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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여야 한다논어에서 배우는 교회개혁 (7)…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최종운  |  pingan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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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17일 (월) 07:27:45 [조회수 : 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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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爲政以德(자왈위정이덕)이면 : 공자 말씀하시기를 정치는 덕을 베풀어야 한다.
譬如北辰居其所(비여북진거기소)이어든 :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고
而衆星共之(이중성공지)니라 : 모든 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다.

   
 
   
 
위의 말은 논어 위정제이(爲政第二) 편 처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지금부터는 위정제이(爲政第二) 편을 시작합니다. 인간이 사는 세상이 어디 법과 규칙으로만 움직여지지 않는다고 봅니다. 정치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덕입니다. 정치는 가장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한 인간의 행위 예술이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군자의 덕은 위대하고 영향력이 큽니다. 군자는 시장 상가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들의 형이하학적인 돈놀음에 혈안이 되기보다는 밤하늘의 별과 같이 칠흙같은 캄캄한 밤에 불과 같이, 망망대해에 등대와 같이, 낮에는 해처럼 밤에는 달처럼 존재하여 덕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공자가 말하고 있는 정치관도 춘추전국 시대의 어지러운 정치적 혼란을 바탕으로 인과 덕을 갖추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군자의 덕목은 한낱 실현불가능 한 딴 나라의 이야기로 단순한 고전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도 있는 마당에 우리는 그 뜻을 기독교적인 가치로 다시금 곰곰이 새겨봐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말한 덕이란 생활과 행동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윤리적인 유익을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덕의 종류 중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독교적인 덕은 아무래도 바울이 요약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사람들의 집합체에서 정치는 필수적인 놀이입니다. 이 놀이를 정당하고 투명하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껍데기는 미국식 정치를 하고 알맹이는 유교식 정치를 합니다. 그나마 공자가 요구하는 덕의 정치와는 거리가 먼 패거리 파당 정치를 하고 있는데, 국민의 분노를 낳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보스를 위한 조폭 수준의 정치입니다. 제 뱃속을 챙기는 한탕식의 정치를 한 경험이 있었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국민을 섬기고 덕으로 정치하기보다는 부귀, 명예와 권력을 이용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공자가 말한 덕의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도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덕이 없는 사회, 그리고 교회

사람은 덕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는 더 큰 덕이 있어야 합니다. 나라에 가뭄이 들거나 자연재해가 심하여 백성들이 궁핍할 때는 왕이 덕이 없어 그리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역대 대통령들도 친인척 부정부패나 참모들의 비리에는 부덕의 소치라고 하면서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하고는 했습니다. 목사도 덕이 있어야 합니다. 흔히 하는 말로 “설교는 잘하는데 덕이 없어” 하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브랜드 목사 가운데 학력과 경력이 화려하고 신학대학 교수까지 하고 총회장 등의 감투를 쓰면서도 덕이 없어 잡음을 가져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화합이 안 되는 것도 다 인간적인 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력이 부족하여도, 설교는 좀 못하더라도, 인물은 못 생기더라도 덕만 있으면 목사될 자질이 충분한데도 우리는 박사학위 소지자 목사를 원하고, 기생 오라비 같은 얼굴 반반한 목사를 원하고,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가진 목사를 원하는 한국교회의 생리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생리는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가치관이자 세계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과는 반대로 되어야 합니다. 자본주의 가치관과 상치되는 구조가 되어야 복음이 제자리를 잡아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 모든 것을 포기 하더라도 예수님의 사랑과 인품의 덕만 가지고 있으면 종으로서의 기본적인 구비 조건은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북극성(北極星)은 지구의 북극에 가장 가까운 별로 위치가 거의 변하지 않기 때문에 예부터 북쪽 방향을 아는 데 이용되었습니다. 북극성은 나침반이 없던 시절에는 길가는 사람들의 갈 길을 알려주는 나침판 역할을 하였습니다. 지구 남반구에서는 십자성이 북국성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는 이렇게 우주 속에 위치가 불변하는 북극성을 창조하여 놓으셨습니다. 항해를 하는 배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가 있다면 그것은 나침반일 것입니다. 선조들에게는 북쪽 하늘의 북극성이 나침반이었습니다. 바다에서 북극성이 없다면 어떻게 넓은 바다를 마음 놓고 항해할 수 있겠습니까? 산속에서 길을 잃어 헤멜 때 밤하늘에 빛나는 북극성을 보고 길을 찾았습니다. 첨단 과학 문명이 발달한 지금은 나침반 없이도 위치를 추적하게 됩니다, 인공위성으로 네비게이션을 가지고 방향과 위치를 찾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 문명의 고비용 구조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인 무비용의 방향 추적 장치인 북극성만 바라보고서도 옛사람들은 충분히 방향을 찾고 길을 찾을 수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볼 여유도 없고 더군다나 밤하늘의 별을 쳐다 볼 여유는 더더구나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하늘의 운행 질서는 여전히 창조 질서의 프로그램대로 예전과 변함없는 위치에서 북극성은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기 위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북극성은 홀로 주위에 다른 별과는 달리 홀로 큰 빛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공자도 그 북극성을 보고 군자의 덕목으로 비유한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북극성을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별은 예수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큰 별을 보고 베들레헴까지 와서 주님 탄생을 축하하지 않았습니까? 천문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동방박사의 별은 목성과 토성 두 개가 겹친 현상이라고 합니다. 동방박사가 본 목성과 토성 두 개의 별이 육안으로는 밤하늘에 하나의 별로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 별이 이상하리만큼 밝게 빛났던 것도 목성과 토성이라는 두 개의 행성이 겹쳐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추측은 혜성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학적인 추측과 분석의 정확성보다는 저는 동방박사가 본 별이 북극성으로 비유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북극성과 같은 분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자기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어서 구원의 북극성으로 삼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장대에 달린 구리뱀을 쳐다보면 나은 것처럼 북극성과 같이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복음을 알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를 따라 하나님이 지시한 가나안 땅을 가는 동안 지치고 피곤하고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불쌍히 여기시어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덕을 베풀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지시대로 구리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구리뱀을 쳐다보게 하여 살게 하였습니다. 구리뱀은 모든 백성들의 구심점을 모으는 북극성 역할을 한 셈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도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우상을 섬기고 늘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에 찌들린 사람들과 사회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걱정, 근심 ,불안, 초조, 질병, 각종 사고가 먹구름같이 드리워 져 있고 사회적으로는 각종 자본주의 부작용인 탐욕과 부동산 투기, 마약, 성범죄, 대박 문화가 판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당리당략의 정쟁만 있어 희망을 주지 못하고 국민을 불안하게 만드는 조선 시대의 유물인 당쟁만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부정부패, 각종 사회적 비리로 인한 고통과 고난의 연속 드라마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 교회적으로도 역시 축소판의 연출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라고 다른 사회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장대에 달아 놓은 구리뱀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구원의 북극성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로부터 영광을 받아야 합니다. 북극성이신 예수님은 온 인류의 빛입니다. 복음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될 때 그 빛을 받은 자는 작은 빛을 반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더 이상 구약시대의 모든 인간들이 죄성을 가지고 죄악의 구렁텅이에 살 때 구원의 방법이 없음을 아시고 예수님을 보내시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성이 넘쳐나는 탐욕적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죄인들의 북극성이신 예수님께 나아갈 덕의 푯대로 삼고 그분을 덕의 모델로 삼기를 원합니다. 수많은 별들이 북극성과 같이 반짝이더라도 하나의 북극성만이 우리를 안전한 항구로 이끄는 것처럼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이처럼 어디를 향해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북극성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사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별들이 북극성을 향하고 있는 것과 같다(而衆星共之이중성공지)고 함은 공자가 비록 하나님과 성경을 모르고 한 말이지만 보편적인 진리의 차원에서 말한 것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신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말은 구약시대의 수많은 선지자와 열두 제자와 바울을 위시한 사도들과 교부들 종교개혁가들 그리고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는 주의 종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은 북극성이신 예수님을 예언하고, 함께 생활했고, 증거하고, 성경을 번역하고, 부패된 교회를 개혁한 주의 종들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다른 별은 쳐다보지 않고 북극성이신 예수님만 진리의 복음으로 기준을 삼았습니다. 허지만 그분들은 십자가의 길로, 고난의 길로, 좁은 길로, 소외되고 왕따를 당하면서까지 복음의 길을 걸어가면서 북극성이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갔습니다. 허지만 지금 주의 종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이와는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불교의 법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끝이 가리키는 달을 쳐다봐라" 는 말은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어서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잘 아는 말입니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쳐다봅니까? 인간은 다 그런가봅니다. 진리의 실체는 보지 않고 껍떼기만 보는 보편적인 어리석음 말입니다. 그러한 어리석음은 우리 기독교신자들도 잘 범하고 있습니다. 손가락 끝의 방향은 진리를 가리키나 대개 사람들은 가리키는 사람의 손가락 끝만 볼 뿐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의 진리는 보려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보라는 달(예수님의 복음)은 보지 않고 손가락 끝(목사, 부흥사의 복음, 목회 성공, 출세 성공, 투기로 돈 벌기)에만 관심을 갖는 어리석은 기독교신자들을 지칭하는 것 이라고 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님의 제자로, 구원받은 백성으로 자처하면서도 실질적인 교회생활은 목사의 자녀로 부흥사의 제자로 조폭의 똘마니마냥 손가락 끝만 보고 그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멀리 있는 달은 목이 아파 쳐다보기도 싫고 가까이 있는 손가락이 이쁘고 잘생겨서 그것만 봐도 행복합니다. 더 더군다나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한 손톱은 너무도 화려합니다. 그것을 복음으로 착각합니다. 손끝으로 안수하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 은혜를 받습니다. 인정해 줄때 사람 사는 맛이 납니다. 손톱 보는 관람료만 내면 칭찬도 해줍니다. 이게 바로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북극성이 되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북극성이 되어야 합니다. 시궁창과 같이 엉망진창인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나고 예수님의 복음이 제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북극성과 같은 변하지 않은 좌표를 제시하여 합니다.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라는 덕을 가져야 합니다. 사회 개혁이든 교회개혁이든 개혁자는 항상 외롭습니다. 혼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 교회개혁의 길을 가는 사람은 외롭고 왕따가 되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반드시 친한 벗이 생기고, 좋은 동지가 생기고 개혁의 협력자가 생길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방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가지고 살면서 복음을 비추는 북극성과 같은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의 영역이 한국사회 전 영역에로 확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정의와 공의가 하수같이 흘러넘치는 하늘나라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삶의 전 영역에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끼리 만의 거룩한 패거리 교회집단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한국역사 한가운데서, 돈이 최고의 가치를 보여주는 맘몬 우상의 자본주의가 극성을 부리는 이 땅위에서, 삶에 지치고 허덕이는 서민들의 고통을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는 개혁교회의 전통을 반추하여 빛을 발하는 북극성과 같이 존재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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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125.57.50.251)
2007-12-17 21:32:42
교회의 신비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가난자,못배운자, 창녀, 병자들이었다. 당시의 힘있고 잘난 사람들이 음모를 꾸며 십자가에 처형 했다. 그런데 그런 못난 무리들이 모여 그리스도교가 세상으로 퍼져 나갔다. 권력들이 박해하고 죽이고 별 짖을 다해도 그리스도교는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천주교에 비교하면 엉성한 조직을 가지고 잘도 버티어 왔다. 그리고 금방 부패하여 없어 질 것 같으면서도 계속이어져 온다.왜 그럴까?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님 때문이 아닐까? 12월 7일 인가 이메일 한통 받았다. 교황 베네딕토16세의 메시지가 세계에 발표 되었다. 2008년 12월 8일까지 프랑스의 루르드란 곳을 순례하면..Indulgence 을 준다고. 영어 사전 찾아보니까 대사면 즉 모든 죄를 사해 준다는 뜻인것 같은데.. 여행 한번가서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500여년 전 종교개혁의 바람을 이르킨 사건과 비슷하여 뭔가 좀 이상하게 보이는데.. 힘없고 만만하게 보이는 개신교 목사들 보고 부패하고 갈라지고 단합되지 못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지 못하다고 꾸중 하면서 교황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떠드는 사람이 없어.. 카톨릭 처럼 Indulgence 선포해도 누구하나 토다는 사람 없는 거대한 힘있는 조직으로 크지 못한 죄 때문이 겠지요..하나님의 축복이 글쓴이 와 그 가족위에 임하시기를 축원 하옵니다.

마음 아픈 목회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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