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나왔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투쟁 이야기다. "하나님은 새로운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하신다"는 고백은 자연의 무자비한 파괴력 앞에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모든 위협에 맞서 투쟁할 것을 요구한다. 성서의 창조 본문, 특히 P문서는 창조와 인류의 존속을 주된 문제로 삼는다. 그것은 세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를 묻는 자연과학적 교과서가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안전을 위한 염려에서 생겨난 기도서이다.

신앙고백적 본문인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 '창조냐 진화냐'라는 의문이나 우주 생성의 비밀, 혹은 과학적 진화의 과정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은 헛수고다. 이러한 의문들은 진화론이 등장한 이후 현대인들이 갖게 된 의문이다. 진화론 이전의 시대, 더욱이 성서 시대에 온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은 아주 자명했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문화적 틀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와 비교할 때 이스라엘 신앙의 독특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바빌론 창조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서는 반란자의 피로 창조된 인간에게 신들을 섬길 의무가 부과된다. 아시리아 지역의 서사시인 <아트라하시스>에서는 높은 계급의 신들은 낮은 계급의 신들의 반란을 무마하려고 인간을 창조하고, 낮은 계급의 신들이 하던 노동을 인간들에게 떠맡긴다. 이러한 신화는 낮은 계급의 백성들에게 노동과 부역 등을 강제하며, 이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성서의 창조 이야기에서는 노동이 타락한 인간에게 내려진 벌이 아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의 에덴동산에서도 노동이 이루어졌다. 낙원이란 노동 없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유흥장이 아니라 함께 가꾸고 유지하는 삶의 일터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비로소 인간이 되고 삶의 보람을 느낀다.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고백은 우리의 전 지구적 공동연대의 굳건한 기초다. 창조신앙은 세 가지 요소, 즉 하나님과 인간과 세계를 함께 고려한다. 창조자 하나님의 현존을 보장하는 것, 인간은 자유롭게 창조되었다는 인식, 그리고 피조물은 선하다는 것이 창조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다. 오늘 우리는 창조에 대한 신뢰와 경외의 느낌을 새롭게 배울 필요가 있다. 경외와 신뢰가 창조자에게만 향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이다. 창조자와 창조 사이의 과장된 분리는 위험하다. 우리는 창조 안에서 창조자를 인식해야 한다. 내재성 안에 초월성이 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해방을 통해 완성된다. 하나님은 해방자로서의 창조자다. 성서는 세계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창조를 다루고 있지 않다. 창조는 미완성이며,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창조를 완성해야 한다. 즉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동역자다. 여기에서 해방은 공동창조 행위가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초월성은 무너져 내리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이 세계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일하는 공동 창조자들의 해방실천 가운데 확보된다.

하나님은 세계를 미완성으로 남겨 두셨다. 당신이 시작하신 창조사업을 완성시킬 의무를 우리에게 지우셨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의 관리자일 뿐이다. 우리는 깊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사업을 완성해야 한다.

전통 신학에서는 창조 세계의 성스러움에 대한 경외를 강조하지 않았다. 이 점과 관련해서 우리는 자신이 속한 모든 땅을 거룩하게 여기는 인디언들의 전통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 세계의 피조성만 강조하고 이 피조물 안에 현존하시는 창조주는 언급하지 않을 때, 이 세계는 점점 더 우리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 소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