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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집 짓는 이야기뉴욕과 1970년대 집 짓던 이야기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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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1월 15일 (토) 22:29:50
최종편집 : 2008년 11월 19일 (수) 18:16:43 [조회수 : 4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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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집짓는 이야기

미국의 집은 벽돌담장이 없습니다. 길에서 바로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훤히 트여있습니다. 마당에 잔디 없는 집이 없습니다. 아파트에서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나면 바로 경찰에 신고해 제제하도록 하지만, 옆집에서 잔디 깎는 소리가 아침부터 아무리 시끄러워도 불평하지 않는 답니다. 나도 잔디가 자라면 또 그런 소리를 내며 깎아야 하기 때문이랍니다.

“우리 이사해야 해. 이사 가는 집은 낡아서 수리를 많이 해야 해.”

“이역만리에서 놀러 왔는데, 이사해 주게 생겼군”

   



카페트를 갈고, 벽지를 뜯어 페인트로 칠하고, 닥트를 청소하고, 외벽을 씻어내어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베란다 나무 계단에 방수페인트 칠하고, 정원수 전지도 한답니다. 수리할 곳을 둘러보며 집의 재료가 무엇인지, 구조는 어떤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바닥이야 철근 넣고 콘크리트를 치겠지요. 그런데 철근 파는 가게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레미콘차 지나다니는 것도 못 봤습니다. 건설공사 중인 공사현장은 가끔 눈에 띄던데 바닥공사 하는 현장이나 준비과정을 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기초공사는 튼튼히 하겠지요, 바닥이 갈라지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야, 이게 뭐야. 없는 게 없잖아.”

“집을 짓거나, 수리하는 필요한 것은 여기만 오면 다 찾을 수 있어.”

홈디폿 Home Depot 이었습니다. 건축에 관한한 없는 것이 없이, 이층높이는 될만하게, 끝도 없이 쌓아놓았습니다. 작은 나사못에서, 벽채를 통째로 세워 놓게도 했습니다. 주로 나무로 집을 짓는데, 나무 규격도 종류별로, 하다못해 튀김용 젓가락만한 크기의 나무까지 가공해 놓았습니다. 울타리도 갔다가 말뚝 박아 심기만하면 됩니다. 창문과 창틀은 물론, 화장실과 샤워장도 들어다 놓기만 하면 되도록 했습니다.

목수의 수준은 게꾸미(계단) 짜는 것을 보면 됩니다. 경사에 맞추어 계단을 몇 개를 놓을 지, 그래도 계단 폭은 30㎝로, 계단 높이는 15에서 18㎝로 유지해서, 마지막 남는 하나가 더 크거나 작지 않도록,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목수의 실력입니다. 그런데 홈디폿에는 계단까지 다 짜여져 있습니다. 발판을 수평으로 유지해서 길이만 맞추면 되게 생겼습니다.

‘야, 이 새끼들 무섭구만.’

설계도를 여기로 가지고 와서 무엇이든 규격에 맞게 잘라 가기만하면 집을 한 채 지을 수 있을만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집을 지으려면 재료를 여러 군데서 가져와야 합니다. 철물은 철문점에서, 보일러 파이프나 위생설비는 PVC전문점에서, 전기공사는 전기재료에서, 철근이나 철판은 철강에서, 판넬은 판넬공장에서, 페인트는 페인트집에서 각각 사와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이런 것이 한군데에 다 모여 있습니다. 각종 공구까지 집을 짓는데 필요한 물품은 무엇이든 몇 평이나 되는지 모를 넓은 터에 키로 두세길 되도록 쌓여 있습니다.

각종 건축자재를 공장에서 만들어서 이 상점에 납품만하면 바로 소비자에게 넘어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중간 도매상이 필요 없습니다. 생산자는 소비자가 쓰는 값을 받고 팔아서 제값을 받는 것이고, 소비자는 공장에서 나온 값으로 사서 또 제값에 쓰는 것입니다.

‘물류를 멈춰, 세상을 바꾸자’

덤프차 기사들이 파업을 하면서 내건 슬로건입니다. 짧은 말 한마디가 덤프차처럼 무겁게 느껴집니다.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이어, 벌써 두 번째 이 슬로건을 내 걸고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5년 전에도 한 차례 전국 물류를 멈췄는데, 아직도 똑같은 일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호도 똑같습니다.

운송료를 올려주든지 기름값을 내려 달라는 데모입니다. 운송료가 적은 것도 적은 것이고 기름값도 올랐지만, 더 큰 문제는 화주와 운전자 사이에 알선업자가 많은 탓이 큽니다. 화주가 운송 물자를 주면, 알선책이 받아 소개료를 챙기고 알선자에게 주고, 알선자는 또 소개료를 먹고 중간책에게 주고, 중간책은 또 소개료를 떼고 중간자에게 주고, 이렇게 몇 다리를 건너 운전자에게 가면, 화주가 내 놓은 운송료의 절반도 운전자에게 가지 않는답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떼놈이 챙긴다고, 운전자들이 화나게 생겼습니다.

   


일하지 않고 전화기만 붙들고 앉아서 소개료만 먹는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 중간 알선자들이 운송료를 다 떼어먹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왜 개선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책입안자들이 로비를 받았는지, 아니면 바로 이들이기나 한지, 빨간 머리띠들 속에 든 화가 덤프만한가봅니다.

농사를 지어서 파는 농민은 적은 값에 팔고, 사먹는 소비자는 비싸게 사야하는 유통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통과정이 너무 여러 단계라서 땀 흘리지 않는 자들이 불로소득을 챙기고 있습니다. 왜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개선하지 못할까요? 아마 정치권이 땀을 흘리지 않는 자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초 위에 흙으로 묻히는 벽은 8인치 블록으로 벽을 둘러쌓았습니다. 기둥이 필요한 곳은 8인치 블록을 두 장씩 둘러가며 쌓아 올리니까 튼튼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블록은 구멍이 세 개인데, 미국의 블록은 두 개입니다. 둘러가며 쌓아도 구멍은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습니다. 여기다가 시멘트를 비벼 넣으니까 훌륭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블록은 같은 높이로 쌓은 위에 2 by 8 각목을 눕혀서 한 바퀴 둘렀습니다. 그 위로 1층 바닥을 놓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둘러놓은 2 by 8위에 같은 크기의 나무를 40센티 간격으로 세로로 세워 놓고, 그 위에 마루를 깔았습니다. 세운 나무들은 X자로 지지대를 쳐서 견고하게 붙들었습니다.

1층부터는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안팎으로 OSB 합판을 치고, 합판 가운데는 단열재를 넣었습니다. 지붕 석가래도 각목을 깔고, 그 위에 합판에 아스팔트 슁글을 입혔습니다.

외벽이 다양한데, 우리나라에서 평판넬 위에 흔히 붙이는 비닐 사이딩이 여기는 많았습니다. 시멘트 하디사이딩이 여기도 있구나 하고 만져보았더니 송판 모양의 비닐 사이딩이었습니다. 겉으로는 벽돌처럼 보여도 합판 위에 장식으로 붙인 곳이 많았습니다. 진짜 붉은 벽돌로 지은 집도 있겠지만, 가서 확인은 못해봤습니다. 사이딩이 아니면 나무를 지붕을 덮는 사이딩에 두 배는 되는 넓이로 아래서부터 그냥 위로 박아간 것도 있습니다. 나무에 유성페인트를 두껍게 칠해서 몇 십년을 견디나 봅니다.

이목사네가 이사 갈 집이 나무로 외벽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아서 손볼 곳이 많았습니다. 바깥은 이사와 살면서 차차 손보기로 하고 우선 내부를 수리하는 것입니다.

“혼자 일하남?”

“예, 지금은 혼자예요.”

“인건비는 얼마나 받나?”

“시간당 10불인데, 일을 다 마치면 1,000불은 될 것 같아요. 벌어서 한국에 나갈 여비에 보태려고요.”

“누가 일을 줬어? 혼잔데 언제, 얼마나 일을 했는지, 어떻게 알아”

“마큰데, 일하러 도착하면 전화하고, 마치고 갈 때 전화하면, 시간을 따져서 줘요. 오늘은 밤 11시까지 일하려고요.”

“이런 일은 얼마나 해 봤어, 잘하네.”

“마크와 두 번 일하면서 배웠어요. 지금은 혼자 일 할만 해요.”

지금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1.5세 교포청년 데이빗이었습니다. 마크는 지금 직장에 출근해서 다른 일을 하고, 퇴근하면 온답니다. 투잡스 Two Jobs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이민을 와서 부모는 모두 일을 하고, 자기는 지금 약대에 다닌답니다. 도배를 한 벽에 도배지를 벗기고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입니다. 도배지 벗긴 곳에 풀을 제거하는 약품의 사용설명서를 꼼꼼히 읽어가며 롤러로 칠했습니다. 풀이 물러지기를 기다리는 동안도 쉬지를 않았습니다. 마크가 보든 보지 않든 일하는 시간만큼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하지만 그때는 너무 힘들었어.’

퍼뜩, 떠올리기도 싫은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1978년 야간대학 1학년 2학기 시절, 돈이 떨어져서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친구에게 대리출석을 부탁해 놓고 돈을 벌러 나섰습니다. 고향 선배인 창우형을 찾은 겁니다.

창우형은 미장기술자였습니다. 사촌 형도 창우형과 같이 일했습니다. 이들은 미장일의 뒷모도, 즉 조공으로 따라 다니는 아주머니네 집에서 머물렀습니다. 나도 조공으로 합세했습니다. 미장 기공 한사람에 조공이 셋이 된 것입니다.

아주머니네는 산비탈 중턱에 단간방을 얻어 살았는데, 자녀 7남매를 미장 조공을 따라다니며 벌어서 길러야 했습니다. 맏이가 고등학교 2학년인데 아들이라 상업학교에라도 보내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 아래로 딸들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일을 할만큼 크기만 했으면 취직을 했습니다. 막내가 또 아들인데 겨우 젖을 뗐습니다. 이 식구를 남겨두고 남편이 세상을 뜬 것입니다. 서울 바닥에서 거리에 나앉지 않고 목에 풀칠하는 것이 천만다행이었습니다.

이 식구들에 우리 셋도 합해 열 한명이 한 방에서 잤습니다. 어쩌다가 여관에서 셋이 자기도 했지만, 돈이 아까워 일이 끝난 저녁에는 다시 아주머니네 집으로 왔습니다. 아주머니는 기공을 붙잡지 못하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밥까지 해 먹여가며 불편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두 어깨를 바닥에 모두 붙이고 잘 수 없었습니다. 양 다리를 온전히 뻗을 수도 없었습니다. 칼잠을 얹고 얹혀서 자면서, 노가다 뒷모도를 했습니다.

“형, 나 오늘은 도저히 못하겠어. 몸살이 심해.”

“그래? 그럼 집에서 쉬어라. 노가다 처음인데, 여드레 일한 건 많이 한거다.”

방학이면 농사일은 해 보았지만, 막노동일은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렀습니다. 먹은 욕만해도 소화가 안 되서 앓게 생겼습니다.

기공이 하나에 조공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는 조공을 데리고 오지 않은 다른 기공 밑에 붙었습니다. 대게는 기공 둘에 조공 하나인 경우가 많습니다. 바닥에서 모래를 얼개로 쳐서, 시멘트를 섞어 사모래를 만든 다음에, 시멘트를 쏟은 부대에 사모래를 담아, 뒤로 지고 벽돌을 쌓는 기공이나 미장을 하는 기공의 사모래통에 부어야 합니다. 둘이니까 짐작을 하고 각자 잘 공급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물”

하고 소리치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달라고 소리치기 전에 물통에 물을 담아다 놔야 했습니다. 빈 통에 욕을 가득 담아 와서, 물로 바꿔 들고 가야 합니다.

“오늘은 벽돌 지는 일이다.”

우리는 조공이 많아 다른 일을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벽돌을 40장씩 지고는 3층이나 4층씩 올라가 쿵 쿵 내려놓기를 하루 종일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공그리야.”

   


모래 통에 모래를 한 짐씩 지고는 슬라브 치는 옥상 대빵에 올려다 손잡이를 놓아 쏟아 놓으면, 자갈을 진 사람들이 자갈을 또 한 짐씩 쏟아 놓고, 시멘트를 맡은 사람은 시멘트를 두 포 따서 놓으면, 삽을 든 사람 둘이서 양쪽에서 삽질을 해 골고루 섞어서, 가운데를 물을 받을 수 있도록 째 놓으면, 물통을 든 사람은 물을 퍼다 붓고, 삽을 든 사람이 다시 섞어, 합판을 쳐 놓은 거푸집에 쓸어 넣습니다. 이런 공그리를 치는 날은 일이 일찍 끝나도 하루 일당을 쳐 줍니다. 일당도 다른 일보다 더 많습니다. 공그리 일이 힘이 들기도 하려니와, 공그리는 빨리 치면 빨리 칠수록 좋기 때문입니다.

앓기도 이 집에서 앓았습니다. 내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이 좁은 집에서 게겼으니, 다른 사람의 불편이야 또 말해 뭐하겠습니까? 창우형이 밥값은 제대로 계산을 해서 떼어 주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달을 일을 더 했습니다. 그리고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공부한 것 없이 학기말고사를 앞두었습니다. 한 달 벌은 것으로 외투 하나 사 입고, 독서실에서 자고, 시장에서 하루 한 끼 밥 사먹을 때는 간장만 남기고 반찬까지 다 먹고, 50원에 세 개하는 호떡을 15개나 먹어 하루 양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던 공부는 총쏘기로 했다가, 문제가 빗겨나도 그냥 외운 문제를 바꿔서 제목으로 쓰고는 답을 써 나가기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었습니다. 부모가 자녀 생각해서 이민을 와 희생하면서 키운 자식이 약대를 가고, 아르바이트를 착실히 하는 것을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두 학기를 마친 방학 때는 밀항이라도 해서 미국에 가보자고, 가기만 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게 되겠지 하고는, 부산으로 내려가 외항선원이 되는 길을 알아보기도 했습니다.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아 안 써 준다고 해서 돌아섰던 기억이 납니다.

‘아, 돌아보니, 그렇게 몸부림치던 인생이 벌써 중년을 지나고 있구나.’

30년 만에 오고 싶었던 땅을 와서는 집지은 것을 꼼꼼히 살피고 있습니다. 두지도 섬에 조그만 집을 짓고 아내와 둘이 노후를 보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물이 빠질 때마다 바다에 나가 겟것을 하고, 나는 그동안 산 세월을 돌아보며 글을 쓰며 살고 싶을 뿐입니다.

데이빗이 혼자 남아 작업을 한다기에 간식을 사 주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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