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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교회 회복을 위한 한 길
박창진  |  5016park@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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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8월 26일 (화) 20:19:13
최종편집 : 2008년 08월 26일 (화) 23:38:00 [조회수 : 2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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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사람에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거듭나고 당사자의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얻고 누리는 것입니다.

   
비신자에서 거듭나서 신자가 되는 것은 구원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을 구원얻었다는 과거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거듭나서 신자가 되어 하나님과 회복된 바른 관계를 누리는 것도 구원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을 구원얻는다는 현재형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신자가 죽음 이후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토록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는 것도 구원입니다. 성경은 이 구원을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씀하며 미래에 얻어야 하는 이루어야 할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현재적으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현재적 구원은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불립니다. 성경은 성화가 구원과는 별개의 어떤 행위가 아니라 그것 자체가 구원에 관한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비신자에서 거듭난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데, 그 은혜에 대한 신자의 바른 반응이 순종입니다. 순종은 성화의 방식입니다. 현재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바르게 받는 것은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기에 달리 말하면 믿음입니다. 성화는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현재적인 구원 곧 성화는 오직 믿음으로, 오직 순종으로 이루어집니다.

거듭나면 거듭나기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생겨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적대하였다고 하더라도 거듭나면 하나님을 바라며 구하고 찾는 갈망이 있게 됩니다. 거듭나면 거듭나기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바르게 반응하도록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싫어하거나 그냥 사람에게 좋은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다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나면 거듭나기 이전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에 마음이 쏠리고 그 원하심을 생활에서 실천하고자 합니다.

이런 변화는 신자 안의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그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따름으로 과거보다 더 성숙한 신자가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에 온전케 되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성화이며 현재적인 구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충만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어떤 신자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그 역사를 따르지 않기도 합니다. 거듭난 이후의 어느 시점까지는 그 역사를 잘 따르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그 역사를 따르지 않게 되기도 합니다. 그 정도가 너무나 심각하며 그로 인해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며 여러 지체들이 고통을 당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현재 가는 길에서 돌이키는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교리가 갈림길의 역할을 합니다. 조건적 견인론은 현재에 하나님의 역사를 따르지 않음이 성화의 문제이면서 구원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현재적인 구원과 영원한 구원을 생각할 때에 반드시 절대적으로 돌이켜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절대적 견인론은 현재에 하나님의 역사를 따르지 않음이 성화의 문제일 뿐이지 구원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잘못된 삶에서 돌이켜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돌이키느냐 돌이키지 않느냐가 현재적 구원과 영원한 구원을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듭남과 함께 이미 결정되었고 불변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났다면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음에도 그 역사를 따르지 않는 경우는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이는 조건적 견인론과 절대적 견인론에서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한 신자와 같이 아비의 아내 곧 계모와 성관계를 맺고서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다 알려지게 되는 것도 가능합니다(고전 5:1). 이런 삶의 모습이 있으면 거듭나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이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절대적 견인론에 의하면 거듭났다면 구원의 문제는 변함이 없기에 영원한 구원에 있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상급에 어떤 문제가 생길 수는 있지만 영원한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적 견인론에 의하면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절대적으로 돌이키게 하셔서 영원한 구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돌이킴이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조건적 견인론은 전혀 다릅니다. 그는 영원한 구원에 문제가 발생하며 돌이키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에도 당사자가 여전히 그 은혜를 헛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거나 하나님의 역사에 미루지 말고 현재에 스스로가 돌이켜야만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성화가 없다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증거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성화가 없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사자의 선택에 의해서.

거듭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대에 서게 되고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거듭난 사람이 영원한 구원을 잃지 않기를 원하시지만 그분은 행한 대로 판결하십니다. 그 판결에 의하여 영원한 구원을 얻는 이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이들이 나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받고 그 안에서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 이들은 어떠하겠습니까? 물론 성화에 대한 강조를 들었지만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들었기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삶에 의해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되는 이들이 어떠할까요?

조건적 견인론을 듣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자기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며 살 수 있고 그 결과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됩니다. 이는 명백하게 자신의 책임입니다. 썩어진 것을 거둘 수 있는 삶에서 돌이키지 않은 당사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절대적 견인론을 들은 경우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의도하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영원한 구원은 불변이라는 생각이 주입되었고 그것은 그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구원에서 변동이 있다는 가르침을 들었다면 영원한 구원의 문제로 인해 그 삶을 돌아보고 회개하였을 수도 있었는데, 그럴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였습니다. 썩어진 것을 거두었다면 당사자에게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이 경우에 과연 당사자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내가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듣기만 하였더라도 땅에서 사는 동안에 돌이켰을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성경의 가르침을 바르게 들려주지 못한 말씀사역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고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셔서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썩어진 것 곧 영원한 멸망을 당하는 어떤 신자들. 절대적 견인론으로 인해 영원한 구원을 생각하며 현재의 잘못된 삶에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했다면 그 책임을 누가 어떻게 져야 하겠습니까?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되자 “왜 견인에 대해 성경대로 바르게 가르쳐주지 않았느냐”며 울부짖는 어떤 신자들의 절규에 대해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입니까? 그것은 그렇게 절규하는 당사자만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의 교회 현실은 중병에 걸린 어머니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현실은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어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될 수 있는 신자들로 인한 것입니다.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들이 돌이켜서 성경이 제시하는 바를 따라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렵고 멀기만 합니다. 절대적 견인론은 의도하였든지 의도하지 않았든지 간에 그 현실의 고착화에 일조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잘못된 모습을 일깨우고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여야 하는 것과 함께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는 것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쩌면 잘못된 교리를 바로잡는 것이 선행되어야만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다음 세대에서는 애초에 이러한 책임을 가지지 않아도 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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