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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연 회장 사회봉사 중인 꽃동네 2002년 탐방기 12002년도 1월에 갔다왔다
이용섭  |  lys9791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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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23일 (일) 11:19:57
최종편집 : 2010년 09월 06일 (월) 14:27:01 [조회수 : 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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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동네 탐방기 "계간 뿌리 2002년 봄호" 에 실렸던 글입니다. 

 

   
 
  ▲ 네이버 이미지 검색에서  
 
필자는 올 1월 31일(목) 오전 10시 반경 동서울터미널에서 꽃동네에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꽃동네 행 버스는 약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약 1시간 30분 후 꽃동네에 도착했다. 가방을 메고 꽃동네로 올라가던 중 승용차를 몰고 내려오는 꽃동네의 창설자 오웅진 신부와 너무나도 우연하게 서로 눈이 마주쳤다. 오 신부는 사진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어 물어 꽃동네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도중 신발정리 봉사를 하고 있는 어떤 앉은뱅이 아저씨의 지시대로 따라 주었다. 그곳 사무실에는 수녀 몇 분이 일을 보고 있었다. 수녀 한 분이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다. 이곳 홍보담당 박 마태오 수사와 미리 약속을 하고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수녀가 전화로 박 마태오 수사와 연락을 취한 후 곧 내려온다고 말했다. 얼마 후 사무실에 들어온 박 마태오 수사와 첫 인사를 했다. 점심을 했느냐고 물었다.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꽃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반찬들도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쌀은 정말 그 질이 떨어졌다. 억지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식사 후 제공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 후부터 박 마태오 수사와 함께 차로 이동하면서 꽃동네의 건물들과 시설물들을 돌아보았다. 한 네 시간 돌아보았더니 피로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돌아보자고 박 마태오 수사에게 청하였다. 꽃동네(음성)의 건물들과 시설물들을 모두 다 대충 한 번씩만 둘러보려 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릴 듯 했다.

다음은 박 마태오 수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박 마태오 수사의 세속이름은 박영식이고, 1960년생이라고 했다. 꽃동네에 들어온 지 17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꽃동네의 가족이 음성에 약 2천 백명이고 가평에 약1천 오백명이라고 했다. 도합 약 3천 6백명이라고 했다. 매년 꽃동네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약 6백명이고 질병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약 2백명이라고 했다. 사망자들 중에는 그 동안 꽃동네에 있었던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포함된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약 3백명이 재활에 성공하여 사회로 복귀한다고 했다.

 

 

   
 
  ▲ 꽃동네 입구에 세워진 최귀동 할아버님 동상과 묘입니다. 네이버 이미지 검색에서  
 
필자는 그때 오웅진 신부와의 서면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요사이 오 신부는 세상과의 인연을 거의 끊고 살고 있다. 매달 두 번째 네 번째 토요기도회에만 얼굴을 내놓고 있다. 박 마태오 수사에게 오 신부가 요사이도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며 계시를 받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꽃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수많은 태양의 기적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사실이라고 말했다. 과거 KBS 기자가 왔을 때 구름 한 점 없이 햇볕이 쨍쨍 내리치는 하늘에 무지개가 떴고 KBS 기자가 촬영해 갔다고 말했다. 통상 무지개를 비가 온 후 생기는 자연현상 이라고 알고 있는데 자연과학에 무지한 필자는 그것이 자연현상을 초월한 기적인지는 모르겠다.

박 마태오 수사는 매년 꽃동네에 연수 봉사 방문 등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약60~70만명이라고 했다. 과거 영국의 여자 변호사 한 명이 약 1년간 봉사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꽃동네에는 대문과 담이 없다. 24시간 오픈된 상태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대부분의 꽃동네 가족들이 사회에서 너무나도 천대받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신적 정서적으로 몹시 나약하여 대문과 담이 있으면 불안해 한다고 말했다. 꽃동네 입구에 있는 안내실도 작년에 만든 것인데 목적은 안내와 교통질서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대한 좋지않은 소문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1월26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회의(www.cbck.or.kr) 자유 게시판에 '오옹진 신부를 누가 좀 말려줘라!'라는 제하의 글이 올라왔다 그래서 필자는 내용 무라고 밝히고 '오웅진 신부입니다.'라는 제하의 댓글을 올렸다. 그러나 그후에도 '오옹진' 신부를 제목으로 한 글이 올라왔다. 필자는 자중에 '오옹진'이 오웅진 신부를 싫어하여 야유 조소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월 27일 특별한 볼 일 없이 그냥 계간 "뿌리" 사무실에 들렸다. "뿌리" 발행인 공석하 교수가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관한 원고를 부탁했다. 그래서 그날 주교회의 게시판에 취재의 도움을 구하는 글을 휴대폰 번호와 함께 올렸다. 그 다음날 저녁 어떤 사람으로부터 제보 전화를 받았다. 제보 내용은 꽃동네와 오 신부의 비리(?)에 대해서였다. 그 중 하나는 꽃동네의 경리담당 수녀가 거기 수사 하나와 눈이 맞아 공금을 횡령하여 야반도주 했다는 것이다. 통화가 끝난 후 발신 추적을 해 보니 '표시제한'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보자의 제보 내용에 신뢰감이 별로 가지 않았다. 우선 여기에 대해서 박 마태오 수사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꽃동네와 오 신부에 대한 온갖 잘못된 유언비어가 있다고 말했다. 꽃동네의 시스템은 한 사람의 수녀가 공금을 횡령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꽃동네의 봉사자들끼리 서로 눈이 맞아 결혼한 경우는 몇 번 있다고 했다. 또한 꽃동네에서 나간 후 사회에서 우연히들 만나 결혼한 케이스도 몇번 된다고 말했다.

필자는 꽃동네의 성금이 후원금과 국고보조금을 비교해서 대충 몇 대 몇이냐고 물어 보았다. 후원금과 국고보조금의 비율이 약 7:3이라고 했다. 박 마태오 수사에게 꽃동네의 부동산이 오 신부 친인척 명의로 위장 매입되어있다는 항간의 소문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는 꽃동네가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꽃동네의 모든 재산은 투명하게 관리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농지는 재단법인에 등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꽃동네 주변에 있는 약간의 농지들은 오 신부와 몇몇 수사들과 수녀들의 명의로 구입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등기소에 등록함과 동시에 명의 신탁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꽃동네 주변의 농지를 조성한 목적은 회복된 환자들에게 체력단련 중 재활의지를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부지를 마련할때 오히려 오 신부의 종중(보성 오 씨)땅을 증친회에서 무상으로 제공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면적은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꽃동네 때문에 주변의 집 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꽃동네 주변에는 민가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충북 음성군 맹동면은 꽃동네 때문에 이제까지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음성군 금왕읍도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꽃동네 주변의 마을 주민들은 주로 수박 농사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도시에 나갔던 주민들 중에서 땅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돌아 오고 있다고 말했다.

박 마태오 수사는 꽃동네 주변의 지하에 엄청난 양의 금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모 금광개발회사가 주민들 몰래 지하에서 약 500m 까지 굴진해 오던 중 발각이 되어서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고 증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금광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꽃동네 주변 마을들의 수박농사는 끝이라고 말했다. 수박농사가 잘되고 있는 것은 지하수가 좋기 때문인데 금광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지하수 고갈과 오염이 초래된다고 말했다.

 

 

   
 
  ▲ 2003년 7월 검찰의 소환조사로 충주지청에 출두했던 오웅진 신부, 사진출처  네이버에서 검색  
 
필자는 과거 꽃동네가 국정감사를 받은 사건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당시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 전부가 꽃동네에 와서 모든 시설들을 다 둘러 본 후 충북도청 국정감사실에서 오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공개질의와 공개답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던 이유는 국졸 학력의 고아원 출신인 홍 모라는 사람이 90년대 초 꽃동네에서 봉사자 생활을 한 일년 하다가 나갔는데 그 사람이 한겨레신문 충북주재 기자에게 접근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 홍 모라는 사람의 증언 중 맞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허위날조된 증언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꽃동네와 오 신부에게 시비를 건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자기도 여기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필자와 박 마태오 수사와의 질의응답을 요약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오웅진 신부는 청주교구(당시 교구장은 현 서울대교수장인 정진석 대주교)에서 최초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진석 주교는 이 수도회를 인준에 주었다. 87년경 정 주교는 오 신부가 교구 사제로 남든지 수도 사제로 입회하든지 결정권은 오 신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오 신부는 양자택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다. 천주교회의 교회법상 교구 사제가 교구를 탈퇴하고 수도 사제를 선택할 경우 그 수도회의 법적 수련을 받고 그 수도회에서 새로 서원을 해야한다. 즉 수도회의 창설자 신분이 수도회의 수련자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오 신부는 꽃동네 회장직을 사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리법상 수련자는 보직을 가질수없기 때문이다. 수련 기간이 끝난 후 오 신부는 첫서원과 종신서원을 동시에 했다.이것은 아마도 천주교 교회사에서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예외적인 사건 일 것이다. 이것을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자기를 편리한대로 상황과 사건에 따라 거두절미 조작하여 꽃동네와 오 신부를 괴롭혀 온 것이다.

박 마태오 수사와의 인터뷰는 복지 시설에 대한 오 신부의 견해를 간단히 듣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오 신부는 도시 계획이 항상 복지 시설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필자와 박 마태오 수사는 차로 꽃동네와 가까운 한 마을의 삼겹살 집으로 갔다. 거기에서 삼겹살을 구워놓고 필자는 소주를 마셨고 박 마태오 수사는 식사만 했다.

거기를 나와서 차로 꽃동네 버스 종점으로 갔다. 서울행 막차를 타고 올라 왔다. 버스를 타고 올라 오는 중 사무실 입구에서 마주친 어떤 한 앉은뱅이 아저씨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분과 마주치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후 그분을 혼자서 얼마 동안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필자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분들의 표정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비겁한, 교활함, 불안함, 자포자기, 술수 등 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박 마태오 수사에 의하면 그분은 사회에서 오랜 세월 거지 생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분은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천대와 괄시와 모욕등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분들의 표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감과 절망감이다. 하지만 그분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편안함, 의심 없음, 자신확신, 천국에 대한 소망 등이었다. 중국의 어떤 성형은 사람이 40세를 넘기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과 성품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책 만 읽어가지고는 인생을 결코 알 수 없다. 필자는 그 앉은뱅이 아저씨의 경우를 보고서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접었다. 그리고 오 신부가 언제고 성인 반열에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필자는 올 1월 31일(목) 오전 10시 반경 동서울터미널에서 꽃동네에 가는 시외버스를 탔다. 꽃동네 행 버스는 약 1시간 간격으로 있다. 약 1시간 30분 후 꽃동네에 도착했다. 가방을 메고 꽃동네로 올라가던 중 승용차를 몰고 내려오는 꽃동네의 창설자 오웅진 신부와 너무나도 우연하게 서로 눈이 마주쳤다. 오 신부는 사진으로만 알고 있었다. 물어 물어 꽃동네 사무실로 들어갔다. 들어가는 도중 신발정리 봉사를 하고 있는 어떤 앉은뱅이 아저씨의 지시대로 따라 주었다. 그곳 사무실에는 수녀 몇 분이 일을 보고 있었다. 수녀 한 분이 어떻게 오셨냐고 물었다. 이곳 홍보담당 박 마태오 수사와 미리 약속을 하고 내려온 것이라고 말했다. 그 수녀가 전화로 박 마태오 수사와 연락을 취한 후 곧 내려온다고 말했다. 얼마 후 사무실에 들어온 박 마태오 수사와 첫 인사를 했다. 점심을 했느냐고 물었다.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꽃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반찬들도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쌀은 정말 그 질이 떨어졌다. 억지로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식사 후 제공된 커피를 한 잔 마셨다. 그 후부터 박 마태오 수사와 함께 차로 이동하면서 꽃동네의 건물들과 시설물들을 돌아보았다. 한 네 시간 돌아보았더니 피로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이제 그만 돌아보자고 박 마태오 수사에게 청하였다. 꽃동네(음성)의 건물들과 시설물들을 모두 다 대충 한 번씩만 둘러보려 해도 족히 일주일은 걸릴 듯 했다. 다음은 박 마태오 수사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박 마태오 수사의 세속이름은 박영식이고, 1960년생이라고 했다. 꽃동네에 들어온 지 17년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꽃동네의 가족이 음성에 약 2천 백명이고 가평에 약1천 오백명이라고 했다. 도합 약 3천 6백명이라고 했다. 매년 꽃동네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약 6백명이고 질병 등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약 2백명이라고 했다. 사망자들 중에는 그 동안 꽃동네에 있었던 사람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포함된다고 했다. 그리고 매년 약 3백명이 재활에 성공하여 사회로 복귀한다고 했다. 필자는 그때 오웅진 신부와의 서면 인터뷰를 부탁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요사이 오 신부는 세상과의 인연을 거의 끊고 살고 있다. 매달 두 번째 네 번째 토요기도회에만 얼굴을 내놓고 있다. 박 마태오 수사에게 오 신부가 요사이도 기적을 행하고 예언을 하며 계시를 받느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말해 주었다. 꽃동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수많은 태양의 기적들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사실이라고 말했다. 과거 KBS 기자가 왔을 때 구름 한 점 없이 햇볕이 쨍쨍 내리치는 하늘에 무지개가 떴고 KBS 기자가 촬영해 갔다고 말했다. 통상 무지개를 비가 온 후 생기는 자연현상 이라고 알고 있는데 자연과학에 무지한 필자는 그것이 자연현상을 초월한 기적인지는 모르겠다. 박 마태오 수사는 매년 꽃동네에 연수 봉사 방문 등을 목적으로 오는 사람들이 약60~70만명이라고 했다. 과거 영국의 여자 변호사 한 명이 약 1년간 봉사를 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꽃동네에는 대문과 담이 없다. 24시간 오픈된 상태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대부분의 꽃동네 가족들이 사회에서 너무나도 천대받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신적 정서적으로 몹시 나약하여 대문과 담이 있으면 불안해 한다고 말했다. 꽃동네 입구에 있는 안내실도 작년에 만든 것인데 목적은 안내와 교통질서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대한 좋지않은 소문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1월26일 한국 천주교 주교회회의(www.cbck.or.kr) 자유 게시판에 '오옹진 신부를 누가 좀 말려줘라!'라는 제하의 글이 올라왔다 그래서 필자는 내용 무라고 밝히고 '오웅진 신부입니다.'라는 제하의 댓글을 올렸다. 그러나 그후에도 '오옹진' 신부를 제목으로 한 글이 올라왔다. 필자는 자중에 '오옹진'이 오웅진 신부를 싫어하여 야유 조소하는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월 27일 특별한 볼 일 없이 그냥 계간 "뿌리" 사무실에 들렸다. "뿌리" 발행인 공석하 교수가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관한 원고를 부탁했다. 그래서 그날 주교회의 게시판에 취재의 도움을 구하는 글을 휴대폰 번호와 함께 올렸다. 그 다음날 저녁 어떤 사람으로부터 제보 전화를 받았다. 제보 내용은 꽃동네와 오 신부의 비리(?)에 대해서였다. 그 중 하나는 꽃동네의 경리담당 수녀가 거기 수사 하나와 눈이 맞아 공금을 횡령하여 야반도주 했다는 것이다. 통화가 끝난 후 발신 추적을 해 보니 '표시제한'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제보자의 제보 내용에 신뢰감이 별로 가지 않았다. 우선 여기에 대해서 박 마태오 수사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꽃동네와 오 신부에 대한 온갖 잘못된 유언비어가 있다고 말했다. 꽃동네의 시스템은 한 사람의 수녀가 공금을 횡령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라고 했다. 물론 꽃동네의 봉사자들끼리 서로 눈이 맞아 결혼한 경우는 몇 번 있다고 했다. 또한 꽃동네에서 나간 후 사회에서 우연히들 만나 결혼한 케이스도 몇번 된다고 말했다.필자는 꽃동네의 성금이 후원금과 국고보조금을 비교해서 대충 몇 대 몇이냐고 물어 보았다. 후원금과 국고보조금의 비율이 약 7:3이라고 했다. 박 마태오 수사에게 꽃동네의 부동산이 오 신부 친인척 명의로 위장 매입되어있다는 항간의 소문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는 꽃동네가 재단법인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꽃동네의 모든 재산은 투명하게 관리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농지는 재단법인에 등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꽃동네 주변에 있는 약간의 농지들은 오 신부와 몇몇 수사들과 수녀들의 명의로 구입되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등기소에 등록함과 동시에 명의 신탁을 작성했다고 말했다. 꽃동네 주변의 농지를 조성한 목적은 회복된 환자들에게 체력단련 중 재활의지를 심어주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교 부지를 마련할때 오히려 오 신부의 종중(보성 오 씨)땅을 증친회에서 무상으로 제공 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많은 면적은 아니라고 했다. 필자는 꽃동네 때문에 주변의 집 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소문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꽃동네 주변에는 민가가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충북 음성군 맹동면은 꽃동네 때문에 이제까지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음성군 금왕읍도 지역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꽃동네 주변의 마을 주민들은 주로 수박 농사를 하고 있는데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도시에 나갔던 주민들 중에서 땅이 있는 사람들은 다시 돌아 오고 있다고 말했다. 박 마태오 수사는 꽃동네 주변의 지하에 엄청난 양의 금맥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모 금광개발회사가 주민들 몰래 지하에서 약 500m 까지 굴진해 오던 중 발각이 되어서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라고 증언해 주었다. 그러면서 금광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꽃동네 주변 마을들의 수박농사는 끝이라고 말했다. 수박농사가 잘되고 있는 것은 지하수가 좋기 때문인데 금광개발이 이루어질 경우 지하수 고갈과 오염이 초래된다고 말했다. 필자는 과거 꽃동네가 국정감사를 받은 사건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당시 보건복지위 소속 의원 전부가 꽃동네에 와서 모든 시설들을 다 둘러 본 후 충북도청 국정감사실에서 오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공개질의와 공개답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었던 이유는 국졸 학력의 고아원 출신인 홍 모라는 사람이 90년대 초 꽃동네에서 봉사자 생활을 한 일년 하다가 나갔는데 그 사람이 한겨레신문 충북주재 기자에게 접근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말했다. 그 홍 모라는 사람의 증언 중 맞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허위날조된 증언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한국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서 꽃동네와 오 신부에게 시비를 건 것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박 마태오 수사는 자기도 여기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당시 필자와 박 마태오 수사와의 질의응답을 요약하여 아래에 소개한다. 오웅진 신부는 청주교구(당시 교구장은 현 서울대교수장인 정진석 대주교)에서 최초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당시 정진석 주교는 이 수도회를 인준에 주었다. 87년경 정 주교는 오 신부가 교구 사제로 남든지 수도 사제로 입회하든지 결정권은 오 신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오 신부는 양자택일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었다. 천주교회의 교회법상 교구 사제가 교구를 탈퇴하고 수도 사제를 선택할 경우 그 수도회의 법적 수련을 받고 그 수도회에서 새로 서원을 해야한다. 즉 수도회의 창설자 신분이 수도회의 수련자 신분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오 신부는 꽃동네 회장직을 사임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리법상 수련자는 보직을 가질수없기 때문이다. 수련 기간이 끝난 후 오 신부는 첫서원과 종신서원을 동시에 했다.이것은 아마도 천주교 교회사에서 좀처럼 찾아 보기 힘든 예외적인 사건 일 것이다. 이것을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자기를 편리한대로 상황과 사건에 따라 거두절미 조작하여 꽃동네와 오 신부를 괴롭혀 온 것이다.박 마태오 수사와의 인터뷰는 복지 시설에 대한 오 신부의 견해를 간단히 듣는 것으로 끝이 났다. 오 신부는 도시 계획이 항상 복지 시설을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는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필자와 박 마태오 수사는 차로 꽃동네와 가까운 한 마을의 삼겹살 집으로 갔다. 거기에서 삼겹살을 구워놓고 필자는 소주를 마셨고 박 마태오 수사는 식사만 했다. 거기를 나와서 차로 꽃동네 버스 종점으로 갔다. 서울행 막차를 타고 올라 왔다. 버스를 타고 올라 오는 중 사무실 입구에서 마주친 어떤 한 앉은뱅이 아저씨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분과 마주치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난후 그분을 혼자서 얼마 동안 지켜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필자의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분들의 표정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것은 비겁한, 교활함, 불안함, 자포자기, 술수 등 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박 마태오 수사에 의하면 그분은 사회에서 오랜 세월 거지 생할을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분은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천대와 괄시와 모욕등을 받았을 것이고 그러한 분들의 표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분노감과 절망감이다. 하지만 그분의 표정에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편안함, 의심 없음, 자신확신, 천국에 대한 소망 등이었다. 중국의 어떤 성형은 사람이 40세를 넘기면 그 사람의 얼굴에서 그 사람의 살아온 과정과 성품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책 만 읽어가지고는 인생을 결코 알 수 없다. 필자는 그 앉은뱅이 아저씨의 경우를 보고서 꽃동네와 오웅진 신부에 대한 모든 의심을 접었다. 그리고 오 신부가 언제고 성인 반열에 올라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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