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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하탄의 영어학원아임 언 올디스트 스투던트, 도전은 아름다워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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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2월 23일 (화) 00:32:55
최종편집 : 2008년 12월 23일 (화) 13:39:57 [조회수 : 3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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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여행기11] 맨하탄의 영어학원


아임 언 올디스트 스투던트

   
“오, 아임 언 올디스트 스투던트 Oh, I'm an oldest student."괜한 짓을 또 했습니다. 지금 와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또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멘하탄 펜실베니아 호텔에 있는 영어학원에 등록하고, 처음 교실에 들어서는 순간 후회가 밀려 왔습니다. 교실에 들어서면서 입에서 튀어나온 첫마디입니다.

영어를 더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대한민국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은 누구나 지겹도록 영어공부를 했지 않습니까? 영어에 인생이 달린 듯이 무슨 시험을 보든지 영어가 가장 중요시 되었습니다. 학생 때는 영어 수학 순서였고, 편입시험도 영어와 전공, 취직시험도 영어와 상식, 공무원시험에도 진급시험에도 영어에서 판가름이 날 정도로, 영어가 안 되면 어디 가서 행세를 못할 지경입니다. 학교를 다 졸업하고도 뉴욕타임즈에 워싱턴포스트를 읽고, 최근까지 공주대학교 외국어학원에서 영어회화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필리핀에서 누가 왔다거나, 코 크고 머리 노란 사람을 만나면, 그래도 궁금증을 풀만큼은 통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비행기 승강장에서 통관하거나, 물건을 사거나, 거리를 돌아다니는데 필요한만큼의 영어는 됐습니다.

그런데 미국 땅에 발을 딛고 보니까 생판 달랐습니다. 영어를 하긴 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여행을 시작할 때는 기차를 타고 다니면서 옆 사람과 이야기하고, 지나가는 풍경 구경하고, 가끔 내려서 관광이나 할 요량이었습니다.

처음 시애틀에 내려서 공항에서 통관할 때는 괜찮았습니다. 기차역에 가고, 박물관에 가고, 공원에 들르고, 거리를 다니다보니까, 미국 시민들의 이야기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습니다. 듣지를 못하니,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뉴욕에 와서도 공원을 가든지 쇼핑을 가든지 물으면이야 친절히 가르쳐 주는 사람은 있지만, 누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고, 한번 친절하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다시 물을 맘이 안 나게 정떨어졌습니다.

‘제나라 말을 못 하는 외국인이 왔으면 친절히 가르쳐 줄 것이지, 뭐 얻어먹으러 온 거지도 아니고....’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고 해도 매번 그렇게 모자라게 굴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에서 몇 년을 산 사람도 어디 가서 시원시원하게 활동을 못 하는가 봅니다. 그러니 슬그머니 화가 났습니다.

‘야, 몇 년을 공부하느라고 죽을힘을 다 했는데, 네까짓 것 말 하나 못 알아들어서야 쓰겠냐?’

오기가 생겨서, 홧김에 영어학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영어학원에 가니까, 한국인 상담사가 있었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학생들이 오니까, 자국 말을 하는 사람을 상담사로 쓰나봅니다. 한 달간 공부할 생각을 하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체류하실 생각이세요?”

“아니요, 한국에 돌아 갈꺼요.”

“그런데 뭐하러 학원까지 와서 공부를 하려하세요, 그 연세에.”

“아니, 숱하게 영어공부를 했는데, 말하나 못 알아듣는데서야....”

미국에 학교가 1학년부터 12학년까지 있듯이, 수준이 1등급부터 8등급까지 있는 중에 4등급을 받았습니다.

일주일을 기다려 첫 시간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아들 나이 또래입니다. 상담을 할 때는 나이 많은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우리 반은 등급이 그래도 높아서 그런지 나이 많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국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미국에 온지 1년이 되었답니다. 터키 친구는 이번주만 하고 이제 본국으로 돌아간답니다. 옆에 앉았던 프랑스 친구는 이번 주 목요일에 집으로 간다고 가족의 선물을 샀답니다.

‘아들이나 딸이 이 자리에 앉아서 공부를 해야 하는데, 주책없이 다 늙어서 괜히 앉아 있구먼.’

이삼일을 지나면서는 후회를 했습니다.



다 늦은 공부를 하기는 벌써 오래 됐습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가겠다고 재수학원에 가고부터입니다. 이때부터 나는 아저씨로 불렸습니다. 동갑내기들과는 멀어진 것입니다. 몇 년 몸부림치는 동안 내 나이또래는 이미 대학을 졸업하거나 사회생활에 기반을 닦을 시기였습니다. 난 이제 겨우 다시 시작이었습니다.

이어령교수가 '젊음의 창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개미가 집에서 나와서 먹이를 찾으려고 방향없이 마구 다닌다. 엉킨 실타래처럼 꼬불꼬불 돌아다니다가, 먹이를 찾으면 어떻게 아는지 나왔던 집으로 일직선으로 돌아간다. 방향없이 돌아다니는 기간이 인생의 목적을 찾는 기간이다.”

20대 후반이면 자기의 할 일을 찾아서 일직선으로 나가야할 시기인데도, 나는 아직도 헤매고 있었습니다. 막내 동생벌 되는 아이들과 말입니다. 난 여전히 아저씨라 불렸습니다. 어쩌다가,

'오빠.'

하고 불러주는 귀염둥이들이 참 이뻤습니다. 남학생들이야 대부분 형님이라고 따랐습니다. 나이는 상관않고 학교에서는 학번이 우선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놈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학교를 나와서는 또 연급이 따라 다녔습니다.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겠다고 들어선 교실이 이번에는 자식벌들과 앉아서,

“당신 You.”

“충퀀 Choongkwon."

하며 서로 맞먹고 있습니다.


도전은 아름다워

내가 이렇게 늦은 데는 기록이 될만한 것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다닌 학교가 6개나 되었습니다. 대학원 두 개는 빼고도 말입니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간 학교가 돈을 벌어서 다니겠다는 야간대학 영문과였습니다. 한 해를 공부하고는 못하겠다고 포기하고, 집에서 누에를 치고 있었습니다. 고모가 찾아 오셨습니다.

“얘 얘, 네 사촌이 청주에 있는 신학교에 갔는데, 내가 등록금을 줄테니, 가서 돌보며 같이 있어라.”

봄 누에가 두 잠을 잘 때, 짐을 싸들고 떠났습니다. 사촌과 밥을 해 먹어 가면서, 돈이 떨어지면 건축공사장에서 막노동해서 돈을 벌어 가면서, 발에 무좀이 온 발에 번져서 딛을 때마다 피가 발자국을 내 가도록, 험한 인생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 해 2학기에는 기도원을 찾아 갔습니다. 세 번째 학교입니다. 중학교를 가지 못했을 때, 농사를 지으려면 차라리 기도원 신학교에라도 가려고 마음먹었던 적이 있던 차에, 깊은 영적인 체험을 갖겠다는 생각보다는, 산에 들어가면 이보다 못하랴 싶은 생각에서 였습니다. 마침 Gamble이라는 선교사가 처음 와서 영어 예배를 드렸습니다. 선교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미국으로 데리고 갈 계획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난 군대를 다녀오지 않아서 그 대상에 들지는 않았지만, 영어 뉴스를 반복해 듣고는 공책에 받아쓰거나, 선교사가 시장에 갈 때 동행해서 통역도 하고, 스크램블게임 Scramble Game 도 하고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따라 다니는 것은 돈 나올 데가 없는 것입니다. 기숙사는 실비로 들어가 한 학기를 써도, 다달이 먹는 밥값은 내야하는데 이 돈을 마련할 데가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갑자기 동산이 울음바다가 되었는데,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나라의 대통령이 죽었다고 성전에 들어가 통곡을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대통령이란 존재를 인식할 때부터 본래 한사람뿐이어야 한다고 알았는데, 이가 죽었으니 나라에 큰 변란이라도 난듯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밥 한 끼니가 더 중요했습니다.

다시 겨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와 이제는 신학교에 가겠다고 편입시험을 보았습니다. 생긴 지 두해 되는 야간으로 편입을 했습니다. 야간이라고 해도 먹고 잘 데가 없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시 낮에 일하고 밤에 학교를 다니는 것은 더 이상 못할 짓이었습니다. 편입에 합격을 하고 전에 다니던 야간대학에 그날로 자퇴서를 낸 것도, 다시는 잘 데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동가식서가숙하기 지긋지긋해서였습니다. 하루를 가서 강의실에 앉아 보고는 군대에 가겠다고 휴학계를 냈습니다.

군대에 오라는 영장을 받았을 때는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먹여 줄 테지, 재워 줄 테지, 입혀 줄 테지, 3년 동안 놀 일 줄 테지, 누구나 때워야하는 기간을 호강 한 번 해 보자’

하고 신이 나서는 갔습니다.

6월말에 입대를 했는데, 멍청도라고 부르는 충청도에서 태어난 것이 또 그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보다 한 달 앞서 입대한 병력들은 전라도에서 왔는데, 기간병들이 못 잡아먹어서 야단들입니다. 나중에야 알고 봤더니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직후였습니다.

당시에는 광주사태라고 해서, 며칠을 완전군장하고 대기상태로 있느라고 고생들을 많이 했기 때문이었을 뿐 아니라, 전라도하면 불온한 사람들이란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입니다.

그 해 말 아직 작대기 하나였을 때 삼청교육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조교로 삼청교육 훈련을 시킨다고 마이가리 일등병을 달고, 빨갱이들 사상교육 시킨다고 사람들을 초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밤에는 어느 누가 조교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함께 잠도 자지 않았습니다. 온 몸이 시커멓게 멍이 든 사람들에게 말을 시켜 보면 그렇게 큰 죄도 아닌데 들어와 죽을 고생을 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 사이 나도 아찔했던 것이,

‘나도 군대에 입대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끌려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군대 오기 전에 나는 머리를 기르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딱히 길러서 멋을 내야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이발하는 요금도 없었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까 어깨까지 치렁치렁해졌던 것입니다. 가운데로 반을 갈라 빗어 내리면 반곱슬머리가 천상 파마한 여자였습니다.

삼청교육대는 이렇게 비정상적이라고 생각되면 무조건 잡아다가 군부대에 넘겼습니다. 심지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면장이나 이장에게 밉보여 들어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역별로 배당된 인원수가 있어서 억울한 사람이 더욱 많았습니다.

군대가 나를 여러모로 살렸습니다. 굶을 때 먹여 살렸지요, 군사정권의 폭압으로부터 보호했지요, 그러나 군대는 내 체질에 영 맞지 않았습니다.



제대하고 공무원할 때,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에 다닌 것이 다섯 번째 학교입니다.

여섯 번째 학교가 결혼을 하고 들어간 감신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벌 되는 아이들하고 영어공부를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그 자식들이 앉아 있어야 하는데 늙은이가 주책바가지입니다.

두 주, 석 주가 지나면서, 전철의 방송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디스 스테이션 이즈 풔리 투 스트릿, 타임 스퀘어 This station is 42th street, Time square."

선생님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리니, 더 재미있었습니다. 여기서 6개월만 있으면 뭐라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한편, 영어와 만학하면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작년에 93세로 돌아가신 임재천 할아버지입니다. 임할아버지는 30대 초반에 8.15해방을 맞았으나,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당이 38선 이북을 장악하면서 교회를 핍박해, 일주일만 누나가 살던 해주에 피했다가 온다고 평양 부근 남형제산을 떠났다가, 안전한 영등포에 잠시 머문다는 것이 60년을 지나도록 혼자 였습니다. 부모님과 자녀들 6남매를 아내에게 맡겨두고 혼자 왔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상봉신청을 했으나, 피붙이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연락을 받고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습니다.

이 할아버지가 공주 원로원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영어를 공부하셨습니다.

“아니, 이게 영어 사전이예요?”

“코리아 헤럴드를 읽으세요?”

보던 사전은 하도 많이 넘겨서 묶은 부분이 뒤로 젖혀져, 닭 잡을 때 날개죽지를 뒤로 잡아 젖히듯이, 뒤로 아주 말려 버렸습니다. 검게 묻은 떼에 세월에 탄 그을음이 더해져 넘길 때 긁힌 흔적이 장마 때 파여진 흙마당 가장자리 같습니다. 박물관에나 들어갈 사전이었습니다. 눈이 보일 때까지 코리아 타임즈도 읽으셨습니다.

‘도대체 영어가 뭐길래 90세가 되도록 놓지를 못하고 있었을까?

‘흔히 말하는, 정보를 얻으려는 것일까?

‘말을 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책상에 놓인 사전과 신문을 보는 순간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려온 아름다운 여정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임재천 이산기*


39세에 고향 떠나

헤어진 지 55년

94세까지 눈을 못 감고

애오라지 북에 있는 가족을 보려고 살았는데,


부모는 생각지도 못했고

아내와 합하려고 환갑까지는 결혼도 안했고

그래도 자식 여섯 중 하나라도 만나고 싶었는데

피붙이 하나 남아있지 않다는 소식 듣고,


이젠 살 소망이 없어서인지

떠난 식구들 어서 따라가고 싶으신 건지

전혀 내색은 하지 않으면서

아픈 곳 없이 기운만 없다고 몸져누웠는데,


당신이 몇 해 전까지 영자신문 보고

누워서야 방 청소도 허용하고

숟가락 들 기력만 있어도 식당 출입을 하는

그 꿋꿋함을 닮고야 어떻게,


북에서 식구들이 예수를 부인했겠고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겠고

김일성 우상숭배에 무릎을 꿇어서

여지껏 목숨 부지하고 살았겠습니까?



나도 한편으로는 영어가 뭐길래 지금 이 나이가 되도록 말을 해 보겠다고 학원문을 드나드나 싶기도 했습니다.

“이 아니면 잇몸으로 산다는데, 대충 구경이나 하면서 다닐 걸, 주책도 심하면 치매라는데....”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하고 싶었지만 민생고가 해결되지 않아 하지 못했던 공부를 이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하고 싶은 열정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우주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어를 잘 듣고 말할 수 있겠니?”

“텔레비전 뉴스를 많이 보세요. 발음도 정확하고, 현대 영어일 뿐 아니라, 시사적이기도 해서 좋아요.”

뉴스를 보다가, 중간에 나오는 광고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조정사가 기상악화 등 여러 가지 난관이 있어서 포기하고 싶었지만, 자기를 보고 조정사가 꿈이라고 한 조카의 얼굴이 떠올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해서 조정사가 되었노라고, 마지막에,

'더 챌린지 이즈 뷰티풀 The challenge is beautifull.'

하고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습니다. 도전이 아름답다는 것은 도전해서 얻는 성공만이 아니라, 도전에서 성공에 이르기는 과정에 풍겨 나오는 향기가 아름답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전한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사, 성공하지 못했다고 해도, 이미 향기가 우리를 더 아름답게 하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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