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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유일한 길인가종교의 언어는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고백의 언어일 뿐
류상태  |  sham5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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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1월 30일 (수) 18:59:45 [조회수 : 3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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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우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매우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다.” 라고 단정 지어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그 의도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만일 위의 말이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기독교 가치의 유일성을 전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면,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일단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종교인으로 공격받을만하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용하는 ‘고백의 언어’라면 시비를 걸 필요가 없다.


위의 글을 고백의 언어로 이해하면 이렇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예수를 믿고 따르기로 한)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종교의 언어를 ‘객관적 진술’로 보느냐 ‘고백의 언어’로 보느냐의 문제는 이처럼 중요하다.


만일 위의 말이 이런 고백의 선언이라면, 이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에 매우 경건하고 충실하면서도 자신들과는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존중하는 열린 종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도 당신들과 똑같이 믿어야 하는가?” 라고 믿는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건 우리 공동체의 고백이다. 당신들의 고백은 무엇인가? 당신들의 구세주, 당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그 분(혹은 그것)은 누구(무엇)인가?”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내가 운영하는 다음(DAUM) 카페 <불거토피아>에 어느 벗님이 이런 질문을 올려놓았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장 6절). 이 구절이 진실로 예수의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의 말이 아닌, 예수의 추종자들이 적은 고백의 언어인지 궁금합니다.”


이 벗님의 질문에서 수식어를 빼면 이렇게 된다. “예수의 말입니까? 예수의 추종자들이 적은 고백의 언어입니까?” 만일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답을 할 수가 없다. 둘 중 하나인지, 둘 다 아닌지, 둘 다 포함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차분히 이 문제에 집중해서 내가 아는 대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요한복음은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사복음서 중에 가장 늦게 쓰여졌다. 아무리 빨리 잡아도 서기 90년 이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그렇다면 예수 사건이 실제로 서기 30년경에 있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인다 해도,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그 사건을 목격한 증인들이 살아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시대가 된다. 게다가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더욱 더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을 강조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증언적 성격보다는 의미와 해석의 성격이 더욱 강하다는 말이다.


시대적으로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쓰여졌다는 점, 역사적 사실성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의미와 해석에 중점을 둔다는 점, 영지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발견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요한복음에서 실제로 예수가 “말했다는” 구절이 실제 예수의 말일 가능성은 다른 복음서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의심을 성서비평학자들로부터 받고 있다. <예수 세미나> 학자들의 경우, 요한복음에는 실제로 예수께서 한 말이 거의 없다고 보기까지 한다.


이런 학문적 배경을 전제하고 볼 때, 또한 예수께서 역사적으로 서기 30년경에 실존하셨다는 가정 아래,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음의 세 가지 정도이다. (요즘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재하지 않았다는 예수신화학파의 주장이 나오고는 있지만, 나는 역사적 예수의 실존에 더욱 큰 가능성을 두고 있으며, 역사적 예수가 개인인지 다수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1) 위의 문장 전체(요한복음 14장 6절)를 예수님이 실제로 말씀하셨을 가능성


만일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는 말씀을 직접 하셨고, 그 말이 왜곡되지 않고 후대(기록 당시까지)에 전해진 것이라면, 전반부(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는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던 예수님 자신이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깨우침의 선언으로 보인다.


후반부(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의 경우는, 예수께서 그런 깨우침을 통해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듯이, 신(궁극진리(ultimate-reality), 또는 도(道)라고 해도 좋다)과의 합일은 자신의 경우처럼, 깨우친 자아(각성된 각자의 진정한 나)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선언으로 보인다.


2)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후대의 고백이 결합되었을 가능성


이 가능성이 맞다면, 예수는 단지 자신이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삶을 사셨기에 바른 길을 걷고 있으며, 진리와 생명의 삶 가운데 있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인데, 그 깨우침의 선언을 제자들이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감히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어서) 또는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공동체에만 종교적 최고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예수 개인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선언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3) 후대의 누군가가 예수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


어쩌면 이 문장은 예수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교회나 특정 공동체, 또는 개인)에 의해 선의로 혹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선의로 기록되었다면 순수하게 예수에 대한 경외심에서 나온 고백의 언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특정 조직 (당시 교회, 혹은 요한공동체 등)의 조직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예수의 권위를 빌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상에서 제시한 세 가지 해석의 가능성은 물론 ‘나의 해석’일 뿐이다. 가능성을 말한 것이며 어느 것 하나 정확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런 해석을 가능성으로 내놓는 것은 “이것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교리 기독교의 해석이 다양한 본문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한 채,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자유와 생명을 주는 복음(복된 소식)이 아니라 특정 종교 조직의 강화를 위한 화음(화를 가져오는 소식)으로 악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다. “그 때, 그 사람들이 왜 그렇게 고백했을까?”를 묻지 않고 “경전에 기록되었으므로 그대로 믿어야 한다.”(‘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는 성서 구절조차도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기록자의 고백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는 한, 종교는 사람을 그 종교 조직에 얽어매는 마약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렇게 마약에 중독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도 자신처럼 마약중독자로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는 것이다. 특정 종교 조직에만 구원이 있다고 믿기에, 자신과는 다른 삶을 선택한 사람들을 기어코 자신의 종교 조직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다. 그것만이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살리는 숭고한 길이요 생명의 길이라고 “진실로”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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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자랑 (59.16.113.248)
2008-01-31 16:28:56
다원주의...
'오직 믿음으로'란 하나님께 대한 신뢰입니다.
그것은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신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하고
신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뜻하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를 바르게 알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그 원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자원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자원입니다.

마귀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존재로서 불신앙의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역사는 교묘하여 사람들은 그 역사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의 지배 방식이 "네 맘대로 하라"이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기에 스스로가 자유인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 자체가 공중의 권세잡은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지배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고요.

기독교가 기독교의 용어에 함몰되어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동의합니다만 그것이 비기독교의 입장으로 인해 기독교의 용어에 대하여 포기하여야 하는 것이라면 전혀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됩니다.
다른 종교인이나 불신자들의 입장에서 마귀의 지배라는 말은 결코 수긍되지 않을 이야기임이 분명할테니까요.

신학적 사고라는 것이 비평학의 견해를 따라 성경을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평학이 성경의 바른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이라 함이 불신자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천사가된앙마님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객관적이라고 함이 그러한 의미이겠습니까?

류상태님의 견해에 대한 반대도 강요는 아니랍니다.
유일함을 말함이 곧 강요는 아닙니다.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당사자가 결정하는 것이지 결정하는 것 자체까지도 강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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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가된앙마 (218.51.55.60)
2008-01-31 14:28:43
예수는 유일한 길이 아닐 수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요? 예수를 믿지 아니는 이들에게는.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그 목적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실 이것은 신앙고백이지요.

이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심과 성경의 여러 기적들 더 나아가 글가운데 질문처럼 성경본문에 있어 한치의 오류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임을 믿는 것은 아니지요. 적어도 객관적이라 함은 믿지 아니하는 이에게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나까요.

요는, 기독인중에 이것을 불변한 객관적 사실로서 진리로 받아들이기에 류상태님의 마지막 문단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처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돌던지지는 마십시요.성경기록과정에 있어서나 전승과정에 있어 기존 교리와 다르게 받아들인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삶가운데 드러내심에 의심치 않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제 안의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정도 가지고 흔들릴 예수의 복음도 아님을 여러분도 확신하리라 믿습니다.

예수의 유일함은 절대 강요로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류상태님의 글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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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1.51.19.194)
2008-01-31 14:04:54
안티당당님과 복음자랑님은
안티당당님 말씀과 복은자랑님 말씀은 ..
그러므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씀이시군요.
예를 들어 두 종교인이 특히 기독교인 과 타 종교인이 자리를 함께하여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래 하신 말씀처럼 말씀을 하신다면 과연 될까요?

두분께서는 고백의 언어인 성서를 객관적 증명용어로 주장하시는 것 같군요.
그렇게 주장하신다면 타종교인과는 도무지 대화채널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동일하게 아버지로 삼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마귀의 지배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또 하나님의 자원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을 풀이하지 아니하고서는 엄밀하게 말한다면 타인과 대화가 불가능한 스스로 기독교를 믿는 방법의 용어에 매몰되어있는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신학적 사고의 부재 때문에 신자들의 맹종현상이 나타나고 있는것입니다. 다시말씀드리면 믿음에서 지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지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 젖에 머무는 것입니다.
설령 본인은 깊은 믿음의 영에 들어가 있다하더라도 그 믿음이 무엇인가? 무슨 열매를 맺고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서신이 70년 이전에 모두 쓰여졌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바울 서신이 바울의 이름을 빌린저자들의 서신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 운동이 일어날 수가 없고 신약성서가 유대인이 기록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기록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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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당당 (61.102.75.116)
2008-01-31 13:16:23
웬지 모르게....당당뉴스다운 기사거리
예수님께서는 그 어느 누구의 증거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귀신이 예수를 증거하여도 셧다마우스 시키셨고, 수많은 병자들에게도 남에게 자랑하지말고 가족에게만 병이 고쳐졌음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자신의 의지로 예수를 증거하였다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오직 자신 스스로 증거하셨습니다.

그러한 그분이 "내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이요"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그 분 스스로가 진리로서 자신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을 믿고, 순종하고, 따르고, 제자가 되는 것이지, 그분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고 검토하고, 판단하는 역활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류상태씨가 저런 글 자체를 쓴다는 것은 진리와 생명의 빈곤함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잘 몰라서 하는 질문에도 명확한 답변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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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자랑 (59.16.113.248)
2008-01-31 13:09:49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동일하게 아버지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분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을 떠나 마귀의 지배 아래에서 살던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위치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세상에 속하고 세상의 원리를 추구하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원의 변화가 뒤따릅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 곧 자기 한계 안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하나님의 자원을 활용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가능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의 서신이나 모든 신약 성경은 주후 70년 이전에 쓰인 편지들입니다.
그 편지들이 쓰일 때에는 아직도 돌성전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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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1.51.19.194)
2008-01-31 11:05:58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란 무엇인가?
아래 '복음 자랑'님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 말씀하셨는데
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는 표현도 객관적인 표현은 될수가 없는 고백적인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종교의 구원이 있다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구원이지.."라는 말씀과 같은 맥락의 말이 될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복음 자랑님과 같이 주님을 믿기때문에 복음자랑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충분이 이해하며 똑같이 고백할 수 있으나

결국 위의 류상태님의 글과 복음자랑님의 댓글 또 우리의 관심과 촛점은 결국 '구원은 무엇인가' 에 달려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는 말씀은 신약성서가 말하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어떻게 표현되고 나타나고 있는가가 중요한데
그것은 결국 어느 특정한 장소의 해체(거룩한 장소의 해체)
특정한 인간의 해체(거룩한 인간의 해체)
특정한 시간의 해체(거룩한 시간의 해체)이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화해)를 가져온다고
주장하는것이 신약성서의 주장.. 특히 바울의 주장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 율법의 신분에서 아들의 신분으로 유업을 이을 자유한자의 책임자가 되었다는 성서의 바울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도 결국 구원을 말하고 있으나 그 다른종교가 과연 법(율법..계명)들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하게 해줄수 있으며 영을 추구하는 종교라 할지라도 용서의 상징을 과연 충분히 가지고 있을까 염려가 되며 그 용서의 상징이 없이 자유함에 이를수 있을까를 묻게 됩니다. 오늘날 그자유함이 가능하다고 또한 추측할수는 있으나 타종교에서의 구원은 어떤 영에의 몰입이지 않을까? 라고 조심스레 판단해 봅니다.

복음자랑님의 질문도 아닌데...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라는 말씀을 구체적으로 펼쳐보고 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댓글을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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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81.51.19.194)
2008-01-31 10:45:07
인간 예수를 생각하기보다는 그리스도운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이미 70년에 성전은 파괴되었다.

성전파괴는 거룩한 장소의 사라짐이다.

성전파괴는 결국 어느장소이든지 하나님은 받으신다는 장소의 해방을 말해준다.
또 특정한 안식일에 대한 해방 .... 어느날이든지 모두 거룩하다 ...시간의 해방

또 거룩한 인간에 대한 벗겨짐 ... 인간차별의 해방

이것이 그리스도 운동이다.

유대교에서 성전파괴의의 충격을 경험한 몇유대인들 (사울을 비롯한)이
결국 바리새적인 특정한 사람에게(바리새적 유대인들)오는 하나님나라의 개념을
모두에게 사랑으로 오는... 이땅에서 펼쳐지고 교회운동으로 이뤄지는 하나님나라운동으로 ..그리스도운동으로 계시된 운동아닐까?

당시의 수없이 죽어가는 십자가 처형의 사람들을 보면서 몇몇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제사를 생각하면서 ... 그당시 널리 불려지는 이름인 예수(구원자)라는 이름으로 개인화 시켜서 예수라는 인물을 만들어내어...

바리새적인 유대교를 극복하며 하나님나라운동을 한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오직 '예수로만' 이라는 명제는 당연히 고백적인 말이지만
율법적인 타율을 넘어 용서라는 죄용서 (어린양상징)상징으로 완전한 자유함속에서 사랑
을 창출하게 한 유대교를 초월하는 유대인으로 시작한 그리스도운동이 아닐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요4장)

그러기에 "오직 예수로만" 이라는 말은 '배타적 이기에' 혹은 '배타적이 될 수 있기에' 새롭게 표현 되어야 하는 말이 아니라

왜 성서는 '오직 예수로만' 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왜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로만' 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가?를 말해야 하지 않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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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자랑 (59.16.113.248)
2008-01-31 10:37:37
구원에 대한 이해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그리고 그 회복된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다른 종교에 구원이 있다면 자신들이 추구하는 그 구원이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하여 기독교가 배타적이라고 하는 말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일 뿐입니다. 다른 종교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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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자랑 (59.16.113.248)
2008-01-31 10:29:42
계시에 대한 이해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 스스로 찾아 이를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인간에게 알리심으로만 알게 되는 분이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스스로를 알리신 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바르게 알려지도록 섭리하셨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 계시는 언약의 시대 진행과 함께 변화가 있습니다. 점점 더 밝게 빛난다는 것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때와 마지막 신약 성경이 기록될 때를 비교하면 후자가 더 진전된 계시를 보여주게 됩니다. 흔히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구분하고서는 신앙의 예수를 역사적 예수의 변경 내지 변질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전혀 잘못된 관점입니다. 신앙의 예수는 역사적 예수를 담고서 머무르지 않고 진전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으로 계시의 종결 시점을 예루살렘 멸망과 돌성전 파괴를 통하여 옛 언약을 완전하 파기하는 주후 70년으로 잡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면 옛 언약의 완전한 파기를 가리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시록보다 더 이전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위의 글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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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나그네 (71.126.115.107)
2008-01-31 10:18:18
바싹 마른 막대기와 같은 마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않는 자들의 특성은 언제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이지요.

다른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자신은 하나님 없어도 살수 있는 특별한 사람인 줄 알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으니!

사람들에게 어리석은 자로 있을 것인가?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자로 있을 것인가?

내가 봐도 불쌍한데 하나님께서 보실땐 얼마나 불쌍 하실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라!

이 한구절도 믿을수 없는 메마른 저 상태씨의 바싹 마음을 언제 하나님께서 녹게 하실까?

바싹 마른 막대기에 물을 오르게 할려면 엄청난 고통이 있을 것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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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8
나이트맨 (221.168.33.235)
2008-01-31 10:04:47
선구자적인 류상태님의 생각에...
류상태님의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목사님의 생각이 기존교단에서는 도외시하고 경원시하는 부류의 생각이며, 현재 성경학자들이 예수의 존재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는 상황에서 미처 그러한 글과 생각을 접하지 못한 교인들의 생각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으로 생각됩니다. 한국기독교는 1.예수의 유일무이성이 고백의 언어가 아닌 선포적 의미로서 교인들에게 굳어져잇고, 2.그 유일무이성이 지나쳐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파시스트적 사고'로 옮겨왓다는 것을 아는 교인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3.그 독단성을 강하게 고집할수록 '흔들림없는 믿음'으로 이해하고, 추앙받는 한국교회정서로는 열린생각에서 로고스로서 이해되는 예수님에 대한 실존을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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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어거지 (69.143.138.135)
2008-01-31 09:48:18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라는 객관적 증거
예수님이 유일한 길이라는 객관적 증거는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에 복종했다는 사실에 있다. 입술의 고백 단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세우셨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자신에게 주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언제나 문제는 그 권세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인 것이다. 류상태는 자가 당착, 억지 논리로 다른 복음 전했던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처럼 선량한 기독교도들을 선동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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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랑 (222.251.209.104)
2008-01-31 08:50:44
그것은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이시다. 그 분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다"

그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누가 인정한다고 해서 진리인게 아닙니다. 누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진리가 아닌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다'라는 명제를 부인한다고 해서 하나 더하기 하나가 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일 뿐입니다. 그걸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 뿐입니다.

류상태씨,
당신이 이런 글을 쓰면 쓸수록 자신은 더욱 비참해지는 것임을 모르십니까?
아마도 그걸 느끼기 때문에 더 이런 글에 매달리는 것은 아닌지요.

믿어지지 않으면 조용히 떠나셔요.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셔요.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위장안티로서 믿지도 않는 기독교의 언저리에서 자신의 튀는 행동으로 먹고살려고하는 비열한(?) 사람임을 스스로가 느끼면서 스스로의 비참함을 절실하게 고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런 글에 신앙을 흔들릴 사람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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