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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뉴욕에서 이사하기너무 쉽게 끝나는 미국 이사, 몸으로 때우는 섬으로 이사하기, 아이 캔트 스탠드 유어 스피킹, 세 달에 한번 이사하기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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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년 01월 07일 (수) 13:28:31
최종편집 : 2009년 01월 08일 (목) 00:55:22 [조회수 : 4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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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뉴욕에서 이사하기  

너무 쉽게 끝나는 미국 이사  

“오늘 우리 이사해.”

“그래? 그럼, 나도 도와야 겠구먼.”

사촌 이목사가 이사를 했습니다. 나도 학원에 가지 않고 이사하는 뒷정리를 했습니다. 웨인에서 리빙스톤으로 약 30분 거리는 가까운 거리였습니다. 이사할 집은 오래된 집이라서 손 볼 곳이 많았습니다.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도배한 벽은 벗겨내고 페인트로 바꾸고, 닥트를 청소하고, 화장실 타일을 새로 붙이고, 내부만 손보는데도 한 달이 걸렸습니다. 교회를 옮겼으니, 사택도 옮겨야 했습니다. 사촌은 집이 헐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내 마음대로 안되는 미국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나도 사흘을 집을 손보는 일을 도왔습니다. 하루는 이사하고 남은 쓰레기를 버렸고, 또 하루는 의자 방석에 새 천을 덧씌우는 일을 도왔습니다. 또 다른 하루는 일꾼들이 칠하지 않는 곳에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붙박이 옷장 세 곳과 음식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집에 새 도배지를 바를 텐데, 있던 도배지를 벗기고 페인트를 칠했습니다. 수성페인트를 사서 원액을 그대로 롤러에 묻혀 아낌없이 벽에 문질렀습니다. 조금씩 묻혀 여러 번 칠하면 얇지만 넓게 칠할 수 있는데도 깨끗하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물자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아무리 두꺼워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삿짐센타에서 일꾼들 네 명이 와서 실었습니다. 큰 콘테이너 차에, 시장에서 쓰는 끌차에 얹어서, 턱마다 판자를 걸쳐 비탈을 만들고, 차에 올라가는데도 철제 경사로를 걸쳐 밀거나 끌고 다녔습니다. 가벼운 것만 들고 다녔지 무겁다 싶은 것은 모두 바퀴에 올려 밀어다 실었습니다. 피아노를 싣는 데도 들지 않고 바퀴에 실어 밀었고, 계단을 오를 때는 넷이서 들어 올렸습니다.

“아니, 이 사람들 힘들이지 않고 일하잖아. 모두 바퀴에 실어 나르지, 꿍꿍, 무겁게 들지 않네?”

“그래서 어떤 집 주인은 일이 너무 쉽다고, 돈을 계약한 대로 안 주려고 해요.”

이삿짐을 싣고 와 집안에 들이는데도 현관문 안까지 차에서 경사로를 연결해서 손쉽게 밀고 다녔습니다. 꿍꿍 무겁게 짐을 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책을 나르는 데는 생각보다 더 손쉬웠습니다. 책박스를 높게 쌓아 놨어도 들어 옮기지도 않고, 박스를 기울여 끌차 턱을 집어넣고는 잡아당겨 한꺼번에 대여섯 박스 씩 날랐습니다. 책박스 하나도 들어 나르지 않았습니다.

일이 순식간에 끝이 났습니다. 일을 아주 쉽게 끝나는 것을 보면, 주인이 그런 소리 할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삿짐 나르는 것도 일종의 전문분야라서 갖춘 장비와 쌓아 온 노하우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 많던 짐을 오전에 다 날라 놓고 갔습니다.  

 

   

몸으로 때우는 섬으로 이사하기

 

두지도에 이사를 할 때 생각이 났습니다. 지하실에서 짐을 묶어서 1층으로 내 놓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웬만한 짐은 하루 전에 다 날라다 놓았습니다. 5톤 차를 불러 일일이 들어서 날라 실었습니다. 일곱 명은 나르고 둘은 받아서 차에 쌓았습니다. 5톤 분량을 일일이 들어서 차에 높이 쌓았으니 싣는데만도 지쳤습니다.

대야도 선창가에서는 일일이 또 들어 내리고, 받아 들어서 쌓아 놓았습니다. 싣는 것 보다는 쉬웠습니다.

“비도 안 오고, 바람도 불지 않아 다행이었지, 둘 중에 하나만 했어도 선창에 쌓아 뒀던 짐이 다 망가졌을 꺼야.”

이튿날 흥영씨 배에 또 들어서 올리고, 위에서 받아서 쌓으면서, 이사를 도우러 오셨던 아저씨가 목소리를 높이셨습니다. 조금이라도 가까이 내린다고 물이 들어 왔을 때 방파제 위에 받아 내렸습니다. 2.5톤 배에 두 번을 날랐으니, 5톤 짐은 실히 되는 양이었습니다.

선창에 쌓아 둘 때 뿐 아니라, 배로 옮기는 날도 조용했습니다. 며칠을 지나 봐도 이날만큼 바람 없는 날도 드물었습니다. 바람 불면 파도가 높아져 싣기도 힘들고, 내리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참 다행이고 감사했습니다.

일단 바다를 건너고는 쉬어야 했습니다. 몇시간 지나지 않아, 일을 서두르라는지 날이 흐려졌습니다. 또 다시 힘을 내, 창고에 날라다가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일고여덟 명은 꼬박 매달려서, 사흘간 이사를 했습니다. 힘들여 꿍꿍 들고, 날랐습니다. 그에 비하면 미국의 이사는 첨단장비로 힘들이지 않고 하는 이사였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어우러진 섬과 섬의 곡선이, 쭉쭉 뻗은 도시의 길과 전봇대와 건물의 직선과는 달리, 마음을 구부렁히 늦춰 주었습니다. 나르던 짐은 몸을 늦췄고, 눈 앞 풍경은 마음을 늦췄습니다. 

   


아이 캔트 스탠드 유어 스피킹

 

이사하기 전, 웨인에서는 15분을 걸어가 버스를 탔습니다. 맨하탄까지는 50분이 걸렸고, 버스는 30분마다 하나씩 있었습니다. 종일 맨하탄을 돌아다니다가 버스에서 내리면 집에 오는 길이 더 멀게 느껴졌습니다. 가게에 들러 과일을 사 들고 집으로 가곤 했습니다. 워낙 걷는 문화가 아니라서, 아파트 입구에서 집까지 가는데도 한참이나 걸렸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는 수영장도 있고 테니스장도 있어서 이목사와 못 치는 테니스도 치곤했습니다.

처음에 버스를 탔을 때는 혹시나 내리는 곳을 잊을까봐 창밖을 줄곧 내다봐야 했습니다. 맨하탄에서 30분 거리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차를 두고 버스는 타는 주차장이 있는 불루밍몰까지는 졸 수 있었습니다. 좀 더 지났을 때는 길이 익어 마을까지 느긋하게 피곤을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버스를 탈 때마다 어린애들까지 뒤로 가자고 조르는 버스 뒤에 나도 타고 가도, 내릴 곳을 알고 벨을 누를 수 있게 되었을 때 이사를 한 것입니다.

“여기서는 몇 번을 타야 맨하탄으로 가나?”

“나도 몰라. 우리는 버스를 안 타고 다녀서.”

이목사네 식구들은 모두 버스를 타지 않기 때문에, 이사해서는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얼마나 걸리는지, 버스 요금은 얼만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단지 이사할 집에 드나들다가 73번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답니다.

이사하기 전에 버스 터미널에서 73번이 어디에 서는지 차비가 얼만지, 나오는 차를 먼저 타기 때문에 표를 끊어 놓아야 했습니다. 버스표를 끊어도 현금으로 그 때마다 계산을 하는 것이 가장 비쌌습니다. 최소한 10개를 한꺼번에 사는 것이 나았습니다. 10개를 한꺼번에 사면 약 25%가 싸고, 한 달 쓰는 패스카드를 쓰면 무려 60%를 깎아줍니다. 사람을 안 거치고 기계를 사용하거나 오래 쓰는 것을 사용하면 요금이 대폭 싸지는 것이 미국입니다. 번번히 내는 번거로움을 없애려고 열흘 혹은 한 달 씩 계산하도록, 사람의 손이 가는 것을 피하고 기계가 일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사도 사람을 덜 쓰고, 바퀴 단 기계를 활용해서 손쉽게 했습니다.

   

 

표도 끊을 겸, 타는 곳도 알아 볼 겸, 작심하고 터미널을 찾아갔습니다. 안내소에 들렀습니다.

“73번 버스를 어디에서 타요.”

“어디를 가는데요?”

“리빙스톤요.”

“리빙스톤 가는 버스는 77번 뿐이에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77번은 보지 못했고, 73번이 마을을 지나는 것을 봤어요.”

“매표소로 가보세요.”

매표소에서 73번 버스표를 달랬더니, 타는 곳에 가보랍니다. 타는 곳에서 73번 시간표를 달랬더니, 안내소로 다시 가 보랍니다. 뭔가 이상했습니다. 타는 곳에 다시 가서 73번 시간표를 또 달라고해 보았습니다. 젊은 여자가,

“아이 캔트 스탠드 유어 스피킹. I CAN'T STAND YOUR SPEAKING”

‘당신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꺼져.’ 뭐 이런 뜻입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고 안내소에 어슬렁 거렸습니다. 같은 안내원에게 똑같은 질문을 또 하기 거시기 해서, 잠시 방안을 모색하며 돌아다녔습니다.

마침 안내원이 교대를 해서 아까 그 안내원이 아닙니다. 새로 온 안내원입니다. 먼저 웃고 목소리를 낮춰서 다가갔습니다.

“내가 이사를 했는데, 이사한 동네 길에서 73번을 봤어요. 73번을 어디서 타야해요?”

“73번은 뉴져지에 있는 정류소에 가야 탈 수 있어요. 여기서는 77번이 가요. 시간표를 보았다가 306번 출구에서 타세요.”

그제서야 이해가 갔습니다. 맨하탄 터미널 말고, 뉴져지에 터미널이 또 있는데, 거기 가야 73번을 탈 수 있고, 여기서는 77번을 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얼굴은 웃었지만, 속을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이 자슥들, 진즉 잘 알려 주지. 처음 오는 사람 헷갈리게 안내도 못 해.’

하고 투덜거리며, 마지막으로 197번을 타고 집으로 갔습니다.

 

   

이사를 하고 처음으로 맨하탄을 가려고 집을 나서니, 뜻밖에도 집에서 5분 거리에 정류장에서 탈 수 있었습니다. 버스 시간표도 없이 정류소 표지판 옆에 서있었더니 오래지 않아 버스가 왔습니다. 맨하탄까지는 약 40분이 걸렸습니다. 시간표를 보니까 버스도 더 자주 있었습니다.

뉴욕에 사는 동안 절반은 웨인에서 절반은 리빙스톤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다니는 길도 절반씩 나누어 구경하게 생겼습니다. 이사하면서, 안 할 수도 있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웨인도 좋았고, 리빙스톤도 좋습니다.

 

   

세 달에 한번 이사하기

이사하면 나만큼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자취를 하는데, 걸핏하면 이사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형각이 아제와 함께 자취를 했습니다. 형각이 아제는 형철이 아제와 쌍둥이 였습니다. 한꺼번에 입학을 하면 부담이 되니까 한 해 늦게 들어가 3학년이고, 형철이 아제는 졸업을 해 마침 혼자였습니다. 놋재 꼭데기에 자취할 집을 지어서 살았습니다. 밥 해 먹을 부엌을 통해 방으로 들어가면, 머릿맡에 책상을 하나 두고 둘이 누우면 꼭 맞을 집이었습니다. 문제는 집안에 어른이 없고 주변에 친구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철이 있었으면 아제한테 공부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자고 이야기나 했을 텐데, 원재와 함께 지취를 할 방을 얻어 놓고,

“아제, 나 이사해.”

통보를 하고 말았습니다. 아제는 한참이나 멍하게 있었습니다. 두 달만에 짐을 싸서 첫 이사를 했습니다.

이사한 집은 단양 향교 앞을 지나는 비포장길 언덕 바로 아랫집이었습니다. 차가 한번 지나가면 일은 흙먼지가 담벼락 밑에 있는 집으로 고스란히 내려앉았습니다. 원제가 곤로를 가져와 석유를 넣고 밥을 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화장실이 멀었습니다. 밤에 화장실을 가려면 아까운 성냥불을 그어대며 한참을 가야 했습니다.

“기왕 방세내고 사는 것, 화장실 가까운 집으로 이사 가자, 우리.”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옆집 화장실은 마당 끝에 있는 변소였습니다. 두 번째 이사였습니다. 이 집에서 첫 여름방학을 했습니다.

방학을 마치고 오니까 여름 장마에 시루섬에 살던 사람이 가산을 다 떠내려 보내고 우리 방에 허락도 받지 않고 살고 있었습니다. 1972년 단양의 장마는 유명했습니다. 단양 시내의 3/4이 물에 잠겼습니다. 단양 남한강 상류에 있는 영월댐에 수위가 높아 방류를 하자 내리던 비와 합세해 적성아래 협곡이 막혀 단양 시내로 물이 차기 시작했습니다. 다니던 중학교 지붕이 고스란히 들려 운동장을 지나 반대편 교사를 넘어가 앉아 있었습니다. 방학을 하자마자 전교생이 베어 놓은 퇴비더미도 따라가 옆에 앉았습니다. 장마에 떠다니던 부유물이 전봇대 위에 걸려 물의 수위를 말해주었습니다. 장사를 하던 사람들은 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어도 팔던 물건을 거리에 쌓아두고 씻었습니다.

“학생들 미안해 허락도 안 받고 이방에서 살았어.”

방학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가자 낯모르는 세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시루섬에서 농사를 짓다가, 물에 모두 떠내려 보내고 목숨만 건져 나왔답니다. 우리 방에서 함께 두 달을 살다가 갔습니다. 그 후에는 원재 할머니가 와서 밥을 해 주었습니다. 1학년이 끝날 때까지, 중학교를 다니던 기간 중에 가장 오래 산 집이 되었습니다.

2학년이 되어서는 헤어져야 했습니다. 원재는 마찬가지로 할머니가 있어서 교대로 밥을 해 줄 수 있는 규상이와 살기로 했고, 나는 지금 머물고 있는 이목사인 이종사촌과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내가 또 바로 옆집으로 세 번째 이사를 했습니다. 사촌이 두어 달 자취를 하다보니 어려웠는지 하숙을 하겠다고 나가는 바람에, 나도 혼자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나도 하숙을 시켜주실 결심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너도 고생 그만하고 하숙을 해 보거라. 영이 엄마에게 이야기 해 놓았다.”

남천에서 살다가 단양으로 이사를 온 영이네 집에서 하숙을 하라고 하숙비를 주었습니다. 영이네는 얼마 전에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아버지가 단양 양조장에서 술도가 차를 운전했는데,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술도가 차는 3발 자동차였습니다. 앞은 오토바이인데, 뒤는 바퀴가 두 개 달렸습니다. 양조장에서 술을 싣고 술집으로 날라다 주었습니다. 단양 양조장은 출입구를 나오자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개울을 돌아 드나들다가 그만 지붕도 없는 차에서 거꾸로 떨어져, 현장에서 죽고 말았답니다. 이사를 하고 영이네서 한 달여 학교를 다니다가 얼마 있지 않아서 방학을 했습니다.

2학기를 시작하러 오니까 네 번째 이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놋재 꼭데기 산비탈을 깎아서 계량주택을 지었는데, 그 중 한 채를 사서 이사를 하였습니다. 이사를 하니까 방을 한 칸 주었습니다. 그런데, 날이 추워져도 방에 불을 넣어 주지 않았습니다. 난방비를 아끼려고, 잠은 안방에서 모든 식구들이 모여 자야 했습니다. 연탄 한 장을 아끼려는 마음은 웬만한 가정은 모두 기울이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래도 공부 잘하고, 예쁘고, 남천에서부터 소꿉놀이하며 지내던, 한 학년 아래인 영이와 밤에는 한 방에서 잔다는 사실 때문에, 불편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날이 더 추워져, 낮에도 내 방에 있을 수가 없게 되자, 학교 가까운 곳에 하숙집을 구한다는 핑계로 이사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친구에게 소개를 받아서 학교 가까이 하숙집을 찾아 갔더니 봄에 함께 자취를 하던 성일이가 그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방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집은 밥을 얼마나 적게 주는지, 한창 크는 아이들이게는 가히 고문에 가까웠습니다.

“밥 좀 더 주세요.”

“밥? 남은 밥이 없는데, 어쩌지?”

식구 수대로 밥을 딱 맞게 해서, 더 줄 밥이 없었습니다. 심지어는 감기가 들어 학교를 못가고 코피를 흘려도 집 주인 젊은 부인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 보지도 않았습니다. 같은 하숙비 내고 배고프게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밥 많이 준다는 하숙집을 찾았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하숙을 하는 중학교 뒷담과 붙은 집이었습니다.

“밥이 식으면 맛이 없으니까, 점심시간에 매점 옆 담장으로 오거라, 담 너머로 건네줄께.”

“예, 감사합니다.”

인심이 좋아 밥도 엄청 많이 담아 주었습니다. 막 입학해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가 밥을 해 먹고 다니는 나를 데려다가, 하숙집 밥상을 처음 받아보게 한, 바로 그 집이었습니다. 학교 가깝지, 점심 따뜻하게 먹지, 주인네 인심 좋지, 다 좋은데, 한 가지 단점이 있었습니다. 점심 도시락을 너무 꽉꽉 눌러 주어서, 밥이 맛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가 하는 질척한 밥이, 도시락 뚜껑에 떡처럼 눌려, 먹기가 나빴습니다. 이것도 철이 들었으면, 좀 적어도 좋으니까 그렇게 심하게는 누르지 않으면 좋겠다고 말이나 했을 텐데, 또 하숙집을 옮기는 사유가 되었습니다.

같은 반 친구가 병태가,

“그럼, 우리 집에서 하숙할래?”

“너들 집에서? 그래 좋다.”

함께 공부도 할 겸, 학교도 같이 다니고, 좋다고 따라 갔습니다. 그런데 방이 본채는 식구들이 살고, 처마밑에 들인 방입니다. 구들을 스레트로 깔고 얇게 미장을 한 방이라서, 나무로 불을 때면 금방 불 닿은 곳만 절절 끓는데, 밤이 다 가기도 전에 식어서 냉방이 되었습니다. 이런 낭패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더 옮길 수가 없습니다. 곧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고 방학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뜨거워서 장판이 시커멓게 탄 방에서 이불을 걷고 있다가 새벽에는 냉골에서 덜덜 떨어야 했습니다. 친구는 새벽에 일어나 나무를 넣다가 지쳐 아주 내 방에 들어오지도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겨울 방학을 할 때까지 한 달을 살았습니다.

중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서 계산을 해 보니 3년 동안 이사를 10번이나 했습니다. 방학에 집에서 지낸 기간을 빼면 석 달에 한번은 이사를 한 꼴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해 봐도 마음에 꼭 들어 더 살고 싶은 집은 없었습니다. 이제 공부 좀 하려면 화장실이 멀고, 화장실이 가까우면 물이 멀고, 물이 가까우면 학교가 멀고, 학교가 가까우면 밥이 부족하고, 밥이 넉넉하면 너무 눌러서 먹을 수가 없고, 밥이 좋으면 방이 춥고, 한 가지가 좋으면 좋지 않은 것도 꼭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인생이란 최상의 만족이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것도 참고 살면 어디나 살만한 것이 또 인생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내내 자취를 했는데, 한번 이사를 하고는 3년을 살았습니다.

처음 간 집은 방문앞으로 동네 하수가 모여 흐르는 집이었는데, 함께 자취를 하자고 온 친구가 뭐 이런 집에서 사느냐고 이사를 하자고 해서 옮겼을 뿐입니다. 두 번째 찾아간 집은 남의 마당에서 수돗물을 받아 써야 하는데도 2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인생이란 참으로 마음먹기에 달렸습니다.

미국이든지 한국이든지, 새집이든지 헌집이든지, 도시든지 섬이든지, 웨인이든지 리빙스톤이든지,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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