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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토론토 여행광활한 토론토 길, CN타워, 장엄한 아이아가라 폭포, 보고싶은 이종희 선생님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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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1월 24일 (월) 23:02:59
최종편집 : 2008년 12월 12일 (금) 15:06:01 [조회수 : 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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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토론토 여행

광활한 토론토 길


“카나다 함께 가실래요? 조카의 자녀들을 방학 때 좀 돌보려고, 데리러 가는데....”

“좋지요, 갑시다. 나도 만나볼 사람이 있어요.”

친구처럼 지내는 사촌의 제수씨와 동행했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하기 전부터 카나다에 사는 이종희 선생님을 만나 볼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도착해서도 이메일을 보내고 전화도 여러 번 해 봤지만 통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이메일은 열어보지를 않았고, 전화는 언제나 통화중이었습니다. 카나다에 가면 전화통화가 되거나,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수소문해서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카나다로 운전길을 나섰습니다.

“와, 굉장하군요.”

   


카나다행 길은 광활했습니다. 뉴욕에서 토론토까지 8시간을 운전해야한다는데, 시속 110킬로미터로 8시간이면, 한국에서는 서울 부산을 왕복하는 길이와 맞먹습니다. 도로공사를 하느라고 1시간, 카나다 입국심사를 기다리느라고 1시간, 2시간을 지체해서 모두 10시간을 차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땅에서 북동부 일부 지역을 지나온 것일 뿐입니다.

남부를 간다거나 서부를 자동차로 여행하려면 R.V.(Room Vehicle)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법도 합니다. 몇 시간이고 운전해 가다가 한가한 숲에서 차를 세우고 방에서 잠도 자고 밥도 해 먹고 쉬다가, 아침이면 또 일어나 하루 종일 운전해서 가는 것입니다.

기차여행이야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니까 우선 피곤하지 않고, 먹거나 잠 잘 수 있으니까 며칠 밤을 가도 상관없지만, 자동차 여행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남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바깥 구경을 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만, 10시간동안 기름 넣을 때만 서고 계속 달리려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카나다는 어딘가 모르게 여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CN타워

“토론토에서 처음 가라면 어디를 추천하겠어요?”

“오전에 CN타워만 갔다가 오세요. 오후에는 나이애가라폭포를 가야하니까요.”

이튼 날 혼자 토론토 관광을 했습니다. 전철을 혼자 타고 나가, 역에 내려서 대합실에 들어서자마자, 제복을 입은 키 큰 사람 둘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불러 세웠습니다.

“CN타워를 어떻게 가지요?”

   


그 중 키 작은 사람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내 머리 위에서 설명이 다 끝날 때까지 눈을 떼지 않고 나를 내려다보며, 반쯤 웃고 있었습니다.

미국인은 민간인에게 길을 물어보거나 말을 걸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천천히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데, 제복을 입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아듣든 말든 자기 빠르기로 설명하고는,

“OK?”

하고 맙니다. 다시 물어볼라치면 끝에,

“OK? OK?”

두 번 'OK'면 또 다시 물어볼 엄두가 안 납니다.

카나다 제복은 미국인 민간인만큼 친절했습니다. 미국보다 더 여유가 있다는 뜻일 겁니다.

대합실을 나와 몇 걸음 떼었더니 높이 솟은 CN타워가 금방 눈에 들어 왔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걸, 몇 발짝만 가면 보이는 걸, 어린아이도 다 알겠는 걸, 그걸 물어보느냐고 하는 듯한 키 큰 제복이 지은 미소를 나도 지었습니다.

“와, 이게 뭐야! 지평선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지평선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제 해가 질 녘에 카나다 국경을 넘으면서 지평선에서 수평으로 붉은 노을이 지더니, 날이 어두워지자 지평선 끝까지 불빛이 까맣게 보이더니, CN타워 꼭대기에서도 그 지평선이 그대로 펼쳐져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고는 넓디넓은 땅끝과 땅끝에서 어디에선가 만났을법한 하늘이 되돌아올 뿐이었습니다.

CN타워가 얼마전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았답니다. 1976년에 TVdhk 라디오 송출탑으로 지었는데, 지금은 토론토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가장 높은 전망대에서는 멀리 나이애가라폭포도 볼 수 있답니다. 4년 전에 대만에서 101 타워를 지어 지금은 세계 두 번째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세계 첫 번째니 두 번째니 다투어도 남산 꼭대기에 세운 남산타워만큼은 실재로 더 높지 못할 것입니다. 도시의 땅 바닥에서, 산 높이와 탑 높이를 함께 계산하면 남산타워가 단연 세계 으뜸일 것입니다. 남산 타워는 산에 지음만큼 으뜸이라도 또 도시에 산이 많아서, 군데군데 산이 가리고 골로 낮아져서 서울 도시 중 못 보는 곳이 많습니다. 반면에 CN타워는 가리는 구석 없이 토론토 구석구석을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땅은 평평하고, 탑은 넓은 땅 가운데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이종희 선생님도 여기를 올라와 봤을 거야. 이민 온 지 20년이 되었으니까.

‘올라 와서는, “어머나”하고 감탄을 했겠지.’

소리 지르는 모습이 선연합니다. 한 바퀴 돌고, 두 바퀴 돌고, 거꾸로 돌고, 안에서 돌고, 밖에서 돌고, 바다를 찍고, 거리를 찍고, 바짝 찍고, 멀리 찍고, 나도 찍어 주고, 나를 찍어 달라 그러고, 이제 내려가도 후회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싶을 때 한 층을 내려왔습니다.

‘와, 깜짝이야, 이게 뭐야!’

본능적으로 몸을 사렸습니다.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는 글래스 플로어 Glass Floor 였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햇빛에 440미터 높이에서 아래 땅바닥이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유리가 깨질지 안 깨질지를 따지기 전에, 바닥이 보이는 허공에 선뜻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누워서 사진을 찍느라고 야단입니다.

옆으로 펼쳐진 유리와 아래에 깔린 유리는 정말 천지차이였습니다. 기차를 타고 올 때, 라운지 카 Lounge Car 는 옆면과 머리 위 일부가 유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 위는 늘 닫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낮에는 구름이 밤에는 별이 머리 위로 흐르는 것을 볼 수 있어서 참 새로웠습니다. 여기서는 하늘 위에서 땅으로 발밑에 유리를 두고 보니 또 새로웠습니다. 순간 유리 아래로 몸이 떨어져 내리는 듯도 했습니다. 온 몸이 짜릿했습니다. 유리는 옆에 있는 거라는 고정관념을 깨니까 새로운 풍경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현대는 고정관념을 빨리 깨는 사람이 앞서가는 사람이라더니, 맞는 것 같습니다.

나머지 두 개의 입장권은 바닥으로 내려와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무빙시어터 Moving Theater 와 CN타워를 소개하는 영상물이 있었습니다. Moving Theater 입구에서 한국말을 하는 가족을 만났습니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혹시, 이종희, 이민지, 이미연 중 한 사람이라도 아는 이름 있으세요? 20년 전에 카나다로 이민을 왔는데, 어머니와 여자형제 6형제가 함께 왔어요. 교회도 다닌다던데, 모르세요?”

“모르겠는데요. 그렇게 찾는 것은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예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습니다. 이민 온지 7년 되었는데, 여기는 처음이랍니다. 초등학생 남매 아이를 데리고 카나다 데이(7월 2일 독립기념일)라 나들이 나왔답니다.

   


온타리오 호수가로 나갔습니다. 물이 있는 곳은 역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CN타워에서 봤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인 것을 보고 찾아 왔습니다. 출렁이는 물가를 걷으며 따가운 햇볕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공연을 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입니다. 높은 장대 위에 올라, 칼로 저글링을 하면서, 사이사이에 사과를 베어 무는 연기에, 시민들은 둘러싸 구경을 하고, 박수를 치고, 기꺼이 기부를 하고, 즐겁게 헤어졌습니다.

페리호는 호수 곳곳을 다니나 봅니다. 볼일로 다니면 가방을 메고 짐을 들고 다닐 텐데, 맨손에 모자를 든 것을 보니 관광객이었습니다. 작은 개인용 보트도 있고, 요트도 바람에 밀려다닙니다. 방파제에 부딪히는 물결이 제법 높은 걸 보니, 호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두지도에 하얀배가 제법 흔들릴 만큼이었습니다.

전철표는 올 때 왕복권을 끊어서 그냥 타기만 하면 됐습니다.


장엄한 나이아가라 폭포

“오늘은 카나다 데이라서, 나이애가라 폭포에 가면 불꽃놀이도 해요. 같이 가요”

“그래요? 알았어요. 가지요”

카나다 하면 이종희 선생님을 찾을 생각만 했지, CN타워니 나이애가라 폭포니 하는 것은 마음에도 없었습니다. 혹시 이좋의 선생님을 만난다면 그 다음에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입니다. 오후에 아이들도 모두 데리고 2시간이 걸린다는 길을 나섰습니다.

“와, 장관이구먼. 이런....”

   


“우리는 다 타봤으니까, 저 아래 내려가서 배를 타고 폭포 아래까지 갔다 오세요. 여기서 기다릴께요.”

나이애가라 폭포는 말로만 듣던 것과는 달리 장관이었습니다.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습니다. 오길 잘 했습니다.

나이애가라 폭포는 미국과 카나다 사이에 5대호 중에 이리호의 물 높이가 높아 온타리아호로 흘러드는 길목이 폭포랍니다. 한반도가 온타리아호에 고스란히 빠지고도 호수가 남는다니, 그 호수의 수준을 일정하게 유지할 뿐 아니라 농업용수 공업용수 생활용수로 쓰고도 남을 만큼의 물이, 두 개의 폭포로 끊임없이 흘러내립니다. 높이는 또 얼마나 되는지 바닥에 부딫히고 피어오르는 안개가 어제 폭포를 멀리로 지나가는 카나다 국경까지 보였었습니다.

“저 안개가 나이애가래 폭포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예요”

“그래요? 폭포가 가까운 모양이지요?”

뭐, 폭포가 있다면 있으려니, 별로 실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와서 보니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신 창조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CN타워에서 본 끝도 안 보이는 넓이가 조용했다면, 그 조용함이 이 폭포에서 모여 한꺼번에 소리치며 넓이의 말을 대신해 주는 듯합니다. 끊임도 없고, 쉼도 없고, 싫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좋은 것도 아니면서, 거슬리지도 않고, 달콤하지도 않으면서, 온 땅의 소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폭포 가까이까지 접근하는 배를 탔습니다. 나눠 주는 우비를 입고 갑판위로 올라갔습니다. 일자로 된 폭포는 미국의 영토고, 더 남쪽의 둥그런 만으로 쑥 들어간 폭포는 카나다 영토랍니다. 미국영 폭포에 조금만 다가가도 말소리가 폭포소리에 묻혀 사진을 찍어 달라는 손짓과 미소로만 의사가 통했습니다. 카나다영 폭포의 만으로 들어가자 삼방이 폭포로 둘러싸였고 물보라가 공중에서 모여 비방울이 되어 방향 없이 마구 때렸습니다. 윗물이 바닥의 물로 떨어지는 1/3 가량은 그래도 물줄기를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바위에 떨어지는지 물에 떨어지는지도 알 수 없게 안개로 덮여있고 물이 넘어 떨어지는 위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줄을 잘 서고, 양보 잘하고,

'Thank you'

'Sorry'

를 입에 달고 다니던 사람들도, 배에 전망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뛰어 앞지르고, 걸려도 모른 척 그냥 지나가고, 휠체어를 보고도 비켜주지도 않았습니다. 너무 장관을 이루어 감정을 주체를 할 수가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한 껍질만 벗기고 보면 다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니까, 추워요”

“아이들 옷은 챙겼는데, 어른 옷은 하나도 가져오질 않았네요”

나도 북쪽으로 오면 여름이라 해도 혹시나 긴팔 옷이 필요할까봐 가방에 넣긴 했는데, 정작 필요한 지금은 가져올 생각을 못했던 것입니다. 폭포의 야경을 구경할거라는 이야기도 오갔는데, 어른들은 모두 낮에 입었던 반소매 차림입니다. 생각을 한 번 더 했어도 긴소매를 가지고 오는 건데, 너무 더워 벗어나고 싶었던 낮기온이 고 '한 번 더'를 허용치 않게 했습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지요. 평소에는 'Thank you', 'Sorry'를 달고 다니다가 더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금방 무질서해 지는 것이랑 다르지 않습니다.

한편, 작은 생각의 차이로 저녁 내내 추워야 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폭포는 보아서 좋지만, 기대했던 이종희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고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마냥 즐겁지는 않습니다.


보고싶은 이종희 선생님

예상치 못 했던 추위를 떨쳐버리려 해도 떨칠 수 없는 것처럼, 만나지 못하고 카나다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폭포 앞 물위로 쏘아 올리는 불꽃은 카메라에 담아도, 크게 웃는 이종희 선생님의 얼굴은 다시 눈에 담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종희 선생님은 대산 우체국에 발령을 받아 대산에 살 때 처음 만났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취직을 하려고 신문광고를 들고 서울 시내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한달간 쉬지않고 다녔지만, 일할 만한 자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공무원 시험서를 한 가방 사들고 고향으로 내려갔습니다. 시험기간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다행히 합격이 되어 발령을 받은 곳이 충북 단양에서 가장 먼 충남 서산군 태안읍 안면도 우체국이었습니다.

충청체신청 관할 중에 가능한 한 가장 멀리 보낼 수 있는 곳이 바로 안면우체국이었습니다. 83년 4월에 시험을 봐서 7월에 합격자 발표를 했는데, 그 해가 다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겁니다. 새해가 되어 혹시 잊어버리고 있는가 싶어서 대전에 있는 충청체신청에 찾아갔습니다.

“왜 발령이 안 납니까? 합격됐다고 통보를 받은 지 반년이 지났는데.”

발령 안 내고 뭐하냐는 투로 이야기 했는가 봅니다. 그때 아마 미운털이 박혔는지 한 달 후에 발령을 냈는데, 연고지 발령 우선을 무시하고 극에서 극으로 보냈습니다. 충청도 동쪽 끝 단양에서, 한반도를 횡단해, 충청도 서쪽 끝에 있는 섬 안면도.

이것이 내 일생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먼저는 이제는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세상에 첫발을 디뎌 세상과 당당하게 맞닥트려 살아가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이고, 다음은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안면도에서 시보기간이 끝나기 전, 6개월이 차기 전에 대산으로 옮겼습니다. 대산교회 청년회는 20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종희 선생님은 피아노학원을 했습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서 차 마시러 가고, 청년회 회지를 만든다고 거기서 모이고, 어느 날 밤은 둘이서 마당 앞 바위에 앉아 새벽이 되도록 이야기하고, 나이는 나보다 서너 살 위의 누나였지만 친구처럼 마음이 통했습니다. 좋은 친구를 깊이 사귀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신감을 더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종희 선생님은 청년회에서 몽둥이로 통했습니다.

“이럴까, 저럴까?.”

“될까, 안 될까?”

청년들이 모여앉아 고민을 하다가, 이종희 선생님에게 의견을 물으면, 바른 방향을 잡아줍니다. 또 결정이 나면 몽둥이처럼 단호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늘 손을 짚고 걷는 소아마비 앓은 쪽 다리가 심하게 아파서, 서울까지 구급차를 타고 가게 됐어요. 구급차가 고속도로를 가다가 정체가 되니까, 그때는 싸이랜을 켜고 삐용삐용 하면서 갓길로 냅다 달리는 겁니다. 소아마비는 시간을 다투는 위급한 상황도 아닌데, 자기들 편하려고 멀쩡한 환자를 이용하더라고요.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나 자신을 보고 정직해야지, 이렇게 상대방이 모르기만하면 양심을 속이는 한국이 어떻게 발전을 할 수 있겠어요?”

카나다로 이민을 가서는 우리교회 카페에 들어오는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습니다. 이민교회에 가서야 예수 믿는 참맛을 알았답니다.

“한국에서는 신앙이 좋아 보이면 피아노 반주에, 주일학교 교사에, 속회 인도자에, 청년회 활동에, 성가연습까지 다 맡기잖아요. 거기다가 수요예배는 물론 새벽예배에 철야기도까지 나오라고, 그래도 죽을 수밖에 없는 부족한 죄인이 아니냐고 닦달을 해요. 교회에 몸과 마음을 꽁꽁 묶어 놓아 자유는커녕, 있던 자유도 잃어 본전도 빼앗기고 오잖아요. 그런데 카나다에서는 달라요. 온 가족이 한꺼번에 차로 교회를 가 먼저 예배드리고, 식사를 하고는 각자가 속한 모임에 가요. 비슷한 동료를 만나 갖는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 사랑과 그 사랑 속에 있는 한없는 자유를 느낄 수 있어요. 여기 와서야 예수 믿는 참 맛을 볼 수 있었어요. 이런 자유가 한국교회에는 왜 없는지, 목사님은 하나님 사랑 안에 있는 참 자유를 성도들에게 맛보이는 목회를 해 보세요.”

하고 목회를 막 시작한 내게 충고해 주었습니다.

대산에서 공무원을 2년만에 의원면직한 후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입학하고 처음 느낀 내 소감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성도로 살았으면, 인생을 목사들의 휘둘림에 끌려 다닐 뻔 했구나. 내 성격과 약한 심장으로 봐서는 목사들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알고 따랐을 텐데. 신학을 하길 잘 했구나.’

생각할수록 끔찍했고, 안도감과 함께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참 자유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가 신학과 목회의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목사라는 것이 돈에 얽매이지 않고, 높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큰 교회 가려고 눈치 보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유인입니다. 성도들은 어떻게 자유를 누리게 할까가 숙제였습니다. 먼저 자유인인 목사가 자유를 줄 수가 있을 것이고, 예배드리는 것 외에 한 사람이 원하는 한 가지 일만 맡기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나와 신앙생활을 한 성도들이 얼마나 진리가 주는 자유를 누리며 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50중반의 나이에 여전히 혼자 살고 있을까? 아니면 혼인의 재미에 빠져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일까?’

지금은 이종희 선생님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운전을 도왔습니다. 8시간 중에 반을 했습니다. 길 잘 나 있지요, 차 잘 나가지요, 한국 같으면 4시간을 쉬지 않고 운전하면 엄청 피곤할 텐데, 미국에서는 쉬지 않고 달렸는데도 별로 피곤한 줄을 모르겠습니다. 일단 카나다를 다녀왔으니 당분간 단념하고,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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