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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세지감일까, 격지지감일까?[미주여행기 10]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들, “우리는 부모덕을 보는 거야"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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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2월 12일 (금) 10:13:56
최종편집 : 2008년 12월 12일 (금) 15:58:17 [조회수 : 3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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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세지감일까, 격지지감일까?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하는 아이들

“애들이 모두 공부를 잘 해서 다행이구나.”

이목사네는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딸은 오는 9월이면 대학교 4학년이 되고, 아들은 2학년이 됩니다. 둘 다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딸은 미네소타 어느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있고, 방학인데도 공부를 하느라 집에 없어서 미국에 와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들은 이름이 우주랍니다. 이름이 특별해서 이런 일도 있답니다.

“아들 친구들이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으면, 지구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물어.”

대학을 들어갈 때 우리나라로 치면 수학능력시험에서 하나를 틀리고 다 맞았답니다. 하버드로 가라니까, 하고싶은 경제학은 시카고대학교가 경제학파도 따로 있고 해서 더 좋다고, 시카고대학으로 갔답니다.

몇 주를 한 집에서 지내면서 생활하는 모양을 보았더니 나로써는 이해하지 못할 구석이 많았습니다.

   
▲ 이목사네 이사하기 전 집


“우주야, 너는 눈만 뜨면 컴퓨터를 안고 사니?”

“엄마가 무선인터넷 공유기를 치웠어요. 속상해요.”

그놈의 컴퓨터를 들고 무엇을 하는지, 하루 종일 두들기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뭘 그렇게 쓰는지, 잘 때까지 컴퓨터를 놓지를 않습니다. 작년 겨울에 아들이 영어 때문에 애를 쓰기에, 아들 좀 보내겠다고 하니까, 무선인터넷을 준비해 오면 좋겠다고 하더니, 지금 내가 오니까 있던 무선 공유기를 치웠답니다. 방학을 하고 집에 온 아들이 밤낮으로 제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하느라고 나오지를 않아서, 차라리 거실에서나 하면 얼굴이나 보겠다고 없앴답니다. 내가 보다 못해 물었습니다.

“도대체 뭘 그렇게 하니? 저 좋은 잔디 운동장에서 공차고 뛰어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니?”

“그런 애들이랑 나는 노는 방식이 달라요. 어디다 글을 올리고 있어요.”

“그럼, 하루 한 번도 밖에 나가지 않고 며칠을 살 수 있니?”

“왜 그런 걸 물으세요”

그래도 자기 전에 30분은 나가서 걷는 모양입니다.

누가 밖에서 들어와도 ‘이제 오세요’하는 인사뿐이고, 눈은 여전히 컴퓨터를 떠나지 않습니다. 제 부모가 뭘 물어도 컴퓨터 세계를 놓치지 않으려는듯 건성으로 대답고 맙니다. 나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대접이겠다 싶어서, 아주 말을 걸지 않고, 없는 듯 지내기로 했습니다.

내 아이도 집에 있을 때, 컴퓨터를 늘 켜고 지내던 것이 생각납니다. 아마 아이들은 컴퓨터로 세상과 소통하나 봅니다.

   
▲ 자연사 박물관에서


이목사가 이사 갈 사택에 집수리하는 것을 보러 갔더니 시대에 뒤떨어져서 버려야할 물건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책상에 놓인 컴퓨터는 'Window98'이 깔려 있었습니다. 안전모드에 들어가 몇 가지를 주물럭거려야 저장된 문서를 내려볼 수 있었습니다. 486컴퓨터 여서 인터넷이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도 않고, 정보도 제한된 시대의 것이어서 더 늦었습니다.

“야 박물관에나 갈 고물들이 많구먼.”

구석 책상에는 전동타자기가 있었습니다. 자동으로 지울 수도 있는, 컴퓨터가 나오기 전에 다양한 기능을 가진, 전동타자기로는 가장 발달된 것이었습니다. 창고에는 이 전동타자기에 사용하던 잉크 테이프가 비닐도 뜯기지 않은 채 박스로 있었습니다.

더 구석에는 처음으로 전기를 꼽아서 타자를 치던, 수동타자기 보다 조금 큰 전동타자기가 있었습니다. 타자기를 두드리면 곧 바로 전기로 채를 올려 치는 타자기였습니다.

아주 구석에는 수동타자기도 있었습니다. 줄을 바꿀 때는 땡 하고 종을 울리며 한 줄 올라가는 타자기였습니다.

“이걸 버려 말어?”

“이런 건 박물관에나 가야 가치가 있겠는데, 박물관에 가려면 우리 세대는 지나야 할 거야.”

버리는 쪽에다 내다 놓았습니다.


컴퓨터가 처음 나왔을 때, 타자기를 썼던 우리는 컴퓨터를 타자기의 연장선상에서 보려고 했습니다. 글이나 쓰고, 자료나 보관하고, 인쇄나 집에서 손쉽게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타자기를 거치지 않고, 컴퓨터를 직접 대했던 세대들은 워드가 중심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세계와의 접촉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항상 열려 있어서, 어디나 무제한으로 들어가고, 어느 누구와도 만날 수 있고, 왜 그런지 궁금증을 다 풀 수 있고, 어떻게 할지 방법이 다 나와 있고, 그래서 거기서 무엇을 할지도 결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한국의 교육 방법과 내용이 달라져야한다는 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암기할 것이 없습니다. 컴퓨터만 열면 다 나오는데, 암기할 것이 아니라, 활용능력을 길러 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엄마는 밤낮 컴퓨터만 한다고 잔소리가 너무 심해요.”

신세대들이 짜증낼만도 하게 생겼습니다. 컴퓨터가 세상 경험이고 공부입니다.

   
▲ 한 고등학교 전경

우주는 대학을 입학하기 전에 본 SAT(미국 대학수능시험) 시험을 며칠 전 다시 보았습니다.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방학 동안에 돈을 벌겠답니다. 컴퓨터를 통해 영어로 온갖 것 다 읽고 쓰면서 세상과 소통했으니, 뭐가 걸리는 것이 있겠습니까? 학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먼저 15시간 훈련을 받으면 하루 2시간을 가르칠 수 있고, 가르치는 것을 봐서 시간을 점자 늘려 나갈 수 있습니다.”

하고는, 훈련 날자를 알려 주었답니다. 한인교회에서는 이목사의 아들딸이 천재라고들 한답니다.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한 것이 소문이 이미 났나봅니다.



“우리는 부모덕을 보는 거야”


‘나도 이런 세상에 살았으면, 나 뿐 아니라 우리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맘껏 한번 공부를 해 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미국에서는 학비가 비싸긴 합니다. 하지만 공부하려면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있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전부가 무료이고, 대학교부터 돈이 든답니다. 그것도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등록금후불제로 우선 빌려 쓰고 졸업해서 갚든지, 수입이 없는 사람의 자녀에게는 감면해 주기도하고, 장학금도 많이 준답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입니까, 격지지감(隔地之感)입니까? 아니면, 둘 다 입니까?

   
▲ 뉴욕에 있는 듀르대학 앞에서


나는 중학교를 한 해 묵어서 들어갔어도 나이로 치면 늦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일이 2월이라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기 때문에 이제 같은 나이와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내 아래 동생은 공부를 시키지 않고 농사채를 물려줄 생각으로 중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데리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했을 때부터입니다. 한번은 내가 공부하는 제천에 와 보고 싶다고 해서 자취방에서 며칠을 함께 지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옛날 이야기를 가끔 합니다.

“그 때 형 방에는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 그래도 공부를 하겠다고 학교를 가더라구.”

그걸 보고서도,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떼를 썼습니다. 두 살 아래인 그 아래 동생과 함께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어머니가 또 아버지를 설득하셨는가 봅니다.

“우리는 아들이 셋이라서 큰 아들은 공부시키고, 둘째 아들은 양지말 밭과 남조 가는 쪽 논을 물려주고, 셋째 아들은 양물래기에 있는 논과 밭을 물려주고, 또 막내인 딸이야 시집이나 보내면 된다고 선택할 수 있지만, 저 아이들은 하나 뿐인 자기 인생이예요. 좀 어렵더라도 원하는 대로 중학교에 보내 주자고요.”

2년을 농사를 짓다가, 동생과 한 학년이 되어 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일제시대 때 학생이 입던, 심순애를 쫓아다니던 이수일이 입었던, 까만 교복에 경찰모 모양의 검은 모자에, 모자 가운데 학교 뺏지를 달고, 목에는 로망카라에 학년 표시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모양이 그렇다면, 학년간 규율도 안 봐도 천리입니다.

학교에 가보니 두 살이나 윈데, 동생의 친구가 내 친구가 되고, 내 친구가 동생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자기보다 나이 어린 것이 선배라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자기와 같은 또래는 까만 3학년 선배가 되어 있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 속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래도 이런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 공부를 잘하는 것이 아니었겠나 생각합니다. 아마 공부가 아닌, 힘이나 깡다구나 허세로 극복하려 했으면, 산골 촌놈이 읍내 토박이를 당할 수도 없었으려니와, 당해냈다고 해도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사고뭉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 상위 3%이상이 학교장 추천으로 입학할 수 있는 포항제철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오늘날 공대가 기피대상이되고 과학자가 비전없는 직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과학입국이라고 기치를 내 걸고, 공업계 고등학교에 가난하지만 공부 잘 하는 우수한 인재를 많이 뽑도록 했습니다. 마을에서 인물 났다고 칭송이 자자하기도 했습니다. 농사지어서는 버거운 학비도 무료고, 지긋지긋한 자취를 안 해도 기숙사에서 다 먹이고 재워주고, 졸업하면 좋은 회사에 취직도 보장되는, 남이 가고 싶어도 못 가는 더 없이 좋은 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철공고에 가니 기대와는 달랐던 모양입니다.

“뭐라고요? 둘째가 자퇴를 했어요? 왜요”

“걔 적성에 안 맞는 단다.”

당시는 적성에 맞고 안 맞고를 따질 겨를이 없을 때입니다.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기숙사 생활에서 상급생이 하급생에게 규율을 잡는데, 중학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생벌 되는 놈들이 상급생이라고 아니꼽게 구는 겁니다. 공부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잘하니 내세울 것 없지, 아무래도 생면부지 타지에서 허물어진 자존심을 회복할 돌파구가 없는 것입니다.

초등학교를 같이 다니고, 중학교도 2년을 꿇어 아래 동생과 같이 다니고, 똑 같이 공부도 잘해 포철공고도 같이 들어간, 고향 동네 바로 아랫집 친구 얼수는 그런 자존심 접고 학교를 잘 다녔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한 학기도 못 채우고 자퇴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공부를 하려고 치면 나보다 나을 뿐 아니라, 아마 우주 못지않게 했을 것인데, 학교를 나와서는 달리 공부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우주는 왜 안 와요?”

이사 갈 주택을 손질하는데, 일하러 온 사람들이 다름아닌 우주의 친구들이었습니다. 유 데이빗, 김 데이빗, 죠슈아 이 셋이서 우주를 찾았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인사와 간단한 말 정도만 할 뿐 한국말은 잘 못했습니다. 우주는 한국말도 유창하게 하고, 농담도 잘 알아들었습니다.

“우주 너는 영어도 잘하고 한국말도 참 잘 한다.”

“다, 부모님 덕분이죠.”

“그녀석 오랜만에 옳은 말 하는군.”

운전을 하던 아이 아빠 이목사가 껄껄거리고 웃었습니다.


우리 부모님은 둘째가 학교를 나와도 후속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안타깝게 지켜볼 뿐입니다. 그 후 집을 나가 10년을 소식이 없었습니다. 명절 때마다 죽었다는 소식이 없으니 어디서 살아 있겠지 할 뿐, 어디로 수소문하거나 연락을 취해볼 방도도 없었습니다. 둘째 이야기만 나오면,

“....”

“....”

가족들이 모두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슴알이만 하기를 10년이었습니다.

이렇게 부모님은 자식에게 덕 보일 것도 없었고, 또 자식들은 그 사정 다 알고, 어디라도 기대서 덕 볼 생각도 안 했습니다. 자기 스스로 인생길을 헤쳐 갈 뿐입니다.

   
▲ 이목사가 이사한 후의 집


셋째 동생은 중학교는 형과 같이 다녔고, 고등학교는 제천에서 역시 밥을 해 먹으며 졸업을 했습니다. 대학을 갈 꿈도 못 꾸고 직업훈련소를 들어가 기계공이 되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일은 했지만, 조그만 꿈이 있었습니다.

“장차 남의 밑에 있지도 않고, 내 기술로 내가 벌어먹고 살고 싶을 뿐이야.”

그렇다고 자본금이 많이 들어도 안 되고, 경기를 많이 타 어려움에 닥치지도 않을, 평생직장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이발 기술이 제일 좋아.”

이발을 처음 접한 것은 공군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할 때입니다. 훈련소를 나와서 자대를 배치받을 때 무작정 이발기술이 있다고 이발소 근무를 자청했답니다. 물론 부대 이발소에 들어가서는 기술이 전무한 것이 탄로나 처음에는 많이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말년 쯤은 제법 가위질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대하고 직장에 돌아가서도 늙어서까지 공장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예상하고 야간에 이발학원을 여러 달 다녔습니다. 이용사 시험을 봐 면허도 땄습니다.

1997년, 때 마침 IMF가 터졌습니다. 공장 문을 닫는 회사가 늘었고, 문을 닫지 않아도 경영이 어렵다고 직원들 퇴직을 권장하고, 명퇴를 하지 않으면 퇴출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동생은 가장 먼저 사표를 쓰고 떳떳하게 환송을 받으며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오래 준비한 이발소를 차렸습니다.

‘야, 대견하구나. 선견지명이 있었네.’


“다른 형제들 보다는, 그래도 막내 네가 가장 복있었지.”

“그래도 나는 지금도 가난이 가장 싫어.”

옛날 이야기를 합니다.

막내 여동생은 객지 생활도 하지 않고, 늘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를 떨어져보지 않았다는 것이 다른 형제들에 비하면 복이었습니다. 대학교도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가서 등록금도 다 내고 다녔고, 졸업하자마자 결혼해서 자기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남부럽지 않았을법한데,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이 가난이랍니다.

집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나가서 산 사람은 어떻게 살아 왔는지 안 봐도 구 만리입니다.

돈 달라는 소리 들어 줄 부모와 함께 산 사람이 그런 소리하면, 어려서 부모 떨어져 혼자 산 사람은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지금은 평안하면서도 가난에 진 응어리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면, 도대체 그 뿌리가 얼마나 깊이 박혔단 말입니까?


우리는 명절에 부모님 집에서 4남매가 한자리에 모일 때마다 입을 모읍니다.

“부모님이 여태까지 건강하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지.”

“이제야 우리는 부모덕을 보는 거야.”

“역시 하나님은 공평하셔.”

공부할 기회는 넉넉하게 갖지 못했지만, 늦게나마 가족 모두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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