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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위안부 할머니들 어디로 가야하나...햇살센터가 대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한 평의 행복” 캠페인을 하고 있습니다.
당당뉴스 편집실  |  webmaster@dangdang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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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년 12월 01일 (토) 02:03:49 [조회수 : 6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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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평의 행복” 캠페인을 전개하며
“미군 위안부 할머니 어디로 가야하나...”

샬롬!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계절에 평화의 인사를 드립니다.

   
 
  ▲ ’민들레 홀씨상’ 받은 ‘햇살센터’ 우순덕씨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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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학시절 등록금이 없어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공부만 시켜주시면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절실한 기도가 사명이 되어서, 마흔 아홉 늦은 나이에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을 졸업하고, 평택 안정리에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햇살센터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4월초에 반 지하를 계약하고 선후배 및 동창들께 이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관심 있는 동문들의 후원으로 200만 원이 마련되었고 은행에서 1,000만 원을 마이너스 대출하여 5월초 입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34년 만에 아들을 찾은 분, 틀니를 해드렸더니 옥수수도 잘 드신다는 분, 만나기만 하면 ‘고마워’하시며 눈시울을 적시는 분 등 우리 할머니들의 맑은 영혼과 만나면서 새 힘을 얻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받아 신앙생활을 중단하시던 한 할머니가 갑자기 찬송가를 부르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부르기 시작한 찬양소리가 안정리 모퉁이에서 울려 퍼진지 5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찬양 모임이 있는 화요일에는 하나님이 보내주시는 봉사자들이 때로는 집에 있는 양식까지 들고 찾아와 기쁨으로 정성껏 식탁을 차려주는 모습은 ‘천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정부의 후원은 없지만 방문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시는 분들이 이 일의 동력이 됩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한국의 짓밟힌 역사의 희생자들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의 삶의 여정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선택이었다기보다는 그저 생존을 위한 싸움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지촌 여성들은 ‘양색시’ 혹은 ‘양공주’ 라는 사회적인 비난과 낙인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민간외교관’ 혹은 ‘달러벌이 산업역군’ 이라 칭함을 받으면서 ‘미군위안부’로서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고무된 사실이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피폐한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외화획득은 중요한 핵심 중의 하나였으며 기지촌에서 미군을 상대하는 여성들을 통해 벌어들이는 달러는 소위 ‘밑천이 들지 않는 장사’로 이해되었고, 실제로 한국경제의 발전은 이러한 방법의 외화획득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단지 외화획득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닉슨 독트린 정책(1969)에 의하여 주한미군의 감축이 시행되었을 때에는 미군의 계속적인 주둔 여건을 만들기 위하여 ‘기지촌정화운동’이 시행되었습니다. 그 운동의 중심 내용은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성병관리를 통한 ‘정화’였습니다.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성병관리를 철저히 받아야 했고 백인과 흑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양질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외교관’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미군을 상대하는 기지촌 여성들의 몸은 국가의 이해관계를 둘러싸고 철저한 관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은 이러한 국가의 이해를 둘러싸고 역사적, 문화적인 희생양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 때 산업역군’으로서 또 ‘민간외교관’으로서 칭송을 받던 평택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지금 늙고 병들어 기지촌의 쪽방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국민기초생활보호대상자인데, 평택으로의 미군기지 이전공사가 본격화됨에 따라 안정리 일대의 땅값은 급등하였고 그와 함께 전/월세 시세도 상승하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 일대에 땅을 가진 사람들은 재래식 건물을 철거하고 미군들에게 임대하기 위한 넓은 평수의 신축건물이 대거 들어서면서 그나마 연탄보일러를 사용하는 월셋방 자체가 격감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안정리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주거문제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1960년대에는 남한 국민총생산(GNP)의 25퍼센트를 차지하도록 경제 성장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송탄경제의 60퍼센트를 부양했건만(캐서린H.S. 문,『동맹속의 섹스』, 56-76쪽) 정부나 지방은 아직까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매매특별법’ 3주년이나 지났건만 전쟁으로 인한 성매매여성인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는 아직도 아무런 지원조항이 없습니다. 또한 ‘평택지원특별법’에도 지원조항이 한 줄도 없습니다.

여러 방송프로그램(SBS 그것이 알고 싶다 ‘기지촌 할머니, 누가 그들에게 낙인을 찍었나?’ 2006.10.21 / KBS 2 TV 시사투나잇 2006.5.4 / MBC 2580시사매거진: ‘기지촌 여성’, 2005. 7.10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지촌 역사’, 2003. 2.9)에서도 보도 되었듯이 가족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사회로부터 내몰려 홀로 죽어가는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비참한 삶은 이들만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회에 글을 보내주신 박태균 교수(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와 방문하신 김기조 박사(전 외교안보연구원 명예교수)도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에 대해서 국가와 사회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씀도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얼마 전 경기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신창기 회장께서 본 회를 방문 시(장호철 도의원 외 3명 동행) 우리 할머니들의 주거의 어려움을 말씀드렸더니 ‘땅만 있으면 집을 지어 주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힘을 입어 대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한 평의 행복” 캠페인(일시후원 60만 원/ 분납후원 5만 원*12개월/ 일반후원 1만 원 이상)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 하여 주십시오. 여러분이 속한 단체에서도 이 소식을 전파하여 주십시오.

이 분들이 평생을 살아온 이 마을을 떠나 낯선 골목에서 인생을 마감하지 않도록 도울 수만 있다면, 돈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우리 할머니들이 ‘사랑과 나눔과 도움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한다’는 하늘의 진리를 경험하면서 마지막 눈을 감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평생동안 강도떼에 짓밟히며 사냥개에 쫓기며 살아온 우리 할머니들에게 밝은 햇살이 비추게 될 새 날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지촌의 평화와 새로운 비전을 기대하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햇살의 은총이 더욱 가득 넘치시기를 빕니다.

우순덕 대표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구 햇살센터)

<후원계좌>
농 협 118-01-074174 사)햇살사회복지회
국민은행 509001-01-220240 우순덕 (햇살)

<후원문의>
031-618-5535, 011-9633-9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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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살센터 4주년  
 

'민들레 홀씨상' 받은 <햇살센터> 우순덕씨

[한겨레] 한 때는 정부가 기지촌 여성을 ‘외화벌이를 하는 애국자’로 칭찬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병들고 외로움 속에 노년을 보내는 이들에게 정부가 주는 혜택은 한달 대략 25만원 정도의 국민기초생활수급권자 지원이 전부다.

경기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 ‘캠프 험프리스(K-6)’ 기지 주변에는 대략 60여명 정도의 기지촌 여성들이 남아 쓸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외부 손길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기지 앞에 위치한 ‘햇살센터’는 그나마 이들이 기댈 언덕이다.

‘햇살센터’를 연 사람은 우순덕(53·5c사진)씨. 평균 63살 안팎의 기지촌 여성들로부터 ‘원장님’ 또는 ‘에미야’, 심지어는 ‘어머니(!)’라고까지 불린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기지촌 여성들이 그에게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아니었다.

우 원장은 “2002년 4월 센터 문을 열고 기지촌 여성들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다녔는데 ‘그런 것은 왜 알려고 하냐’며 반응이 차가웠다”고 했다. ‘무슨 조사나 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냉대하던 이들을 찾아가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려움을 하나씩 풀려고 애썼다. 그와함께 멀게만 느껴졌던 서로의 거리도 조금씩 좁혀졌다.

“한 번은 한 할머니가 추석 때 홀로 신김치와 밥을 해놓고는 울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렸어요. 그뒤론 1주일에 한번씩 이분들과 함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센터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있어요”

기지촌 여성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노년의 병이다. 그러나 틀니 끼우기 처럼 의료보험 혜택을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처음에는 ‘독거노인 주치의 맺기 운동본부’의 도움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센터 후원금 중 1인당 30만원씩을 지원하고 있어요. 200만∼300여만원 하는 틀니를 무료로 시술해주는 치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30여명의 틀니도 새로 했지요”

봄·가을로는 미술·춤치료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푸드뱅크를 통해 노인들이 식사를 거르지 않도록 애쓰고 있다.

감리교신학대와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을 거치면서 소외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됐다는 우 원장은 “이 분들이 그늘진 삶에서 벗어나서 햇살과 같이 밝은 마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는 마음으로 쉼터를 햇살센터로 지었다”고 했다.

우 원장은 사각지대에 놓인 기지촌 여성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23일 지역 시민단체인 ‘평택자치참여시민연대’로부터 아름다운 시민상인 ‘민들레 홀씨상’을 받았다. 우 원장은 지나온 시간 보다는 앞으로 더 할 일이 많다고 했다.

“기지촌 여성분들 10명 중 9명이 전·월세로 근근이 살고 있어요. 국가 지원생계비 중 15만원 정도를 월세로 내고 나면 10만원으로 살아야해요. 이 분들의 주거공간을 마련할 수 있도록 앞으로 노력해야죠.”

글·사진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WHY 5월호 우먼 인터뷰 - 우순덕 햇살센터 원장 월간WHY 기사  /2006/09/01 13:51
http://blog.naver.com/karta/50008169353

당신의 햇살을 나눠 주세요 
햇살센터 원장 우순덕


   
 
  정희수감독님을 모시고  
 

6남매의 맏딸. 순할 순(順)에 덕 덕(德)자인 자신의 이름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내 사랑하기로 했다는 착한 소녀는 수십 년이 흐른 뒤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고 있다. 살면서 사랑의 빚을 너무 많이 져 그 빚을 할머니들께 갚고 있다는, 기지촌 할머니들을 위한 선교센터 겸 쉼터인 ‘햇살센터’의 우순덕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만 있을 때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사랑의 빚이라고 봅니다. 그 빚을 이제는 돌려드려야죠.”

“저기가 K-6라고도 불리는 미군부대 캠프 험프리예요. 여기부터가 쭈욱 기지촌인 셈이죠.”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안정리에서 만난 그이는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미리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를 따라간 곳은 부산스럽지도 그렇다고 한산하지도 않은 기지촌 거리. 태극기와 성조기가 줄지어 걸린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도로들을 사이에 두고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조악한 간판의 상점들이 띄엄띄엄 자리잡고 있었다. ‘Rent Room'이라고 쓰인 상점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로 리모델링한 날건물들이 어색하게 자리 잡은 곳, 바로 그이가 보여주고자 한 곳이었다.

“저 클럽 보이죠? 우리 할머니가 저기서 일해요. 왼쪽의 건물 보세요. 저게 지난달까지 우리 할머니가 일하시던 곳이에요.” 어색할 만큼 크게 새겨진 온갖 ‘CLUB’ 간판들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그이는 끊임없이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입구만 있을 뿐 창문은 없어서 전혀 환기가 안 된다는 클럽들 이야기며, 노년에도 여전히 클럽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일상, 그리고 미군이 새로 들어온다는 얘기에 새로 건축되는 건물들 때문에 주변이 뒤숭숭 하다는 소문을 열심히 들려준 그. 쉰다섯의 나이에도 소녀 같은 열정으로 햇살센터를 운영하며, 그 동안 우리 사회가 알면서도 모른 척 외면해 온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을 보듬어 안아주고 있는 햇살, 우순덕을 만나보자.

WHY : 햇살센터라는 이름이 너무 예쁘다

우순덕 : 이런 쉼터를 하겠다고 했더니 친구가 이름을 지어 주었다. 처음엔 햇살로 수놓는 집으로 하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서 햇살센터로 줄였다 (웃음). 우리 할머니들 삶이 그 동안 너무 그늘지고 어려웠으니까 이제는 그 마음의 그늘을 햇살로 수놓아서 아름다운 삶으로 엮어 가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예쁜가?

WHY : 예쁘다(웃음).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된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우순덕 : 원래 소외된 여성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다. 감신대에서 신학을 전공했었는데 그때부터 이 땅의 불쌍한 여인들을 위해 일을 하고 싶었다. 그 후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을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불우한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꾸려보고 싶다는 꿈을 키우게 되었다. 소외된 여성을 위한 봉사에도 여러 분야가 있어서 ‘서울여성의전화’에서 상담교육도 받고 한 2년 동안 상담을 하기도 하고 성폭력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점차 관심범위가 좁혀지게 되었고 사람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소외 여성, 특히 기지촌 할머니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된 것 같다.

WHY : 햇살센터를 처음 세운 것이 2002년 봄이다.

우순덕 : 2000년 가을, 국제결혼을 한 여성들을 위해 미국에 갔다오면서 기지촌 여성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도움이 필요하신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했는데 마침 안정리에 60여 분의 기지촌 할머니 분들이 계신다고 들어서 알게 되었다. 2001년 여름부터 사전조사에 들어가서 2002년 봄에 개원했다.

WHY : 가족들이 반대는 안하던가?

우순덕 : 반대는 안 했다. 근데 미국 갔다 오고 나서 2000년 가을부터 평택 가서 일한다고 하니 처음엔 멀다고 뭐라 그러더라. 그러다 2001년 봄이 지나고 여름 지나고 2002년 봄이 되니까 그렇게 원하면 가서 하라고 그러더라 (웃음).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시작했다.

WHY : 처음엔 기지촌 할머니들에게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우순덕 : 물론이다. 처음엔 할머니들이 많이 거부반응을 보이셨다. 근처 교회와 푸드뱅크 도움을 받아 할머니 연락처를 알아내서 전화 드리면 그것도 싫어하시는 분들 많았다. 그래도 계속 마음을 열고 꾸준히 다가갔더니 할머니들도 결국 마음을 여셨다. 처음엔 햇살센터를 반지하 전세방에 꾸렸는데 그땐 서른 몇 명이 단칸방에 다닥다닥 붙어 앉아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 내가 스포츠 마사지 배운 걸로 스포츠 마사지를 해드리기도 하고 파마 봉사자들이 오셔서 우리 할머니들 파마를 해 주시기도 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 한 분이 파마를 하시다 말고 막 우시더라. “아니, 할머니 왜 우세요” 했더니 교회를 다니시다 상처를 받은 일이 있어 이젠 안 다니시는데 찬송가가 부르고 싶으시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랬다. 그럼 부르시자고. 그때 파마 모자 뒤집어쓰고 찬송가 부르는데 할머니들이 그러시더라. 맨날 불렀으면 좋겠다고. 일주일에 한번씩이라도. 그럼 그러자고 해서 매주 월요일마다 찬송가를 부르게 됐고 그렇게 할머니들과 마음의 문을 열어 나가기 시작했다. 원래 우리 할머니들이 알고 보면 그렇게 마음이 여리실 수가 없다.

WHY : 햇살센터가 하는 일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우순덕 : 매주 월요일마다 할머니들하고 모여서 찬송가 부르던 게 일종의 찬양예배가 되었는데 그게 작년부턴 매주 화요일로 바뀌었다. 그 예배가 끝난 후엔 공동식사를 하고, 각종 명절엔 함께 모여서 식사도 하고 또 야유회도 간다. 그 외에도 다양한 치료 프로그램들이 있다. 지역의료기관 등과 연계한 의료연계서비스, 방문상담, 법률상담, 푸드뱅크를 통한 식사 지원, 미술치료와 춤치료 등이 그런 것들이다. 특히 ‘독거노인 주치의 맺기 운동본부’의 도움과 안정리의 박장석 치과의 도움으로 30여 분의 할머니가 틀니를 새로 해 넣기도 하셨다. 보험도 안 되는 거라 비싸서 엄두도 못 내던 거였는데…(웃음). 그 외에도 성폭력 상담, 입양된 자녀찾기, 혼혈아동에게 학습비와 용돈을 지급하고 후원하는 프로그램 등 하는 일이 많다. 하지만 올해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바로 주거공간마련운동이다.

WHY : 주거공간마련운동?

우순덕 : 2003년 여름을 기점으로 미군이 온다는 것이 공식화됨에 따라 기지 주변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바람에 집값들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대추리 주민들이 직접적인 피해자라면 어찌보면 우리 할머니들은 간접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연탄을 떼는 집에서 월세 5만 원, 7만 원짜리 집에서 살 수 있었는데 집들이 죄다 재건축 붐이 이는 바람에 보일러 떼는 집으로 이사가야 하고 그 때문에 방값을 십오만 원, 십칠만 씩 내게 되니까 한달에 25만원 되는 생활보호비 받아서 그거 내고 나면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주거공간마련운동을 하고 있다.

WHY :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면서 아쉬운 점도 많이 느낄 텐데….

우순덕 : 답답함을 많이 느낀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답답한 건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해 다들 너무나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평택지원특별법이란 게 있지만 미군기지로 인해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고생한 사람들은 할머니들 아닌가?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선 한 줄도 언급된 바 없고 여성가족부에서 지원하는 성매매특별법을 봐도 외국 여성에 대해서도 지원하면서도 자국의 전쟁으로 인해 생긴 성매매 피해 여성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 너무 답답하다.

WHY : 외람되지만, 기지촌 할머니들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은 전쟁으로 인해 생긴 성매매 피해 여성이라기보다 자의적인 성매매 여성이라고 보는 시선이 더 강한 편이다.

우순덕 : 여러 가지 시각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내가 보는 시각으론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 때문에 미군이 들어왔고 미군 때문에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게 너네를 구하러 간 우리네 군인들을 즐겁게 해 줘라 요청을 하니까, 우리 정부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서 기지주변에 보건소를 만들어놓고 성병검사를 해서 성병에 걸리지 않은 깨끗한 여성들만 클럽에서 일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런 환경들로 인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기지촌 여성으로의 삶을 살아오신 할머니들이 많다.

WHY : 예를 든다면?

우순덕 : 우리 할머니 중 한 분은 결혼해서 아기를 못 낳는다고 시집에서 쫓겨났다. 소박맞은 여자가 어디 가서 살 데가 있나? 누가 미군부대 근처 식당을 소개해서 그곳에서 일하다가 미군을 만나다 보니 어찌해서 살게 됐고 또 아기까지 낳게 됐다. 결국 할머니가 아기를 못 낳았던 게 아니라 남편이 능력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너무 분해서 그때 그 할머니가 자기가 낳은 아기를 데리고 시어머니랑 남편 앞에 가서 자기가 낳은 아기가 아니랄까봐 그 앞에서 젖도 먹였다 그러더라. 내가 어디가면 그런다. 누가 그 할머니한테 돌을 던지겠냐고. 칠거지악하고 가난이란 족쇄가 그 할머니를 기지촌 할머니로 만든 거 아니냐고.

또다른 할머니는 전쟁 때 부모 다 잃고 오갈 데가 없어서 친구가 “좋은 언니 집이 있다. 가자, 거기 가면 공짜로 밥 준대”라는 말만 믿고 덜컥 따라 갔다가 친구가 “나 며칠 어디 갔다올게. 기다려” 그래놓고 혼자 도망갔다고 한다. 친구는 없지. 자기 혼자 있는데 얼굴이 하얀 사람 까만 사람 왔다 갔다 하니까 무섭지 그러니까 “저 갈래요” 그랬더니 주인아주머니가 “너 며칠 동안 먹은 밥 값 내 놔! 잠잔 값 내놔!” 도망갈래야 도망갈 수 없게 포위망을 짜놨으니 도망갈 수도 없고. “너 하룻밤만 자라. 그럼 내가 봐 줄게…”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나니, 옛날 사람 정조관념에 이제 버린 몸 싶어서 못 빠져 나오게 되고 그렇게 기지촌 여성으로 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이런 케이스가 많이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할머니들은 움츠러들고 피해의식에 갇혀있는 분들이 많다. 평생을 남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살아오시다보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시게 된 것이다. 그런 지난날의 아픔을 풀어버리고 남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하기 위한 ‘인생그림 새로 그리기’ 치료 프로그램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다. 내적인 상처를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프로그램인 것이다.

WHY : 힘들지 않나?

우순덕 : 힘들다. 그러면서도 힘들지 않다. 사실 햇살센터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더 많다. 하지만 인력도 자금도 많이 부족하다. 현재 1주일에 3일 나오는 파트타임 간사 한 명 정도만 함께하는 실정인데 보다 원활한 활동을 위해선 풀타임 간사가 3~4명이 더 달라붙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리고 보다 많은 이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힘들다. 그러나 또한 힘들지 않다. 이 일은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고, 또 그런 보람된 일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 때문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죽는 날까지 우리 할머니들과 언제나 함께 하고 싶다. 이것이 아마 내게 주어진 사명일 것이다.

<글 / 김성주 기자 (karta@naver.com, karta@newswhy.com

   
 
  햇살 할머니들의 솜씨  
 


"기지촌 할머니는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 희생양"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기지촌 할머니 돌보는 평택 햇살센터 우순덕 원장

[ 2007-08-23 16:09:15 ]

   
 
   
 
가난하고 자식 많은 집의 딸로 태어나 6.25전쟁 후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들의 생활을 감당해야 했습니다.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서도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 등 집안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우리의 큰 언니, 누나들이 있었습니다.

기지촌에서 숱한 고생을 겪어야 했던 이들은 주로 50대 후반에서 70대 후반까지의 여성들로, 노령이 된 지금은 돌아갈 고향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2002년 봄부터 평택 안정리로 내려가 할머니들을 돌보고 말벗이 되어주고 저마다 아픈 상처를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기지촌 할머니들의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서 햇살센터를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순덕 원장인데요, 벌써 5년이 넘었습니다.

감리교 신학대를 졸업한 우순덕 원장은 오로지 과부와 고아와 떠돌이 객들을 보호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곳으로 오게 됐다고 하는데요, 평택 햇살센터 우순덕 원장을 8월 23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삶의 그늘을 햇살로 수놓은 곳 ‘햇살센터’
 
▶ 정식명칭이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이고 줄여서 햇살센터인가요?

2002년 봄에 햇살센터로 우리가 명명을 했고 작년에 경기도청으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이름을 약간 바꾸어서 사단법인 햇살사회복지회가 된 거예요.

▶ 시작하신지 얼마나 되셨어요?

5년 지났습니다. 사단법인이 된 것은 작년 가을이고 할머니들과 만나기 시작한 것은 5년 됐어요.

▶ 장소가 정확하게 평택 어디에 있나요?

평택 K6 미군부대 근처에요. 옛날부터 죽 미군부대가 50년 넘게 있었어요.

▶ 지난번에 말썽이 많았던 평택 대추리와는 거리가 얼마나 먼가요?

5분~10분 거리밖에 안 돼요. 입구와 입구 사이인데 우리 안정리하고는 5분이고 조금 더 깊숙이 가면 10분 정도 걸리죠.

▶ 현재 기지촌 할머니들이 몇 분이나 살고 계세요?

60여 분이 계세요. 동두천이나 의정부 말고도 안정리에만 거주하시는 할머니들이에요.우리 할머니들의 자치조직이 있는데 ‘국화회’라고 해요. 할머니들끼리 경조사를 나누고 나라에서는 관여할 수 있는 체제이기도 해서, 예전부터 이 조직이 있었어요.옛날에는 아픈 사람이 있으면 1천 원씩 모으기도 했고 또 시에서는 조직의 대표들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다고 합니다.

◇ 대부분 생활보호대상자, 어딜 가나 소외대상자

▶ 평택에서 대추리 사건도 있었지만 미군 기지를 이전한다고 해서 굉장히 시끄럽잖아요. 땅 값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찬성하는 사람도 있고,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었나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게 볼 수도 있고 국제화 중심도시라고 해서 나름대로 애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우리 할머니들은 젊어서 몸 고생, 마음고생을 하셔서 그나마 단칸방에서 살 수가 있는데 미군 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는 것이 확실시되면서부터 그 지역에 돈 있는 사람이 와서 옛날 집을 사서 허물고 새로운 빌딩들을 2천여 가구 이상 짓고 있어요.그래서 할머니들이 살고 있는 재래식 집들이 없어지고 좋은 집들이 생기는데, 할머니들이 좋은 집에 들어갈 수 있는 여건은 안 되고 옛날 집들이 없어지니까 옛날에 5만원, 7만원, 8만원 내던 월세 값이 15만원, 17만원에 육박하고 있어요. 그러니 할머니들이 생계비 30여 만 원을 받아서 방 값 내고 전기수도세로 20여 만 원을 내면 생활하는 게 힘들죠.

▶ 할머니들은 모아놓은 돈은 전혀 없으신가요?

나름대로 조금은 있지만 없는 분들이 더 많아요. 클럽에 있던 분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분들만큼 모을 수 있는 형편은 안 되잖아요. 구조 자체가 돈을 벌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고요.그리고 할머니들이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자기관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 그러면 대부분이 생활보호대상자이신가요?

70% 정도가 대상자세요.

▶ 햇살센터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

햇살센터에서는 할머니들을 만나면서 이미용서비스를 해드리는데 어떤 할머니가 우시더라고요.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교회를 다니다가 상처를 받으셨대요. 그러면 찬송가 부르자고 해서 부른 게 계기가 돼서 ‘다음 주 월요일부터 모여서 찬송가를 부르자’고 했더니 좋다고 하세요.그래서 2002년 가을부터 계속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죠. 1주일에 1번씩 모임이 시작되었는데 요즘은 매주 화요일마다 모이고 있어요.

▶ 몇 분 정도 참석을 하세요?

2,30명 정도 됩니다.

▶ 교회에 가서 어떤 상처를 받으신 건가요?

할머니들 얘기가 자기들은 어딜 가나 양동이에 참기름 한 방울 똑 떨어진 느낌이라고 하세요. 그런데 여기에 오면 같은 처지이고 봉사자들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니까 편안하다고 말씀하세요.

◇ 애국자를 가장한 정부의 부추김도 한 몫 했어

▶ 위안부 할머니들은 강제로 끌려가서 희생을 당하신 거지만 이 분들은 그 당시에 강제는 아니지 않는가, 또 구조적인 문제라고 하더라도 돈도 모을 수가 있을 것 아닌가, 그걸 왜 사회나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우리가 1969년도에 닉슨 독트린이라고 해서 주한 미군들이 많이 감축이 되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의 정권은 미군들이 한국에 더 머물게 하기 위해서 기지가 있는 곳에 클럽을 만들고 그곳에서 여성들이 일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여성들이 깨끗하게 미군들에게 바쳐지도록 성병검사를 하는 보건소를 기지가 있는 곳마다 만들어서 유방에다가 성병 검진에서 오케이 받았다는 표를 달고 일을 했다고 해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으로 인해서 미군이 오면서 미국정부가 한국정부에 그런 걸 요구했고, 또 그래야만이 머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당시의 정권은 우리나라가 힘든 때니까 여성들한테 가서 일하도록 부추겼죠. 그래서 한국과 미국의 정치적인 희생양이라고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동맹 속의 섹스>라는 책을 캐서린 문 여사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썼는데, 그 책을 보나 작년에 라는 프로그램에서 기지촌 할머니, 그들에게 누가 낙인찍었나?, 또는 MBC에서 기지촌 역사를 다룬 2003년 2월 초에 나왔던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통해서나 당시에 일했던 사람들, 기지촌 여성들과 어우러져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당시는 너희는 애국자다, 외화를 벌어들이는 애국자다, 민간외교관이라고 부추겼습니다.애국자라면 애국자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하는데 다른 독거노인들처럼 단지 그런 수준에 머물고 있고 기지가 안 온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기지이전으로 인해 할머니들이 머리 누울 쪽방마저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굉장히 안타까운 가운데 있습니다.

▶ 6,70년대 어렵고 힘든 그 시절에 기지촌은 굉장히 성황이었고, 오죽하면 ‘동네 개도 달러를 물고 다닌다’ 이런 얘기도 있겠어요. 실제로 기지촌 여성들이 거기서 나오는 물건으로 장사도 많이 했어요. 냉정하게 따져보면 돈 좀 벌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뭐하고 지금 쪽방마저 얻지 못하는가, 안타까운 반면 속상하기도 해요.

몸이 아프니까 병원비로 많이 쓰셨어요. 제가 여기에 와서 장례를 3번 치렀는데 그 중에 최할머니 같은 경우는 그 일을 하다가 나이가 들면 클럽에서 청소, 설거지를 하는데 몸이 아프니까 그만두시더라고요. 보통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여기저기 아프고 쑤시잖아요. 우리 할머니들은 그런 면이 더 많으신 것 같아요.그래서 몸이 아프니까 병원비가 싸게 들기도 하지만 큰 수술비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MRI, 치과 등에 대해서는 혜택이 안 가요. 결국 병원비로 쓰시다가 아파서 세상을 떠나시는데 장례식조차 아무도 오지 않는 거죠.

▶ 우순덕 원장님은 어떻게 그 일을 하시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학교에서도 가르쳤고 감리교여성연합회 총무도 했고 또 남편 때문에 미국에서 잠시 지냈던 적도 있었고, 여러 가지 일을 했었어요.그러다가 뒤늦게 40대에 이화여대 사회복지대학원을 들어가서 여성복지에 대해 공부하면서 성매매에 대한 리포트를 쓰게 됐어요. 저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서울여성의 전화에서 자원봉사를 2년 넘게 했었는데 그 일도 중요한 이슈이기는 하지만 성매매 리포트를 쓰다 보니까 갈수록 이 일은 필요한 일이고 이쪽 분야 일이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2000년 가을에 위스콘신에서 국제 결혼한 여성들의 모임에 가서 일주일 정도 지내면서 기지가 있으면서 센터가 없는 곳에 가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두루두루 기지 주변을 다녔는데 평택 안정리에 할머니는 계시는데 센터가 없다는 걸 발견했어요. 당시에 안정감리교회 임준철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가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고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들려주시고 6,70여분 계시다고 하셔서 그러면 일은 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지금도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하고 있어요. 1박을 하기도 하고.

◇ 한 줄기 햇살로 다가간 ‘마음 문 열기’

▶ 햇살센터를 운영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사무실이 있는데 제가 감리교신학대학을 다니면서 등록금이 없을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한 적이 있어요. 공부시켜주시면 이 땅의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일을 하겠다는 서원기도를 했어요. 2학년 1학기 때는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를 해서 다녔는데 2학기 때 등록금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2학기 때 학교를 못 가고 당시 기숙사 사감이셨던 방순자 목사님께서 교회로 연락해서 오라고 하세요. 등록금 다 해놨으니까 오라고 하시는 거예요.전체장학금으로 2년을 공부했는데 2학년 겨울 방학 때 신림동에 있는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하는데 공부시켜 주시면 이 땅의 도움이 필요한 여성들을 위해서 일하겠다는 기도를 많이 했었어요. 그래서 저는 사람들한테 그래요. 기도할 때 기도를 잘 해야 된다고요.(웃음)

2000년 가을부터 평택에 가서 일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하필이면 왜 그렇게 멀리까지 가느냐고 하다가 2002년 봄이 되니까 당신 인생의 사명이 그 일이라고 느껴진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해서 편안한 가운데 일을 시작했고 그 당시 저한테는 꿈과 열정과 기도밖에 없었어요.몇 십 만원 정도를 빌려서 반지하를 얻으려고 그 동네를 몇 바퀴 돌아다녔어요. 거기는 예나 지금이나 전세가 거의 없어요. 결국 월세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전세 1,200만 원짜리 15평 반지하를 얻었어요. 그걸 4월 초에 얻어서 5월 초에 입주를 했고 6월 초에 개원예배를 드렸어요. 한편으로는 안정감리교회에서 국화회 회원 명단을 받았어요.

▶ 처음부터 선뜻 다가오시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사무실을 마련하고 또 한편으로는 할머니들에게 전화해서 사회복지사인데 커피 한 잔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랬더니 어떤 할머니는 너무 머리가 아파서 귀찮다고 하세요. 제가 스포츠마사지를 배워서 머리 시원하게 해드리겠다고 하고 할머니를 만났어요.그때 60이 좀 넘으셨는데, 할머니들을 만나려고 스포츠마사지를 배웠거든요. 두피 마사지부터 해드렸더니 머리도 안 감았다고 하세요. 괜찮다고 나중에 손 씻으면 된다고 해드렸더니 너무 시원하고 좋대요. 그렇게 한 분, 한 분 만났어요.

7월 초경에 그 중에 국화회 회장총무 할머니가 계시는데 친한 분들끼리 햇살센터로 오시라고 했더니 7,8분이 오셨어요. 떡국과 수박을 대접했는데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시더라고요. 또 한 번은 8월 10일 전후로 해서 전화를 돌렸더니 34명이 오셨어요. 앉을 자리가 없어서 등 기대고 붙이고 앉으셨어요. 어떤 분이 옷을 주셔서 할머님들께 다 나눠드리고 8월 말에 봉사하시는 분이 오셔서 이미용서비스를 했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김할머니가 우셔서 그 다음 주부터는 매주 월요일마다 예배가 시작된 거예요.

▶ 소외감을 많이 느끼시는 분들이라서 마음을 쉽게 안 여셨을 것 같아요.

어느 방송사에서 혼혈아를 둔 어머니를 소개해 달라고 해서 제가 정성을 들인 P할머니라고 계셔서 할머니, 혹시 인터뷰를 하는데 얼굴과 이름이 안 나가는데 인터뷰하시겠냐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한테 뭐가 돌아오느냐고 해요. 사회적인 인식을 높이는 거라고 말씀드렸더니 낙인찍으려고 나가느냐고 P할머니가 원장인 저랑 싸웠다고 2,3달을 그러고 다니셨다고 다른 할머니들이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모일 때마다 그 할머니도 오게 해 달라고 같이 기도를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나오셨어요. 그날따라 아들을 찾은 배 할머니라고 계셨는데 이 분이 기도를 잘 하시는 분이라 그동안 안 나오셨다가 나오신 P할머니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배 할머니가 기도하시면서 “우순덕 원장님이 눈물 뿌려 아들 찾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시고...” 그 기도를 하시는 거예요. 기도가 끝나고 나서 P할머니가 눈물을 닦으시더라고요. 마음을 여신 거죠.

◇ 대부분 자녀 입양, “내가 성공해서 엄마 꼭 찾으러 올게”

   
 
   
 
▶ 그분들의 자녀들은 입양된 거예요?

입양을 많이 보냈어요. 또 애기가 없는 분도 계시고 낳지 못하는 분도 계시죠.

▶ 자식들은 서울에 있지 않고 다 나가있는 건가요?

나가 있는 분도 계시고 없는 분도 계세요.

▶ 아들을 찾으셨다는 배 할머니 이야기 좀 해주세요.

배 할머니는 아들을 6,7살 때 보냈는데 TV에서 엄마 찾는다고 하면 숨고 싶으셨대요. 엄마로써 한 게 뭐가 있나 하고요. 할머니 말씀으로는 그 당시에는 공산당이 쳐들어온다고, 그러면 혼혈아들을 먼저 못살게 굴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애미가 아들이 힘들게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걸 어떻게 보겠느냐고 해서 그 마을에서 입양을 많이 보냈다고 해요. 미국이라는 것은 알지만 자세한 주소는 모르죠. 그래서 아들을 보내고 나서 일주일 동안 내가 살아서 뭐 하나 싶어서 약도 먹었는데 누가 살려내셨대요. 애기 아빠하고는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였고요. 그렇게 보내고 34년이 지났는데 어떤 할머니가 아들, 딸 찾는다고 했더니 배 할머니도 그럼 나도 아들 찾고 싶다고 하세요.

배 할머니가 숨이 차셔서 센터에 오시기 힘들어하세요. 그래서 제가 방문을 가서 핸드폰으로 입양기관을 추적했어요. 어느 단체를 통해서 할머니 아들이 입양된 걸 확인했고 관련 자료를 4월에 보냈어요. 그랬더니 5월 말에 아들로부터 편지가 왔어요. 아들이 40살 가까이 됐죠.할머니가 너무 행복해 하시더라고요. 편지를 들고 오셔서 이것 보라고, 아들을 만난 듯 기뻐하셨어요.

▶ 아들을 만나셨어요?

그 해 12월에 왔어요. 아들, 며느리, 손자까지. 며느리는 독일 계통의 미국사람이고 영어선생님이고 아들은 건축가이고 9살짜리 손자가 똑똑해요. 지금도 서로 전화로 연락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고요.할머니는 뭘 바라고 싶지 않으시데요. 그저 잘 커 주고 못해준 게 너무 미안하고 잘 사는 것을 봤으니까 됐다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세요.

▶ P할머니도 자식을 찾으시려고 하신 거잖아요. 찾으셨나요?

못 찾았어요. 한국에 있는 입양기관이 미국에 있는 입양기관한테 소식을 전했고 그 기관이 아들, 딸한테까지는 편지를 전달했는데 아들, 딸로부터 연락이 안 와서 마음고생을 하고 있어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닌가 하고요.당시에 9살과 10살 남매를 보냈는데, “엄마, 안정리를 떠나지 말어. 내가 꼭 성공해서 엄마 찾으러 올게.” 그래서 전화번호도 안 바꾸시고 살고 계세요.

▶ 다른 할머니들도 가족들과는 전혀 연락이 안 되시나요?

되시는 분들도 몇 분 계시지만 대부분은 연락을 끊고 사세요. 돈이 있을 때는 여러 가지 혜택을 나눠주었지만 만나서 동네에 알려지는 게 가문의 수치로 여겨지는 걸 감당하기가 어려운 거죠. 돈 벌어서 생활비를 부칠 때는 좋았는데 지금은 가난하고 아프고 하니까요. 아까 병원비라고 말씀드렸는데 병원비뿐만 아니라 동생들, 엄마 생활비를 갖다 주고 오빠, 동생 공부시키고, 당시에 사는 게 힘드니까 다 퍼 준 거죠.

▶ 기가 막힌 사연들을 갖고 계시는데 한두 분 정도 사연을 말씀해주세요.

어떤 분은 6.25 때 부모님을 잃어서 정말로 있을 곳이 없었대요. 그러던 중에 아는 언니가 아주머니가 한 분 계시는데 그 집에 가면 그냥 재워주고 밥도 준다고 해서 언니 따라서 그 집에 갔대요. 언니가 하는 말이 내가 며칠 어디 다녀올 테니 여기서 지내라고 해서 언니가 올 때까지 며칠을 기다렸대요. 1주일, 2주일이 지나고 연락도 없고 오지도 않는데 그 와중에 백인, 흑인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무서워서 아주머니한테 아는 언니도 없고 무서워서 가겠다고 했더니, 가기는 어딜 가냐, 네가 며칠 동안 여기서 먹고 잔 거 내놓으라고 하더래요. 돈이 어디 있어요. 없어서 거길 갔는데. 본인도 모르게 팔려 온 거죠.몇 날 며칠을 거부하다가 하루만 미군과 같이 잠을 자라는 요구에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건장한 남자들이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결국 어느 날 하루 미국남자와 잠을 잔 것이 시작이었고 스스로 나는 이제 버린 몸이라는 감정과 더불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 거죠.

▶ 그런 분들 중에서도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신 분도 있잖아요.

가신 분들도 계세요. 다시 돌아오신 분이 할머니들 중에 한 분 계시고요. 남편의 학대로 못 견디고 다시 오셔서 지금 이곳에 사세요. 말도 안통하고 하니까 위자료도 못 받고 돌아오신 거예요.

또 다른 할머니는 아이를 못 낳으셨어요. 그래서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스트레스를 받다가 쫓겨나셨어요. 그래서 외삼촌이 소개한 미군부대 근처 식당에서 일하다가 미군을 만나서 아기도 생겼어요.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여자인데, 어느 날 아기를 끌어안고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와 남편 앞에서 내가 낳은 아기라고 젖을 먹였대요. 그러니 이 할머니에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요. 물론 그 아기도 입양이 됐고요.요즘 같으면 그런 일이 없겠지만 그 당시에는 아기를 못 낳으면 그런 일이 있었잖아요. 이 분이 지금 77세인데 지금 살아 계세요.

◇ 가족조차 외면한 장례식...내 죽음인 것 같아 마음 아파 더 못 가

▶ 거기서 사시다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자녀랑 연락이 되면 모르지만 대부분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면 같이 살던 언니라든지 그 분들 외에 저와 읍사무소 직원과 기사, 이렇게 한 분의 장례식을 셋이 갔었어요. 화장장 장례식을 3번 치렀는데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어요.한 번은 읍사무소 직원이 바쁘다고, 제가 사회복지사니까 가서 잘 부탁한다고 해서 저랑 기사랑 둘이 갔어요. 당시에 제가 초창기라서 할머니들에게 같이 가자고 했더니, 할머니들 마음을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죽음이 내 죽음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파서 더 쓰라리고 스산해서 발걸음이 못 떨어지시는 거예요. 마음은 아프지만 못 가시는 거죠.또 한 번은 저랑 기사랑 할머니 한 분이 동행했던 적도 있어요.

▶ 장례식 치르실 때 마음이 어떠셨어요?

이럴 수는 없는 거라고 생각했죠.

▶ 가족들에게 연락을 해 보셨어요?

가족이 있는 분들이 없었어요. 장례식장에 제일 많이 왔던 게 5,6명이었어요. 친자매처럼 지내던 할머니가 계셔서 몇 분이랑 같이, 한 번은 이장님도 같이 가셨었어요.

▶ 편찮으시면 의료보험 혜택은 되는 건가요?

큰 수술을 해야 할 경우에는 그 수술비를 혼자서 감당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제가 갔을 때만 해도 3천 만 원인가 4천 만 원정도 있었는데 심장판막 수술을 하면서 천안의 단국대 병원을 왔다 갔다 하면서 수술비 내야지, 같이 돕는 사람들한테 그냥 있을 수 없어서 돈을 주고 감사표시를 하다 보니까 약값으로 다 날리고 지금은 돈이 없어요.

▶ 햇살센터를 운영하시면서 정말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안타까운 일들이 많으실 텐데, 현재 햇살센터에 가장 필요한 게 어떤 건가요?

미군기지가 다시 평택으로 안 오면 모르지만 평택으로 오기 때문에 안정리 주변의 주거현황이 새 건물과 옛날 재래식 건물이 공존하고 있거든요. 대추리 분들이 직접적인 피해자라면 우리 할머니들은 미군기지 이전으로 인해서 그 집을 내놓아야 되는 건 아니지만 마을의 변화로 인해서 마음고생을 하고 계시잖아요. 옛날에 애국자라고, 민간외교관이라고 이야기를 했으면 그에 대한 나름의 보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얼마 전에 한소리 운영위원회를 하면서 우리 할머니들을 미군 위안부라고 부르자고 했어요. 왜냐하면 일본과 관계된 할머니들이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인 희생양이라면 이 할머니들은 미국과 한국의 정치적인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한소리 운영위원회에서 말하기를 기지촌 할머니라는 용어보다는 미군 위안부 할머니라고 이름을 붙여보자는 이야기도 같이 했어요. 이러한 정치적 맥락 속에서 우리나라 경제성장도 25%나 일으켰고 지역경제도 60%를 부양했다는 자료가 <동맹 속의 섹스>라는 책 속에 나타나있는데 그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일으킨 애국자라고 일컬었다면 현재 주거문제로 마음고생을 하고 계신 것에 대한 대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세를 지급해주든지 할머니들에게 집을 빌려주든지 아니면 땅이라도 빌려주든지, 아무튼 할머니들이 사시는데 편히 사실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 꼭 평택이어야만 하나요?

할머니들에게 선택권을 드릴 수도 있죠. 그런데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기가 살던 고향을 못 벗어나는 특성이 있거든요.

◇ ‘순할 순, 큰 덕’ 이름처럼 살고 싶어

▶ 우순덕 원장님은 순할 순자, 덕 덕자를 쓰시는데 정말 이름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처음에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옛날 드라마에 순덕이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는데 나중에는 제 이름을 좋아하기로 했어요. 순할 순, 큰 덕. 이름을 사랑하고 이름처럼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고향은 어디세요?

서울이에요.

▶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보통 분들이셨어요.

▶ 형제는 어떻게 되세요?

6남매 중의 제가 맏이에요.

▶ 학교 다니실 때 모범생이셨을 것 같은데 어떤 학생이셨어요?

착하고 온순하다는 말이 성적표에 늘 있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말이 싫더라고요. 초등학교 때부터 일괄적으로 이런 말이 있는 게 싫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까 일의 책임자는 결단도 해야 하고 아닌 건 아니라고 말도 해야 하고, 그런 면이 필요하더라고요.그래서 요즘은 나름대로 그런 면들이 일을 통해서 개발되어가고 있습니다.

▶ 어릴 때 누구랑 싸워보신 적 있으세요?

매번 지고 왔던 기억이 나요.(웃음)할 말을 못하고 집에 와서야 그때 이 말을 했어야 하는데 왜 못했을까 많이 그랬어요.

▶ 맏이로서의 책임감도 강하셨을 것 같아요.

그렇기도 한데 제 밑에 여동생이 있어요. 여동생이 집안의 여러 가지 일들을 잘 감당해주고 있어요.

◇ 가족의 열렬한 지지는 내 삶의 축복

▶ 어릴 때 장래희망이 뭐였어요?

여러 가지가 있었죠. 좋은 약을 개발하는 것도 생각했었고 고등학교에서 대학을 가면서는 고등학교 때 김활란 박사님의 이야기를 설교 시간에 들었고 그 분에 대한 역사적 부정적인 평가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지만 그 분의 자화상이 저한테 와 닿아서 그런 기도도 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그래서 신학대학교에 가신 거예요?

신학대학은 그 당시 목사님께서 소개를 해 주셔서 갔었고, 그렇다면 이런 일들을 신학대학을 통해서 공부를 하면서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 결혼은 언제 하셨어요?

27살에 했어요.

▶ 남편도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인가요?

남편도 신학을 했죠. 지금 목사님이세요.

▶ 혹시 남편께서 어려운 여성들도 많은데 왜 기지촌 여성이냐고 하지는 않으셨어요?

미국에서 남편과 같이 공부를 했고 열린 생각으로 있었기 때문에 저보고 항상 하는 말인데요. 이런 자료는 다 컴퓨터와 씨름을 해야 하잖아요. 그런 거 컴퓨터와 씨름하지 말고 라디오 인터뷰도 나가지 말고 그런 시간 있으면 할머니 한 분 더 만나서 손 잡아주고 웃고 하나님 나라 경험을 시켜드리는 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고 해요.(웃음)

▶ 혹시 일이나 성격 때문에 부부사움을 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부부싸움을 한 적은 있죠. 제가 일주일에 한 두 번은 평택에 있는 햇살센터에 가서 자야 하니까 제가 빚진 게 많잖아요.(웃음) 그래서 싸움을 잘 못 걸죠.

▶ 자제분은 어떻게 되세요?

아들 하나 있는데 지금 27살이에요.

▶ 아드님도 엄마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이해하고 도와주고 있나요?

춤 테라피로 할머니들 치료 프로그램을 할 때 강사랑 같이 와서 도우미 역할을 몇 차례 했었어요. 그래서 필요한 일이라고 나름대로 이해하는 것 같아요.

▶ 그렇게 가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시는 걸 보면 우순덕 원장님이 축복을 받으신 것 같아요.

그렇죠. 보통 아내나 엄마가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일 때문에 비우는 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일이 필요로 한다면 가서 열심히 하라고 해 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감사하죠.

▶ 할머니들의 사연을 들으시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함께 울어보신 적도 있으실 것 같아요. 갖고 오신 책 속에 어느 할머니가 인터뷰를 하셨는데 내용을 잠깐 소개할게요.‘얼굴이라도 한 번 봤으면...배운 것도 없고 똑똑하지도 못해서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재워주고 먹여주는 다방 술집 같은 일이었다. 나는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낳을 때 힘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나도 아이 아빠한테는 연락이 없고 주변 사람은 아이 혼자 키우면 뭐 하냐, 입양 보내라. 그래서 입양을 보냈다.’현재 할머니들의 가장 절절한 소원이 뭔가요?

건강하게 남은여생을 사시는 거죠. 주거의 불안 없이. 월세를 더 내라고 하면 힘드니까 그런 불안 없이 건강하게 사시는 게 소원이에요.

◇ “나 정말 행복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

▶ 현재 햇살센터에서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무일푼의 상태에서 할머니들과 일주일에 한 두 번씩 만나면서 식사를 드릴 수 있었어요. 매주 화요일마다 모였고 작년에는 경기도 사회복지 공동모금에서 프로젝트를 받아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모였어요. 그 외에도 치과연계, 법률상담연계,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주시면 오시는 분들에게 드리고 갖다드리기도 하는 푸드뱅크연계, 또 혼혈아동 프로그램, 지역의 어르신들을 가끔씩 모시고 있고 국내외 연계사업도 하고 있어요.앞으로 할머니들이 사시는 동안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사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손길을 통해서 지원이 된다면 할머니들이 사실 수 있는 집이 되어서 “나 정말 행복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그래서 앞으로도 할머니들을 위해서 치료 프로그램과 예배를 같이 드리고 식사도 제공하고, 가능하면 일주일에 두 세 번이라도 같이 하면 좋겠는데 이건 정부에서 후원하는 게 아니니까요.

▶ 여러 가지 일을 하시면 필요한 게 자금인데 어떻게 마련을 하세요?

제가 감리교신학대학교를 나왔기 때문에 선후배를 통해서 하고 있고 시아주머님도 목사님이셔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도 합니다. 그리고 이슈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나 개인의 후원금으로 지탱을 하고 있어요.

▶ 이런 기회에 전화번호를 알려주세요.

031-618-5535입니다. 햇살을 ‘오오사모’합니다로 기억해 주세요.(웃음)작년에 저희가 소식지를 낼 때 평택 온정리가 평당 200만원 정도여서 200분의 1평이라도, 1만원이라도 후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싶어서 ‘1만원 10만 명 운동’을 펼치고 있어요.일 자체가 많아서 발로 뛰어야 하는데 어디 후원해 달라는 말을 못 하겠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후원감사편지를 써서 영수증과 활동한 거 보내드리는 정도에 미치고 있습니다.저희가 CMS도 하고 있으니까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정리(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원)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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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다 (118.46.206.241)
2015-10-27 03:56:31
이전안되는차,설정차,압류차,법인부도차 매입 ☎ 0 1 0-3 0 7 2-9 9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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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22
무자년 (211.221.90.81)
2008-01-06 15:13:49
올 한해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세요.
올 한해 하시는일 번창하시고 건강하세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비번 :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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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4
바람 (68.238.233.21)
2007-12-12 14:49:39
실천하시는 목사님 께
우리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은 어려운대 믿음 을 실천하시는 목사님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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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24
우순덕 (121.200.102.123)
2007-12-07 14:04:10
감사합니다^^
멀리서 따스한 마음을 전해주셔서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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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0
박병준 (69.248.252.80)
2007-12-04 10:06:21
좋은일 하자
참으로 좋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햇살센터에 마음을 모아야 될것같습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나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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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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