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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떠나는 처음 여행 (1)"고생하러 가는 거야 괜 쟎아"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김충권  |  ckkim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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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10월 02일 (목) 23:08:56
최종편집 : 2008년 10월 15일 (수) 17:40:47 [조회수 : 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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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홀로 떠나는 처음 여행 

   

“고생하러 가는 거야, 괜찮아.”
  

 ‘아, 드디어 떠나는구나.’

여행을 결정하고 두 주만에 출발입니다. 정말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이 결정하고, 준비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긴 기차여행을 할 거니까 가방은 최소한 작아야 합니다. 성지순례를 떠날 때처럼 끄는 가방을 가져갈 것도 없고, 어깨에 메는 가방 하나에 양치도구와 옷가지 몇 개면 되었습니다. 속옷이야 어쩔 수 없지만, 겉옷은 갈아입지 않고 추우면 덧입었다가 더우면 한 겹을 벗을 준비를 하고, 기차나 버스에서 정 추우면 앉아서 다리부터 목까지 덮을 담요를 하나 넣었습니다.

인터넷에서 배낭여행을 하는데 뭘 넣어야 하는지 찾아봤습니다. 먼저 여행을 했던 사람들이 아주 친절하게 올려놓았습니다. 비상약을 챙기고, 돈 주머니는 속옷에다 하나 더 차고, 여권번호와 사진 하나는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다 적어 넣었습니다. 미국에 묵을 집에 줄 선물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1주일 후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기대하지도 않는 눈치였습니다.

천안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공항버스로 갈아탔습니다. 혼자 길을 떠나보기는 처음입니다. 1년에 한 번씩 있는 교역자 부부수양회나, 수양회를 성지순례로 외국을 나갈 때나, 언제든지 가족이 가든지 부부가 함께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도 걸을 수만 있으면 설악산이고 울릉도고 수안보고 데리고 다녔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결석을 시키고 4박5일씩 제주도도 가고 홍도도 가고, 일부러 여행은 못해도 기회가 있으면 다니는 것이 좋다고 꼭 데리고 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이나 터키 등 외국을 갈 때는 아이들은 못 데리고 다니고 부부만은 같이 갔습니다. 기간도 너무 길거니와 추가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번 여행은 아내도 못 데리고 가고 나 혼자 길을 떠났습니다.

없는 여행을 만들어 떠나는 것도 처음입니다. 공식적으로 계획된 것이야 가는 것이지만 일부러 여행을 떠날 계획은 여태껏 잡아보지 않았습니다. 생존을 위한 것 외에는 사치라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이 장날 장보러 가는 것 외에 어디를 간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에야 마을에서 관광을 가고 계를 모야 단풍놀이를 간다지만, 새조밭을 파먹던 어린시절에는 지금 굶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어쩌다 달력에 세계지도가 나와도 그냥 거기 있는 것이려니 했지, 거기를 가 본다거나 여행을 한다는 생각은 있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여행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1970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여행입니다. 수학여행을 가려고 날짜를 정해 놓고 돈까지 다 걷어서 출발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 봄부터 나라 안에 사고가 그렇게 많이 나는 것입니다.

특히 수학여행을 갔던 버스가 충돌하거나 언덕에서 구르는 사고가 라디오를 통해 속속 교무실 교장 선생님께 전해 졌습니다. 불이 나고, 물에 빠져 죽고, 수학여행단 사고소식들이 여행에 발목을 잡게 생겼습니다. 그해는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아침은 서울에서 먹고 점심은 부산에서 먹는다고 해서, 서울서 부산이 얼만데 그렇게 빨리 가느냐고, 그러니까 사고가 많이 나는 것 아니냐고, 친구들끼리 가기는 가야한다면서도 불안해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가는 날짜에 임박해서 교장선생님이 올해는 사고가 너무 많이 난다고, 이럴 때는 집을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고, 서울 구경 가는 수학여행을 취소했습니다. 처음 여행이라고 붙은 이름이 이렇게 상상만 남기고 사라졌습니다. 못 먹은 떡이 더 맛있다고, 여행하면 가보지 못한 수학여행이 먼저 생각납니다.

“고생하러 가는 거야, 괜찮아.”

그렇게 오래 기차를 탈 수 있겠느냐고, 아내가 걱정입니다. 유명한 호텔에서 잠을 자고,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를 보고, 맛있는 것을 먹고 다니는 여행이 아닙니다. 기차를 타고 일하는 미국 사람들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이라크에 군인을 보내는 정치인이 아니라, 아들의 전사소식을 듣고 가슴아파하는 어머니의 한숨소리를 듣고 싶을 뿐입니다.

광우병 걸린 소릴 우리나라에 수출한다고, 자기들은 안 먹고 버리는 내장을 우리나라에는 돈 받고 판다는, 미국 농민들의 마음을 실재로 한번 보고 싶어서, 보고 느끼고 싶어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같을 터인데, 특히 농민의 마음은 모두 땅처럼 흙처럼 같을 터인데, 두 달 가까이 계속되는 우리 촛불집회를 보고 저들은 뭐라고 생각하는지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화물칸에 실을 트렁크 하나 없이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와, 비행기 크다.”

비행기가 드디어 움직입니다. 노란선을 따라 이륙장으로 방향을 틀고 있습니다. 탑승대기장에서 어린아이가 아래로 비스듬히 나있는 창을 내려다보며 외쳤습니다. 과연 크기는 컸습니다. 저 육중한 쇠붙이가 보이지도 않게 가벼운 공기 위를 날아가게 하다니, 새삼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존재 같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탄 비행기가 이륙할 건너편 하늘에 착륙할 비행기가 불을 반짝 켜고 각 작은 사선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땅에 닿는가 싶더니, 바퀴에서 검은 연기가 폭 일어 흩어지더니, 속도를 줄여 서서히 굴러갔습니다.

오늘부터 장마가 시작된다고 버스로 올라올 때 추적추적 비가 내렸는데, 언젠지 비는 그치고 구름만 잔뜩 끼여 있었습니다. 활주로는 이미 말라 있었습니다. 흐린 구름아래 있다가 순식간에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습니다. 장마 구름이라 낫게도 드리웠던 모양입니다. 구름 위에는 딴 세상이었습니다. 햇살이 하얀 구름 위를 맑게 비추었습니다. 솜이불 위에 엄마의 보드라운 손길이 토닥이며 이불을 고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아파하지 않았으면 

우리 삼형제 개구쟁이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바깥에서 놀았습니다. 신발은 언제는 흙이고 검불이고 나무껍질이고 산골에 묻혀 사는 삶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아침나절에 나갔다가 배가고파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점심이 늦었는데도 이불 꿰매는 일을 마치지 못해 솜을 손으로 토닥거려 골고루 펴 주고 계셨습니다. 놀이가 다 들은 발로 정검정검 들어서며,

“밥 주세요. 배 고파요.”

“.......”

하고 소리쳐도, 보드랍게 토닥이시던 손 때문에 목소리도 사라졌는지 솜을 밟지 말라고 손사래만 치셨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묘등에서 고상받기 하듯이 한바탕 굴러보고 싶지만, 한 발자국도 들어 설 수 없었습니다.

지금 창문 밖으로 폭 한번 안겨보고 싶을 만큼 보드라운 밝은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엄마가 다듬던 이불솜처럼 나를 부르고 있는듯합니다. 뛰어 내렸다하면 비행기가 올라올 때보다도 더 빨리 구름을 뚫고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거라는 생각이 현실로 퍼뜩 깨웁니다.

 

그래도 나는 비행기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어릴 때 우리 마을 위를 지나는 비행기는 왜 그리 소리가 큰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쒝---.’

예고도 없이 갑자기 하늘을 찢고 다가오는 소리는 소리에 놀라 도망가는 내 뒤통수도 찢고 내 등짝도 찢어서 내 골도 빨아내 가고 내 살과 뼈도 모두 단번에 흡착해 가는 것 같았습니다. 아무리 달려 도망을 가도 소용없고, 소리를 있는대로 질러도 다 흡수당해 버리고, 길게 소리를 내며 눈앞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아야만 살았구나 싶었습니다. 소백산맥을 남쪽으로 두고 마을이 중턱에 있어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비행기는 모습도 소리도 예고도 없이 벼락치듯이 왔다가 긴 여음을 높이며 가물가물 사라졌습니다. 그 뒤를 대고 기가 죽었다가, 한숨을 쉬었다가, 원망을 했다가, 더 커서는 욕을 해도, 세상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눌러오는 세상은 내 기를 꺾어 놓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 삼형제 뒤로 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를 보고,

“욕심도 많지 아들을 넷이나 낳았어.”

했습니다. 딸을 섞지도 않고 아들만 차례로 넷이나 낳았기 때문입니다.

막내로 태어난 동생에게 아버지는 필권이라고 호적에 올리셨습니다. 우리는 필권이 보다는 호권이가 낫겠다고, 내내 호권이라고 불렀습니다.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럽던지 삼형제가 서로 친해지려고 좋은 것은 서로 갖다 주었습니다. 맛있는 생고구마를 깎아 주면

“괴기맘, 괴기맘”

하고, 못치기를 하며 가지고 놀던 던 못을 들려주면,

“모찌, 모찌”

하며 재롱을 부리던 막내가, 얼마동안 앓다가, 오래지 않아 죽었습니다. 새벽에 아버지가 지게로 져다가 뒷산 너머에다 묻으셨답니다. 나중에야 어른들께 들었습니다.

“호권이는 비행기 소리에 놀라서 죽은 것이란다.”

나도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죽겠다 싶었는데, 호권이가 비행기 소리에 잡혔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닭들은 기겁을 하고 날아오르고, 돼지는 꽥꽥거리며 구석으로 머리를 처박고, 소도 코가 찢어지게 고삐를 당기는데, 사람이라고 온전하겠어?’

생각했습니다.

지금 호권이 생각이 더 간절합니다. 그 비행기를 내가 타고 하늘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아무도 놀라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산속에 작은 새 세끼 한 마리도 놀라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마을에서 내려와 버스정류장과 학교와 교회와 큰 건물 농협 창고와 이발소가 있는 장정으로 조금만 내려와도 비행기 소리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습니다.

‘스 웨 웩---’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예음이 있고, 산마루와는 훨씬 낮아 소리도 그만큼 작고, 사방으로 툭 터져서 옆으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비행기가 어떻게 그렇게 낮게 갈 수 있는지, 소백산맥을 넘어 고도를 더 낮추는 모양입니다. 손을 뻗어 튀어 오르면 비행기 밑바닥을 잡을 것 같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지 20여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무슨 쌕쌕이가 그렇게도 날라 다니는지, 왜 그렇게 소리는 커야 하는지, 그러다가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자는 건지, 내 동생 호권이가 죽은 건 그럼 어디 가서 하소연해야 하는지, 산 속에서 들짐승과 함께 살아가는 무지랭이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높이 구름 위를 날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좀 커서는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비행기만 보면, 발로 돌을 차며, 욕부터 나왔습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한잠을 자고 났더니 아침을 먹으라고 깨웠습니다. 서울을 떠나 태양과는 반대방향으로 돌아 다시 만난 것입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솜이불 같은 구름 사이를 뚫고 올라온 산이 군데군데 모여들었습니다. 카나다에서 시애틀을 거쳐 내려가는 록키산맥 중에 군데군데 우뚝하니 모여 있는 만년설 봉우리였습니다. 한여름인데도 산 정상에는 구름에서 눈을 따왔는지, 눈에서 구름을 떼어 주었는지 모르게, 같은 색깔로 허옇게 어울려 있었습니다.

 

이정록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 

굽이 없는 신발을 신고 다니던 옛날,

자기가 꿰매는 신발에

수많은 곤충이 밟혀죽는 게 걱정이 되어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매일 기도를 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생명을 잃는

안쓰러운 곤충의 영혼과 무심코 어린 생명을

짓밟는 눈 못 뜬 발바닥을 용서해 주세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발바닥 한가운데가 오목한 이유를 깨달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무릎을 탁 친 그는

그날부터 낮고 조그마한 뒤축을 달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예쁘고 편안한 신을 신게 되었다.

그의 예지는 신(神)의 뜻이었기에

순식간에 전 세계에 퍼졌다.

신발에 깔려죽는 어린 생명들이

삼분의 일쯤 줄어들었으며,

그로 인해 늘어난 곤충이며 새싹은 결국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삶을 되돌려 주었다.

 

- 이정록의 《발바닥 가운데가 오목한 이유》 중에서 -

 

목회를 한지 20년 만에 한해를 쉴 수 있는 기회를 만나 혼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는데, 비행기 바닥을 향해 아무도 욕을 하지 않는 여행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도 아프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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