도 이민 초창기에 지은 4층 벽돌건물이예요.”

이런 집들을 수리하는 모습도 불 수 있었습니다. 수리를 포기하고 풀숲이 쌓여 허물어지는 집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시내 중심이라는 10번 도로변에는 초창기에 지었다는 4층 벽돌건물이 아직도 호텔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400년 전에는 이 땅에 역사가 없었을까?’
박물관에 가도 이전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 일 없이 비어있던 땅일까?’
겉으로는 아무 일 없었는 듯 평온했습니다.

 

   
▲ 지은지 400면이 된 건물

엇그제 오웬 사운드로 오는 버스 안에서 앞자리에 앉아 열심히 구경을 하다가 옆에 앉은 여자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여자는 쉴새없이 3시간은 떠들어 대었고, 나는 ‘어허 어허’하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학원에서 영어 공부하고 실습한다고 치니 들을만했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인데, 아이들 다 키우고 일을 시작했답니다. 축제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일이랍니다.

“오웬 사운드 휴런 호수가에서 인디언 축제를 오늘 저녁부터 내일 오후 2시까지 열어요. 내용은 토착 인디언의 생활상을 소개하고, 여러 종족 인디언의 드럼을 연주하는 경연을 벌일 거예요. 꼭 구경 오세요. 당신의 이번 여행에 특별한 추억이 될 것이 틀림없어요.”

축제 기획안과 장소와 시간, 자기 이름을 적은 메모를 건네주었습니다. 꼭 오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그러나 오는 날은 바로 캠프에 갔고, 어제는 교회를 갔다가 피곤해서 쉬었습니다. 갈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인디언 축제가 끝나고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이 땅의 인디언이 모두 그렇게 사라진 듯이 흔적도 없이 평온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선가 뿌린 피들이 땅을 솟구쳐 오르고 있을 것입니다. 이미 축제라는 이름으로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난 성이 김, 당신은 이름이 김  

“여기 내려서, 저 오솔길로 걸어 올라오면서 구경하세요.

시내를 지나 공원에 들렀습니다. 소아마비로 어릴 때부터 한 쪽 다리를 저는 이종희 선생님은 국가에서 장애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마을 한인교회에서 전도사 일도 했습니다. 함께 걷기가 어렵기 때문에 차로 올라가고, 나는 걸어서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고 따라 올라갔습니다.

해리슨 공원 Harison Park. 공원 입구에 나를 내려 주면서, 이종희 선생님은 차를 운전해 주차장에 두었습니다. 오웬 사운드에 흔한 공원 중에 하나입니다. 아니, 캐나다 어디를 가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공원 중에 평범한 공원이었습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최대한 이용해서 사람이 쉴 수 있도록 꾸몄습니다. 물길을 그대로 두고 사람이 드나들기 쉽게 발판만 놓았고, 나무도 그대로 두고 마당만 넓게 잔디를 깔았고, 차가 다녀도 파이지 않도록 포장을 했을 뿐이고, 숲 가까이에는 잔자갈을 깔아 산책로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깎고, 부수고, 새로 만들어서 조성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자연은 무궁무진했고, 사람은 손대지 않은 땅만큼이나 여유로워보였습니다.

공원 위쪽에는 알비 R.V. 를 가지고 와서 며칠이고 캠프를 할 수 있는 무료 캠프장이 있었습니다. 엊그제 기족들과 함께 캠프할 때와 비슷한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공원에서는 밥을 해 먹을 수도 있고, 싸 온 것을 펼쳐놓고 먹을 수도 있고, 손쉽게 돈 주고 사 먹기도 편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 햄버거와 샌드위치를 사 먹었습니다. 나는 이미 두 달 가까이 외국에서 살았으니까 주변에 있는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한인교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보고 한국말로 조용히 하라면 말을 안 들어도 영어로 조용히 하라면 말을 잘 듣는다더니, 영어로 듣고 영어로 말을 하니까, 먹는 것도 영어식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이즈 유어 네임 킴? Is your name Kim? 당신 이름이 김이야?”

식당에서 우리 식탁에 서빙을 하는 여자의 명찰에 이름을 김 Kim 이라고 썼습니다. 한국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지만, 그냥 자기 이름이 김 Kim 이랍니다.

“난 성이 김 Kim 이고, 당신은 이름이 김 Kim 이로군."

이름 하나가 같은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 문화가 캐나다 현지인 깊숙이까지 스며들었다는 것입니다. 

 

방앗간이 있던 잉글리스 폭포  

배 불리 먹고, 또 캐나다에 처음 와서 고생한 이야기 다음에, 캘거리에서 공부한 이후에 생활의 기반을 잡으면서부터 이야기를 하면서, 잉글리스 폭포 Inglis Falls로 향했습니다. 이 폭포는 찾는 사람이 많은지 주차료도 받았습니다. 이종희 선생님은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폭포계곡 양쪽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나무도 보고, 풀도 살피고, 사진도 찍고, 놀라지도 않는 담비와 토끼에게 손짓도 하고, 폭포 주변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폭포 옆에는 떨어지는 물을 이용해 방앗간으로 쓰던 건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싯누런 나무 썩은 물이 쉴 새 없이 흘러 내렸습니다. 부서지면서 흩어지는 포말은 그래도 흰색이 났습니다. 포말 위로 날아 바람따라 흩어지는 물안개는 희미하지만 나이아가라 폭포를 연상하게 했습니다. 높은 산이 없이 낮은 구릉으로만 되어있는 자연 때문에 이런 작은 산이나마 무척이나 좋은가 봅니다. 더욱이 폭포가 있으니 여기는 더욱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폭포 구석구석을 누빈 흔적이 바위 위에 밴들밴들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 잉글리스 폭포

우리나라 폭포는 산이 높고 많은 만큼 그 수도 많지만, 물의 양은 적습니다. 캐나다 폭포는 산이 많지 않아 수는 적지만, 폭포가 있다하면 지천으로 널린 호수와 호수를 연결하는 물길이라서 물의 양이 엄청납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그리 넓지 않아 높긴 하지만 좁은 폭포가 많습니다. 캐나다 폭포는 호수와 호수를 연결하는 폭포라 그리 높지 않지만, 댐을 넘어 흐르는 것처럼 장관입니다.

우리나라 폭포는 대부분 장마 때는 철철 넘치다가 갈수기가 되면 말라붙습니다. 캐나다의 폭포는 사시사철 나무뿌리를 잠갔던 물이 흘러 탁한 것이 변함없이 넘쳐흐릅니다.

폭포 하나만 비교해 보아도 환경을 이해할 수 있고, 그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품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빨리빨리’와 ‘천하태평’.  

 

캐나다 깊숙이까지 파고든 중국산 싼 물건들  

폭포에서 내려와 상가들을 둘러보았습니다. 홈 디폿(Home Depot)은 건축에 관한한 작은 못에서 크게는 벽체까지 없는 것이 없는, 뉴욕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캐나다를 알려면 캐나디언 마켓 Canadian Market 에 가 보세요.”

캐나디언 마켓에는 캐나다인의 특색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북극에 가까운 만큼 겨울 용품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아래 위가 붙은 통옷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람들어갈 구멍이 없고, 눈에 잘 젖지도 않게 생겼고, 웬만하면 찢어지지도 않게 튼튼하게 생겼습니다. 두툼한 겨울 잠바들은 꼴이고 모양이고 따지지 않고 따뜻하면 그만이라는 듯 겨울이 춥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두지도에서 바닷물 적셔가며 배를 건너다니려면 가죽 장갑이 있어야 겠구나.’

생각하고, 부드러운 사슴털로 만든 카나다 사람들 장갑을 산사고 샀습니다. 내 장갑만 사면 아내가 서운해 할 것 같아서 여자용은 고양이 가죽으로 뒤적여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고양이가죽 장갑이 중국산이었습니다. 그렇게 멋지게 빠졌고, 부드럽고, 따뜻해 보이는 것이 중국산이었습니다. 내가 산 것도 꺼내서 잔글씨를 눈 찌푸리고 읽어 보았더니, 이것도 역시 중국산입니다. 점원에게 물었습니다,

   
▲ 카나다인의 방한복

“우리나라가 중국과 이웃인데, 이웃 것을 멀리 지구 반대편에서 사고 말았어요. 카나다인이 카나디안 상점에서 중국산을 팔아요? 그럼, 카나다인의 정체성을 내어 주는 꼴이 아니냐고 뭡니까?”

“어차피 세계는 좁아져서 경제성 있는 상품이 어디고 시장을 점유하게 되어 있잖아요.”

하고 태연했습니다. 물건만 팔아서 장사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1달러 상점은 최근 들어 성공한 브랜드 중 하나예요. 들어가 보세요.”

1달러 상점에는 모든 상품이 1달러였습니다. 뉴욕에도 있었는데,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상품이 중국산이었습니다. 뉴욕에도 다를 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과거에는 소련을 미워하더니, 지금은 중국을 미워합니다. 자기의 경쟁상대가 되면 미워하고, 경쟁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미워할 가치도 없다는 듯 잊어버립니다. 중국을 미워하면 미워하는 것만큼 두려운 존재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럴만도 하게 생겼습니다. 도처에서 중국 상품들이 없는 곳이 없고, 가격이 싸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고 있었습니다.


어디가도 묵을 방이 있음에 감사
  

저녁은 이종희 선생님의 집에서 먹었습니다. 점심을 잘 먹은 터라, 간단하게 칼국수를 끓여 먹었습니다. 칼국수보다 더 긴 이야기를 우리는 이어 갔습니다. 마지막 이야기는 내가 했습니다.

“이 집에 와보니 소파 의자도 두 개, 식탁의자도 두 개, 침대도 더블로 넓어, 방도 거실과 침실로 두 개, 다 두갠데 사람만 하나네요. 이제 50대 중반이지만 늙은 신랑 하나 들이면 어떻겠어요.”

하고 운을 떼었습니다.

“지금에야 무슨, 돈을 벌어 오라고 닦달하지 않아도 살게 되었으니, 자식 새끼 둘 생각도 하지 말고, 오롯이 둘이만 행복하게 여생을 보낼 친구 하나 물색해 볼 생각이 없으세요?”

“혼자 평생을 살다보니 못된 버릇만 늘어서 안 돼요. 난 남의 집에서는 통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초대를 받아서 가도, 12시건, 새벽 두 세 시건, 집으로 와서 자야 해요. 내 집이라 해도 누가 옆에 있으면 또 잠을 못 자요. 그래서 혼자 조용히 살면서, 하는 일이나 충실하고 싶어요.”

낮에 종일 돌아 다녀서 피곤이 몰려와 어제 묵었던 모텔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침에 어지러이 흩어 놓았던 그대로 눈에 익은 물건들이 나를 맞아 주었습니다. 두 달여 여행을 다니면서 어디고 내 방이라고 내어 주어서 참 고맙기 그지없었습니다.

시애틀에서 김목사는 아들이 쓰던 방을 내어 주었습니다. 뉴욕에서 사촌 이목사도 이사하기 전에도 독방을 주었고, 이사 후에도 넓은 방을 내어 주었습니다. 랄리 김목사도 이틀을 자는데 푹신한 침대의 넓은 방을 선뜻 내 주었습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아니면 무슨 친구냐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형제가 더 힘들게 하는 것이 가장 속상했다고 술회하며, 당분간 쉬는 나를 위로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보였습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지금도 이종희 선생님이 모텔을 일부러 잡아 주어서 내 물건을 흩어놓고 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때는 밤이면 잠 잘 곳이 없어서 하늘에 별을 쳐다보고 갈 길을 물어야 하는 때가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학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학습지를 돌리던 직장에서는 공부를 할 수가 없어서 나왔습니다. 신문을 돌리던 경향신문 서대문지국에서는 일주일 병영훈련을 다녀온 후로는 다른 사람이 충원되어 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병영훈련은 유신정국이 막바지로 치닫는 1978년에도, 학생통제 수단으로 사용하던 학도호국단에서 수도권 대학에서는 남한산성 인근 부대로 보냈습니다. 병영훈련 중에 밥 주고, 재워 주고, 놀이를 주던 생활이 끝나고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독서실로 갔습니다. 독서실이란 공부할 때는 책상에서 하다가, 잠잘 때는 바로 그 책상 밑에서 이불을 덮고 자는 것입니다. 세면은 화장실에서 하고, 밥은 나가서 해결을 해야 합니다. 규모가 큰 독서실은 주변 식당과 협정을 맺어 식권을 발행해 하기도 합니다. 영천동 시장 건너편, 독립문 사거리에 있는 독서실은 규모가 작아 잠만 잤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갔다가 내 자리에 책가방을 놓고 밥을 사 먹고 돌아와 보니 책가방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책상위에 두고 갔는데, 없어졌습니다.

“여기, 여기 내 가방 못 보셨어요?”

“못 봤는데.

사무실 총무에게 급히 달려가 물어봐도 모르겠답니다. 여러 사람이 왔다갔다하는데, 누구라도 자연스레 들고 가면 그의 것이려니 하지, 의심하는 사람은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독서실을 온통 다 뒤지며 찾아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착각하고 바꾸어 갔나 하고 비슷한 가방을 찾아도 그런 가방은 없었습니다. 혹시 누가 잘못 가지고 간 줄 알고 돌려주러 올지를 기다려도 한번 없어진 가방은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그 가방에는 돈은 없었지만 책이란 책은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보는 교재는 물론, 몇 권 째 쓰는 일기장이 다 들어 있습니다. 책이야 다시 사면되고, 못 사면 도서관에서 빌려도 되지만, 쓴 일기장은 되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일기는 내 생활이 힘들고 아플 때면 더 큰 위로가 되는 친구였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일기쓰기 검사를 할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기쓰기 검사는 학년이 시작되는 시기에 으레 한번 씩 하는 담임선생님의 종례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일기는 자취를 하면서 힘이 들면 만나는 내 유일한 친구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면서도 일기만은 계속 썼습니다. 일기의 이름을 케니 Keny 라고 부르면서, 이차대전 때 안네가 독일군을 피해서 쓴 일기인 키지를 흉내 내기도 했습니다.

아무 연고 없이 고학을 하면서 눈물로 쓴 일기를 몽땅 잃어버렸으니,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친근해지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어버렸으니, 며칠 동안을 새 일기장을 사서 돌아오라고 타령을 하며 보냈습니다. 독서실 기일이 다 차도록 일기장은 돌아오지 않았고, 내가 독서실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머리 누일 데가 없었습니다. 방학을 하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 방에서 잠을 자보지 못했습니다. 야간학교가 끝나면 총총히 사라지는 발걸음 속에서 나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어디에서 밤이슬을 피해야할지 물어야 했습니다. 문이 열린 교회에서 많이 잤습니다. 골목길 따뜻한 굴뚝 옆에 쪼그려 앉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외삼촌은, 그렇게 한 5년만 살면 이 서울 바닥에서 뭐가 되도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 집 없이 떠도는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재영이 은화 정운이가 학교가 끝나고 교문을 나서면, 돌아갈 집이 있다는 생각에 한없이 위안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 아이들을 볼 때면 가끔, 서대문 사거리 어둠에 짓눌린 가로등 불빛이 왜 그렇게 흐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흘러, 지금은 가는 곳마다 내 방이라고 한 칸씩 마련해 주는 사람들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매 끼니 거르지 않고 배를 채울 수 있는 것이 한없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먼 이국에 와서야 그 때를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등잔 밑이 어두워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좋은 호텔로 못 모셔서 죄송해요.”

이종희 선생님은 호텔을 얻지 못하고 싼 모텔을 잡았다고, 싼 모텔을 잡아서 대접해 죄송하다고, 도타운 정을 나눌 때면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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