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새로운 이해  - '교리'가 아니라 '현실'에 기초해서

예수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라는 새 지평을 가리키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 채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며 짖는 개와 같을 때가 참 많다.

예수는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데려가소서"라고 기원하지 않고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고 기원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역사 한복판에 '온다'는 뜻이다. 신약성서에는 '천당'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것이 없으며 천당에 들어간다는 표현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들어가는' 현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가 저 세상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한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일이다.

예수에게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독점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몸의 차원에서 시작했으며 치유와 식사를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즉 영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을 모든 사람이 계급 차별 없이 이용할 수 있는 공동체로 나타났다. 예수는 세리와 죄인들, 즉 당대에 법적으로나 의례적으로나 배척받는 부류들과 교제하고 함께 식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뜻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하나님 나라 도래를 선언하는 것은 인간의 권력 독점을 끝장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어디까지나 정치 현실과 직결된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이들 및 억압받는 이들과 손을 맞잡음으로써, 그리고 가장 곤경에 처한 이들의 얼굴에서 주님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한다. 그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은 집요하게 버티고 있는 구조적 폭력과 다양한 형태의 물리적 폭력, 또한 무차별 억압을 조장하는 폭력의 난무로 이 시대에 우리 가운데 활개치는 죽음의 한복판에서 생명의 표징으로 존재함을 뜻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구현하는 우리의 공동 노력으로 이미 지금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그 나라는 자연과 인간 모두의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해방, 개인적 범죄와 사회적 범죄에서 벗어나는 해방, 하나님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인간의 친교, 인간과 자연의 친교를 지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머나먼 이상이 아니다. 그 나라는 비록 새싹과 같지만 이미 작용하면서 우리가 사는 세계를 변혁시킨다. 우리에게 신앙이 있는 한, 하나님 나라는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 안에서 세력을 뻗친다. 신앙을 통해 우리도 부서진 세계를 치유하고 화해시키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유한 정의의 행동대원들이 된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와 이상향이라는 두 차원을 갖는다.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정의, 재산의 나눔, 인권 존중, 사회적 형제애가 있는 곳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다.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 나라는 항상 더 많은 정의, 더 많은 나눔, 더 많은 인권 존중, 더 많은 사회적 형제애가 가능한 이상향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주체적 활동과 동시에 인간의 모든 역사적 기대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선물에 의한 역사의 근본적 변형에 대한 희망이다. 하나님 나라는 "이 상황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이 상황은 더 이상 변화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게 하며, 우리를 끊임없이 새로운 상황으로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