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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사건 재조명-박찬종 전 의원에게 회개를 촉구한다박찬종 전 의원은 BBK 김경준 사건의 변호사로도 활동했다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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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1월 15일 (토) 10:29:40
최종편집 : 2008년 11월 16일 (일) 21:45:33 [조회수 : 5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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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양 사건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었다   

 

[편집자 주]

1987년 8월29일 오전 11시경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 2리 주식회사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32명의 집단변사사건이 외부세력에 의한 집단타살이라고 대부분 믿고 있는 중, 최근에 외부세력에 의한 집단타살이 아니라,자의에 의한 집단자살이라고 입증할 만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월간 "교회와 이단" 1995년 4월호 '특별기고'

[필자 주] 이 글의 원래의 제목은 '오대양 사건 재조명-박찬종 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였으나 당시 월간 "교회와 이단" 발행인 이대복 목사가 '오대양 사건은 타살이 아닌 자살이었다'고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2008년 11월 12일 

요사이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1987년 8월 29일 오전 11경 경기도 용인군 남사면 북 2리 주식회사 오대양 용인공장에서 주방 일을 하고 있었던 김영자 씨(당시 41세, 여)에 의하여 최초로 발견되었던 32명(남4 +여28)의 집단 변사자들의 사인이 외부 세력에 의한 집단타살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대단히 안타깝고 애석하고 어처구니 없고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사인은 외부세력에 의한 집단 타살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집단자. 타살, 즉 집단자살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작년 3월경 우연한 계기로 인해 오대양 사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후 이제까지 틈틈히 오대양 사건의 전반에 관하여 추적 조사 연구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작년 월간 “시사정경” 9월호에 오대양 사건에 관한 글을 한번 발표했던 바가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오대양 사건에 대한 단행본을 하나 준비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추적 조사 연구의 결과로써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사인이 자의에 의한 집단 자. 타살이 아닌 외부세력에 의한 집단타살로 왜곡되어져 세인들로 하여금 인식되게 하였던 그 가장 큰 원인은 1991년 7월19일 상오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의 박찬종 의원의 기자회견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때 박찬종 의원은 오대양 사건의 배후에 소위 구원파라고도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와 주식회사 세모의 유병언 사장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이 글을 통해서 그 당시 박찬종 의원의 기자회견이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무사려했을 뿐만 아니라 신앙적(박찬종 의원은 천주교 신자)으로도 큰 죄악이었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사인이 집단자살일 수밖에 없다는 객관적 증거를 몇 가지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거기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1. 박찬종 의원은 주식회사 오대양 용인 공장의 한 천장에서 집단자살이 시작되기 약 10시간 전에 유재순 (당시 49세. 여)이라는 여인이 그곳에서 아래로 내려왔다가 1987년 8월28일 오전 오대양 용인 공장을 급습한 경찰수사대에 의하여 붙잡혀 사기죄로 약 징역 1년을 살고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부검을 맡았던 황적준 박사(고 박종철 군의 부검을 맡고 그당시 그의 사인이 고문치사라고 주장했던 현 고려대학교 법의학 교수)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재관 법의학 과장등은 그들 중의 첫 번째 사망자의 사망시기를 1987년 8월 29일 상오 1시, 그들 중의 마지막 사망자의 사망시기를 상오 11시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제3의 집단(소위 구원파와 주식회사 세모)이 약 10시간 내에오대양 용인 공장의 한 천장 위에 숨어 있던 32명을 밖으로 데리고 나와 그들을 제3의 장소로 데리고 가서 집단 타살한 뒤 그들 모두를 다시 그곳으로 올려놓았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과거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은 고 탁명환씨, 대전침례신학대학 정동섭 교수,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단, 전 국회의원 김현씨 등입니다.  

 

 

2. 박찬종 의원은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의 발생 얼마 후 고 탁명환 씨와 한패가 되었던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단이 오대양 집단변사사건 발생 직전인 1987년 8월26일 충남 도경 수사과에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장 박순자 여인(당시 48세) 및 사채 모집책들의 집단자살을 막아달라고 신고까지 했었던것을 알고 있습니까? 

 

 

동아일보 1987년 9월 1일 9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26일 1백 78명이 모여 채권단을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27일에는 박여인이 정부 각기관으로부터 수많은 상패와 표창장, 공로패 등을 받은 경위를 설명해 줄 것을 요구하며 충남도청에 몰려가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앞서 목사까지 포함돼 있는 채권단은 소문과 제보등을 통해 박 여인의 사술에 놀아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시작하면서 ”잠적한 박여인 등이 집단자살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점을 경찰에 알리고 대책을 강구하도록 촉구했으나 경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을뿐 적극적인 소재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현재 채권자들은 경찰의 미진한 수사태도에 불만을 품어 경찰의 수사에 기대하지 않고 채권단 스스로 자체조사반을 편성, 박여인의 재산조사 등에 나서고 있다. 채권단이 경찰을 불신하는 것은 채권단이 박여인 등의 집단자살 가능성을 강력히 제기했는 데도 이를 진지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고 채권자 이상배 씨 폭행사건의 사주인물로 고발됐던 박여인을 경찰이 제대로 감시하지 않아 결국 박여인이 자살극을 연출할 계기를 주었다고 보기 때문, 일부 채권자들은 이번 사건의 결과에 대해 경찰이 부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 탁명환 씨의 월간 “현대종교” 1987년 10월호 172~173P에는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단의 한명인 홍은석 씨의 글이 아래와 같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우선 박순자의 남편 이기정 씨와 통화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여러 면으로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 박순자가 성모병원에서 도망갔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우리는 무릎을 치며 묘한 감탄사를 토해 놓았다. 한편으로는 아뿔사이고 한편으로는 그러면 그렇지였다.

박순자의 지시에 의해서 보모들이 시내 어느 곳에 집결하여 유아들을 빼돌리는 모습이 눈으로 보는 듯 선하게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늦은 시각에 이기정 씨와 Y의 통화가 이루어졌다. Y는 만나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기정 씨는 시간이 없다며 내일 아침에 만나자고 했다. 끈질기게 만나자고 해서 승낙을 받았다. 자정쯤 보문산 오거리에서 만났다. 밤이 늦었고 조용히 이야기할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다방도 이미 문을 닫은지 오래였다.

부근 00여관 202호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씨는 아무 일도 아닌 듯 또는 모르는 듯 표정 하나 흩어지지 않고 이야기 했다. Y는 다음과 같이 제의를 했다.

“이자는 지급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원금도 천천히 갚아도 좋고요. 그러니 박 사장이 돌아와 공장을 가동하도록 설득해 주십시오. 사람 목숨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빨리 지명수배해서 찾으십시오”

엄청나게 많은 사채를 끌어다 썼으니 뒷감당할 자신이 없어 죽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렇지만 이기정 씨는 그럴 리가 없다고 태연했다. 거듭 촉구했더니 이씨는 도경 모 형사와 통화를 했다.

“나요, 이기정이 밤늦게 죄송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통화가 족히 10분은 진행되었다. 몇 마디 생각나는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어이 큰일났네, 우리 애들이 다 도망갔다네”

-네가 감추어 놓은거 아냐?

“허허 농담하지마!”

-네가 돈 줬다는 얘기가 있는데 무슨 말이야?

이 말에는 그냥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긴급히 수배해서 찾아달라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집단자살이 예측된다고 이기정씨에게 강력히 이야기했으나 피곤하다며 시큰둥한 채 내일 도청에서 만나자고 했다. 우리의 제보를 무시한 경찰에게 살인방조의 책임을 묻고 싶다. 이틀 후 시체로 발견된 32명, 경찰의 직무 태만 속에서 죽음의 그림자는 그들을 삼켜버렸다."   

 

 

3. 박찬종 의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오대양 사건의 배후에 소위 구원파와 주식회사 세모의 유병언 사장이 있다고 거짓 폭로했던 것을 죽기 직전까지 자랑했던 고 탁명환씨 조차도 오대양 집단변사사건 발생 직후에는 오대양 집단 변사자들의 사인이 집단자살이라고 인정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경향신문 1987년 8월 31일 3면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탁명환 소장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만 해도 자신이 재림주 또는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교주가 50여명 있다’며 ‘앞으로 이들 중에서 이번 박 여인처럼 집단 자살사건을 일으킬 우려가 있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87년 8월31일 5면에도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같은 박씨의 말세론에 대해 탁명환 씨는 성구를 인용하는게 문제가 아니라 말세 심판의 절박한 위기의식을 세상 끝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자기네들을 따라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탁 씨는 박 씨가 동반자살을 했다면 자살 직전 추종자들에게 80년대 중 말세가 온다며 죽을 것을 설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고 탁명환씨도 그의 현대종교 1987년 11월호 94P에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1987년 8월26일, 채권단은 경찰과 박여인의 남편 이기정 씨에게 행방을 감춘 오대양 신도들이 집단자살할 가능성을 경고하는 한편 용인에 있는 오대양 공장에 행방을 감춘 유아원 및 학사원 아이들이 있음을 제보했으나 경찰은 이를 묵살해 버렸다. 뿐만 아니라 다음날인 8월 27일에 경찰은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신변에 이상이 없다고 발표했다.”   

 

 

4. 박찬종 의원은 이 글의 앞에 한번 언급된 그 당시 부검의 황적준 박사가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집단자. 타살 여부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이경수 씨(당시 45세)의 사인이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필자는 얼마전 황적준 박사와 전화통화를 할 기회를 가졌었는데 그때에도 황적준 박사는 이경수 씨의 사인이 자살임이 분명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런데 필자는 고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발생시와 오대양집단변사사건의 발생시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노태우 6.29 선언 이전이고 후자는 노태우 6.29 선언 이후이기 때문입니다.   

 

 

5. 박찬종 의원은 고 탁명환 씨가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이 발생한 직후 오대양 집단변사자들 32명 전원이 죽기 직전까지 그들이 숨진채 발견된 오대양 용인공장의 한 천장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인정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고 탁명환 씨는 자신의 현대종교 1987년 10월호 146P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경찰은 28일 채권단의 제보에 따라 용인공장에 형사대를 보내, 공장에 숨어있던 부녀자 12명. 초.중고생 18명, 어린이 19명 등 49명(여기에 질의 1에 나오는 유재순씨 포함됨. 그녀는 오대양 용인공장의 한 천장으로 올라간 33인 중의 유일한 생존자. 미주판 중앙일보 1991년 7월 15일 1. 2면, 7월 16일 1, 2면 참조, 필자 주)을 찾아내어 연고자가 나타난 18명은 가족에게 인도하고 부녀자 10명은 대전시 동구 용전동 소재 대전 일맥자매원에 수용하고 나머지 21명은 대전시 중구 탄방동 소재 대전 시립아동 보호소에 보호 의뢰하였다. 그러나 천장에 숨어 있던 32명은 찾지 못하고 다음날인 29일 시체로 발견됐다.”   

 

 

6. 박찬종 의원은 바로 위의 유재순 여인에 대한 기사가 미주판 중앙일보 1991년 7월 15일자 1, 2면과 7월 16일자 1, 2,면에 보도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박찬종 의원의 1991년 7월19일 상오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의 기자회견이 있기 3, 4일 전에 이미 오대양 천장 거주자들 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재순 여인은 위의 기사들을 통해서 오대양 집단 변사자들의 사인이 '거의 강요에 의한 집단 자살'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유재순 여인은 1988년 9월 10일 전주 교도소에서 출감한 후 가졌던 인터뷰(일요신문1988년 9월 15일자)에서는 그들의 사인이 외부세력에 의한 집단타살일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만 그것은 그녀 자신이 그들의 사인이 집단자살이라고 인정할 경우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자들로부터 받을 채무이행 독촉에 대한 불안감과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재순 여인은 채권자들의 빚 독촉으로 인해 1989년초 그녀의 둘째 딸이 살고 있는 LA 그렌데일로 도피성 이주를 한 후 미주판 중앙일보의 기자들에게 그때에는 그녀 자신의 본심을 털어놓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7. 박찬종 의원은 최초에 33명이 오대양 용인공장의 한 천장 위로 올라갈 때 유재순이라는 이름의 여인이 2명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오대양 천장에서 죽은 유재순 (당시 55세)씨의 남편은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장 박순자 여인의 남편인 이기정 씨의 형인 이기양 씨이고 오대양 천장 거주자들중의 유일한 생존자인 유재순 (당시 49세)씨는 자신의 사채모집 행각 때문에 남편 박모 씨와 이혼하였습니다. 즉 그녀들은 서로 동명이인인 것입니다.   

 

 

8. 박찬종 의원은 월간조선의 이정훈 기자가 1987년 8월29일 오후 8시경 오대양 집단변사사건 현장에서 비디오 촬영과 사진을 찍으며 현장감식을 했던 이삼재 경정(현 57세, 경찰수사연구소 연수계장)과 오대양 사건에 관한 특별 인터뷰를 하여 그것을 월간조선 1991년 10월호에 보도했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 특별 인터뷰에서 이삼재 경정은 장장 4시간 동안이나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사인이 외부세력에 의한 집단타살이 아니라 자의에 의한 집단자. 타살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증명하였습니다.   

 

 

9. 박찬종 의원은 월간조선의 이정훈 기자와 두번째 만났을 때 자신의 1991년 7월 19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의 기자회견이 잘못되었던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시인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까? 

 

 

월간조선의 이정훈 기자는 월간조선 1992년 2월호 458P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뛰어든 사람이 박찬종 의원, 의원회관에서 처음 만났을 때 박의원은 오대양 사건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나는 수사권이 없는 의원이다. 다만 청문회를 열어 의혹을 따질 수는 있다“며 구체적인 답변은 성만현 특별보좌역(48)과 박미출 비서에게 미뤘다. 두번째 만났을 때 박의원은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이 자살일지라도 누군가가 자살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타살이다“며 한발 후퇴하는 발언을 했다.   

 

 

10. 박찬종 의원은 자신의 1991년 7월19일 오전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의 기자회견에서 주식회사 오대양의 총사채 중 거의 모두가 주식회사 세모의 유병언 사장에게로 들어갔다고 주장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1987년 9월1일자 신문 보도에 의하면 그때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단에 신고 접수된 채권자 총수는 280명이며 채권총액은 78억 이었습니다. 그러나 약 10개월 후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단은 제 5공화국 비리조사 특위에 채권자 총수는 345명, 채권총액은 97억원이라고 신고 하였습니다(동아일보 1988년 6월 16일 14면). 그렇다면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채총액은 97억원이라기 보다는 78억원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과거 주식회사 오대양의 원금에 대한 이자율은 월 3푼에서 5푼까지의 고금리였습니다. 또한 주식회사 오대양의 파산 직전까지는 원금에 대한 이자 지급이 대단히 정확했고 그것은 주식회사 오대양의 채권단도 여러번 인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건 당시 경찰 측과 월간조선의 이정훈 기자의 추정대로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채는 거의 대부분 원금에 대한 이자 지급액으로 나갔다고 보여 집니다. 예컨대 1억원의 사채를 월 5푼으로 빌렸다면 2년 후에는 1억 2천만원을 가져가게 되는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 탁명환씨는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채 총액을 처음에는 100억원 정도로 추정하다가 약 9개월 후인 198년 5월 중순 경에는 150억원 (현대종교 1988년 5월호 142P), 1933년 5월 중순 경에는 370억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현대종교 1933년 6월호 190P).

또한 고 탁명환씨는 한때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채 총액 중에서 약 50억원 정도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 씨에게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라고 가정하였습니다(현대종교 1988년 11월호 124P). 그리고 주식회사 오대양의 용인공장의 한 천장으로 올라갔던 남녀 33명은 모두 다 사채 모집책들이었고 천장 밑에서 일보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사채 모집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부서에서 일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1. 박찬종 의원은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의 현장에서 발견되었다는 '삼우도 지금 무척 고통받고 있답니다'라는 메모 쪽지의 출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필자는 얼마전 이삼재 경정과의 전화 인터뷰 중에 그가 그 쪽지는 자신을 비롯한 현장감식팀이 찾아낸 것이 분명히 아닌데 이상하게도 MBC에서 그것을 보도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추측컨대 그 쪽지는 한때 1987년 8월 30일 밤에 오대양 사건의 현장에 갔다고 주장하고서는 나중에는 1987년 8월 29일 밤에 오대양 사건의 현장에 갔다고 말을 뒤바꾼 소위 구원파와 주식회사 세모의 유병언 사장과 사이가 대단히 나빴던 모 씨가1987년 8월 30일 밤 오대양 사건의 현장에서 조작했던 것으로 사료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일에는 천부적이고 천재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2. 박찬종 의원은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과장, 전 고려대학교 법의학 연구소장 황적준 박사의 스승인 문국진 박사가 자신의 저서 “강시 강시”에서 이경수의 사인이 타살이라고 주장했던 근거와 배경과 출처를 알고 있습니까? 

 

 

이경수의 시신을 촬영한 칼라사진은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국진 박사는 목에 끈이 매달린채 서있는 이경수의 시신의 칼라사진은 보지 못하고 목에 묶인 끈을 풀지않은 이경수의 시신을 현장에서 아래로 끌어내려다 눕힌 후 여러 시간 후에 촬영한 이경수의 시신의 칼라 사진만 보고 그렇게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즉 첫번째 사진에는 이경수의 뒷목에 색흔이 분명히 없습니다만 두번째 사진에 색흔이 나타나는 이유는 이경수의 목에 묶인 끈을 풀지 않고 그냥 둔채 바닥에 내려놓았기 때문에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누군가가 문국진 박사에게 이경수의 시신에 관련된 자료를 제공했다면 그는 악의적으로 첫번째 사진만 제외했던 것이 분명해지는데 그는 아마도 필자가 바로 위에서 지적한 모 씨일 것입니다.   

 

 

13. 박찬종 의원은 전 국회의원 김현씨가 ‘오대양 사건이 3개월 이상 끌면 국회의원 재선은 문제가 없다’ ‘오대양 사건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언론이 이를 수용한다’ 고 공공연하게 떠들어서 그것이 신문 기사화까지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1991년 7월 중순경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의 현장에서 현장감식을 했던 어떤 경찰관은 김현 의원과 만나서 오대양 사건에 관하여 토론을 한 뒤 자살이면 김현 의원이 의원직을 내놓고 타살이면 자신이 경찰직을 물러날 것을 조건부로 김현 의원에게 공개토론을 제의한 적도 있었습니다(중도일보 1991년 7월 16일).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김현의원은 그 제의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14. 박찬종의원은 오대양 집단변사자들의 배후에 소위 구원파와 주식회사 세모의 유병언 사장이 있다고 주장했던 대전침례신학대학 정동섭 교수가 1991년 5월까지는 그러한 주장을 하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습니까? 

 

 

정동섭 교수는 과거 자신의 간증담을 통해서 자신이 소위 구원파와 결별하게 되었던 시기는 1977년 4월이었다고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현대종교 1990년 5월호 151P). 즉 정동섭 교수는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만 십년이상 구원파와는 아무런 접촉이 없었습니다.   

 

 

15. 박찬종 의원은 주식회사 오대양의 사장 박순자 여인을 비롯한 다수의 직원들이 과거 소위 구원파 신도였다고 해서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이 발생할 당시도 그들이 소위 구원파 신도였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필자는 과거 천주교 신자로서 고 지학순 주교 밑에서 일도 조금 보았지만 1979년 말 개신교로 왔습니다. 그후 1991년 8월 말 ‘로마천주교회와 알베르토 리베라’라는 책을 출판하고 나서 필자는 개신교계로부터 천주교의 스파이라는 모함과 오해를 무척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달석이라는 사이비 목사 하나 외에 필자가 천주교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개신교계에 단 한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1993년 7월 말 ‘교황제도에 대한 교회사적 비판’이라는 천주교 교리 비판서도 한권 출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필자는 과거에 친분이 있던 천주교 신자들이나 신부님들도 종종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필자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아는 신부님들이 차비나 하라고 용돈을 주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결단코 천주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위 구원파와 오대양과의 관계도 이와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오대양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 소위 구원파 신자였다고 해서 그것을 소위 구원파가 책임져야 한다면 지금 한국의 신흥종교의 창시자나 교주 중에서 천주교 출신이 10여명이나 되는 것(노길명, 한국의 신흥종교, 가톨릭신문사, 1991. PP 56~57)은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김수환 추기경이 책임져야 합니까 아니면 로마교황 요한바오로 2세가 책임져야 합니까?   

 

 

16,. 빅찬종 의원은 사회 일각에서 오대양 사건의 배후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은 정치권력층의 비호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것을 알고 있습니까? 

 

 

국민일보 1994년 2월 24일 22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국제신학연구원 이영훈 원장(조용기 목사의 측근, 필자 주)은 ‘대개 이단사이비종파는 권력층과 밀착돼 있다’고 전제한 뒤 '이런 점 때문에 오대양 사건 등 사이비 종파 관련 수사가 흐지부지됐다‘고 지적했다.  

 

 

-박찬종 의원에게 마지막 부탁하는 말- 

 

 

이제까지 필자는 진실을 밝혀야만 하겠다는 한 가지 욕심으로 글을 써왔습니다. 그 결과 오대양 사건의 진실이 확연히 드러났다고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박찬종 의원이 이 글을 읽고 필자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되면 공개적으로 과거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하여 사죄하십시오. 만약 박찬종 의원이 사죄를 하지 않는다면 필자의 주장이 틀렸다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여기고 언론을 통해 박찬종  의원에게 오대양 사건에 관한 공개 토론을 정식으로 요청할 것입니다. 원래 필자는 박찬종 의원을 대단히 좋아하고 존경했으나 오대양 사건에 대해 연구하면서 너무나도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박찬종 의원은 얼마전에 발생했던 신민당 전당대회의 폭력사태로 인하여 1994년 11월 25일 도하 각 일간지에 사죄광고 (5단 전면광고)를 내었습니다. 이번에도 이와 같이 용기있는 행동을 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고자는 구원파 교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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