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면서

“한 번 모이자고? 알았어요. 올라갈께”.

그 덕분에 필리핀이나 가나에서 선교사들이 오면 곧잘 이야기도 하고 쇼핑을 데리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면 통관절차에서 나서 통역도 하고, 가이드가 없어도 짧은 영어로 노점상에게서 물건을 사기도 했습니다. 억양이나 발음은 콩글리쉬 같아도 의사는 통하니까, 국내파 영어라고, 외국에서 영어를 배우지 않은 순수 국내파 영어라고 했는데, 드디어 외국에서 혼자 영어를 떠들 기회가 왔습니다.

먹는 것이야 걱정 안 해도 되었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 어떤 사람은 김을 싸가느니, 고추장을 사 가느니, 누구는 김치를 잘 묶어서 넣어 가느니 해도, 난 외국 여행을 하면서는 외국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들도 사람이고, 사람이 먹는 음식인데 우리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음식을 나누어 먹지 않고는 진정한 순례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언제든지 음식을 가리지는 않았습니다. 없어서 못 먹을 지경인데, 음식을 가려 먹고 못 먹고를 구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중학교를 들어 가면서 내 손으로 밥을 해 먹으며 학교를 다녔고, 대학은 고학을 하느라고 굶고 다녔는데, 그래서 지금도 고구마든 감자든 밥이든 먹어서 배부르면 한 끼니 해결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행 내내 먹는 것에는 전혀 구애됨이 없었습니다.

잠도 잘 잡니다. 아내가 잠이 안 와서 고생을 해도, 나는,

“왜 잠이 안 와? 나 잔다 하면 자는 것이지, 잠을 누가 주고 안 주고 해? 내가 찾아서 자는 것이지. 눈 감고, 긴장 풀고, 마음 풀고, 영혼까지 풀고, 온 몸을 맡겨 봐.”

하고, 늘 말해 왔습니다. 어디서고 잔다 하면 잘 잡니다. 그렇다고 잠이 많지도 않습니다. 낮잠은 좀처럼 안 자고, 정 졸리면 의자에 앉아서 10분 정도 졸면 끝입니다. 안 잔다고 하면 또 밤을 새고 운전을 하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고, 졸리다가도 영어공부를 하면 잠이 다 달아나 정신이 말똥말똥해 지기도 합니다. 공부하면 잠이 달아나 졸리지는 않는데, 내일을 위해 일부러 자 두어야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렇게 잠에 구애받지 않으니 기차로 시애틀에서 LA를 거쳐, 남부를 가로질러 뉴올리언스에서 마이매이까지, 다시 북쪽으로 랄리에서 한국에 왔던 친구네 집을 들렀다가 뉴욕까지, 30일 동안 기차를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티켓을 끊어, 북미대륙을 횡단하는 동안, 기차에서 잠을 자기로 계획했습니다. 카나다도 기차로 다녀 올 수 있답니다. 올 때는 북부 노선을 타고 시애틀로 오려고 했습니다. 호텔에서 안 자고 기차에서 잠을 공짜로 자는데, 아무리 기차에서 먹는 값이 비싸다고 해도 호텔값만 하겠습니까? 호텔비가 하룻밤에 저가라고 해도 100불, 10만원입니다. 자는 것이 해결되니, 먹는 것도 수월해 졌습니다.

그러나 여행은 계획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사정도 잘 모르는 처음 가보는 땅을 계획한 것에 척척 들어맞게 다닐 수는 없었습니다. 시애틀에서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기차역에 갔더니, 마침 모든 학교가 방학을 해서 기차여행객이 많아져 좌석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쪽으로 가려던 것을 바꿔서 좀 한산한 북부노선을 타고 가서, 뉴욕에서 머물렀다가, 올 때는 카나다를 횡단했습니다. 시애틀에서 뉴욕까지 1주일, 뉴욕 맨하탄을 나다닌 것이 5주일, 카나다 오웬 사운드를 거쳐 퀘백에서 뱅쿠버까지 횡단한 것이 약 10일, 모두해서 꼭 두 달간이었습니다. 뉴욕에 있는 중에 카나다를 사흘, 노스케롤라이나를 나흘 다녀왔습니다. 좋은 여행이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래도 미국 현지에 있는 친구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비행기를 내리고 타는 시애틀에서 이틀씩 묵은 김순휘 목사네 집, 5주간 뉴욕에 다닐 수 있도록 묵은 뉴저지 사촌네 집, 카나다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청년 때 만났 이종희 선생님과 그 형제들. 빈말이었든지 찬말이었든지 한번 놀러 오라는 말이 쉽사리 이루어지리라는 생각은 안했을 텐데, 나 같은 무대뽀가 있어서 손님 한번 제대로 치뤘을 것입니다.


어릴 때 내가 자란 동네는 가운데 평지에 초등학교, 교회, 농협 창고, 이발소, 가게가 있고, 하루 두 번씩 버스가 들어왔습니다. 이 동네를 중심으로 소백산 기슭과 중턱에 여섯 개의 마을이 둥그렇게 둘러 있습니다. 운동회를 할 때는 칠결 七結 의 어른들도 달리기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고 모래가마니 오래들기도 했습니다. 우리 동네는 칠결 중에서 가장 높은 소백산 줄기 중턱이었습니다. 구름 떠가는 날이면 구름의 그림자가 지금 어느 밭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고, 비가 오는 날 마루에 앉으면 비 떨어지는 줄기를 한참 아래까지 볼 수 있고, 눈 온 날이면 위로 산과 아래로 마을들이 온통 하얀 것을 한 눈에 볼 수 있고, 꽃이 피는 봄이면 흰색 분홍색 빨강색 등 온갖 꽃들이 길가에서 산자락까지 널려 핀 거대한 꽃둥지 안에서 살아가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사방이 산이고 트인 곳은 하늘뿐이라, 어릴 때는 여기가 세상의 다인 줄 알았습니다.

그럴만큼 외진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할아버지 때에 들어오셨답니다. 딸을 시집보낸 사돈댁이 앞으로 큰 난리가 날 터인데 피난고지를 찾아가자고, 해방이 되고 나서 풍수지리를 보고 생면부지인 여기까지 식구들을 끌고 오셨습니다. 피난고지가 6.25때는 인민군의 퇴로가 돼서 더 큰 고난고지가 되었습니다. 인민군이 남하할 때는 죽령으로 넘어 갔는데,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알려진 통로가 막히자, 험한 산을 넘어 우리 동네로 내려와 북쪽으로 넘어 갔습니다. 인민군은 많은 사람을 죽이고 끌고 갔습니다. 뒤이어 국군이 와서는 인민군에게 부역을 한 사람과 그 가족을 또 그렇게 죽였습니다. 부역을 갔다가 살아 돌아온 큰아버지가 국군에게 시달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인민군도 국군도 다 우리 편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 때에 빈손으로 들어온 우리 집안은 소작과 새조밭이 전부였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대부분 가난해 중학교를 가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았습니다. 나도 못 갔습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첫째는 하나님께 드린다고 부모님이 서원을 하신 것 때문에, 한 해를 묵어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집을 나와서는, 줄이 끊어진 연같이 되었지만, 결코 떨어지지 말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평소에 미국을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9.11테러의 배경으로 빈라덴을 지목하고, 빈라덴을 잡기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침공했을 때,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미국의 시대가 가고 있다.*

미국의 시대가 가고 있다.

애굽이 강팍해서

노예 삼은 제 잘못은 못 보듯

테러의 원인은 안보고

공공연한 테러를 자행하는

미국은 사라지고 있다.


미국의 시대가 가고 있다.

로마가 미쳐서

도시에 불 지르고 환호하듯

세계를 내편 네편 갈라놓고

아프간에 폭탄을 퍼붓는

미국은 사라지고 있다.


미국의 시대가 가고 있다.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다고

패권을 휘두르다 섬나라로 머물듯

세계 곳곳에 반미감정을 부추겨

백색테러를 또 당하는

미국은 사라지고 있다.


미국의 시대가 가고 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26:52)

자국경제 살린다고

군수산업 활성화하는

미국은 사라지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을 여행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머리 위를 나는 비행기보다는 덤불에서 열은 딸기로 배를 채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려곡절 끝에 미국 중에서 뉴욕에, 뉴욕 중에서도 맨하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맨하탄이 세계의 중심이라해도 여행하는 것은 역시 ‘나’기 때문에, 여행을 하다가 언뜻 고향이 떠오르거나 옛날 생각이 날 때는 지체 없이 이야기가 섞였습니다. 미국을 바라보는 눈도 살아온 마음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모양입니다. 한국 사람인만큼 한국의 현실을 비춰보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좋은 일도 있었고, 다시는 생각하기 싫은 일도 있었습니다. 워싱턴 디시에서 밤기차를 타고 올라오는 길에 니웍 Newark 에서 내려야 할 것을 니웍 공항역 Newark Airport 에서 내렸습니다.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걸 니웍이라는 글자만 보고 내린 것입니다. 전철을 타고 더 가야 하는데, 30분이나 기다려야 했습니다.

“걸어가도 우리가 전철보다 빠르겠어요.”

기다리던 사람과 이야기하며 기다렸습니다.

니웍역에 도착하니 자정이 가까웠습니다. 버스는 다 끊어 진지 오래 됐습니다.

“여기 니웍역인데, 좀 실러 올 수 있어?”

“난 잘 모르는데, 하여튼 기다려봐 갈께.”

사촌에게 전화로 부탁을 하고 안전한 자리를 찾아 갔습니다. 역 출구는 흑인들이 왁짜지껄 모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가오더니,

“완 달러, 완 달러 One Dolor, One Dolor.”

하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달라고 할 때 주어야지 거절하거나 반항하다가는 총 맞는 경우가 있다는 소리를 뉴욕에 오면서 들었습니다. 마지못해 꺼내 주고는, 다시는 달라지 말라고 악수로 다짐하고 돌아섰습니다.

경찰이 차로 방범을 서고 있는 자리가 가장 안전할 것 같아서, 픽업 Pick Up 장소 중에서 경찰이 바로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가방을 내려놓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또 한명이 슬슬 접근하는 눈치가 보였습니다. 동료가 받는 것을 보고 자기도 얻으러 오는 모양입니다. 사촌은,

“여기 니웍역 옆 호텔 정문인데, 여기까지 걸어와. 차 돌려 들어가기가 곤란해.”

“그래? 밤이라서 그 호텔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길을 묻기에는 경찰이 가장 확실하고 안전했습니다. 경찰을 찾아가 물어서 호텔을 찾아 가는데, 이 친구는 더 가까이 빙빙 돌면서 접근하는 눈치가 뻔했습니다. 찾든 못 찾든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노골적으로 따라왔습니다. 돈을 좀 주는 거야 20달러짜리를 왼쪽 가슴 주머니에 항상 준비해 넣고 다녀서 각오하고 있어도, 한 두 명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컴컴한 길을 바삐 걸어 가는데, 저 앞 도로 옆에 기다리던 차가 흑인 한명을 밀치면서 앞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사촌의 차였습니다. 잠근 차를 두드려 타고는 얼른 출발했습니다. 일단 위험지역을 벗어나게 되어서 안심이었습니다.

“왜 한자리에 있지 않고, 앞으로 갔어?”

“흑인 하나가 막무가내로 문을 열려고 하는데, 열어서 대꾸했다가는 좋은 일도 없을 것 같아서, 밀치고 앞으로 갔지 뭐.”

경찰이 앞에서 지키고 있는데도 돈을 뜯으려는 흑인들을 민간인으로써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흑인은 가깝고 경찰은 멀었습니다.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었습니다. 더욱이 말이 잘 안 통하는 여행객으로는 속수무책, 늦게 다니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반면에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풍경이 있습니다. 카나다데이(7월 2일) 다음날 어제 갔던 나이에가라 폭포에 다시 들렀습니다. 어제는 사람이 엄청 많아서 카나다 폭포 아래까지 배를 타고 접근했다가 오는 것으로 그쳤는데, 오늘은 한산해서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습니다. 못 갔던 폭포 입구를 갔습니다. 잔뜩 당긴 활처럼 휜 드넓은 폭포 안으로, 삼면에서 1미터는 더 되는 높이의 물이, 끝도 안 보이는 폭포 속으로 쉴 새 없이 빨려들고 있었습니다. 떨어지는 폭포도 폭포려니와, 빨려드는 폭포는 더 장관이었습니다. 떨어지는 폭포는 안개로 덮여있지만, 빨려드는 폭포는 호수바닥과 물줄기가 훤히 보였습니다. 떨어지는 폭포는 아래서 소용돌이를 일으켜 둥글었지만, 빨려드는 둥근 속으로 꽂히는 직선이었습니다. 사람은 감히 만들어 낼 수 없는 하나님만의 작품이었습니다.

록키산도 이만큼 좋았습니다. 하지만 예상은 하고 계획은 있었던 것이지만, 나이에가라 폭포는 들를 계획도 없었고 더욱이 폭포 입구는 생각지도 않은 것이라서 감동이 더 컸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사진을 펼쳐보는 감동은 잔잔한 웃음을 짓게 합니다.

바깥 세상을 경험한 나는 돌아와 보니, 나 자신도 알 수 있게 많이 변해있었습니다. 아내와 다정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당장 후회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만한 사람도 없었는데, 사실 그래서 내가 선택하기도 했으면서, 나보다 나은 구석이 훨씬 많은 것을 인정하고도, 가부장적인 사고 때문에 억눌러 내 위주로만 살려고 했습니다. 늦게 철이 났습니다. 이제는 서로 도와 가면서, 친구로 살기로 했습니다. 외국 여행하면서 화를 한 번도 낼 수 없었던 것처럼, 적어도 그만큼은, 아내에게도 화를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아들도 좀 더 자유롭게 자라게 해 주어야 겠구나’

정운이는 이제 고1인데, 아침 8시까지 학교를 가서 밤 10에 야간자습이 끝난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3년간 이 짓을 한다는 것이 이제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재영이도 고1인데 실업계 고등학교를 가서 일찍은 옵니다. 그러나 인문계고등학교가 아니라 공부를 못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가 죽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은화는 중학교 특수반에서 특별활동을 하고 옵니다. 미국이나 카나다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커가는 것에 비하면 불쌍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이 아이들뿐이겠습니까? 그러나 부모와 떨어져 거리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이 기왕 왔으면 한 인간으로써의 자유는 누리도록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뜻만으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노력은 해 볼 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