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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로부터의 자유그리스도교 성서 안에 담긴 불순물을 가려내라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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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1월 07일 (금) 20:12:16
최종편집 : 2008년 11월 08일 (토) 00:32:09 [조회수 : 2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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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도올 김용옥 선생이 ‘구약 폐지론’을 주장하다 개신교와 가톨릭 양쪽으로부터 집중 비판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구약 뿐 아니라 신약도 할 수만 있다면 폐지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성서가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 안에 함께 들어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구분하지 못하고 성서의 기록 전체를 신의 전갈로 간주하는데서 오는 폐해 때문입니다.


‘성서’라는 이름의 이 멋진 책은 수천 년 인간사의 온갖 비극과 희극, 욕망과 질투, 음모와 암투, 그리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처절한 삶의 장면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솔직하게 담아냅니다. 인간 세상에 대한 가차 없는 고발, 그 점만으로도 성서는 인문학 고전으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치를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게다가 이 책은 어두움과 혼란에 둘러싸인 인간세계에서 진정한 구원의 길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신적 계시를 담고 있기에 ‘거룩한 책’ 즉 성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진솔한 삶의 이야기들은 당시 사람들이 만나고 인식한 신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이기적인 지 너무나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성서의 거룩함에 동참하려는’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습니다. 오늘은 구약성서에서 그런 당황스런 구절을 하나 꺼내어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콤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 이 명을 찢어 죽였다.” (공동번역 열왕기하 2장 23,24절)


이 구절은 선지자 엘리사에게 임한 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나타내는 사례로 기록되었지만 ‘사랑과 자비의 신’으로 정리된 신약성서의 신관은 물론이고 사랑보다는 법과 정의를 먼저 요구하는 구약성서의 신관으로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놀렸다는 이유만으로 42명의 생명을 몰살시키는 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게다가 희생자들은 그저 철없는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 전체가 신의 계시이므로 모든 구절을 ‘기록된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교육받은 보수 개신교인들은 이 구절조차도 실제 사건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이런 해석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이 내놓는 논리라고는 “그 때는 율법의 시대인 구약시대였기에 그런 일이 가능했지만 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이므로 하느님께서 지금도 그런 일을 하시지는 않는다.”는 정도의 궁색한 변명뿐입니다.


문제는 이런 맹신이 그들이 몸담고 있는 종교의 세계만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 전체에 매우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로 세계에서 신도 수가 가장 많다는 교회의 목사가 이 구절을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근거로 “목사가 잘못이 있더라도 교인이 함부로 목사를 비판해서는 안된다. 목사의 잘잘못은 하나님이 물을 것이다.”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가 교회를 은퇴한다고 선언했을 때는 장로들과 부목사들이 엎드려 은퇴를 철회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비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설교를 아무 거리낌없이 하는 목사에 대해서 수십만에 달하는 교회 구성원들이 바치는 일사분란한 충성심은 그저 놀라운 뿐입니다.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훌륭한 분인데 종교 문제로 들어가면 꽉 막힌 개신교인들을 자주 만난다”는 말을 가끔 듣습니다. 그런 분들은 ‘이성보다 계시가 우선’이라는 믿음에 따라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스스로 내려놓았기에 맹신에 빠져든 것입니다. 이렇게 교리에 세뇌된 사람은 아무리 합리적인 근거를 들이대도 대화 자체가 힘들어집니다.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서와 교리’라는 자신들의 절대 기준에 의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사 이야기(엘리사 사건이 아니라)는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사제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경전에 삽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보 그리스도교 학자들은 그 구절이 문자 그대로 실제 사건일 수는 없지만 당시에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시대적 한계와 무지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신의 징계로 받아들였고 그것이 전승을 타고 전해져 성서에 기록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면 성서 안에 시대 상황에 따른 한계는 있어도 고의에 의한 왜곡은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는 있지만 고의적 왜곡은 없는 진실의 책’이라고 믿는 것과 ‘시대의 한계 뿐 아니라 고의적인 왜곡까지 담겨 있기에 진실과 허구를 반드시 가려내야 하는 책’임을 아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는 상황에서 성서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실제 가능성이 가장 큰 해석을 무시해 버리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보면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한 애정으로, 또한 전통적인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들이 받을 충격을 고려하여 보다 유연한 해석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해석자의 그런 유연함(?)이 결과적으로 성서에 관련된 진실을 덮고 교인들을 무지의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요?


성서의 기록과 해석의 관계를 꿈으로 비유하자면 성서 안에는 개꿈과 용꿈이 함께 담겨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개꿈은 의미를 찾기 어려운 꿈이고 용꿈은 좋은 뜻과 의미를 담은 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해석자라면 개꿈은 개꿈이라고, 용꿈은 용꿈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수 개신교인들이 성서 안에 담겨있는 개꿈을 용꿈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분들이라면, 성서의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진보 개신교 해석자들은 개꿈을 기어코 용꿈으로 만들려고 애쓰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서에 개꿈은 없다고 확신하는 보수 신앙인들보다 개꿈인 줄 알면서도 기어코 용꿈을 만들려고 애쓰는 진보 해석자들이야말로 교인들로 하여금 성서의 세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는 사람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성서는 이삼천년 전의 시대적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기에 시대의 한계와 기록자의 인식의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계급이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한 불순물도 적지 않게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서는 정금 자체가 아니라 정금을 포함하고 있는 금광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석에서 정금을 얻어내려면, 즉 성서에서 진정한 신의 말씀을 들으려면, 이 광석을 용광로에 넣어 펄펄 끓여서 모든 불순물들을 분리해내야 합니다. 이 작업은 어떤 교리적 전제에도 매이지 않고 과학과 이성에 의해 성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열린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혹독하고 정직한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성서 안에서 인간의 말과 정금과도 같은 신의 말씀을 가려서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성서가 그리스도교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최고의 문학적 가치를 가진 고전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성서를 통해 영적 깨달음을 얻고 진리 안에서 자유하며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전승자와 기록자들의 무지에 의한 한계 및 오류와 함께 지배계급의 고의에 의한 왜곡도 반드시 가려내야 합니다.



* 이 칼럼은 <공동선> 2008년 11+12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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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공 (218.237.101.234)
2008-11-24 09:51:08
공감하고 지지함
성서를 바로 보도록 돕는 글 공감합니다. 모든 독자나 신자가 그러한 분별을 할 수 있고, 그것을 분별하려고 노력한다면 기독교는 지금보다 더 강한 빛을 발하고 더 쨘 맛을 낼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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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 (71.218.70.176)
2008-11-20 08:34:02
제발 성서를 읽어라. 최대한 쉬운버전이라도...
성서나 읽고 류상태목사를 비판하라. 제발 부탁이다... 하긴 성서를 읽는 것 보다 현대 영성가들의 책을 읽는 것이 훨씬 정신 건강에 좋지만... 그래도 그 많은 페이지 중에 옥석을 가릴 열심과 용기가 있다면...아니 시간이 허락된다면, 성서를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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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부정한 류목사 (180.158.61.251)
2013-09-04 09:28:09
아니 하나님을부정 성경을 부정한 사람이 어찌 목사가되었는고??

에베소 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 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 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 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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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121.153.125.101)
2008-11-19 20:48:46
긍정의 자리입니다.
님의 자리는 여기가 아닌듯 싶습니다. 님의 펜은 늘 부정을 얘기하네요.
당당뉴스의 자리는 부정의 시대에 긍정을 말하고 찾으려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제 소견으로는 님이 원하는 자리를 하나 만들어 분가를 하시는 것이 나을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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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네 (58.121.11.41)
2008-11-15 16:09:09
시대적인 고견입니다. !
님의 고견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진리란 특수 집단에게만 통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보편적 가치에 맞지 않는 아전인수격의 성경 사건들은 비판적으로 해석하여 거울로 삼는 것이 맞습니다. 지난 날에는 무지하여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 지금은 그래서는 안된다!
적어도 이런 상식은 가지고 성경에 접근해야한다고 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지나치게 신화화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성경중심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잡았는지 .... 탁월한 님의 예견과 그 지성적 성실함에 지지를 보냅니다. 님에게서 한국개신교회의 희망의 씨앗을 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건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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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121.163.108.112)
2008-11-13 20:19:57
류상태로부터 자유
그가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쓸 필요가 없다. 본인도 무슨 소리인줄 모르고 지껄이고 있으니까, 예수를 안믿겠다고 하는 사람한테 더 들을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정직한 무신론자의 소리가 더 논리정련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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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요 (180.158.61.251)
2013-09-04 09:29:49
내말이...근데 어찌 목사나요?? 개나소나 목사인가요??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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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노 (118.92.118.35)
2008-11-13 06:27:02
이 일을 어쩔꼬?
해도해도 너무합니다. 이젠 성서까지도 당신의 사냥감이 되어 버렸네요. 이 일을 어쩔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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