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핵심으로 들어가면 보수와 진보는 통한다.

참, 원론적인 얘기다. 보수가 좋은(나쁜) 것인가, 진보가 좋은(나쁜) 것인가? 물론 이미 한 편 가치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중의 하나만 좋은 것이요, 다른 편은 나쁜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단순하게 말한다면 우리사회(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보수는 지켜야할 가치가 더 많다고 믿기에 현재 질서를 지키려는 것이고, 진보는 바꿔야할 변화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 개인마다 어디에 조금 더 가까우냐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젊을수록 진보적이고, 나이가 들수록 보수적이 된다. 더구나 이러한 사전적 규정을 넘어 현실에 적용해 보면 뭐가 보수적이고, 뭐가 진보적이냐는 평가는 더욱 복잡해진다. 개발이냐 보존이냐를 놓고 말하자면 흔히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국부의 창출을 위해 끊임없이 개발하고 진보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이른바 진보주의자들은 생태계의 가치를 최대한 보존하고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과연 누가 진보가, 누가 보수인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이다. 그래서 특정한 태도나 주장을 영원토록 진보 또는 보수라 해서도 안된다.

결국 순수한 보수는 순수한 진보와 연결될 수 있다. 흔히 ‘진보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영어 단어 ‘radical’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놀랍게도 첫 번 째 의미가 ‘근본적인’, ‘기초적인’이고, 두 번 째 의미가 ‘과격한’, ‘급진적인’(extreme), ‘혁명적인’(revolutionary)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이젠 널리 알려져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정 지켜야할 참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면(보수적), 그 가치가 흐려질 때마다 더욱 원칙적인 주장을 펴다보니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보이는(진보적) 게 당연할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구약 선지자들은 보수적으로도, 진보적으로도 볼 수 있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사 55:7) “이것은 야곱이 지키라고 세우신 계약, 이스라엘이 언제까지나 어길 수 없는 계약이다.”(대상 16:17/공동번역):보수적⇔“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사 1:13):진보적

이 점은 예수님에게도 동일하다. 그의 기본적인 태도는 참으로 거칠고 진보적이었다. 동시에 그는 참으로 보수적이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마 21:12):진보적⇔“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 5:17):보수적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말해서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는 참된 가치에 따라 반응하는 그 때 그 때마다의 필요한 태도라고 본다면 분명 밖으로 보이는 태도가 지키려는 것이든 바꾸려는 것이든 그 핵심은 하나다. 일맥상통한다.

2.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모르는 우리 사회의 소위 ‘보수주의자들’

그러나 보수든 진보든 같은 맥락에서 만날 수 있고 사회발전을 위해 함께 협력할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 현실에서 여지없이 깨져버리는 순간이 있다. 보수와 진보가 발전을 위한 열린(상대적인) 태도가 아니라, 교조화 되어 절대적 가치라고 믿는 순간이다. 그럴 때 보수나 진보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자세나 방법이 아니라,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된다.

특별히 지금 이른바 보수는 참으로 위험하다(물론 진보도 상당히 그렇다). 나는 지금 순진한 보수가 그립다. 내가 이해하는 한 본래 진정한 보수는 지켜야할(보수해야할) 중요한 가치를 사수하기 위해서 다른 잡다한 눈앞의 이해관계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그게 전통이든, 문화든, 이념이든, 종교든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처럼 자신의 보수적 가치(품위)를 지키기 위해, 다른 사소한 이해관계쯤은 초월할 줄 아는 대범함이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이른바 보수들은 보수라고 말하면서도, 자신들이 내세우는 가치보다는 허접한 이해관계들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자. 성균관 같은 유림들은 유교적 가치와 전통, 도덕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성장과 발전을 명분으로 무분별하게 서구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태도가 기대되는 사람들이다. 막연한 우리의 분류상으로 보면 분명 보수다. 그러나 사실이 그러한가? 현실에서 드러나는 유림들은 보수가 아니다. 만약 그들이 진정 보수라면 박정희나 이명박식의 성장주의, 개발주의를 가장 거세게 반발해야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문제에는 최소한 관심을 두지 않거나 더 나아가 적극적(또는 잠재적) 지지층이다. 더욱이 그들은 부동산에 관심 많다. 이것은 보수가 아니다. 지켜야할 가치보다 기득권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다.

요즘 “경제만이 살 길이다” “기업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자”고 하니, 이젠 “부자가 존경받는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당당하게 들려온다(‘부자가 손가락질 받지 않는 나라’, 나성린, 08년 1월 29일, 한국경제신문). 그러면서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분야의 모범이라 믿고 있는 미국의 예를 따라 우리도 기업인들, 부자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몰라도 한참 모르는 얘기다. 세계 최대 부자들인 워렌 버핏이나 빌 게이츠는 천문학적인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부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나를 포함해 미국에서 ‘행운의 티켓’을 거머쥔 특권층은 그만한 행운을 못 가진 이들을 부양할 책임이 있다.” “부자들에 유리하게 돼 있는 불공정한 미국의 세제를 뜯어고쳐야 한다.”(워렌 버핏)

그리고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액수를 거리낌 없이 사회에 다시 환원한다. 워렌 버핏은 2006년 전 재산의 85% 가까운 370억 달러를 빌 게이츠 재단에 기부했다. 빌 게이츠와 아내인 멜린다도 2004년 주식배당금 33억5,000만 달러 전액을 기부했다. 미국을 넘어 세계 최고의 부자 1위, 2위인 두 사람은 그저 흉내 내는 정도가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고후 8:3) 재산의 사회 환원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자들은 기껏 세금을 피하기 위할 때나 법인체를 만들고, 위법에 대한 사법처리를 피하려할 때 비로소 호주머니를 턴다(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을 보라). 자식들에 대한 상속에 대해서도 버핏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다. “그는 항상 ‘자식들에게 너무 많은 유산을 남겨주는 건 독이 된다’고 말해 왔다.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이 물려주면 자녀의 성취감을 빼앗기 때문에 '독'이 된다는 것. 부자인 부모를 만났다는 이유로 평생 공짜 식권(food stamp)을 받는 일은 반사회적일 수 있으며, 자녀들에게 해가 된다는 생각이다.‘('성공과 부자에 대한 현자의 질문, 워런 버핏 스토리', 예병일) 그런데 대한민국 부자 이건희는 아들 이재용에게 세금을 피해 재산을 넘겨주기 위해 주가조작, 회사 지분 변경은 물론 정부 고위층 돈 로비에 금산법 개정까지 시도하고 있다. 우리 국민들이 과연 이들을 존경해야 하나? 이것은 참다운 보수주의자들의 모습이 아니다.

※이 글을 몇몇 인터넷 사이트에 함께 기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