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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종교 개혁 의미를 애석해 하며<논어>에서 배우는 교회 개혁(6)…초대 교회 개혁 정신 살려야
최종운  |  pinganm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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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15일 (토) 10:07:33 [조회수 : 2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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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曰君子 就有道而正焉 可謂好學也已(자왈군자 취유도이정언 가위호학야이)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르게 하면 배움을 좋아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한 ‘도’란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인륜과 하늘의 이치와 땅에서 사는 법을 주로 의미하였습니다. 천지 창조 이후 사람들은 내재된 하나님의 형상인 양심을 도덕과 윤리로 땅과 하늘에서 일어나는 자연법칙에 따라 살았습니다. 이런 자연법칙을 신학적 용어로 일반계시라고 합니다. 일반계시 속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 속에 자신의 창조 질서를 분명히 나타내시고 있습니다. 하늘의 모든 기이한 현상들 그리고 땅 위 모든 피조물 속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대로 사시사철 하나님을 향하여 찬양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일반계시는 주로 자연법칙으로 나타납니다. 미세한 소립자, 원자에서부터 아주 광대한 우주의 은하계의 운행 질서는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의 결집체인 과학은 단지 발견하고 증명할 뿐입니다. 과학의 발전으로 아주 미세한 바이러스 수준의 생명체든 아니면 가장 발달된 고등생명체이든 간에, 하나님의 창조 질서들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한 일반계시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일반계시도 무시하고 첨단 과학의 지혜로 유전자를 변형하고 인위적인 생명을 합성하여 생명 창조의 영역을 넘보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영역이란 지극히 가소로운 짓거리이지만 인간은 바벨탑에 올라서서 자신의 위대함을 과대홍보할 것입니다.

공자가 말한 도란 바로 일반계시 속에 감추어진 환경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법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인륜이라는 것도 인간 자신 안에도 하나님께서 프로그램하여 놓으신 선한 양심으로 인간관계가 이루어지고 사회생활의 규범으로 살아갑니다. 흔히 잘잘못을 가릴 때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양심도 없느냐”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나님의 품성으로 창조하여 놓으신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운행 안에서 그 자신의 성품에 따라 역사하시고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여러 민족들과 나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의 도덕적 양심 가운데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선악에 대한 내면적 양심 가운데도 보편적으로 계시되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죄성의 유전자가 이어져 오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 일반계시를 왜곡하고 사탄의 도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사람들의 허망한 생각과 어두운 마음으로 전쟁과 탐욕의 역사가 반복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땅을 자기 이름으로 등기하여 놓고 자기 땅으로 배타적 권리로 다른 사람의 땀을 착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지혜와 과학 기술의 발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업신여기고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풍요한 물질로 바벨탑의 장벽을 쌓아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연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공자는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르게 하면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말함은 일반계시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품성을 말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땅과 하늘의 창조 질서 가운데는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가운데 다스리고 주관하는 이가 있을 것인데 이를 신(神)이라고 하고 상제(上帝)라고도 했습니다. 이 도는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입니다. 공자가 알지 못했던 로고스이지만 공자는 일반계시가 주는 차원에서 로고스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도라고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 복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한자로 말하면 道입니다. 이때 道의 의미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복음의 진리를 전하러가는 것을 우리는 전도(傳道)하러간다고 표현합니다. 道란 글자는 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진리를 의미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할 때 길이란 진리를 의미합니다. 중국어 성경에는 “我就是道路,真理,生命. 若不藉着我. 没有人能到父那里去”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道路는 예수님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구원의 도로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도는 다름 아닌 예수님이십니다.

죄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군자(의인)로 칭함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 연휴에야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신과 성경을 기준으로 교회를 개혁하여 한국교회가 바로 세워지면 비로소 성경과 신학을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개혁의 근거는 성경이고 개혁의 최상위 준거는 종교 개혁가 루터와 칼뱅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구약의 개혁 전통과 예수님의 복음으로 그리고 중세 종교 개혁의 정신으로 항구적인 개혁을 해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인다는 표증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말씀으로 하나되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의 사람과 같이 낮아지셨다는 뜻입니다. 원수 되었던 관계가 회복되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죄인된 인간 사이의 화해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교회는 화합하고 통합하여야 합니다. 서로가 보수니, 자유니, 진보니, 개혁이니 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아무리 의사라고 하더라도 바이러스에 노출되고 암은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목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죄인입니다. 거룩한 체 위선으로 포장한 종교 엘리트로 행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한 이유도 바로 종교 엘리트의 구조적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하나님 손에 이끌린 종교 개혁이지요. 마틴 루터 자신도 말하기를 “개혁은 내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원 생활에서 중세 교회가 제시한 고해성사나 신비주의적 구원의 방법들을 하나씩 부정하면서 절망적으로 구원을 구하던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죄를 완전히 참회하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결심으로 고백할 때,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면서도 죄의 벌은 남게 되므로 그것을 기도나 선한 행위와 헌금으로 용서 받는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런 종교적 상황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하나님의 상급론을 말하는 브랜드 목사도 있고 일천번제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아보려는 기발한 목회 아이디어가 개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결국은 브랜드 목사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만 마는 이런 상황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없습니다. 현재 교회가 그때의 종교적 부패 상황으로 동일하게 원위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성전 건축과 전도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해지자 헌금을 부추기면서 면죄부(免罪符) 발행을 남용하여 많은 폐단을 가져왔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어떠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어 구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루터는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들게 되었습니다.

루터와 칼빈 등의 종교 개혁자의 종교 개혁을 가반으로 한 현 개신교의 개혁주의 교회는 언제나 종교 개혁 정신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은 어찌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수백 년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교회는 꾸준히 변질되고 개혁주의 교회의 유전적 변이 현상이 증가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자금의 상황은 다름 아닌 당시의 종교 개혁 이전 상황으로 원위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다시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당시의 로마 가톨릭의 교황은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교황이 브랜드 명품 목사라는 대교황, 중소형 교회에 당회장이라는 작은 교황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종교적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혜택을 돈으로 포장된 밥그릇을 놓지 않는 이상 개혁을 하기란 루터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착한 목사에서 나쁜 목사로

<내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다>라는 제목의 어느 목사님이 지으신 책이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겪었던 일에서 깨우침을 얻는 이야기로 아주 공감이 가는 내용입니다. 유치원이란 처음 사회 생활의 시작입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유치원 교육은 정말 중요합니다. 유치원에서는 잃게 하면 착한 어린이로, 저렇게 하면 나쁜 어린이로, 길을 건널 때는 횡단보도로, 녹색 신호등이 커지면 손을 들고 건너고, 친구 사이는 사이좋게 지내고, 밥은 골고루 먹는 등등의 기본적인 교육을 합니다. 사실 우리가 사회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은 유치원에서 다 배웠던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생활의 덕목은 사회라는 유치원에서 다 배운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파당을 지워 갈기갈기 찢어지는 나쁜 어린이의 집합체로 성장했습니다. 어렸을 때는 착한 어린이가 커서는 나쁜 어른이 된 것처럼 신학교 졸업 시는 착한 목사에서 목회 성공하고부터는 나쁜 목사로 변태된 경우를 보게 됩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그것은 유치원에서 배운 기본적인 것을 망각한 어른처럼 성경과 종교 개혁의 기본을 망각한 목사들과 브랜드 목사들이 삯군 목사, 짝퉁 브랜드 목사로 변태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치원 어린아이는 성장 과정에 정상적으로 나타나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욕심쟁이입니다, 그래서 유치원 교사들은 나눠먹으라고 가르칩니다. 유치원 아이들은 교육 효과가 빨라서 곧 사이좋게 나눠먹고는 하지요. 신학교에서도 유치원과 같은 그런 교육을 받았지만 얼마간의 목회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욕심쟁이 목사로 변하고 맙니다. 그래서 자기만 알고 자기 교회만 성장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지요. 이게 과연 정상적인 하나님의 도를 알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의 도를 실천하고 있는 모습일까요? 판단은 이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 맡기겠습니다. 복음을 몰랐던 공자도 인간의 죄성을 알았기 때문에 비록 죄를 짓고 잘못을 하였지만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르게 하면 비로소 배움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한 것 같습니다.

누가 더러운 방주에 타겠는가? 

올해도 저만치 종교 개혁 주일이 지나갔습니다. 해마다 형식적으로 기념하는 예배가 있는 교회는 그나마다행입니다. 아예 종교갸혁기념주일 행사를 하지 않는 교회도 있고 , 종교개혁의 의미를 살교하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개혁의 의미를 강조하면 자신의 반복음적 목회와  자본주의적 목회과오가 들어날까 싶어서인지도 모르지요. 오늘 한국교회는 종교 개혁가들의 개혁본질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탐욕과 온갖 죄의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깨끗한 방주로 환골탈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물이 새는 방주에, 더러운 방주에, 갈아타겠습니까? 선장이 자기들과 똑같이 사기치고, 출세 성공하려고 발버둥 치는데 갈아타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모습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신뢰도 추락과 교인들의 감소로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선생된 브랜드 목사들이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르게 하여야 비로소 예수님의 길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인간적인 명예와 영광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혈육의 끈끈한 죄성을 포기하여야 합니다. 온갖 사회의 처세와 협잡을 기독교적인 가치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바울 사도와 같이 무소유의 삶을 지행하여야 합니다. 이런 무소유의 삶의 형태를 간직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인 불교의 스님들입니다. 예수님의 무소유 실천이 불교계에서 행하고 있으니 우리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요? 이런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스님들의 책들은 베스트셀러로 서점 진열대에 놓이지만 기독교 목사님들의 책 가운데 베스트셀러가 된 책들은 희귀하다 못해 전무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만 잔치를 벌이고 이불 밑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공자가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이면 가위호학야이(可謂好學也已)’라고 말한 것을 한번 되새겨봐야 하겠습니다. ‘도가 있는 곳에 나아가 자기의 잘못을 바르게 하면 비로소 배움을 좋아하게 된다.’ 이 말은 성경과 종교 개혁 정신으로 되돌아가 지금의 부패하고 타락한 자본주의에 함몰된 적그리스도적인 신앙 사조를 바르게 하면 성경과 종교 개혁 정신의 배움을 좋아하게 된다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논어>를 가지고 교회 개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동안 교회 개혁의 당위성과 정신을 성경을 인용하고 종교 개혁가들의 문헌을 인용하여 논하는 것이 하도 식상하여 교회 밖에서 기본적인 개혁의 당위성을 쉽게 설명해 보려고 한번 시도해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 밖에서 주어진 시공간이 다른 고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반계시적인 진리를 발견하여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전방위적 통합적 지혜와 깨달음 그리고 통찰력의 범위에서 부족하지만 계속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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