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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신앙질병은 교회세습이다[교회세습의 바벨론포로] 교회세습를 소멸시키지 않고서는 결단코 교회가 교회다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
이필완  |  leewaon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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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1월 27일 (화) 18:21:23
최종편집 : 2009년 01월 30일 (금) 19:52:59 [조회수 : 6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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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광교회 민병소 목사가 [교회세습의 바벨론포로]라는 제목의 130여 페이지짜리 포켓판으로 교회세습 비판서를 냈다. 책은 작아도 실린 내용은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민병소 목사는 30여년전 30대 목회시절에 감리교회에 침투한 통일교회 세력을 비판하는 책 '감리교회 어디로 가나]를 출판한 일로 감리교회를 떠났다가 10년전 다시 돌아와 성실히 목회를 하는 중 다시 무거운 책을 냈다.

민병소 목사는 이 책에서, 현 한국교회 귀족화 현상에서 파생되는 온갖 신앙질병들 중에 소위 교회 세습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고 했다.

아무리 교회개혁 운운 해도 이 교회세습를 소멸시키지 않고서는 결단코 교회가 교회다운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민 목사는 이 문제는 교회의 본질성과도 직결되는 것으로 구조적인 범죄에 해당한다고 단정하였다.

민병소 목사는 이 교회세습의 병폐를 오늘 한국교회의 비벨론 포로 상황으로 진단하고 신양성서 정신을 통하여 그런 포로 상황으로부터 귀환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대안책을 열어보였다.

그와 함께 교회세습의 비성경적인 측면과 더불어 다양한 각도에서 그 도덕적인 해이와 부당성을 논의해 보았다고 하였다.

차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질병:세습

   세습옹호론자들과 성서진학의 과제

   종교사적 방법론과 그 접근

   조직신학의 관점에서 본 세습문제

   목회 생산성과 세습주의자들의 설교평가

   세습주의자들의 교회행정적인 태도

   세습주의자들의 교회성장과 목회성공

   한국교회 혁신론


부록 한국종교사(상,중,하) 소개

교회세습의 바벨론 포로 / 민병소 지음/ 왕중왕출판 발행 / 2008년 11월10일 / 4,800원

주문처 / 02-2682-4138, 010-9852-1919
bsm314@hanmail..net
국민은행 675602-01-150122(신재희)  우리은행 247-195027-02-001(신재희) 
                                       * 아직 서점에서는 구입할 수 없습니다.

---------------------------------------- 교회세습의 바벨론 포로 맛보기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질병: 교회세습 (PP.3~17)


말틴 루터의 말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죄인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를 테면 동전 한 닢의 양면성인 셈이다. 그렇다고 볼 때 어찌보면 의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죄인의 행태를 보인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리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죄를 범함으로써 신앙질병을 앓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 민병소 목사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신앙질병이란 신앙의 전염병으로서 온갖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부정부패 내지는 비리현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신앙질병은 무엇보다도 교회의 전도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케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공신력과 영향력을 일시에 추락하게 만들고 마는 독화살과도 같은 것이 바로 그 신앙질병인 것이다. 이에 나는 지금 한국교회가 중병으로 앓고 있는 신앙질병들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아픈 상처를 진단한다면서 만지면 만질수록 마음만 더 아프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목회를 하는 사람으로서 그 만큼 괴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할 말은 선지자적인 기능을 갖고 해야 될 것으로 본다. 불의한 행태를 보고도 못본 체 그대로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불의한 일에 합세한 꼴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펜을 들었다. 단지 본글 여기에서는 지금 앓고 있는 무수히 많은 한국교회의 신앙질병들 중에서 교회세습에 관한 질병현상만을 다루어 보기로 한다. 그 이유는 서슴치 않고 자행되고 있는 교회세습을 위한 행태야말로 한국교회에 번지고 있는 암병으로서, 아주 대표적인 신앙질병현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건강한 교회의 전도와 논쟁

목회 일선에 있으면서 들어보면 교회세습에 관한 여론은 전폭적으로 부정적이다. 이 여론의 핵심은 교회세습이야말로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중심 대상이라는데 있다. 물론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긴 있다. 이 옹호하는 사람들은 두 말할 나위없이 이미 성공(?)적으로 교회세습을 끝낸 이들과 교회세습을 염두에 두고 은밀히 진행하고 있는 이들로서 이해 당사자들이다. 일부에서는 아무런 의식없이 “교회세습은 아무나 하나,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하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다. 어떻든 신앙 양심이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교회세습 자체를 부정적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너무나 궁금해서 본 글을 쓰기에 앞서 개인적으로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짐작한대로 거두절미하고 신경질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는 심한 욕설로 저주까지 퍼부어대는 이들도 있었다. 아차 싶었다. 낯 뜨거울 정도로 창피스러웠다. 아주 부끄러웠다. 어떤 의식있는 사람은 “아니 그것을 몰라서 물어 봅니까. 재벌들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교회 같은 데서 무슨 김일성도 아니고. 자식에게 세습해 주는 것입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 마십쇼. 물어보는 목사님도 세습해 주려고요” 하면서 투덜거렸다.

   
 

 
  ▲ [교회세습의 바벨론포로]를 집필하게 된 동기는?  

정말 한국교회의 공신력과 영향력이 세습해 주는 교회들 때문에 또다시 추락하고 있는 순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건강한 교회의 전도까지도 방해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자명한 일이다. 때문에 교회세습을 선지자적인 탄핵으로 도마 위에 올려놓고 논쟁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4~6).

위 구절에 따라 4절의 말씀은 논쟁의 근거가 되며, 5~6절의 말씀은 건강한 교회의 전도의 근거가 된다. 사도 바울의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고후 10:3)라는 말씀은 그가 이기적인 동기에서 육체, 즉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으로 행하는 적대자들(전도의 방해자들)에 대해서 자신 만큼은 육체적인 충동으로 싸우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목회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인간적인 카리스마에 의지하거나 인간의 욕망 및 뭔가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를 따라 의와 진리와 사랑으로 행하겠다는 말이다.

전도 방해자들의 모든 이론은 대중전통(평신도들)을 미혹케 하는 허황된 궤변으로써 거짓 목회자들의 감언이설을 가리킨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한편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고후 10:5b)라는 말씀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이 인간의 온갖 것들을 지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종치 않을 때는 벌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이웃에 있는 건강한 교회의 전도를 위해서이다.

전도에 방해가 되는 사도 바울의 적대자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사도로 자처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무한대로 쌓아 올리는 위인들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함으로 말미암아 한없이 높아지는 바벨탑을 쌓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형태는 복음의 진리를 왜곡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파괴하고마는 불손한 동기를 분출시키고도 남는다. 이는 극도로 교만한 작태로서 불신앙적인 것이다.

   
 

 
  ▲ 교회세습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건강한 교회의 전도를 위해서 할 수 밖에 없는 논쟁은 자연스럽게 변증적인 것이 된다. 이 변증은 이성의 법정에서 자기 변호를 하는 것 이상의 성격을 띤다. 이 변증이라는 개념에는 두 요소가 내장되어 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일어나는 모든 교만과 허황한 성곽을 무너뜨리는 싸움과, 그 두 번째는 모든 생각을 바로잡아 그리스도에게로 복종시키는 신앙이다. 전자를 논쟁이라는 소극적인 면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전도라는 적극적인 측면인 것이다. 이에 우리는 변증 혹은 논쟁은 적극적인 측면인 전도를 언제나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연유로 해서 전도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다 주고 있는 오늘의 교회세습 문제를 상정해 놓고 논쟁적인 해부작업을 해보자는 것이다. 해부를 해야 수술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건강한 한국교회의 변증을 위해서 말이다.

만남의 의미와 전도

실제로 전도행위의 중심에는 만남과 밀접하게 상관되어 있다. 알고 보면 성경의 세계는 만남으로서의 진리를 펼쳐주고 있는 만남의 세계이다. 즉 성경의 진리는 만남의 진리라는 말이다. 이 만남의 진리는 이론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설명되어지는 대상이 아니라, 메시지로서 선포되어지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선포되어지는 것이기에 무슨 상당한 학자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 즉 설교자를 요청한다. 이에 메시지를 선포하는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역사의식과 신앙양심을 가지고, 먼저 하나님께 응답하는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목회자의 인격성은 책임적인 응답의 능동성을 발휘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성경이라는 텍스트가 만남의 진리를 말씀하고 있을 때, 그 만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이에 전도행위는 제1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하는 신앙에로 이끌어 올리는 어부와도 같은 작업인 것이다. 이럴 때 어부는 잡히는 고기의 습성을 잘 알아야 한다. 때문에 듣는자의 콘텍스트(상황)을 정확히 인지한다는 것은 실로 중차대한 일이다. 이는 듣는 자에게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니만큼 듣는 자의 정신적 상황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 요즘의 감리교 사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렇다면 말씀을 선포하는 어부는 누구이며 그 말씀을 듣는자는 누구인가.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이 양쪽 모두가 다 한국인이다.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은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일 때부터 한국인의 정서를 갖고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이 한국인의 정서를 잘 알고 있었던 헐버트 선교사(미북감리회선교부 소속)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주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한국인들이 신봉하는 다양한 의식들은 서로 상충되는 데도, 그들의 내부적인 면에서 볼 때 모든 종교에 두루 두루 통함으로써 아무런 적의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수세기에 걸쳐 익숙해지는 동안에 하나의 종교적인 혼성물을 이루어 왔다.
그래서 한국인은 사회에 있을 때는 유교도이고, 뭔가 생각할 때는 불교도가 되며, 고난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는 정령을 숭배하는 귀신 숭배자가 된다. 이에 한국인의 밑 바닥에 두루 깔려있는 신앙은 원시적인 정령숭배사상으로서, 그 밖의 모든 문화는 그런 신앙 위에 기초를 둔 상부구조에 불과한 것이다(Homer Hurbert, The Passing of Korea, Yonsei University Press, 1969, pp.381~382).

위와 같이 헐버트는 한국인의 기층종교로서 샤마니즘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샤마니즘은 비조직화된 종교이다. 조직화된 종교와는 달리 한국인에게 있어서 샤마니즘은 가치관, 관습 또는 정서와 같은 사회적 잠재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기층종교인 것이다. 이 샤마니즘이 기층종교라는 말은 불교와 유교가 한국인에게 수용되었을 때 이미 형성되어 있는 샤마니즘의 정서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는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환언하자면 불교의 샤마니즘화 또는 유교의 샤마니즘화는 물론 기독교의 샤마니즘화가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국인의 정서와 샤마니즘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한국인은 그의 독특한 문화적인 체취가 있다. 우리는 이를 정서라 부른다. 한국인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한국적 정서를 가지고 산다. 이를 한국인의 심성이라고 해도 좋다. 행위자로서의 한국인은 그만의 문화적 과거의 유산물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정서나 심성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다시 말해서 그가 한국인으로 있는 한, 그는 문화적인 공백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윤이흠, 한국종교연구<4권>, 집문당, 1999, p.208).

여기서 하나의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즉 한국인의 정서는 곧 샤마니즘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경우이 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샤마니즘은 다음과 같이 작용해서 나타난다.

이와 같은 현세적 기복 태도는 샤마니즘에서 가장 강력하게 전수되었다. 이처럼 고전적 이상과 기복적이고 현세적인 욕망의 갈등의 흐름이 한국 역사를 통해서 이어지면서, 서서히 조화로운 질서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 조화는 샤마니즘의 현세주의의 틀에 고전적 이상이 담기면서 나타났던 것이다(윤이흠, 샤마니즘과 한국문화사<샤마니즘연구 제1집>, 한국샤마니즘학회, 문덕사, 1994, p.94).

이로 보아 한국인의 정서는 경험적 세계에서 얻은 경험적 지식과 판단에 의거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의 정서는 바로 경험적 현세주의인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의 정서를 경험적 현세주의라고 부를 때, 이는 하나의 맥락이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을 샤마니즘과 상관시켜서 논하는 경우에, 샤마니즘은 하나의 역사적 전통으로서 경험적 현세주의 정신을 언표해 주고 있는 일종의 대표성이라는 사실이다. 즉 샤마니즘은 경험적 현세주의의 전수 매체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와는 달리 한국인의 정서를 한(恨)으로 보는 경향이 한국학계에 만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히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정서라고 단정할 수 있을 때는 불가변적인 측면과 함께 고유성과 보편성 및 현재성이라는 요인이 반드시 충족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으로 볼 때 한을 한국인의 정서로 보는 데는 그같은 충족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직시할 수가 있겠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요즈음에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는 한이라는 정서가 없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한국인에게 있어 한이라는 정서는 가변적인 것으로 고유성과 보편성 및 현재성이라는 요인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본 항목에서 ‘만남의 의미와 전도’의 상관관계를 논의해 보고 있는 중이다.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이미 한국인의 정서인 경험적 현세주의의 전수 매체로서의 기층종교, 즉 샤마니즘을 바탕으로 해서 불교와 유교를 만나 기복화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만남의 의미는 실로 중요한 것이 된다. 우리 한국인이 기독교를 만났을 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일언해서 앞서 언급한 바대로 기독교 또한 기복화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기복화 현상은 지금도 변함없이 진행 중에 있는 한국적인 상황이다.

3대 신념유형의 조화

오늘의 한국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부터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메시지를 내용으로 해서 여전히 지금도 선포를 하고 있으며 전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가 기복신앙이란 과연 나쁜 것으로서 부정적으로만 매도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심사숙고해서 답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조직화된 일련의 종교들을 이에 종교적인 신념유형을 중심으로 해서 정리해 본다면, 기복형과 구도형과 개벽형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념유형이란 수용욕구 내지 수용자의 정신적 동기의 유형을 일컫는다. 이 정신적 동기의 유형은 역사적 조건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꿈의 유형들 중에서 어느 하나가 선택되든가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다. 이 유형은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근원적 염원이 표현되는 기본적인 세 신념체계이다. 이를 테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3대 유형이라는 말이다.

기복신앙은 생존 동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현세적 조건에 만족을 추구한다. 동시에 행동에 있어서는 일률적인 행동양식을 보이는데, 극단적인 보수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기복신앙은 두 가지 동기를 그 안에 내장하고 있다. 하나는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인 동기이다. 한 마디로 기복신앙이란 소시민적 욕망을 추구하는 행위의 신앙이다. 배 부르고 등 따뜻하게 지내는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소시민적 욕망인 것이다.

한편 구도신앙은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자아의 완성을 위해 발버둥치는 고행과 극기의 모습을 보여 주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삶의 현존적 조건과 이상 간의 문제점을 진지하게 각성하고 언제나 엄격한 도덕생활을 지향한다. 진정한 종교의 특성은 자아의 존재론적 각성에 있다. 이 각성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인류 문화의 지혜의 연원을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두려움과 당혹감에 대한 자기 방어적인 생존 동기의 본능에서부터 인간이 이상적 자아를 성취하고자 하는 능동적 자아 완성의 추구로 전향케 해 준다.

그리고 개벽신앙은 종말론적인 신앙으로서 황금시대를 열망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황금시대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완성이다. 그래서 전도에 열의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도 자체는 황금시대를 열어 역사 가운데서 실현해 보려는 이상과 의지의 사회적 표출인 셈이다. 이를 통해 현존하는 사회의 부조리 온갖 현상을 개혁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는 그 3대 신념유형(기복형-구도형-개벽형)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만 하는가. 이 관계를 정확히 관조한다는 것은 오늘의 한국교회에게는 실로 중대한 관건이 된다.

기복과 구도와 개벽의 3대 동기는 사실 인간의 종교적 염원의 3대 범주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근원적으로 대망하는 것이 있다면, 이 세 가지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3대 동기가 동시에 공존하면서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조화된 종교사상을 이룬다. 실제로 모든 종교경험은 기복 동기를 갖고 있고, 이 기복 동기가 완전히 배제된 신념체계는 이미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 철학이나 정치사상으로 변해진 것이다(윤이흠, 한국종교연구<1권>, 집문당, 1991, p.31).

개별종교의 특징은 위 3대 유형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한 종교행위의 특징은 기복과 구도와 개벽의 3 유형의 삼자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며, 이 삼자관계는 종교적 신념체계의 구조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이쯤해서 우리는 분명하게 하나를 짚고 건너가야 할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지금까지도 줄기차게 변함없이 한국교회가 주창해 오고 있는 큰 오류의 하나로서, 기복신앙을 타파하자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종교학이라는 학문을 알기 전에는 그런 주창이 정당한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니다. 기만당하고 속아온 셈이 되었다. 진단을 잘못 내리고 있으니 처방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한국종교들 중에서 기복신앙의 덕을 가장 크게 본 기독교가 기복집단의 제1인자인 데도 불구하고, 이제와서도 여전히 기복신앙을 타파하자는 주창은 기복신앙을 토사구팽하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기복신앙을 타파하자고 해서 토사구팽당할 기복신앙이 절대로 아니다. 이미 주지한 대로 불가변적인 한국인의 정서가 그렇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 있는데 어떻게 한국인의 정서를 무슨 방법으로 말살시킬 수가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잘 사는 데는 두 가지의 길이 있다. 하나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이 있다. 이 두 가지의 길은 나란히 평행선을 유지할 수도 있고 서로 분리해서 갈라질 수도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잘 산다는 기준을 여전히 물질적 풍요에다만 두고 있다. 여기에 바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야만 한다. 이때의 물질적 풍요는 성공의 척도가 된다.

한국교회들이 기복신앙에 매달려 그에 큰 덕을 보아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동안에, 산업화 이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산업화 이후의 시대란 절대빈곤이 퇴치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과 연금제 같은 사회보장 제도가 도입되어 구체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때라는 말이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개신교회의 성장이 둔화되고 침체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복인구이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한국교회 밖에서 기복문제를 이미 나름대로 해결받은 사람들이 전도가 될 리가 만무하다. 동시에 기복문제를 해결받은 한국교회 안의 기복인구가 또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한국교회의 둔화 내지는 침체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주요 원인은 그 동안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정예전통(목회자들)이 솔선수범해서 모본으로 보여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르쳐 주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렵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루돌프 불트만의 말대로 신학은 바로 인간학이라고 했듯이, 진정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기복신앙만을 추구하지 말고 그것을 떠 안은 채 구도신앙으로 성숙해서 사회의 개벽을 일궈내야만 한다. 나사렛 예수를 보라. 예수는 참 인간으로서 세속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허망할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치병하는 등 많은 이적을 통해서 기복문제를 해결해 주었지만, 정작 그의 이적 행위가 어느 경우를 막론하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인 동기를 동반하지는 않았다. 이는 그가 이적은 행하였으되 자신을 위한 기복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구도형과 개벽형의 믿음으로 발돋움해서 성숙하지를 못한 채, 여전히 기복형의 믿음에서 정체되고 있는 한국교회가 온갖 신앙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 기복형의 믿음 정체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신앙질병들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저주받아야 할 암병이 있다면, 내가 보기에는 교회세습 행위이다. 때문에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신앙질병현상을 교회세습으로 규정하고 지금 세밀히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는 중인 것이다.

때만 되면 계획적으로 무자비하게 추진하고 있는 교회세습은 건강한 교회로 성장하고 있는 모든 교회들의 전도에 훼방을 주는 마귀 짓거리이다. 그래서 논쟁을 통해 싸우더라도 끈질기게 막아 근절시켜야만 한다.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은 어쩔 수없이 숙명적으로 불교를 만나 불교식 사고방식에 젖어 들었다. 이어 유입된 유교의 행동양식에도 빠져들고 말았다. 이렇게 된 데는 한국인의 기층종교인 샤마니즘의 관용적 포용성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기독교와의 만남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주님의 지상명령(마 28:18~20)의 성경적인 실천을 위해서라도 기복신앙으로만 머물러 있지를 말고, 구도신앙과 개벽신앙으로까지 수용하는 조화의 태도가 요청된다. 그런데 그 3대 신념유형의 조화를 일궈낼 만큼 성숙한 한국교회가 되려면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인 과제로 교회세습이라는 신앙질병부터 도려내는 수술작업을 시급히 시행할 때이다.
이 수술작업은 역사적인 과업으로 시대적인 사명이다. 이렇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본 글을 통해서 교회세습의 부당성을 다각도로 관조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당연히 신앙질병은 정확하게 진단되고 처방되어져야만 한다. 따라서 본 글은 진단하면서 처방을 내리는 내용이 되는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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